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은 모든 인간의 기본적 인권입니다

[306호 커버스토리] 《건강할 권리》 《아픈 몸, 더 아픈 차별》이 말하는 ‘질병’

2016-04-22     이범진 기자·오지은 기자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점점 더 치명적으로 파괴되고 있습니다. 미세먼지, 방사능, 자외선 등이 우리의 건강을 위협합니다. 공기와 땅, 그리고 물은 그 오염도가 기하급수로 높아지는 현실입니다. 노동환경도 퇴행합니다. 과도한 노동시간으로 노동자들이 ‘번아웃’에 처해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낮은 최저임금으로 인해 저임금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있고요. 한편에서는 노동 기회조차 얻을 수 없는 이들의 고통이 더욱 깊어갑니다. 

이러한 삶의 악조건들은 고스란히 우리 몸과 정신에 스며듭니다. 사람들은 병원에서 고된 삶의 결과를 확인하지요. 대형병원부터 동네의원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환자가 차고 넘칩니다. 전에 없던 다양한 병 증상과 만성질환을 겪는 이들로 병원은 그야말로 늘 ‘성황’을 맞고 있고, 제약회사들은 계속 신약 개발에 힘씁니다. 우리는 요즘, 바이러스성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활개 치는 상황도 목격하고 있습니다.

‘나의 질병’에서 ‘사회적 질병’으로
우리들의 건강과 아픔은 곧 사회적인 맥락과 연결되어 발생하고, 또 만성화됩 니다. 이미 우리들 속에 들어온 육체/정신의 ‘아픔’은 척박한 생활환경과 거친 노동환경의 맥락 안에서 발생한 것이지요. 지극히 사적 영역으로만 여겨져 오던 개인의 건강 문제 원인을 공적인 영역으로 확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이를 대변하는 (주로 보건의료 혹은 사회복지 관련) 책은 더디지만,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공공의료기관인 진주의료원 폐업 논란이 뜨거웠던 지난 2013년 출간된 《건강할 권리》는 ‘사회적 권리로서의 건강’을 주장합니다.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이자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소장으로 오랫동안 건강권과 건강정책을 연구해온 저자는, 거의 대다수 사람이 ‘나의 질병’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생각에 전환을 제안합니다. ‘사회적 질병’이라는 거지요. 

“질병이라는 최종적인 결과는 생물학적 현상이지만 이것이 사회적 맥락 속에 있다고 본다. 사회구조가 질병과 사망, 안녕에 영향을 미치는데, 그 작용은 물질적 요인, 사회 환경, 노동환경이라는 세 가지 경로를 통한다.” (29쪽)

그러니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이런 모든 요인이 유기적으로 개선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결핵균을 없애는 의술’에서 더 나아가 국가 차원의 ‘건강 정책’이 함께 확대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다음은 스웨덴의 국가보건위원회가 제안했던 ‘건강 정책 목표’(2000년)의 일부입니다. 

•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를 0.25 미만으로 낮춤.
• 빈곤율을 4% 미만으로 낮춤(유럽연합 기준).
• 1998년 당시 총선에서 투표율이 60%에 미치지 못했던 지역의 투표율을 5% 이상 올리기.
• 고용률을 85% 이상으로 증가시키고, 장기 실업률은 0.5%로 낮춤.
• 취약한 지역에서 자라는 어린이의 비율을 10% 미만으로 줄임.
• 모든 학생이 중등 교육과정을 마칠 수 있게 함.

저자는 현실화되지 못했던 이 정책에 대해 주목해야 할 점으로 “건강 정책을 바라보는 눈”과 “참여와 사회적 토론을 거쳐 국가 목표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즉 한국에서 사적인 문제로 치부되는 건강 문제가 공공적으로 다루어지려면 정치가, 민주주의가 건강해져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시민들의 정책 참여가 활발해져야 한다는 말이지요. 민주주의가 잘 이루어지는 것이 곧 우리들의 ‘건강에도 이롭다’는 것입니다. 

