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새로운 세계를 여행하는 설레임

[301호 커버스토리]

2015-11-23     김주련 성서유니온 출판국장

‘그냥’ 그리기 시작하다

특별한 생각이 없었다. 무엇을 이루거나 어디에 진입하고 싶은 바람도 없었다. 오래 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쓰신 신영복 선생님의 친필 엽서가 그대로 담긴 책을 보면서, 지인들에게 휴지며 메모지에 또박또박 써서 보낸 손 글씨와 함께 구석에 수줍게 실린 저자의 그림엽서에 묵직한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 케테 콜비츠, The Mothers, 1922-1923, 목탄. (2015 평화박물관)

특히 “빈 지게가 더 무겁다”라는 짧은 문장과 함께 실린 소박한 그림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한 메시지로 남아 있다. 전문가의 유명 그림은 아니겠지만 그린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 진정성이 어떤 작품보다 진하게, 보는 이의 가슴에 인상적인 무늬를 만들어 주었으리라.

그때부터였을까? 그냥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 본래 말수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어서 하고픈 말을 글로 많이 하는 쪽이었는데, 어느 순간 말과 글이 건네는 소통의 직접성이 오히려 관계를 위태로움에 빠뜨릴 수 있음을 경험했다. 그래서 어쩌면 조금은 모호한, 그래서 더 많은 해석이 가능한 간접적인 소통이야말로 진실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그냥 그림으로 말을 건넬 수 있다면, 굳이 꼭 말이 아니더라도 작은 그림 하나가, 하고 싶은 말보다 더 많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 케테 콜비츠, The Presoners, 1908, 에칭. (2015 평화박물관)

하지만 쉽게 시작을 못했다. 왠지 전문적으로 배워야 할 것만 같았고 뭔가 대단한 결심을 해야만 할 것 같았을까? 몇 해 전, 잠시 유럽여행을 하는 동안 적지 않은 갤러리를 기웃거리면서 마음속으로는 계속 ‘나도 그리고 싶다’ 했지만 그 마음을 먹기까지는 좀처럼 쉽지 않았다.

   
▲ 케테 콜비츠, The Ploughmen, 1906, 에칭. (2015 평화박물관)

그렇게 또 시간만 보내다가 지난해, 오클랜드 아트 갤러리에서 케테 콜비츠의 석판화와 목판화를 만나게 되었다.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처음엔 가슴이 먹먹하다가, 결국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눈물을 훔치고야 말았다. 이건 그냥 메시지가 아니었다. 작가의 온 생애, 온 시대를 걸고 나를 뒤흔드는 것만 같았다. 그 강렬함은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림 그리는 홈메이트 친구에게 “그림 그리고 싶다”라는 말로 자주 내뱉어졌고, “그럼 그냥 무조건 시작하세요”라는 대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올해 초 그냥 시작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이 시작이었다

딱히 그림으로 무엇을 이루려는 욕심은 없었지만 그래도 혼자 가는 길은 도중에 포기할 수 있으니 동행자가 있으면 오래 갈 수 있다는 조언에 따라 사무실에서 함께할 수 있는 이를 찾았다. 그리고 초행길에는 가이드의 도움이 큰 힘이 될 수 있기에 퇴근 후 그림 그리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일주일에 한 번씩 그리기 시작했다.

첫 시간, 그림 그리는 방법을 본격적으로 배울 줄 알았는데 사무실 책상 위에 가지 두개와 파프리카 두개를 올려놓고 무조건 보이는 대로 한번 그려보란다. 한 번도 무엇을 제대로 그려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냥 그리라고. 보이는 대로. 겁내지 말고 그냥. 다만 어두운 데는 어둡고 밝은 곳은 밝게. 잘 보고 그대로….

▲ 운동화 소묘, 4B. 2015.4.28.

그렇게 했다. 우린 간단히 선 쓰는 법을 배우고 그 자리에서 바로 보이는 것을 그렸다. 그냥. 그런데 신기하게도 두 시간여 그리고 났더니 실물과 꽤 비슷한 그림이 나왔다. 그랬다. 그림은 어느 특별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오래도록 잘 들여다보고 그대로 그리면 그려지는 일상의 사소함처럼 가까이 다가왔다. 중요한 것은 대상을 사랑하며 오래도록 바라볼 것. 왜곡하지 말고 보이는 그대로 이해할 것. 사랑하기에 좀 더 바라보고(눈으로 어루만지고), 바라볼수록 사랑이 깊어지는 것을 느끼면 되었다.

