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공동체? 먼저 ‘공간신학’ 이해해야죠”

[303호 커버스토리] 최규창 이레하우스 소장 인터뷰

2016-01-26     이범진 기자
   
▲ ⓒ복음과상황 오지은

함께 집 짓고 모여 살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여러 현실적 제약으로 ‘관심’에만 머무는 경우가 태반. 어렵사리 함께 살기에 성공하더라도, 크고 작은 갈등과 장애물이 산적하다. “뚜렷한 철학과 주도면밀한 계획 없이는 필패(必敗)”라는 게 먼저 길을 걸었던 이들의 뼈아픈 조언이다.

이에 관한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최규창 이레하우스 소장을 만났다. 그는 10여 년 전, 이미 서강대 IVF 동료들과 이레하우스 공동체를 꾸려 한 건물에 모여 살았다. 올해 4월이면 두 번째 이레하우스 공동체가 생겨난다. 그는 오랫동안 ‘공간’에 관한 사회학, 정치학, 철학 등의 연구를 섭렵해 나름의 ‘공간신학’ 강좌도 꾸렸다. ‘함께 집 짓고 살기’에 관해서 이론과 실전을 고루 갖춘 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31일, 그가 운영하는 회사 사무실에서 ‘그리스도인에게’ 함께 집 짓고 사는 것의 의미를 물었다.

― 공간신학? 생소하게 들린다.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얼마 전 6주(24시간) 동안 강의를 했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의 5분의 1도 하지 못했다.(웃음) 인간은 선과 면으로 살아가며 입체적인 공간에서 존재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 대해서는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 지금의 시공간에서 들이닥치는 사건들에 잘 반응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사건이 벌어질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좌절하며 인생을 살아간다. 성경을 봐도 수많은 인물들은 입체적 사건 안에서 하나님과 소통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텍스트로만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살아가는 공간이 우리에게 미치는 힘은 강력하다. 의식과 무의식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더 깊이 봐야 한다. 그래서 나름대로 ‘공간신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봤다.

―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결국 공간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이 막대하다는 것인데, 강의 중에 ‘질병과도 연관이 있다’고 하셨다.
물론이다. 가장 쉬운 예로는 폐질환을 일으킨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있지 않나. 옥시 제품이었는데, 영국 본사에도 없는, 우리나라에서만 판매한 제품이었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가장 가습기를 많이 쓰는 나라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많아서다. 거의 아파트에서 피해자들이 나왔는데, 아파트의 특성상 건조하니까 가습기를 쓸 수밖에 없는 거다. 

또한 핵가족화와 개별화의 영향으로 번아웃(burn-out, 기력소진)과 관련한 질병이 늘고 있다. 70년대에만 해도 1퍼센트 정도였던 당뇨 환자가 지금은 10퍼센트다. 암환자도 10년마다 두 배씩 늘어난다. 식생활도 영향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스트레스가 원인인 병들이다. 정신적 질환이다. 원래 우리 민족에게는 흔치 않았던 질병들이다. 최근 30년 사이에 근대화의 충격으로 생겨난 거다.

― 아파트 이야기부터 천천히 풀어 가면 좋을 것 같다. 아파트가 사람들 삶에 영향을 끼치는 정도는 얼마나 될까?
자녀들에게 끼치는 영향부터 이야기해보자. 옛날 우리가 살던 집 구조는 다락도 있고 마당도 있고 자연도 있었다. 부모가 다 밖에서 일해도 자연이 키워주었기 때문에 아이들 삶이 크게 어그러지지 않았다. 그런데 시멘트 안에서 자란 아이들은 부모가 없으면 굉장히 힘들다. 부모를 대신해줄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옥처럼 비밀 일기장 숨겨둘 곳 하나 없이 모두 오픈된 공간이다. 아이들 마음속에는 불안이 자랄 수밖에 없다. 공간이 아이의 의식을 결정한다. 아파트 실내 구조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우리의 의식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 획일화된다. 점점 전체주의 사회가 만들어지기 쉬운 조건이 되어간다.

