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

[307호 메멘토0416]

2016-05-23     유성오 전 고등학교 윤리 교사
   
▲ ⓒ복음과상황

윤리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보낸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마음에 떠오르는 많은 질문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왜 의롭게 살아야 하지?’였다. 특히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부패와 거짓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드러날 때면, 학생들 앞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나 자신이 과연 제대로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회의가 들기도 했다.

삶의 행복을 위해서 많은 아이들이 목표로 삼는 사회적 위치에 도달한 어른들이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삶의 가치관이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의 가르침과 다른 상황에서, 과연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혹시나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저 선생이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래.’ 혹은, ‘저 양반도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구먼.’

수학여행이라는 것을 숱하게 가보았다. 버스를 타기도 했고, 배를 타기도 했고, 비행기를 타기도 했다. 학생들이 다니는 수학여행지는 대개 동일하다. 그러니 수학 여행길에 벌어진 사고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기울어지는 배 안에서 승객들에게는, 제자리에서 기다리라고 말해 놓고 자신과 동료들은 탈출 준비를 했다는 선장과 선원들의 기사를 읽는 순간, 벼락을 맞은 듯 가슴이 저려 왔다.

‘거봐, 우리 생각이 맞았지?’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윤을 좇는 세상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 군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하고, 그래야 사람답게 사는 것이고, 그런 삶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군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달 일이 없다. 그러나 ‘더 많은 이윤’이 삶의 목표인 사람에게는 ‘군자’라는 개념 자체가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군자가 되면 도대체 뭐가 생기는데? 그래서 이윤이 얼마나 늘어나는데?

이윤을 위해서 이명박 정부는 선박 규제를 완화해주었고, 이윤을 위해 청진해운은 일본에서 사용하던 낡은 배를 구입했다. 이윤을 위해서 회사는 낡은 배에 위험한 증축을 했고, 이윤을 위해 운항 중에도 늘 화물의 과적을 일삼았다. 이를 관리해야 할 정부는 ‘알아서 잘하라’며 믿고 맡겼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꼴이다. 정부가 직접 꼼꼼하게 관리하기에는 예산이 부족했던 탓일까.

정부는 예산을 줄이기 위해서(이윤을 위해서) 생명을 구하는 구조 업무를 이윤을 목표로 하는 민간 업체에 넘기도록 법을 개정했다. 구조 작업을 위해서 필요한 안전 장비를 보유하고 있으면 비용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구조를 위한 장비와 구조를 위한 훈련 예산 등을 줄여나갔다. 어쩌다 한번 발생하는 사고를 대비하느라 매년 정부 예산을 많이(?) 쓰는 것은 낭비라는 사고방식이다. 

예산이 줄어드니 구조를 위한 훈련이나 준비도 충분하지 못했을 것이다. 생명이 죽고 사는 위기 상황에서 혹시라도 나중에 책임질 일이 두려워 해경은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뭘 어찌해야 할지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도 청와대에 보고하느라 바빴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한 자료 사진을 보내라고 요구하느라 도리어 현장에서의 인명 구조에 걸림돌 역할을 하고 말았다.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는 뭔가 행정적인 업적(?)을 확보해서 윗사람에게 올리는 게 훨씬 더 중요한 이익이라 여겼기 때문일까.

점점 기울어가는 세월호 안에서 그 많은 아이들과 선생들과 승객들과 직원들이 왜 죽어갔는지, 살릴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왜 안 살렸는지… 세월호의 아픔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사람들의 가슴에서 여전히 요동치고 있는 해결되지 않은 물음이다.

‘그 무엇보다도 생명의 안전이 최우선적 가치고, 이윤 확보는 그다음이어야 한다.’

당연한 것으로 배우고 가르쳤던 윤리적 가치 기준이 부정당하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고 배웠던 것일까.

이미 오래 사용해서 기능이 다해가는 낡은 배를 들여다 개조해서 승선인원을 늘리고, 그렇게 개조한 배에 화물을 더 실으려는 목적으로 배의 평형수를 줄여 위험도를 높이고, 배가 침몰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한 채 정해진 기준치를 넘게 화물을 과적하고, 배의 안전운항을 책임져야 할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들에게는 기다리라고 한 채 자기들만 탈출을 시도하고, 해경은 가라앉는 배 안의 아이들을 바라보기만 하고….

이 모든 일들을 꿰뚫고 있는 가치는 바로 이(利)에 대한 탐심이다.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사람의 생명과 안전은 뒷전으로 미루어 버린 것이다. 생명과 안전보다는 돈과 이익에 더 우선순위를 두고 행동하였기에 벌어진 결과이다.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세월호를 보는 또 다른 입장도 있다. 그런 사고는 나의 일이 아닐 거라는 막연한 안심, 그저 재수 없는 남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는 안일한 믿음, 그런 까닭에 세월호의 아픔을 2년 넘게 아니 앞으로도 계속 되새기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피곤하게 느낀다. 아직 그 아픔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그 아픔에 공감하는 일이 마음으로 와 닿지 않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눅 7:32)

우리 자신이 그런 불행에서 예외 받은 인생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실감 나게 깨닫지 못하는 한, 함께 아파하며 진실을 밝히기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일을 공감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마음 깊이 공감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도 그 얘기냐, 이젠 지겹다’라는 마음이 떠오르는 것은 아닐까. 서로 소통하고 공감한다는 것은, 같은 처지에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질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생명보다 돈을, 안전보다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회 풍조가 당연시 묵인되는 분위기라면, 그 사회에서 살고 있는 나는 어느 순간에 그 풍조의 희생양이 될지 모른다. 사실은 늘 희생양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병에 점점 감염되어가면서. 아직 그런 풍조로 인해 나타나는 증상(사고)이 내게 심각한 손상을 주지 않을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병이 누적되다가 터지게 되는 순간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태에 자신이 처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이나 세월호의 아픔처럼 말이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 돈과 이익은 썩을 양식이다. 썩을 양식을 위해 사는 삶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삶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썩을 양식을 위해 사는 삶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영원한 양식을 위하여 사는 삶, 그 삶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임을 분명히 세상 앞에 말하기 위해서 세월호의 기억을 결코 놓을 수가 없다.

비록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 원하지 않았던 사고가 발생하였지만, 그 사고의 아픔을 잊지 않고 계속 기억함을 통해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삶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이후에라도 돈과 이익을 위해 생명과 안전을 버리는 삶을 선택하지 않도록, 그런 선택으로 인해 또다시 황당한 아픔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적당히 하고 이젠 좀 잊고 살지. 사고로 죽는 사람이 한둘이냐?’ 그렇다. 누구나 다 죽는다. 문제는 어떻게 죽느냐이다.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하고 무슨 가치를 마음에 품고 추구하다가 죽어 가느냐이다. 세월호를 잊지 않고 말한다는 것은, 썩을 양식을 위해 행동한 삶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행동한 삶을 분별한다는 것이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애쓰던 삶과 이윤을 위해서 생명을 외면한 삶에 대해서 분명하게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다.

삶의 순간은 늘 가치 기준의 선택이다. 어떤 가치 기준에 따라 행동할 것인지를 결정하며 살아간다.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우리 자신에게 있다. 그래서 우리가 추구하며 살아야 할 삶이 어떤 삶인지를 입으로 소리 내어 세상 앞에 고백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 삶이 어떤 선택을 할 순간에 이르렀을 때, 우리 입으로 되새기고 되새기던 고백에 순종하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유성오
철학과 상담교육을 전공했으며, 27년간 고등학교 윤리 교사로 재직했다. 저서로는 《변해야 변한다》 《아이의 공부 심리를 이해하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