사울이 버림받은 진짜 이유는?

[299호 거꾸로 읽는 성경] 사무엘상 13~14장

2015-09-22     김구원 개신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교수
   
▲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신 이유는 그의 개인적 실패 때문인가? (그림: 구에르치노의 <다윗을 공격하는 사울>, 1646년작)

사울이 제사장의 직무를 월권했다?
사무엘상 13장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사울이 버림받은 이유를 제사 문제에서 찾는다. 즉 사울이 제사장만 집행하게 되어 있는 제사를 스스로 집행함으로써 ‘월권’했다는 것이다. 이 월권은 매우 심각한 죄로서, 윤리적으로 실패한 다윗은 용서받아도 제의적 문제 즉 예배에 관해 실패한 사울은 절대로 용서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연결된다. 나아가 오늘날 제사장의 직분을 계승한 목사의 권한을 평신도가 월권하는 일에 대한 엄한 경고로도 사용된다. 그러나 정말 성경 본문이 사울의 잘못을 제사장의 직무에 대한 월권으로 말하고 있을까? 많은 성서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증언한다.

먼저 사울이 제사를 직접 수행함으로써 월권했다는 주장의 근거 구절인 사무엘상 13장 9절을 보자.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이 구절을 잘못 이해하면 사울이 제사장의 직무를 월권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이리로 가져오라”로 번역된 히브리어(하기슈 엘라이 haggišû ʾēlay)가 “내게로 가져오라”로 직역된다는 사실은 그런 오해를 더욱 강화한다. 사람들은 사울이 동물들을 직접 죽여 제사를 지냄으로써 제사장의 고유 권한을 침범했다고 오해한다. 하지만 사울이 제물을 직접 죽였다하더라도 그는 제사장의 고유 권한을 침범한 것이 아니다. 

본래 제물은 대속죄일과 같은 특별한 날을 제외하면 제물을 바치는 ‘제주’(祭主)가 직접 도살한다. 사무엘상 13장이 전제하는 상황에서도 사울은 제주로서 충분히 동물을 죽일 수 있다. 제사장의 고유 권한은 제주가 동물을 죽인 후에 시작된다. 제사장만이 죽은 동물의 피를 거두어 하나님 앞에 가져갈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은 사울이 “번제를 드렸다”라고 진술할 뿐, 그가 피를 직접 받아 단에 뿌렸다고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무엘이 그 제의 의식 중에 없었기 때문에, 사울이 도살 후의 과정도 직접 집행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지나친 억측이다. 왜냐하면 당시 사울은 엘리 계열의 제사장을 거느리고 있었다(삼상 14:4 참조). 따라서 사무엘 없이도 다른 제사장들을 통해 제사장의 고유 직무를 월권하지 않고도 충분히 제사를 합법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울이 “번제를 드렸다”는 표현에 근거해, 사울이 제의적 월권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면, 다윗과 솔로몬도 이런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무엘하 6장 17절에 따르면,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의 성막에 안치한 후 다윗도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렸다.” 열왕기상 9장 25절은 성전을 봉헌한 솔로몬이 1년에 세 번씩 “번제와 감사제를 드렸다”고 기록한다. 사울의 경우나, 다윗과 솔로몬의 경우, 모두 동일한 히브리어 숙어가 사용된다. 즉 “제사(번제, 화목제, 감사제 등)를 드렸다”(hʿlh ʿlwt)라는 표현은 제사장뿐 아니라 모든 일반 제주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울이 “번제를 드렸다”고 해서 그가 제사장의 직무를 월권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사무엘상 13장에서 사울이 사무엘에게 꾸지람을 들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13~14절에서 찾을 수 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이제는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삼상 13:13~14)

