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H. 요더의 성폭력과 메노나이트 교회의 대응 1

[302호 심층 탐구] 1

2015-12-28     김성한 IVF 간사
   
▲ 존 하워드 요더. (사진: Carolyn Prieb/위키미디어 코먼스)

성폭력과 관련한 모든 사건은 아프고 슬프다. 세계적인 신학자 존 H. 요더의 성폭력 사건이 아픈 것은 그가 주장하고 정교하게 발전시킨 비폭력 평화주의 신학을 스스로 부정한 꼴이 되어버렸다는 안타까움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오랫동안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외면당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 안의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외면과 조직적인 은폐는 시간과 상황, 문화와 신학적 차이를 넘어 반복되고 있기에 더욱 슬프다. 이 글은 요더와 메노나이트 교회의 실패,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과정을 담으려 했다.(4회 연재) 이 ‘덕스럽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한국교회가 작은 덕이라도 회복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인터뷰를 시작하다
신학자이자 윤리학자인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는 1997년 12월 30일 사망했다. 그의 사망을 알리는 부고 기사가 <뉴욕타임스>에 실렸을 정도로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성폭행(Sexual abuse)에 대한 소문들은 그가 사망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더욱 크게 회자하였다. 요더의 성폭행 사건들은 1970~80년대에 일어났다. 이 글은 2012년 어간부터 다시 시작된 요더의 성폭행 논란과 미국 메노나이트 교회(Mennonite Church USA)와 메노나이트 신학대학원(Anabaptist Mennonite Biblical Seminary, AMBS)이 보인 반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필자는 먼저 요더의 성폭행에 대한 최근의 논란과 관련된 인물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새라 웨그너 셍크(Sara Wagner Shenk)는 현재 미국 인디애나 주 엘크하르트(Elkhart)에 위치한 AMBS의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셍크는 또한 미국 메노나이트 교회의 대표인 어빈 스투즈만(Ervin Stuzman)과 함께 ‘식별그룹(Discernment Group)’의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식별그룹’의 일원으로서 AMBS에서 오랫동안 가르쳤던 테드 쿤츠(Ted Koontz)는 윤리학자로서 AMBS에서 요더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평화학 프로그램의 책임자로 일해왔다. 그는 요더의 오랜 동료였으며 요더의 가족들과도 가깝게 지내왔다. 레베카 슬로우(Rebecca Slough)는 AMBS의 학장으로 재임중이다. 슬로우는 2015년 3월 21~22일에 AMBS에서 있었던 애통·고백·헌신의 예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존 로스(John Roth)는 요더가 졸업한 고센대학(Goshen College)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메노나이트 학술 계간지인 <메노나이트 쿼털리 리뷰>(Mennonite Quarterly Review, MQR)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요더는 31년 동안 편집위원으로 MQR에 참여했으며 이 저널을 통해 많은 글을 발표했다. 에버렛 토마스(Everett Thomas)는 미국 메노나이트 교회의 공식 기관지라고 할 수 있는 <더 메노나이트>(The Mennonite)의 책임 편집자로 2014년까지 지난 13년 동안 일했다. 토마스 역시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AMBS에서 요더의 학생이기도 했다.