― 획일화된 아파트의 실내 구조가 의식의 획일화로 이어진다?
신축 주택 70퍼센트 가량이 아파트로 지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 60퍼센트가 아파트에 사는데 대부분 85제곱미터(25.7평 전용면적) 33평형에 산다. 태반이 똑같은 크기고, 평수에 상관없이 설계도 똑같다. 거실 1, 방 3, 화장실 2. 나머지 빌라나 다세대도 설계는 다 아파트 구조를 따른다. 똑같은 공간에서 살면 불편한 게 똑같고 몸의 동선이 같아진다. 서양인들이 한국 아파트를 보고 놀라는 것 중 하나가 거실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마당과 마루가 없어진 향수가 거실에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가부장적 문화가 만들어낸 구조라고 볼 수 있다. 기껏해야 서너 명 사는 집에 거실이 그렇게 클 필요가 있나? 거실에 아버지가 앉으면 통제가 된다. 누가 어디에 가는지, 나가는지 들어오는지 등등. 거실에 또 빠지지 않는 게 있다. 대형텔레비전. 어디를 가나 거실 인테리어는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짜인다. ‘보여주기’ ‘과시’ ‘체면’ 문화다. 주부들이 자기의 자질을 평가받는 기준이 거실을 얼마나 잘 꾸며놓았는가가 되어버렸다. 이런 나라에선 전체주의가 가능해진다.

   
▲ 획일화된 아파트의 실내 구조가 의식의 획일화로 이어진다.


―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파트를 ‘섬기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서울에 처음 아파트가 생겼을 때 사람들은 ‘저런 곳에서 어떻게 사느냐’며 들어가기를 꺼렸다. 1958년에 한 동짜리 종암아파트가 처음 지어지고, 1962년 단지형으로 마포아파트가 처음으로 들어설 당시만 해도 거의 외국인들만 살았다. 장을 담그는 민족인데 장독은 어디에 둘 것인가? 등등 걸리는 게 많았던 거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을 버리면 편하다는 걸 알게 된 거다. 70년대가 되어서야 사람들이 아파트에 거부감 없이 들어선다. 박정희 대통령이 ‘중산층’을 만들어내기 위해 만들었던 전략이 주요했다. 일종의 군사주의 작전이었다. ‘아파트 만들기 180일 작전’이라고도 했다. 실제로 180일 만에 아파트 한 동을 만들어냈다.

― 박정희 대통령이 왜?
원래 박정희는 선거에서 한 번도 서울 지지율로 이겨본 적이 없다. 김대중, 신익희한테 다 졌다. 군인 출신이었고, 서울의 교양 있는 상류층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는 자신의 지지층을 만들기 위해 아파트를 도입해 ‘중산층’을 만들기로 한다. “모든 사람에게 집을 주자!” 청약통장만 있으면 아파트가 생기고, 자고 일어나면 아파트값이 올랐다. 싸게 집을 사게 해주고 집값을 오르게 했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중산층이 되었다. 그들이 지금 살아 있는 권력인 1930~1940년대 생들이다. 그때는 노력하면 돈을 벌 수 있는 시대였다. 사우디아라비아도 가고, 베트남도 가고. 우리나라 절반 가까이가 ‘중산층’이 되었다. 그들은 박정희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다. 좋은 기억밖에 없으니까. 그 마음이 고스란히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로 연결된다. (50년대 생들은 좀 다르다. 그들은 베이비붐 세대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온 세대다.) 어쨌든 박정희의 전략은 정통했다. 한때 고도의 군사전략이 오늘날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을 이렇게 바꿔놓은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아파트를 고급으로 짓고, 선호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나?

― 더 이상 아파트값이 오르지 않는다.
외국 어디에도 우리나라처럼 아파트의 재산가치가 높은 나라는 없다. 대학등록금이 올라도 과거에는 아파트값이 오르니까 융자를 받아서 등록금을 내고 했다. 아파트값이 올랐기에 70년대 오일쇼크, 80년대 3저(저달러, 저금리, 저유가) 현상, 90년대 버블경제 등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다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10년 전부터는 집값이 오르지 않고 있다. 나머지는 다 오르고 있는데. 아파트가 폭탄이 되었다.