여호와의 명에 불순종한 사울
여기서 사무엘은 사울 왕조의 단절을 선포하는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가 사울에게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무엘이 말하는 죄는 불순종인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사울이 여호와의 어떤 명령에 불순종했는지 명확히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울 왕이 왕조를 빼앗긴 이유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첫째, 사울이 지키지 않았던 여호와의 명령은 무엇이었는가? 둘째, 그 불순종이 사울에게 그렇게 치명적인 죄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많은 학자들은 사무엘이 두 번이나 말했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한다. 실제로 사무엘상 13장은 사울에 대한 어떤 신명(神命)도 기록하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그 명령을 제사에 관한 율법과 연결하는데, 이것이 옳지 않음은 앞서 이미 살펴보았다. 그렇다고 사울에 대한 사무엘의 꾸지람이 질투에 의한 자의적이고 불공정한 것이라는 주장도 옳지 못하다. 이는 성경 내러티브를 지나치게 문자적 사실주의로 접근하는 데서 발생하는 오해이다. 성경 저자는 다양한 문학적 장치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문에 숨겨진 다양한 문학적 힌트들을 잘 파악해야 한다.

사울이 저지른 불순종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문학적 힌트는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사무엘상 13장의 사건을 사무엘상 10장의 사건과 문학적으로 연결짓는다. 즉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 받은 첫 번째 선지자의 명령을 상기시킨다.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왕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것이다. 내가 네게로 가서 너의 할 일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을 기다리라.(삼상 10:7~8, 필자 사역)

이 구절은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은 후 사무엘이 예언한 세 가지 징조를 그 문맥으로 한다. 아버지의 암나귀를 찾으러 다니다 우연히 사무엘과 만나 그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은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에 사무엘은 사울에게 소명의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세 가지 징조를 예언한다. 이 징조들은 사울에게 기름부음, 즉 왕으로서의 소명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다. 사울은 이 세 가지 징조가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보면 자신의 기름부음에 대한 확신을 가진 채, 7~8절에서 사무엘이 명령한 바,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사울에게 주신 명령을 이행해야 했다.

율법의 규례는 지키고, 하나님의 명령은 어기고
필자가 본지 281호(2014년 4월호) “사울의 첫 번째 실패”에서 설명한 것처럼, 사무엘의 이 명령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두 단계의 명령을 포함한다. 첫 번째 단계 명령에 순종했을 때, 두 번째 단계 명령이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즉 그 모든 징조가 성취되어 왕으로서 자신의 소명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을 때, 사울은 왕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런 사무엘의 명령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애매하지만, 사무엘은 그것의 의미를 알 수 있는 힌트를 이미 사울에게 주었다. 사무엘상 10장 5~6절을 보자.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기브아(‘하나님의 산’-개역개정)에 이르리니 그 곳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이 본문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준 세 번째 징조에 대한 것이다. 기름부음 받은 사울을 고향 기브아로 보내면서 예언한 세 가지 징조 중 기브아에 도착하면서 발생하게 될 징조에 관한 것이다. 이 징조에 따르면 사울은 다른 선지자들처럼 예언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사무엘이 사울의 고향을 단순히 “기브아”가 아닌 “하나님의 기브아”로 언급할 뿐 아니라, 그곳에 블레셋인들의 주둔지가 있음을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그렇다! 기브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인들에게 준 언약의 땅인데, 그곳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현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사울도 평소 자신의 동네에 주둔한 블레셋 군대가 동족을 약탈하고 핍박할 때에 마음 아파하며 하나님의 구원자, 즉 왕을 소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무엘의 세 가지 징조가 이루어져 사울이 왕으로서의 소명을 확신하게 되었다면, 왕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자기 동네 기브아에 있는 블레셋 군인들을 쫓아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다소 모호한 언어로 된 사무엘의 명령에 사울이 순종했을 때, 블레셋의 본진이 이스라엘을 침략해 들어올 것이다. 이때 발휘되는 것이 8절의 두 번째 명령인데, 사무엘은 사울에게 길갈에 내려가 자신이 도착해 그 다음 할 일을 말할 때까지 칠 일을 기다리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울은 첫 단계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고, 길갈에서 7일을 기다리라는 둘째 단계 명령도 자연스럽게 취소되었다.

