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 나타난 우주와 세상 창조에 대한 이해1
[308호 거꾸로 읽는 성경]
구약 성경은 여전히 유대교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정경이다. 오랜 세월동안 이 책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킨 책이었고, 사람의 글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고백되어온 책이다. 마치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되 사람이 되신 것처럼, 성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전적으로 사람의 글이다.
이러한 성경의 특징은 필연적으로 성경의 진술을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할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구약 성경이 말하는 이방 민족을 진멸하라는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외국인 가운데 종을 취하라거나 모든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 그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는 명령은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사람들마다 달리 말할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깨닫기 어려운 책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고 토론하고 고민하며 해석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준다. 우주 창조를 둘러싼 성경의 진술 역시 그러한 수많은 문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1. 신학적·신앙적 문헌으로서의 구약 성경
1) 하나님의 영감으로서의 성경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ESV “breathed out by God”; NRSV “inspired by God”)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디카이오쉬네”)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여기서 “성경”이 가리키는 것은 당시 초대 교회가 읽던 헬라어 구약 성경인 칠십인경(LXX)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점은 이 책을 읽을 때에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정의로운 삶으로의 훈련에 유익하다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점점 온전하게 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된다. 예수를 오래 믿었음에도 여전히 인간의 전적 타락과 무능함을 이야기하며 세상에 존재하는 죄악을 당연하게 여겨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으면서 온전한 삶으로,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는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영감성은 글자나 단어의 무오류성과 아무런 연관이 없고, 실천적인 삶으로의 변화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그렇기에 신약 기자들은 구약을 인용함에 있어 자구적인 인용에 거의 매이지 않은 채 자유롭게 첨가(가령, 히 10:17과 렘 31:34), 삭제(가령, 사 40:3과 막 1:3), 변경(가령, 행 4:25-26과 시 2:1~2)하거나 부정확하게(가령, 막 1:2~3과 사 40:3, 말 3:1) 인용한다.
2) 하나님을 아는 것
그런 점에서 성경은 근본적으로 신앙적 목적으로 쓰여진 글이다. 성경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자신들을 부르심을 알고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영광의 삶을 살아가도록 초대하고 격려하는 데 있다. 그래서 구약에 기록된 말씀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백성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명확하게 전달한다. 다음과 같은 구절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표현한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헤세드”)과 정의(“미슈파트”)와 공의(“쩨다카”)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하고 아는 일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는 사랑, 정의, 공의를 우리가 살아가고 당신이 지으신 이 땅에 행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을 알고 그분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우리가 구약을 비롯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구약 속에 드러나는 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공의의 행하심을 깨닫고 이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성경 읽기의 모든 초점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깨닫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고 이해하게 될 때, 이 깨달음은 그 읽는 자를 바로잡으며 의(“디카이오쉬네”=“쩨다카”) 안에 자라가게 하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게 한다.
3) 성경의 배경으로서의 역사
성경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진리를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한다. 이러한 성경의 진리는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의 상황과 맥락을 통하여 전달되었다. 그 점에서 성경은 ‘역사적’이다. 이 표현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 역사적으로 틀림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흔히 열왕기나 역대기를 ‘역사서’라고 분류하지만, 이 책들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역사를 전달하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 책들은 특정한 신학적 목적을 위해 쓰여졌으며, 그 목적을 위해 당시의 기록자들이 구한 자료들을 해석하고 취사선택하여 배열하였다. 이 책들이 역사를 다루지만 이 책들에 근거해서 이스라엘 왕들의 연대를 정확히 확립할 수는 없다. 이것은 역사학의 문제가 아니라 근거가 되는 성경 본문 자체가 서로 충돌되는 연대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포기하고 버리지 않는 한 해결되기 어려운, 성경 자체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그래서 구약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역사 진술을 가리켜 ‘신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학적’이라는 것은 그러한 역사 진술을 통해 하나님과 그 백성에 대해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그로 인해 어떤 이들(트램퍼 롱맨, 이안 프로반 등)은 구약 문헌을 가리켜 ‘신학적 역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편이나 욥기 같은 문헌의 경우, 그러한 ‘신학적 역사’조차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글들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이들이 대부분 곤경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구하고 찾으며 부르짖은 글들인지라, 그 안에서 어떤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진술을 찾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시문이 아닌 산문체 글들 역시 근본적으로는 신학과 신앙을 전달하기 위해 쓰인 책인지라, 그 내용에서 실제의 역사를 찾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본문은 역사를 전달하고 싶어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역사라는 매개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을 읽을 때 그 배경이 되는 역사나 과학과 연관되어 보이는 진술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구약에 대한 부당한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배경에서 어떤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그것이 구약 본문을 오늘까지 의미 있게 존재하게 만드는 요인은 아니다다. 역사라는 배경은 구약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통로이며 수단이다.