모든 인터뷰는 2015년 5월 6일부터 13일 사이에 미국 인디애나 주의 고센과 엘크하르트에서 이루어졌다. 2015년 2월 메노나이트 교회는 요더의 성폭행과 관련된 다양한 기록들과 문서들을 일반에 공개하는 결정을 내렸다. 필자는 8월 6일부터 20일까지 고센대학에 위치한 메노나이트 교회의 기록 보관소에서 이 자료들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존 하워드 요더는 누구인가?
존 하워드 요더(1927~1997)는 가장 영향력 있는 메노나이트 신학자일 뿐 아니라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로 꼽힌다. 고센대학을 졸업한 그는 1947년 21세의 나이로 다른 메노나이트 청년들과 같이 자원봉사자로 유럽에 갔다. 유럽에서 전후 복구사업과 선교를 위해 일하는 동안 1950년부터 스위스 바젤대학교에서 역사신학으로 박사과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57년 칼 바르트(Karl Barth) 밑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이라는 상황 속에서 재세례파-메노나이트(Anabaptist-Mennonite) 전통으로 부터 나타난 신학계의 새로운 목소리가 되었다. 요더는 에큐메니컬운동과 복음주의운동 양쪽 모두에 깊이 관여했다. 메노나이트 역사학자인 로스는 세계 교회에 대한 요더의 공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메노나이트 전통 안에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스스로를 아주 작고 미약한 존재들로 여기는, 거듭거듭 현실성 없고 순진한 사람들이라고 무시당해오면서 생긴 어떤 심리가 있습니다. 루터파 사람들은 메노나이트들을 “종교개혁이 만들어낸 기형”(the deformation of the reformation)이라고까지 말하곤 했었죠. 그런데 같은 크리스천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두 번의 전쟁이 끝나고 생긴 이 텅 빈 공간에 든든한 성경적인 기초와 함께 평화주의 입장을 그토록 명확하게 설명해내는 요더가 등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무엇인가 이야기할 것이 있구나”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죠. 요더가 WCC에 초청을 받아 메노나이트 전통을 대표하게 되면서 우리는 “바로 이거야!”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요더도 스스로에 대해 의식하지 않았을지라도 이런 생각들을 구체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오, 우리도 보다 큰 기독교 전통 속에서 우리들의 목소리가 있다.” … 그리고 이런 요더의 기여가 사람들에게 요더에게 경의를 표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죠.(로스, 2015)

요더가 등장하는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하는 것과 동시에 그가 대표하고 있는 메노나이트의 오랜 문화적 전통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의 유형론에 따르면 분리주의 모델을 대표하는 재세례파-메노나이트들은 종교개혁 때부터 이미 조롱과 박해의 대상이었다. 요더는 이런 독특한 문화에서 출현했으므로 그의 기여는 단지 한 개인의 성취만이 아니라 재세례파-메노나이트들이 다양한 교회들에 제공할 수 있는 기여로 여겨지게 되었다.

또한 요더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무관하게 그가 뛰어난 학자였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는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에 능통했으며 학문적 관심은 매우 다양해서 신학,  윤리학, 사회과학, 성서학, 그리고 선교학을 아우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요더가 칼 바르트와 리처드 니버와 같은 그 시대의 대가들과 신학적인 논쟁을 시작했을 때 그는 겨우 30대였으며 죽을 때까지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들과 윤리학자들을 대상으로 끊임없는 대화를 전개했다. 요더는 또한 스승이었던 해롤드 벤더(Harold Bender)와 가이 허쉬버거(Guy Hershberger)를 거침없이 넘어섰던 인물이다.(쿤츠, 2015)
로스는 그가 가까이에서 경험했던 요더를 매우 강력한 인물로 묘사한다. “그는 큰 키와 함께 강력한 목소리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다 놀라운 지성을 갖췄지요. 만약에 당신이 그와 어떤 논쟁을 벌인다면 그는 당신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 등장하는 페이지의 각주를 기억으로부터 불러와서 언급할 정도입니다.” 요더에 대한 이런 관찰은 그가 갖고 있던 놀라운 지적 능력을 잘 보여 준다.

로스는 또한 요더가 보여준 깊은 영성을 언급한다. “하지만 또한 요더는 아주 깊은 경건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그 모습들은 거짓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그런 깊은 기도를 했고. 그래서 이런 지적이면서 또한 경건함을 동시에 지닌 모습은 저에게 큰 영감을 주었던 것이죠.”

대인관계를 어려워 한, ‘어색함’의 대명사
많은 이들이 요더를 매우 강력한 존재로 기억하는 한편, 다른 이들과 어울리기 힘들어하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어색함’(awkwardness)은 그를 잘 표현해주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진 저술가인 마르바 던(Marva Dawn)은 노트르담 대학교(Notre Dame University)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동안 요더의 학생이었으며 그의 조교로 일하기도 했다. 던은 요더와 있었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저는 존 요더의 학생 조교로 2년 동안 일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요더는 저의 환대(hospitality)를 사용했습니다. 그는 평소의 ‘어색함’을 띤 채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죠. “우리 과에 새로운 방문객이 있는 것 같아.” 그러면 제가 또 이렇게 물었죠. “제가 그분을 저녁에 초대하기 원하세요?” 요더가 그렇다고 대답하면 저는 또 어떤 사람들을 초대하기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때로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그의 아내가 존과 애니 요더(요더의 아내)와 함께 저의 아파트로 오기도 했죠.(네이션 & 던, 2013)