13장 8절의 “사무엘이 정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라는 언급이 10장의 이 명령들을 문학적으로 상기시킨다고 해서, 그 두 사건이 사실적으로 연결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10장의 사건과 13장의 사건 사이에는 적어도 2년 이상의 시간차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성경 최종 본문의 저자가 그 두 사건을 분명히 문학적으로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문학적 연결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13장 3절에서 요나단이 게바(‘기브아’의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높은)에 있는 블레셋 수비대를 공격한 사건이고, 이것은 10장 7절에 기록된 “(왕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의 구체적 내용이었던 것이다. 10장에서 사울이 용기가 없어 순종하지 못했던 것을 13장에서 그의 아들 요나단이 순종했다.

그러면 저자가 심어놓은 문학적 힌트, 즉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라는 말이 사울이 저지른 불순종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기여할까? 이를 위해 먼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라는 말에서 강조점이 ‘사무엘’에게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 왕정의 성격으로 볼 때, 사울 왕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명령은 늘 선지자 사무엘을 통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선지자 사무엘의 명령은 여호와의 명령과 동일하다. 여기서 선지자를 통한다는 것이 사제 중심의 종교생활을 장려하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에 쓰인 일반적이고 추상적이 규례가 아니라, 늘 현장에서 새롭게 발화되는 말씀, 즉 ‘새롭게 해석되는’ 말씀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사울이 사무엘이 정한 대로 “이레”를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여전히 여호와의 명령을 어겼다고 간주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사울이 제사를 집행한 것은 사무엘이 이레가 지나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사울은 사무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켰고, 자신이 정한 7일 만에 오지 않은 것은 사무엘이다. 그럼에도 사울이 여호와의 명령을 어긴 것으로 비난받은 이유는 사울이 말씀의 의도와 상관없이 행동했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10장 8절에 수록된 명령의 핵심은 “칠 일”을 기다리라는 데에 있지 않고, 사무엘 선지자가 길갈로 내려와 사울에게 해야 할 바를 가르칠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즉 사울은 사무엘이 말한 “칠 일”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문자 의미 너머에 있는 사무엘의 의도를 파악해야 했다. 명령의 어떤 한 문자적 측면을 지켰다고 해서, 말씀에 순종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사울이 지켜야 할 “여호와의 명령”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규례가 아니라,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길갈 현장에서 역동성 있게 주어질 명령이다.

‘자발적 주체성’을 전제한 여호와의 명령
지금까지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또 하나 배울 수 있는 것은 사울 왕이 순종해야 했던 명령은 사울 왕의 주체적인 판단과 능동적인 결단을 전제한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 명령은 사울이 기계적으로 따르면 되는 고정된 문자가 아니라, 그가 자기 삶의 현장에서 전인격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역동적 명령인 것이다. 10장 7절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준 명령을 상기하라.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 징조가 임하거든 왕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라”고 명령하는데, 도대체 왕으로서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인가? 사무엘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사무엘의 이 명령은 매우 애매한 것이었다. 어떤 학자들은 이런 명령의 애매성 때문에 사울이 불순종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명령/뜻의 성격을 오해한 데서 기인한 주장이다.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는 일은 그 명령이 나의 삶의 구체적 상황에서 어떤 형태가 될지를 스스로 알아가는 과정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일일이 말씀하시고, 우리가 그 말씀에 기계적으로 순종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사울도 세 가지 징조(삼상 10:2~6)를 통해 자신의 왕적 소명에 대한 확신을 받았을 때, 왕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주체적으로 판단해 순종했어야 했다.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는 선지자 사무엘의 말 속에 다 숨어 있었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충분한 힌트를 우리 삶 속에 이미 마련해 주신다. 그러나 그 뜻이 마냥 기계적으로 따르면 되는 ‘매뉴얼’이나 ‘규정집’의 형태로 주어지는 것은 분명 아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다는 의미를 근본적으로 오해했던 것 같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찾아 순종하는 일에 실패한다. 대신 여호와 말씀의 고정된 문자적 의미에 집착했던 것 같다. 이런 집착은 제의와 주술에 대한 집착과 연결되는데,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사무엘상 14장에 등장한다. 사무엘상 14장은 믹마스에서 벌어진 사울의 군대와 블레셋 사이의 전투를 그리는데, 이 전투에서 사울과 요나단의 행동이 매우 재미있는 대조를 형성한다. 