― 사는 공간은 곧 ‘부의 상징’이자 ‘신분’이다.
중세시대에는 물건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자본에 대한 욕망 자체가 없었다(일부 부르주아나 귀족들 빼고는). 지금은 살 게 너무 많다. 그러니 자본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1장이 그래서 ‘상품’이다. 우리의 바람을 상품에 투사시켜서 그 대상을 섬기는 게 물신주의(物神主義) 아닌가. 물신주의는 상품이 있기에 생긴다. 견물생심이라고 말하지 않나. 그런데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과연 물건이 있어서 욕심이 생길까? 물건을 저장할 공간이, 욕망을 만든다. 욕망은 결국 공간에서 나온다.

90년대부터 아파트가 대형화되기 시작한다. 왜? 가전제품 판매가 포화상태에 이른 거다. 해결책으로 건설회사와 전자제품회사가 손을 잡았고, 삼성과 엘지 등이 가전제품을 크게 만들기 시작한다. 텔레비전 등 가전제품이 커지고, 건설회사는 대형 평수를 지어 공급했다. 90년대 중반에 양문 냉장고가 처음 나오는데, 그렇게 되면 냉장고를 놓을 부엌도 커져야 한다. 냉장고가 커지니까 채워 넣어야 한다. 그때쯤 생긴 게 대형마트다. 다 연결되어 있다. 물신주의는 공간 때문에 생긴다. 소파가 사고 싶어도 놓을 공간이 없으면 소파에 매달리지 않는다.

▲ ⓒ복음과상황 오지은

― 우리가 어디에 사느냐가 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 변화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잘 알겠다. 그런데 문득 공간에 영향받는 인간에 관한 본질적인 궁금증이 더 생긴다.
‘인간을 한 인간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겠다. 일단 타고난 것이 있을 것이다. 칼 융은 그것을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했다. 인간의 유전자 속에 수천 년 수만 년 역사적으로 축적한 경험과 정서들이 태어날 때부터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일종의 본능이다. 이 집단적 무의식 안에 원형(Archetype, 原型)이 있다고 보고 신(神)이나 악마나 모든 것은 집단적 무의식 속에 존재한다고 본다. 월터 윙크의 《참사람》에 보면, 예수는 우리의 내면으로 승천하셨다는 표현이 있다. 하늘로 승천하셨지만, 실제로 우리가 감지를 해야 소통이 가능한 것 아닌가? 인지도 안 되고 감지도 안 되는 신과 소통할 수 없다. 신을 포착하는 것은 깊은 내면(집단적 무의식)에서 가능하다. 반면에 의식은 종속변수에 불과한데, 집단적 무의식이 타고나는 것이라면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의식이다. 흔히 에고(자아)가 하는 일이다. 의식은 세계의 질서를 배우고, 그래서 시대마다 다르다. 의식이 시대의 산물이라면, 무의식은 뭔가 본질적인 것을 갖고 있다.

― 무의식이 이끌어가는 인간?
쉽게 말해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은 실제적인 것들이다. 이를테면, 과학주의, 기계적인 것, 자본 등이다. 반면 ‘무의식’ 속 의사 결정은 직관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욕망 지향적이고 충동적이다. 옷을 살 때 보면, 분명 새로운 스타일의 옷이라 샀는데 집에 가서 옷장을 열어보면 죄다 비슷한 스타일에 같은 색 계열의 옷들이다. 융은 어느 골목에 처음 갔는데 어디선가 본 듯한 곳을, 과거 내 유전자 속 무의식이 본 것이라 설명한다. 그런데 이런 사상에 너무 빠져버리면 결정론으로 간다. 결정론은 곧 필연론인데, 하나님은 모든 걸 결정해 놓지 않으신다. 사건의 하나님이다. 명제적 하나님이 아니다. 삶을 창조하듯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 균형을 잡는 경험과 과정이 필요하겠다.
개인적인 고민의 시작은 ‘어떻게 자기 시대는 물론 성경이 쓰인 고대 시대에 관한 이해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였다. 사회학, 철학, 정치학 관련 책을 읽으며 성경의 사건을 다시 들춰보았다. 사실, 모든 악(惡)은 상징으로 드러난다. 악의 실체는 강도나 폭력 등의 구체적인 행동들로 드러나지만, 항상 구조나 원형 속에 숨어있다. 학자들은 그 상징성을 감지하고 분석해왔다. 정치학, 사회학, 지리학 등에서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오로지 신학만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대상으로 삼던 과학 분야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인정하겠다는 목소리가 있다. 이들의 방대한 연구결과를 신학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데 현실은 ‘의식’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다. 그게 아니면 반대로 초자연적인 믿음으로 ‘그냥 믿으라’는 식이다.