요더의 오랜 친구였던 하우어워스 역시 1970년대 요더의 연구실을 방문해서 나눈 첫 대화를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요즘은 어떤 연구를 하시느냐?’고 묻는 ‘아카데믹 게임’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쿤츠는 요더의 이 어색함이 그의 놀라운 지적 능력의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존은 그의 지적능력 때문에 외로운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너무 똑똑했기에 다른 많은 사람과 같은 수준으로 대화를 나눌 수 없었고, 그래서 또 외로웠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것들이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죠.”

이런 요더의 독특한 성격은 ‘책임’과 같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쿤츠는 요더가 AMBS의 전신인 고센성경대학원(Goshen Biblical Seminary, GBS)에서 가르쳤던 1967~1984년 동안 동료들과의 관계가 쉽지 않았음을 증언한다. “존과 다른 교수들 사이에 좋은 동료 관계가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요더는 그 자신의 동료들과만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에게 요더는 매우 강력한 인물로 기억된다. 요더의 많은 학생들은 그의 “겁을 주고 마음을 끌지 못하는 교수방식”에 대해 불만을 표현했다. 정신건강의학자이며 《하나님의 거실 안에 있는 코끼리:메노나이트 교회와 존 하워드 요더》의 저자인 루스 엘리자베스 크랄(Ruth Elizabeth Krall)은 논란이 되는 그의 에세이에서 자신이 청강생으로 참여했던 1970년대의 요더의 수업을 다음과 같이 복기한다.

나는 그를 권위적이며 독단적인 담임선생님의 모습으로 기억한다. 요더에게 지적으로 흥미롭고 도전적인 질문들을 하는 소수의 (주로) 남학생들만이 요더와 지적 대결을 즐기고 있었고, 강의실의 대다수 학생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크랄 2013, 177)

정리하자면 요더는 매우 뛰어난 학자로 에큐메니컬운동과 복음주의운동에 속한 많은 세계 교회들에 영향을 끼쳤지만 다른 이들과 어울리기 어려웠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저명한 윤리학자였던 글렌 스타이센 역시 요더의 아주 가까운 친구였다. 아스퍼거스 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들을 둔 스타이센은 자기 아들과의 경험을 비추어 볼 때, 요더가 “엄청난 천재인 아스퍼거스”(super-genius Asperger’s)였을 것으로 추측한다.(스타이센, 2013) 우리는 요더의 복잡해 보이는 깊은 생각들과 그의 주변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며 어색해하던 이유가 무엇인지 다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요더가 이런 복잡한 성격과 함께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른 많은 성폭력 사건의 경우와 같이 요더의 성폭행은 책임이 수반되지 않는 권력의 남용과 관련되어 있다.