요나단의 선제기습 vs. 사울의 금식기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요나단은 늘 현장에 적합한 결정을 하는 반면, 사울은 제의와 주술에 의존한다. 요나단이 블레셋 군대에 대한 선제적 기습공격을 단행할 때, 사울은 저주받은 가문의 제사장인 아히야의 에봇(“궤”)에 의존해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었다. 요나단과 백성들이 현장에서 전력으로 전투할 때, 사울은 자기 백성들의 생명을 담보로 맹세를 한다.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도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아무 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삼상 14:24). 

언뜻 신실한 신앙 행위로 보이는 사울의 금식 전략은 전쟁의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군인들이 잘 먹어야 한다. 한편 요나단은 좀더 현장에 적합한 상식적인 판단을 했고, 사울의 금식 정책에도 반대했다. “요나단이 가로되 내 부친이 이 땅으로 곤란케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았거든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면 블레셋 사람을 살육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삼상 14:29~30) 

최고 사령관이었던 사울 왕은 전쟁하는 병사들에게 금식을 명하는 것보다 현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량을 적절히 활용하라고 명령했어야 한다. 사울의 일견 경건해 보이는 맹세는 전세를 어렵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 더 큰 제의적 죄를 범하게 했다. 저녁이 되어 맹세가 풀리자, 굶주렸던 병사들이 탈취한 동물들을 피 채로 먹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놀란 사울은 병사들이 그런 죄를 짓지 않도록 ‘간이 제단’을 쌓도록 지시했고, 그 와중에 사울의 군대는 블레셋에 대한 전략적 우위를 모두 상실하게 된다. 그럼에도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전세가 열세로 돌아선 것이 누군가의 제의적 ‘죄’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맹세를 통해 그날 전쟁의 진정한 영웅인 요나단의 사형을 명한다. 사울은 왕으로서의 판단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백성들이 오히려 바른 판단과 맹세로 사울의 잘못된 판단과 맹세를 교정해 준다.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사하였음이니이다 하여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삼상 14:45)

순종, 100% 책임지는 분별과 행함
어떤 점에서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전쟁하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예배를 드렸고, 전쟁 중에는 인본적 수단을 배제하려는 듯 금식을 선포하였고, 금식 규정을 위반했을 때는 자신의 아들이라도 죽이려 하지 않았는가? 이보다 경건한 모양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문제는 이런 사울이야말로 정작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자라는 사실이다. 사울의 외적인 경건 행위들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전혀 없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추상적인 규례를 기계적·문자적으로 따르는 것도 아니고, 제사를 자주 드리거나 ‘주여, 주여’하며 맹세하듯 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은 늘 현장에서 그분의 뜻을 주체적으로 책임 있게 분별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 분별의 기준이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소명일 것이다. 사울은 왕으로서 마땅히 백성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해야 할 책임자였고,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은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요나단처럼 현장에 가장 적합한 전술을 택하여 용기 있게 실천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문자에 대한 기계적인 순종이나 제의나 주술적 행위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책임 회피’이다. 결과에 대해 자신이 책임지지 않고 하나님을 탓하거나, 그것이 어려우면 주변 사람들을 핑계 댄다. 

