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거울
[307호 스무 살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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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성애혐오(homophobia) 반대 시위에 나선 시위자들 (사진: Kenji-Baptiste OIKAWA/위키피디아). |
“한국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고등학교 1학년 겨울, 저는 미국 LA에 있는 대안학교를 잠깐 다녔습니다. 넓은 세상과 많은 경험을 누렸던, 무척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는 LA 특유의 복합적인 문화를 짧은 시간 동안 한껏 느꼈지요. 주로 학교에서 사귄 두 친구와 시내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는데, 한 명은 이탈리아계 백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흑인이었습니다. 이 친구들과 쌓은 추억거리들은 끝도 없지만, 무엇보다도 처음 만났을 때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은 지금까지도 제게 묘한 충격으로 남아있습니다.
두 친구는 멀리서 온 교환학생을 반겨주었고, 우리는 한국에 대해 묻고 답하며 즐겁게 놀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국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그때 느꼈던 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정한 적도 의도한 적도 없는, 제겐 너무 자연스러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누군가의 ‘생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그 질문. 그 질문을 듣고 느꼈던 감정은 5년이 지난 지금도 형용할 수 없습니다.
눈먼 자들의 토론
동성애, 넓게는 성소수자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꼭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동성애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저는 LA의 야자수 아래에서 두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릅니다. 누군가의 정체성이, 누군가의 의견이 되는 순간. 저는 말합니다. “이 자리에 동성애자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런 질문은 실례예요.” 대답을 들은 이는 높은 확률로 이렇게 말합니다. “동성애자가 그렇게 많지 않잖아요. 여기에는 없을 거예요.” 그러나 이어지는 제 말을 듣고 그는 말을 줄입니다. “제가 동성애자일 수 있잖아요?”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많은 나라일수록 거리에 장애인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혐오는 그 힘이 강할수록 그 대상을 지워버립니다. 지금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가, 나아가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 중 누구도 동성애자일 수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 강력한 혐오. 여기에 노출된 소수자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알리는 것으로 혐오와 싸워야 합니다. 존재가 부정당하는 이들이 직면한 첫 번째 과제는 ‘보여지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성소수자들(LGBTQA)에 대해서, ‘논쟁’합니다. 그들의 삶과 일상, 사고와 욕망, 그리고 종교와 정치까지. 대한민국 곳곳에서 그들에 대해 갖은 방법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소수자에 대한 ‘의견’을 밝히는 이들 중 대다수는 그들이 목청 높여 ‘논하는’ 대상과 같은 색의 색안경을 끼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요. 그들은 성소수자를 볼 수 없습니다. (빨간 색안경을 끼면 빨간 색이 보이지 않듯이) 성소수자들에 대해 자기 ‘의견’을 열심히 논하는 사람일수록, 그들을 볼 수 없는 눈먼 사람이라는 역설.
편안한 낯가림
철저히 감추어진 소수자들은 존재하지 않고 ‘표시’됩니다. 표시는 그들의 구체적인 인간성을 닦아내고 성적 지향성만을 돋보이게 합니다. ‘게이 같다’는 말은 좋은 뜻으로 쓰이지 않고, 오직 열등성의 함의만을 전달하지요. 게이는 보이지 않지만 게이 같다는 말은 선명한, 이 모순된 긴장의 맥락에서 성소수자들은 존재하면서 부재합니다. 말하는 주체로서는 지워지는 반면, 대상으로서는 표시되는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던가요. 억압의 주체들은 성소수자들을 집으로 몰아넣고 문을 잠근 것입니다.
그렇게 가두어진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견고한 감옥의 창살을 뚫고 나오지 못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서 ‘토론’했습니다. 어쩌면 그 ‘토론자’들은 몰랐을 것입니다. ‘토론’할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토론할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있다는 것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들의 특권이라는 것을요. 누군가는 이렇게 외칠지도 모르겠습니다. 토론의 자유가 있지 않느냐? 이런저런 주제들에 대해서 내 의견을 밝히는 것을 억압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그러나 그렇게 묻는 당신은, 어쩌면 남성일지도 모르는 당신은 ‘일하는 여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는 익숙하지만 ‘일하는 남자’에는 지극한 자연스러움을 느낄지도 몰라요. 성실하게 교회에 다닌다면 ‘이슬람교를 허용해도 괜찮나’는 낯설지 않지만 여기에 기독교를 대입해서 생각해본 적은 없을지도 모르고요. 혐오는 자아와 만날 때마다 낯을 심하게 가립니다. 그 편안한 낯가림 속에서 우리는 표시하기 시작하지요. ‘여’선생, ‘여류’ 작가 등의 고전적인 방법을 넘어서 기사를 가장한 찌라시들의 제목에 꼭 ‘◯◯녀’가 들어가듯 말입니다.