▲ 모자 소묘, 2B. 2015.5.5

그래서 지닌 것들 중에서 좀 더 오래되고 좀 더 내 손 때와 이력이 묻은 물건들을 먼저 그리기 시작했다. 운동화, 모자, 구두… 언제 내 신발을 이토록 물끄러미 두 시간 이상을 바라본 적이 있었을까? 없었다. 자주 끈이 풀려 고생했던 운동화, 외로운 거리에 쉬 물들게 하는 모자, 오랜 시간 이곳저곳 나를 데려다주면서도 언제나 같은 모습인 그 구두. 추억들이 살아났고 사연들이 다가왔다.

▲ 구두 소묘, 4B. 2015.4.19.

얼마 전,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이 없지만 시골농장에서 12시간씩 크로키를 하며 그림을 터득한 이치카와 사토미의 인터뷰를 읽게 되었다. 지금까지 70여 권의 그림책을 낼 정도로 유명한 이 작가의 그림 그리는 방식은, 한 자리에 앉아 짧게는 30분, 길게는 3일 동안 바라보면서 느끼고, 그 느낌을 그림으로 담아낸다는 것. 무엇보다 여행 중에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고 하면서 0.1초 만에 얻어지는 이미지는 자기 것이 아니라고 답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시간을 들여 관찰할 때 대상을 바로 이해하게 되고 오래도록 생생하게 그 기억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존 버거가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에서 말해준 ‘그림의 한때’가 조금 이해되는 지점이었다. 사진이 찍히는 순간과 달리 그림이 그려지는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의 그림을 그리는 길고 짧은 과정이 순간을 구성해가는 과정이라고 했던.

▲ 카를 블로스펠트의 사진 모사, 4B. 2015.3.28

글을 쓸 때도 역시 오래 바라보는 일은 중요하다. 시인 이정록은 《시인의 서랍》에서 “오래 들여다보면 모두 시가 된다”라고 했고, 시인 고은은 <순간의 꽃>에서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고 쓰면서 자세히 바라봄의 새로운 발견을 노래했다. 그러므로 글을 잘 쓰려면 먼저 오래 바라보는 힘부터 키워야 한다. ‘시이불견’(視而不見)처럼, 보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쓸 수 없고, 제대로 말할 수도, 그릴 수도 없다.

그림은 오래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볼 수 있는 데까지 힘을 다해 보면서 그려보기. 처음엔 두 시간으로 부족했다. 심지어 네 시간으로도 부족했다.

그런데 그림 그리기 시작한 지 4, 5회 차에 뒤러의 토끼를 본대로 그리다가 내가 그려놓은 토끼털의 포실함에 놀랐고, 카를 블로스펠트(Karl Blossfeldt)의 식물 사진을 놓고 그대로 묘사하다가 시간을 들이면 들일수록 실제에 가까워지는 결과에 스스로 대견해했다. “그렇게 하면 돼요. 특별하지 않아요. 그렇게 오래 바라보고 본 것을 다 그려내면 돼요.”

철학자 한병철은 《시간의 향기》에서 “즉각적인 향락”은 아름다울 수 없다고 하면서 어떤 것의 아름다움은 “한참 뒤에야” 다른 것의 빛 속에서, 귀중한 추억 속에서 비로소 드러난다고 했다. 즉 순간적인 광휘나 자극이 아니라 사물들의 잔광, 사물들의 여운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면에서 그림이라는 작업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있는 참 좋은 길임에 틀림없다.

오랜 시간 들여다보고 그것을 담아내는 과정에서 대상의 아름다움이 결결이 모두 살아나는 것을 경험한다. 그 여운 또한 깊고 길게 남으면서. 알렉산드라 호로비츠의 《관찰의 인문학》 ‘에필로그’에 기록된 셜록 홈즈의 말이다. “내 방법을 알잖나, 사소한 것들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알아낸 걸세.”