시민 중심의 건강 공약이 나오고, 투표로 건강 정책이 바뀌어서 건강의 권리를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누리도록 제도가 갖춰질 수 있습니다. 일찍이 ‘사회의학 아버지’ ‘의학계의 교황’이라 불렸던 독일의 병리학자 루돌프 피르호도 발진티푸스 유행을 막기 위해서 소득재분배와 토지개혁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아픔’(질병) 문제의 근본은 사회라는 맥락에 닿아 있고, 그 근원적 처방은 정치에 있다고 본 것이지요.

   
▲ 《아픈 몸, 더 아픈 차별》 김민아 지음, 뜨인돌 펴냄

국가의 무책임 앞에 ‘방치’되는 아픈 몸
국가는 국민의 건강을 보호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개인은 ‘나의 질병’으로만 생각합니다. ‘아픔’은 개인의 몸에서 발생하고, 누가 대신 아파줄 수 없다는 속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픈 몸, 더 아픈 차별》의 저자는 “손상된 몸, 질병에 걸린 몸, 늙어 가는 몸은 시기만 다를 뿐 몸 하나가 통과해야 할 자연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의 길을 걷는 모든 국민은 의료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저자는 불편한 몸 때문에 오해와 차별을 받는 이들의 아픔을 책에 자세히 담았습니다. 그중 재생불량성빈혈에 걸린 20대 여성의 절규입니다.

“부모님은 버겁다는 내색은 안 하시지만 저 혼자서는 생각이 많아졌죠. 처음 진단받았을 땐 지금 죽으면 의료비도 안 들고 가족한테도 짐을 안 지울 텐데 하는 생각도 했어요. 살아남는다는 게 환자에게는 버거워요. 이렇게 사는 게 더 안 좋을 수도 있으니까. 살고 죽는 건 내 뜻이 아니라는 생각에 희망을 갖고 힘내 보려 하지만, 기대가 배신당해 절망할까 봐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어요. 좋든 나쁘든 오는 대로 받아들여야겠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치료해야지 싶다가도 ‘이런 마음가짐이 정말 중요해? 갑자기 화가 나요. 이렇게 죽게 방치하는 사회에 대해 막 분노가 치솟기도 하고요.” (194~195쪽)

‘방치’라는 단어가 탁 걸립니다. 이 사회, 더 구체적으로 정부는 왜 이런 약자들을 방치하는 걸까요? 물론 국가 차원에서 병원비 감면 제도를 마련하고 있지만,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저소득층에게는 제출해야 할 서류가 너무 많습니다. 위의 여성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정부가 나빠요. 세금 ‘뜯어갈 때’는 간편하게 고지서 한 장 날리면서 뭘 줄 때는 어마어마하게 까다롭게 굴죠.”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취약계층의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되는 현실입니다. 건강검진 기회가 적은 사람이 대다수이며, 질병을 조기 발견하더라도 치료받을 가능성이 적은 이들입니다. 민간보험으로부터 거부당한 사람이 태반이고요. 대안은 모든 사람이 경제 수준에 상관없이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체계, 즉 보편적 의료보장제도의 수준을 높이는 것입니다. 최근 1년(2014~2015), 돈이 없어 병원을 찾지 못한 비수급 빈곤층이 무려 36.8%에 달합니다. 아픈 몸을 치료받을 수 있는 권리는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부여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권’이라고 합니다. 