어두운 이야기 : 요더의 성폭행
최근까지도 요더의 성폭행의 진실은 감춰져 있었다. 지난 2015년 1월 <메노나이트 쿼털리 리뷰>(MQR)에는 여성 역사학자인 레이첼 월트너 구슨(Rachel Waltner Goossen)이 쓴 “야수를 해가 없게 하다: 존 하워드 요더의 성폭행과 메노나이트 교회의 반응”(Defanging the Beast: Mennonite Responses to John Howard Yoder’s Sexual Abuse)이라는 논문이 게재되었다. 구슨의 이 논문이야말로 그의 성폭행 사건의 경위를 소개하는 본격적이고 공식적인 최초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때까지 요더의 은밀한 이야기를 밝히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그의 비행에 대한 매우 다른 해석들이 공존했었다. 예를 들자면, ‘여성들과의 부적절한 관계’ ‘성적인 경계의 침범’ ‘성적인 비행’ 등으로부터 ‘성적 문제의 의혹’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을 대상으로 요더가 벌인 일들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은 지난 세월 동안 이 사건이 얼마나 다양한 해석들을 낳았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피할 수 없는 질문은 “요더와 피해자들 사이에 도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피해자들은 얼마나 존재하는가?”일 것이다. 1992년 8명의 여성이 다른 30여 명의 피해여성들을 대표해서 메노나이트 교회 지도자들 앞에 나서서 자신들이 요더로부터 겪은 피해를 증언했다. 물론 요더가 완력을 사용했거나 여성들을 위협하지 않았지만, 요더의 ‘환영받지 못할 성적인 행동’(unwelcome sexualized behavior)은 여성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구슨은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요더의 징계절차의 한 부분으로 요더를 상담했던 두 명의 정신건강 전문가들을 인터뷰했고, 그들의 증언을 기초로 100명 이상의 여성들이 요더로부터 “원치 않는 성적 침범”(unwanted sexual violations)을 경험했을 것으로 추측한다.(구슨, 2015, 10) 너무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여성이 성희롱부터 성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성적인 침범과 폭력을 경험했다.

이미 앞서 살펴보았듯이 요더에게는 매우 다양한 학문적 관심들이 있었다. 1960년대 말부터 요더는 결혼과 독신에 대한 소논문들을 쓰기 시작했다. 다음은 요더가 썼던 소논문들의 제목이다. “결혼은 언제 더 이상 결혼이 되지 않는가?”(1968), “윤리학과 목회적 관점에서 본 독신”(1973), “홀로인 사람들을 존중하라”(1973), “간음은 언제 결혼이 되는가?”(When is adultery a marriage?, 1974), “도움에 대한 요청”(1974), “무엇이 ‘마음의 간음’인가?”(1975). 이 소논문들은 정식으로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장소에서 발표되었고, 그의 수업 시간에 강의 자료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시기 북미의 격변하는 문화적 상황(전통적인 혼인 관계와 이를 기초로 하는 가정을 넘어서는 다양한 형태의 실험들)을 생각해 본다면, 사회-문화적 이슈들에 대해 줄곧 대답을 시도해왔던 학자로서 결혼과 독신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요더가 이런 생각들을 행동을 통해 실험했다는 것이다.

요더의 이상한 ‘해석학적 공동체’ 실험
요더의 많은 피해자들은 요더가 계속해서 편지나 대화 가운데 “친밀함”(intimacy)이라는 주제에 집중했다고 증언한다. 그의 소논문 중 하나인 “도움에 대한 요청”(A Call for Aid)은 그의 생각과 행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예다.

나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신학적이며 윤리학적인 그리고 심리학적인 연구로 이끌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 이 연구는 내가 써왔던 글들을 넘어 연구해 보지 않았던 주제들로 나를 밀고 갑니다. 그것은 매우 복잡한 주제들로서 출판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만일 독신자들을 위한 교회와 사회의 의무를 단언한다면 이 주제들을 피할 수 없습니다. … 따라서 당신이 동의한다면, 당신이 이 연구 주제들을 위한 “해석학적인 공동체”의 일부가 되어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요더, 1974)