아마추어, 수줍음이어서 설렌다

전문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프로가 아니라서, 그냥 취미로 그리는 그림이라서 누군가에게 그림을 보여주는 일은 부끄럽지만 설레는 일이기도 했다. ‘그냥’ 그리는 것들이라서 ‘그냥’ 보여줄 수 있었고, 심지어 겁도 없이 콩나물국밥집 개업하는 지인에게 콩나물 그림을, 죽집 개업을 하는 친구에게 죽 그림을 선물하기까지 했다.

▲ 오클랜드 해변에서. 2015.10.17

몇 개월 더 그리고 난 지금 생각하면 얼굴 빨개지는 일이지만 아마추어라서 그 모든 시작은 행복한 설렘이었다. 그림하고 별로 상관없을 것 같은 사람이 직접 그려서 건네는 어설픈 그림들은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웃음 짓게 했다. 그거면 됐다. 앞으로도 이런 어설픈 짓들로 좀 더 많은 이들을 웃게 할 수 있다면 넉넉히 즐겁지 않을까.

정혜윤의 글을 통해 알게 된 한충자 할머니의 시는 이런 면에서 어느 프로 시인보다 선량한 행복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글을 모르는 까막눈이었지만 72세에 처음 한글을 배우고 첫 시집을 낸 후에 얼마 전 83세에 두 번째 시집을 내신 할머니 이야기는 우리에게 지금이라도 어설픈 무엇을 그냥 시작해볼 수 있게 한다. 어차피 아마추어니 못 그려도, 못 써도, 못 해도 괜찮은 거니까.

시는 아무나 짓는 게 아니야
배운 사람이 시를 써 읊는 거지
가이 갸 뒷다리도 모르는 게
백지장 하나
연필 하나 들고
나서는 게 가소롭다.

꽃밭에서도 벌과 나비가
모두 다 꿀을 따지 못하는 것과 같구나
벌들은 꿀을 한보따리 따도
나비는 꿀도 따지 못하고
꽃에 입만 맞추고 허하게 날아갈 뿐

청용도 바다에서 하늘을 오르지
메마른 모래밭에선 오를 수 없듯
배우지 못한 게 죄구나
아무리 따라가려 해도
아무리 열심히 써도

나중엔
배운 사람만 못한
시, 시를 쓴단다.

- 한충자 할머니의 “무식한 시인”, 《여행 혹은 여행처럼》에서

취미, 딴짓의 영성

어쩌면 새로운 발견은 늘 걷던 그 길이 아니라 문득 딴 길로 잘못 들어섰을 때 낯선 기쁨으로 찾아오는 반가움일 수 있다. 오랜 시간 텍스트만 주로 다루어오던 직업 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 내게는 외국어 하나를 새롭게 배워 새로운 세계를 여행하는 것처럼 설레는 일이다. 그 여행지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반갑고, 모든 사물이 선물로 도착한다.

때때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 중에 과학자들이 늘 해오던 방식을 벗어나 딴 짓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때로는 가수의 시집이, 시인의 점토공예가, 철학자의 그림이 그들의 전문적인 일보다 사람들에게 더 뜻밖의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내 그림이 유명한 전문가들의 취미생활과는 비교할 바 못된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번 정도 결이 다른 딴짓에 푹 빠져봄으로써 지금 하는 일을 지속하게 해주고, 더 생동감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확실하다.

무엇보다 말과 글에 지쳐 있을 때 몇 시간 집중해서 한 컷의 그림을 그리고 나면 마음 가득 잔잔한 위로가 흐르는 것만 같다. 어떤 땐 책을 읽다가 감동적인 구절을 만나면 밑줄을 긋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문장과 함께 그림을 그려놓으면서 그 순간의 감동을 훨씬 더 오래 기억하는 법을 배운다.

특별한 소망 없이 그냥 그리기 시작했지만 그냥 이렇게 책을 읽다가 그림으로 한 줄, 길을 가다가 그림으로 한 풍경,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다가 그림으로 한 사연을 담아보는 것. 그렇게 그리다가 조금 특별한 선물이 온다면 어느 날 내가 사랑하는 성경 이야기를 어린이들에게 한 개씩 그림으로 꺼내줄 수 있기를 소박하게 그려본다.

김주련
성서유니온선교회 출판국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올해 초부터 ‘그냥’ 시작한 그림 배우기에 푹 빠져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