능력의 부족인가? 의지의 결여인가?
지난 3월, 미국과 쿠바가 88년 만에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쿠바의 인권 문제가 거론되면서 냉랭한 기운이 연출되었다고 현지 언론이 전했는데요. 오바마 대통령이 “무역과 은행 거래 정상화 등의 성과는 인권 상황이 얼마나 좋아질 것인지에 달렸다”고 말한 게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응답한 쿠바의 라울 카스트로 의장의 발언에 뼈가 있었습니다. “인권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 지구 상의 어떤 나라도 교육, 의료권리 등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61개 인권을 모두 충족시키지 못한다.” ‘의료권리’가 바닥을 헤매고 있는 미국의 공공의료 수준을 꼬집은 겁니다. 쿠바의 높은 의료 수준과 무상의료 제도는 이미 유명하지요.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일은 국가의 가치관과 의지에 달린 문제입니다.

부유한 국가든 상대적으로 빈곤한 국가든 늘 재(자)원 부족을 들지만 국가가 이행하지 못하는 것과 이행하지 않는 것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의무를 이행할 능력의 부족(inability)과 이행하려는 의지의 결여(unwillingness)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경우에 따라서는 재원의 잘못된 배치를 바로잡는 정치적인 결단까지를 감행해야 합니다.(230쪽)

우리나라는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의지의 결여’가 확실합니다. 상징적인 예로, 경상남도(도지사 홍준표)는 2013년 공공의료기관인 진주의료원의 문을 닫았습니다. ‘적자’라는 이유였습니다. 소외계층 환자 백여 명이 강제 퇴원을 종용당했습니다. 명백한 인권 침해였습니다. “공공의료를 확장하겠다”는 정치인들의 공언(公言)은 모두 공언(空言)이었습니다. 

지난해 메르스 사태 직후에는 공공의료의 확충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공립병원의 턱없이 적은 격리 병실이 메르스를 확산시킨 것이라 인식한 거지요. 몇몇 가난한 사람들만 이용하는 곳인 줄 알았던 공공의료기관이 우리의 안녕과 기본권을 지키는 데에 필수임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 "건강이 인권으로 여겨지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_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 (사진: US Mission in Geneva)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은 “건강이 더 이상 갈구하기만 하는 축복이 아니라 싸워서 얻는 인권으로 여겨지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헌장 서문에는 ‘모든 사람이 도달 가능한 최고 수준의 건강을 향유하는 것은 인종이나 종교 혹은 정치적 신념과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여건과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권 중의 하나’라고 명토 박았습니다.

그러나 눈앞 이윤에 눈이 멀어,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는 나라도 적지 않습니다. 2014년 OECD 국민의료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공공병상 비율은 12.8%로 최하위입니다. 영리병원이 허용된 다른 18개국의 공공병상 비율 평균이 77%인 것을 감안하면, 우리는 그야말로 공공의료후진국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공공의료를 더욱 포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합니다. 지난 3월 10일 정부가 발표한 제1차 공공보건의료 기본계획(2016~2020)은 의료영리화를 활성화하고 공공의료를 축소하는 계획들이 난무합니다. 

이를테면 분만취약지 해결, 응급의료기관 확충을 거의 전적으로 민간의료기관에 위탁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진주의료원처럼, 다른 공공의료기관도 얼마든지 폐원될 수 있는 명분이 생겼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역사상 최초로 지방의료원 폐원을 승인한 정부입니다.) 반면, 병원호텔허용, 원격의료 추진, 신의료기술평가 간소화 등 의료민영화 관련 정책은 적극적으로 추진합니다. 성남시의 ‘시민병원’과 무상공공산후조리원 등에는 사사건건 딴죽을 걸면서 말입니다.

사회의 타락을 고발하는 은유, 질병
희생자들이 더 늘어나기 전에 국민의 건강권을 지키고, 의료산업화를 견제해야 할 나라를 만들어야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는 사회가 되어야겠지요. 늙고, 병들고, 죽는 ‘자연의 길’에서 타인의 아픔을 헤아리며 살아야겠지요. 저자는 책 끝에 수전 손택의 글을 인용, 질병을 보는 우리의 시선 개조를 요청합니다.

질병은 늘 
사회가 타락했다거나 부당하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고발해 주는 은유로 사용되어 왔다.
-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