겨우 3페이지 분량의 짧은 글이지만 이 글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일인칭으로 쓰인 편지를 존경받는 학자인 요더로부터 받은 여학생들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요더의 이상한 실험을 알게 된 GBS의 말린 밀러(Marline Miller) 총장은 1976년경부터 요더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게 되었고 요더의 비행을 멈추기 위해 노력을 지속한다. 그리고 밀러와 요더 사이에 계속된 10년 가까운 은밀한 대화는 많은 비밀 메모들을 남겼다. 1979년 12월 6일 요더가 밀러에게 보낸 다음의 메모는 요더의 “실험”에 담긴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당신의 지난 12월 5일자 메모 중 A/1항목을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우선 신체적으로 직접 개입된 경험들이 무엇인지를 기술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변형이 있을 수 있으나 계속되는 신체적 접촉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A. 자연스러운 인사로서 만지기(superficial touch as a natural greeting)
B. 접촉(touch)이 가질 수 있는 깊은 의미에 대한 토론; 구두 혹은 (더 많은 경우에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문서를 통해서
C. A와 B를 전 단계로 같은 접촉은 더 의미가 있게 됩니다. 이것이 꼭 기대되거나, 다 이루어져야 하는 것처럼 반복되지는 않습니다. 접촉은 어쩌면 손뼉치기가 될 수도 있고, 포옹이나 가벼운 입맞춤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까지의 표현들은 내가 기술한 약속들에 대한 서면 허락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그런 동의는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D. 위와 같은 표현들이 하나의 기대가 되어서 다시 만났을 때 일상적인 기대가 됩니다. 여기에 문을 닫거나, 무릎 위에 앉거나, 더 깊은 입맞춤이 더해질 수 있습니다.
E. 옷을 조금 벗기기
F. 옷을 모두 벗기기
G. 음경과 치골을 만지기(superficial touching of penis/pubis)
H. 부분적인/단절된 흥분/진정 상태를 탐험하기 (exploration of partial/interrupted arousal/intermission)… (요더, 1979).

이해하기 어려운 이 비밀메모를 요더가 밀러에게 보냈던 것은 1979년이다. 따라서 이미 그는 여기에 기술된 많은 실험을 진행한 상태였을 것이다. 이것이 요더가 교회 안의 독신들을 위한 실험이라고 주장하던 내용이며, 그가 선택한 여학생의 “해석학적인 공동체”와 함께 나눈 “개인적인 우정, 상담, 그리고 신학적 윤리학”의 구체적인 모습이었다.(요더, 1979)

요더의 실험에 대한 더 구체적인 폭로
구슨은 최근 논문에서 요더의 실험을 더 구체적으로 폭로한다. 그녀의 발견은 요더의 행동을 성희롱이나 성추행과 같이 상대적으로 작은 사건으로 보려는 이들에게 상당히 충격적이다.

요더는 자신이 “부분적인/단절된 흥분”(partial/interrupted arousal)이라고 부르는 행위를 ‘사정없이 이루어지는 삽입’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야수를 무해하게 한다”(defanging the beast)는 말을 설명하면서, 성적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하는 여성들에게 “가족 간의 친밀함”(familial intimacy)을 가르쳐 주려고 했으며 이 가족 간의 친밀함은 강간과 같은 강압적인 방식이 아닌 안전한 방식으로 증명되어야 했다.(구슨 2015, 12)

지금 우리는 요더와 그의 희생자들을 아주 먼 거리에서 읽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 일의 전모를 파악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요더의 지적인 탁월함과 그것을 기반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행사한 많은 힘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로스는 요더의 학문적인 탐구와 그의 비밀스러운 실험들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저는 그가 제가 아직 생각해 보지도 못한 무엇인가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누구도 이러한 만남의 실체가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죠. 왜냐하면, 서구 사회에서는 우상이 되어버린 핵가족이라는 맥락 안에서만 친밀감이 경험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여성의 필요를 진지하게 다루면서 확장된 가족에 대한 정의를 묻는 것과 같은 진보적이며 급진적인 입장과 여성주의 운동의 최전선의 의제로 제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 어쩌면 어떤 진실이 거기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중에서야 정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죠.(로스, 2015)

요더의 탁월한 지적 능력은 그에 대한 어떤 인식(perception)을 형성했으며, 이는 그가 오랫동안 저지른 이런 비밀스러운 실험들을 숨기기에 충분했다. 요더가 왜 이런 성폭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완전한 답은 없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로 그의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밝히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적 충동에서건 아니면 정말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서건, 요더의 성폭행이 어떤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이뤄졌다는 것이다. 물론 두 경우 모두 그가 피해자들에게 저지른 일들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다음호에 계속)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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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IVF(한국기독학생회) 춘천지방회 대표간사로 IVF미디어 사역부와 인디밴드 코드셋 멤버로 활동했고 철학, 교회사, 평화학을 공부했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3년간 이 글에 자주 등장하는 미국 인디애나 주의 고센에서 살면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박사 과정(Intercultural Studies)을 공부했다. 현재 한국 기독교의 민족복음화 담론에 대한 논문을 붙잡고 씨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