―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칼 융은 의식을 ‘빙산의 일각’이라고 했다. 바닷물이 빠질 때 뭍이 잠깐 드러났다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는 의식되지 않는 영역이 훨씬 많다. 직관, 감정, 의지 등. 그러나 데카르트(1596~1650) 이후로 인간의 사유에서 이런 것을 다 빼버리고 ‘지성’만을 남겼다. 지성만이 곧 사유이며 정신이고 인간이라고 파악해버렸다. 신학도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고 의식되는 것만 연구하게 되었다. 결국 어떻게 되었나. 지성의 황금기에 오히려 야만적인 일들이 벌어졌다. 20세기에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 무려 1억 명이다. 그 이전에 죽은 사람들의 수보다 많은 역대 최대 수치다. 근대성이 꽃을 피웠다는 시대에 일어난 일이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계몽(근대)은 철저하게 이성 중심으로 흘러갔기에 신화적 세계관을 버리고 갔다며, 그 세계가 우리를 공격한 것이라고 직관한다. 신화적 세계관은 ‘무의식적 세계관’ ‘공동체적 세계관’이다. ‘인간 정신은 절대정신으로 간다’는 헤겔식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자연스럽게 신화적 세계관은 ‘버리고’ 가게 된다. 그러면 전쟁이 날 수밖에 없다. 왜? 우리는 진보해야 하니까. 새로운 문명 창조를 위해서는 나약한 인간은 쓸어버려야 하니까(헤겔은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정부가 일방적으로 위안부 합의를 해놓고 한 말이 무언가. ‘대승적 차원에서 이해해달라’였다. 우리는 더 강해져야 하니까, 더 진보해야 하니까 ‘사소한 것’은 희생하자는 것 아닌가. 신학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성찰해야 한다. 인간 정신은 과연 진보하는가? 인간 내면은 그렇게 질서 정연하지 않다. 장 폴 사르트르(1905~1980)는 이 세계가 너무 논리 정연해서 ‘구토’가 나온다고 했다. 실제 인간의 내면은 그렇지 않기에 무의식은 점점 소외되어간다.

― ‘공간’에 대한 이해가 그런 한계에 도움이 될까?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직선으로 인식하는데, 입체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존재에는 시간성이 없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에 존재한다. 일제강점기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문창극을 지지하는 목사와 신학자들도 많지 않았나.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그렇게 해석하는가? 공간에 대한 아무 이해가 없어서 그렇다. 그 역사 공간 속에서 함께 고통받는 하나님을 인지하지 못하고, 평면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공간’은 실제로 우리 내면부터 우주까지 다 연결되어 있다. 우리 내면은 우리가 사는 공간, 만나는 사람들, 사용하는 언어 등으로 결정된다. 그런 모든 것들을 연결해봐야 한다. 칼 융은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되는 과정을 개성화 과정이라고 했는데, 이 통합을 통해 인간이 성숙하게 된다고 봤다.