얼굴은 이름에 선행한다
다른 존재에 대한 윤리학을 연구한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인은 우리에게 얼굴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내 눈앞에 얼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표시의 제거를 전제합니다. 얼굴은 사물과 다릅니다. 사물은 전체의 부분이나 기능으로 의미가 있지만 얼굴은 이렇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얼굴은 코와 입, 눈으로 이루어지지만, 이는 판자와 서랍, 책상 다리가 모여 책상이 이루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책상과 달리 얼굴은 바라보고 호소하며 스스로 표현합니다. 얼굴과의 만남은 사물과는 전혀 다른 차원을 열어줍니다.
얼굴과의 만남은 절대적 경험이고, 레비나스는 얼굴이 스스로를 내보이는 방식을 ‘계시’라고 부릅니다. 온갖 복잡한 논의와 학술적인 연구를 초월해 얼굴은 고유한 의미를 내비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종교적인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러한 얼굴철학에 대해서 고민하다보면 성소수자를 표시하고 보는 이들, 다시 말해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의 이야기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나본 적이 없어요. 언론과 미디어에서 더 비틀 수 없을 만큼 왜곡된 그들의 모습은 철석같이 믿으면서 주변에는 성소수자가 없을 거라 믿어서일까요. 정작 성소수자들과 인연을 맺어본 적도, 이야기해본 적도, 심지어 ‘얼굴’을 본 적도 없습니다. ‘동성애자들은 문란하다’는 근거 없는 낭설에는 착실하게 신뢰를 베풀면서, 그들과 진지한 대화 한 번 나눠본 적이 없는 그 널찍한 괴리. 책을 안 읽고 서평을 쓰고, 영화를 안 보고 영화평을 쓰는 것 이상으로 어색하지 않나요? 얼굴을 맞댄 적이 없다는 것, 그들이 소수자로서 겪는 구체적인 고통이 새겨진 얼굴을 만난 적이 없다는 것. 그러나 그들의 분명한 인간성 앞에 ‘성소수자’라는 이름을 붙여 오직 그 이름만을 마주하는 그 처절한 혐오의 기제. 얼굴은 이름에 선행합니다.
북극곰과 진흙, 그리고 옹호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방긋방긋 웃음이 터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지만,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들 중 적잖은 분들이 이 질문을 제게 던지려고 할 것 같습니다. “너 동성애자 아냐?”라고 말이지요. 수상하다는 거지요. 성소수자 담론을 꺼내는 사람에게 꼬리표처럼 달라붙는 질문입니다. 동성애자가 아닌데 왜 동성애자들을 ‘옹호’하느냐는 것이 그 질문의 골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참으로 기묘합니다.
우선, 제가 그들을 ‘옹호’하고 말 권리가 어디 있나요? 누군가의 정체성에 대해서 ‘옹호’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거만한 행위입니다. 누군가 제게 다가와 “저는 한국인이 아닙니다만, 당신이 한국인임을 인정해드립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제게 폭력으로 다가올 겁니다.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과정에서, 개인은 필연적으로 주체가 될 권리가 있습니다. 어떤 이도 다른 이의 정체성에 대해 옹호할 권리가 없습니다. 저는 성소수자들을 ‘옹호’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동성애자만이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위해 말하리라는 놀라운 생각입니다. 당사자가 아니어도 해당 권리의 필요와 보편성은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북극곰이 아니어도 북극의 눈물을 보며 환경 위기에 대해 자각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번 6월 11일에 17회를 맞는 퀴어문화축제에 간다고 퀴어인 것은 아닙니다. 머드 축제에 간다고 해서 진흙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혐오의 거울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성적 지향성이 궁금하신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이성애자라고 하더라도 동성애자라고 하더라도, 그 외 어떤 성적 지향성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밝혀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 글, 강한 혐오의 발현 끝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지워진 성소수자들의 온갖 표시들로 범벅이 된 얼굴을 보자는 제 글과 제 성적 지향성은 철저하게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글을 읽으면서 저자의 성적 지향성을 궁금해 하는 그 태도가 바로 혐오라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깊게 뿌리내린 혐오를 다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겠지요. 튼튼한 위계를 갖는 권력화된 구조 속에서, 우리는 혐오하고 혐오받는 것에 익숙하니까요. 얽히고설킨 내 안의 혐오를 들여다보는 것이 여간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다른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아요. 이름을 붙이기 바빠 눈 한번 마주치지 못한 곳곳의 사람들과 눈을 마주해보아요. 온갖 표시들을 제하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들여다보아요. 너무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던 혐오의 표시와 이름들이 툭, 하고 떨어질지도 모르니까요.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세상을 꿈꾸기에는 제가 너무 어린 걸까요? 여러분에게 ‘그렇지 않다’라는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김희림
장차 전문성과 대중성, 다양성을 겸비한 인문학자를 꿈꾸는 스무살 인문학도. 머리 아픈 철학책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시끄러운 베이스 기타 연주를 즐기며, 비폭력·반전·반핵을 지지하면서 삼류 무협영화 ‘덕후’를 자처한다. 아버지인 김기현 목사와 함께 ‘로고스서원’을 꾸려나간다. 경희대 철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