제사가 끝나자마자 나타난 사무엘을 맞으며 사울이 한 말을 들어보자.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고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삼상 13:11~12)

사울의 말에는 자기 책임을 인정하는 내용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백성에게, 선지자에게, 블레셋 사람에게, 심지어 하나님께 그 책임을 돌리고 있다. 이것이 불순종하는 왕의 모습이다. 주체적이며 자발적인 순종은 100%의 책임을 수반한다. 순종하는 사람은 주체적이며 책임지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사무엘상 13~14장의 내용을 통해 사울이 버림받은 이유가 여호와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에 있음을 살펴보았다. 아울러 그의 불순종의 내용이 무엇이며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한마디로 사울은 경건의 형식에 매여 사명의 현장에서 책임 있는, 그리고 책임지는 왕으로 살지 못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수동적이고 문자적인 순종과, 제의와 주술에 대한 집착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했다. 또한 책임 있는 신앙 주체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야 할 주제는 왜 ‘순종’이 사울에게 그렇게 중요했는가이다. 왜 하나님은 순종하지 못한 사울을 버리셨는가이다.

왜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셨는가
순종하지 못한 사울이 왕조를 약속받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고자 예비하신 왕정의 독특성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고대 근동 사람들은 왕정을 이루고 살아왔다. 그들 나름의 왕정 이념을 이루고, 어느 정도 검증된 행정 관료 제도도 정립했다. 고대 근동의 왕정에서 왕은 ‘신의 아들’로, 일반 인간과는 그 기원부터 다르다. 일반 인간은 신의 허드렛을 맡도록 창조되었지만, 왕은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따라서 왕을 섬기는 일과 신을 섬기는 일이 구분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위에 세우시고자 했던 왕정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왕은 신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자신의 말이 법이고 자신의 의지가 선인 그런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의지를 이행해야 하는 ‘대리 통치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신하/종’의 개념에 더 부합한다. 이런 왕에게 가장 요구되는 덕목은 순종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법과 뜻을 펴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뜻을 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곧 순종이 이스라엘 왕정의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스라엘 왕정의 독특성이 반영된 것이 바로 선지자 제도이다. 선지자는 왕이 하나님의 뜻을 위반했을 때 그에게 찾아가 그를 책망하고 심판하는 자였다. 왕은 선지자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와 동역하는 존재였다. 사울에게 주어지는 신명이 늘 사무엘을 통해 주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반면 고대 근동에도 점술가들이 왕의 곁에서 여러 가지 자문 업무를 감당했지만, 어디까지나 왕의 녹을 먹는 고용인에 불과했다. 그들은 왕의 뜻을 거스르는 조언을 하지 않는다. 언제나 왕정 보존적인 조언들만 하는 자들이었다.  

물론 이런 왕정의 개념은 그때까지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주변 나라의 왕정을 보며 왕정에 대한 이해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위에 세우고자 했던 왕정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고, 왕은 누구보다 그 점을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이스라엘의 왕에 합당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따르는 사람, 즉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어야 했던 것이다. 사울은 여기에 실패했다. 사무엘상 13장에서 사울이 행한 행보, 즉 전쟁 전에 신의 호의를 구하는 것은 전형적인 고대 근동 왕들의 행보이다. 고대 근동의 왕들은 전쟁 전에 신전에 들러 반드시 신의 호의를 구하는 제사를 드렸다. 사울이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제사를 집행한 것은 자신을 이스라엘 왕의 틀이 아닌, 고대 근동의 왕의 틀에 따라 행동한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사울의 실패는 구속사적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울을 버린 이유를 사울의 개인적 실패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 사울이 버림받은 것은 그가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악해서가 아니라, 그의 행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의 행보와 달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왕”은 순종하는 왕이다. 그 순종은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주체적으로 발견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 그의 나라,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명에 대한 확신이다. 이 확신 가운데 책임 있게, 책임지며 사는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인 것이다.  


김구원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고대 근동과 구약 성경의 비교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개신대학원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한국교회의 개혁은 평신도들의 성경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실천에서 출발한다고 믿으며, 평신도들이 성경을 올바로 읽게 하는 책을 저술하는 데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성경,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무엘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