― 그런 ‘연결’을 통해 하나님과 더 잘 소통할 수 있다?
무의식의 심연이 연결되어 있기에 그 속에 있는 신의 원형과 만날 수 있다. 우린 거기서 신을 만난다. 하나님은 ‘저기’에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 만나는 것이다. 키에르 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 1장 제일 앞에 “모든 인간은 다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인간이 다 연결되어 있고 그 인간들은 또 영원한 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무의식의 심연 속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그 힘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사로잡히면 돈, 권력, 섹스의 노예가 된다. 무의식에 사로잡히면 의식으로 저항할 수 없다. 독일의 나치를 보라. 온 나라가 무의식에 사로잡혔다. ‘절대악’에 근접했다. 앞서 말했듯, 아도르노는 ‘우리가 신화적 세계관을 버렸기 때문에 그 세계가 우리를 공격한 것’이라고 말했다.

― 무의식의 힘에 사로잡힌 사람들 중 현실에서 권력을 얻은 이들이 많아 보인다.
히틀러처럼 무의식의 심연을 집단적으로 지배하기 때문에 그렇다. 인간이 개별화되어 있다면 그러한 조정이 불가능할 텐데, 집단주의로 그들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 아파트가 대세인 우리나라는 그런 힘에 지배받기 딱 좋은 환경 아닌가?
그렇다. 나는 아파트 집단의 영이 있다고 본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공통으로 그 심연 속에 그들을 사로잡은 원형이 있다. 아파트값 올리기 위해 어떤 짓도 불사한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진다. 자기들도 의식에서는 심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무의식에서는 참을 수가 없다. 집단적 님비현상도 다 아파트에서 벌어지지 않나.

― 한국교회의 비상식적이고 충격적인 사건들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겠다.
교회가 너무 커지면 밀도가 높아진다. 어느 국가나 교회나 다 밀도가 있는데 고밀도 속에서는 영도 움직이기가 쉽다. 사랑의교회를 봐라. 교회 자산의 네 배가 넘는 빚으로 교회건물을 짓는다는 데에 97퍼센트의 교인이 찬성했다. 무기명 투표였는데도 말이다. 거기에는 똑똑한 사람도 많았을 텐데, 고밀도의 공간에서 대다수 성도는 목사가 하자는 대로 따라간다. 밀도가 높아질수록 도덕성이 떨어진다. 대도시 범죄율이 높은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밀도가 낮은 시골에서는 서로 도우며 산다. 우리 양심이 살아날 수 있는 밀도(환경)가 있다.

   
▲ ⓒ복음과상황 오지은

― 이레하우스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론과 실제가 어떻게 접목되어 갔는지….
현실적으로 구현 가능하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재현 가능한 공동체를 하고 싶었다. 구성원들의 직장도 다르고 삶의 스타일도 달랐기에 두레공동체나 예수원, 부르더호프 모델처럼 할 수도 없었다. 기존의 삶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공동체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다가 도시의 중도적 모델을 만들자고 생각했다. 극단적인 공동체는 오래갈 수 없다. 규율이 타이트하면 지속될 수 없다. 인간은 시스템적이지 않기에, 시스템이 인간에게 안식을 주지 않는다. 개인의 신앙 상태가 좋을 때는 상관없는데, 나쁠 때는 상처받고 괴로워질 수밖에 없다. 나는 지속가능한 공동체 운동을 꿈꿨다. 이레하우스는 그런 취지에서 만들게 되었다.

― 10여 년 전, 집 짓는 과정부터 시작해 여러 가정이 함께해왔는데, 시행착오가 적지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 처음 해보는 경험이라 집 짓는 과정에서 사기도 당하고 돈도 많이 날렸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건축해가는 과정도 어려웠다. 그리고 같이 산다는 것을 처음 해보기에 ‘거리두기’에 실패하기도 했다. 너무 가까이 밀착했다가 서로 상처도 많이 주고받았다. 미로슬라브 볼프가 말하지 않나. 거리두기가 있어야 그 사이에 타자를 수용할 수 있다고. 그래서 거리를 두다가 너무 헐거워지면 또 방만해지니까 계속 ‘밀당’을 한다. 공동체는 적정 거리와 적정 밀도를 찾아가는 과정을 계속 밟아야 한다. 적정 수준의 갈등도 필요하다. 앞서 말했듯 인간은 시스템적이지 않다. 시스템 바깥에서 오는 불편함에서 에너지가 솟아난다.

― 5년 전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는 함께 교회를 하려다가 다시 흩어진 적 있더라. ‘밀당’의 과정은 계속되고 있을 텐데.
현재 다섯 가정이 이레하우스에서 살고 있다. 4월이면 ‘이레하우스 시즌2’가 완공되어 입주한다. 아홉 가정 예상하고 있다. ‘시즌1’의 이슈가 육아였는데 어느덧 아이들이 자라서 교육 이슈가 중요해졌다. 시즌2의 이슈는 교육과 교회가 되었다. 현재 가정교회로 모이기도 하고, 다른 교회를 다니는 구성원도 있는데 여전히 공동체와 교회 통합이 목표다. 그러나 교회는 강제하거나 강요한다고 되는 게 아니기에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나중엔 생업의 통합도 생각하고 있다. 구성원들이 직장을 그만두게 되는 50대가 되면.(웃음) 50~60대가 일을 가장 많이 일을 해야 할 시기다. 20~30대는 우리가 지원해주고 격려해줘야 할 세대이지, 일 시켜야 할 세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 '공간신학 관점에서 본 공동체 세우기' 커리큘럼

― 공동체와 교회, 따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개념 같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기 불편한 것은 우리가 만든 교회가 아니라 부모세대가 만든 교회라서 그렇다. 이상적 모델로서의 특정한 교회가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가정교회로 1년 모여 보니까 이제는 기존 교회에 가면 답답해서 못 견디겠다. 우리는 시스템화되지 않은 단순한 가정교회다. 예배 인도도 돌아가면서 하고, 해석도 자유롭게 나눈다. 일은 아무것도 안 한다. 그래도 사람들이 집에 안 간다. 자기 속 이야기 나누느라 시간이 모자란다. 최근에 타임테이블 없이 수련회에 다녀왔는데 지금껏 다녀본 수련회 중 가장 좋았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 세대의 공동체이고 교회다. 사람은 자기 이슈와 싸워야 한다. 교회는 그 시대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지고 그 시대 사람들과 함께 성장했다가 사라져야 한다. 특정한 교회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려는 것은 목회자의 야망일 뿐이다.

― 그래서 ‘사라져야 한다’?
난 우리 애들한테도 말한다. “너는 나중에 네 공동체를 네가 만들어라. 아빠 교회에 다닐 생각하지 마라. 너도 친구 있지?” 그 시대 사람들과 만들어지고 그 사람들과 성장했다가 사라져야 하는 게 교회다. 부모가 자녀를 책임질 수 없다. 그러나 부모의 공동체가 자녀의 공동체를 돌봐줄 수는 있다. 이레하우스에서 열 명 넘는 아이들이 같이 자랐다. 어른들이 다 이모 삼촌이다. 공동체는 적어도 내가 옆집 아이를 혼낼 수 있어야 한다. 상도 같이 주고, 벌도 같이 주고. 공동체는 아이를 같이 키우는 것이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혼자서 설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공동체 없이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 심연 속에 사로잡혀 욕망을 이길 수 없다. 서로서로 견제하면서 도우며 살아야 한다.

― 많은 사람들이 이레하우스 같은 공동체를 꿈꾸지만 노하우가 부족해서 시작하지 못한다.
시간만 되면 돌아다니면서 알려주고 싶다. 현실적으로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가 마인드이다. ‘공동체를 왜 이루어야 하는가?’ 치열하게 물어야 한다. 둘째가 자원(resource)이다. 최소한의 자원은 있어야 한다. 셋째가 방법론이다. ‘집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어떻게 공동체를 이룰 것인가?’ 등등. 세 가지를 다 갖추기는 어렵지만, 하나하나 단계별로 맞춰나갈 수 있다. 공동체를 꿈꾸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 최근 IVF 학사회를 통해 ‘공간신학 관점에서 본 공동체 세우기’ 강의를 열었다. 6주 해보니까 턱없이 부족하다. 8주~12주로 봄에 강좌를 한 번 더 진행할 예정이다. 

※ 다음 페이지에 이레하우스 공동체 구성원 박상수 우신혜 부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