2. 본문의 신성화와 문자적 읽기
그러나 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고백하고 있는 구절을 오해하면서, 어느 결에 교회는 구약에 진술된 모든 진술들이 과학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타당하거나 근거가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에 쓰여진 글자에 대한 이러한 신성화는 해당 본문의 문학적인 장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무차별적으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성경 본문을 극단적으로 신성시하게 되면, 사실 본문이 법전의 형태이든 이야기의 형태 혹은 시문으로 쓰여졌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레위기와 창세기 같은 책에 쓰인 진술이나 시편에 쓰인 진술이나 그저 절대 불변의 타당한 하나님의 말씀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쓰여진 본문의 표면적인 문자적 의미에 집착하여 동의하기 어려운 여러 견해들이 형성되는 경우들이 허다했다. 이상의 논의를 생각하면, 구약 성경을 읽을 때에 어떤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근거들을 발견하려고 하거나 과학적인 사실에 대한 증거들을 발견하려는 시도들은 대부분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한다.
1) 문맥과 장르에 대한 고려로 충분한가?
이런 경우 우리는 흔히 문맥에 따라 본문을 읽어야 한다는 점을 제시하지만 그것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령, 창세기 1장에서는 여러 번 “각기 종류대로”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인류로 하여금 땅을 가득 채우라고 명령하셨고(창 1:28; 9:1),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창 9:19)든지, 노아의 후손들은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흩어져 머물렀다(창 10:5)는 언급들은 온 땅에 흩어져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정적인 것은 한 곳에 모이려는 이들을 흩어 버리신 바벨탑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창 11:1~9).
그러므로 창세기 본문들을 그 강조되고 반복된 표현을 따라 읽는다면 인종간의 분리와 따로 떨어져 살아가는 것을 강조하는 본문으로 읽을 여지가 있게 된다. 분명 하나님은 종류대로 창조하셨고, 서로 다르게 지으셨다. 그런데 창세기 본문이 말하는 바를 문자적으로 충실히 따르다 보면, 인종대로 언어대로 흩어져 살아야지 함께 모이면 안 된다고 여길 수 있다. 그리고 창세기 전반부의 문맥을 고려하더라도 ‘흩어짐’을 핵심적인 주제라고 여길 수 있다.
여기서 이 본문은 일체의 섞임과 함께 모여 살아감에 대한 반대이론으로 활용되면서 인종 차별과 격리의 근거로 사용될 여지가 생긴다. 대표적인 경우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였다. 이 정책은 모든 사람을 인종등급으로 나누어 백인, 흑인, 유색인, 인도인 등으로 분류하였다. 인종별로 거주지 분리, 통혼 금지, 출입구역 분리 등을 통해, ‘차별이 아니라 분리에 의한 발전’을 지향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백인들의 지배, 흑인과 기타 인종에 대한 차별이 핵심이었음을 온 인류가 목격하였다. 문제는 성경 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강조하는 이해와 이러한 해석이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며, 남아공의 뿌리를 이루는 화란 개혁주의 신학 역시 원칙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문자적 읽기가 해로운 경우가 많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문맥에 대한 고려 역시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고 적용하는 데 큰 도움이 못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 다른 경우도 있다. 가령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시 19:5~6)라는 구절은 명백히 ‘천동설’을 알려 준다. 그래서 중세까지의 교회는 천동설을 하나님의 진리라고 여겼다. 지동설이 제기되었을 때 이를 심판한 이는 다름 아닌 교회였다. 지동설에 대한 반대를 위해 성경 구절들이 인용되는 것은 그 당시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루터 역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 대해 확고하게 성경을 내세우며 반대하기를, 여호수아가 멈추라고 명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중세 교회는 시편의 성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성경의 문자를 그대로 받아서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본 구절의 앞 뒤 문맥을 고려한다 해도 여전히 동일한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을 것이다. 문맥에 대한 고려로도 잘못된 결론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시편의 장르가 ‘시’라는 점을 고려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시를 ‘다큐’로 읽을 때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보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고려해야 할 것은, 아마도 이 싯구를 쓴 시편 기자는 육안으로 관측된 대로 실제로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2) 이데올로기 비평
그러므로 장르나 문맥에 대한 고려가 수천 년 전에 쓰여진 구약을 잘못 읽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야곱이 레아와 라헬 모두를 취했음에도 오늘 우리네 교회 어디에서도 야곱의 결혼을 우리가 따라야 하는 규범으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가볍게 넘어설 수 있는 근거는 문맥이나 장르에 대한 고려가 아니다. 그것은 그러한 결혼을 고대적인 관습이라고 판단하고 평가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또한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을 읽고 나서 IS 같은 무지비하고 말도 안 되는 폭력 집단이 아닌 이상 기독교인이 전쟁에서 다른 종교를 가진 민족을 완전히 짓밟아야 한다고 적용하지 않을 것이다. 여호수아에게 여러 번 반복된 ‘진멸’ 명령을 규범적인 본문이라 여길 법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라는 사고에 기반해서 구약 본문을 판단한다는 점에서, 특정한 사고방식에 기반하여 무엇인가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는 의미로 이를 ‘이데올로기 비평’이라 부를 만도 하다.
사실, 창세기 10~11장에서 강조되는 ‘흩어짐’을 인종 분리 정책에 적용하는 것이 부당함을 판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 ‘이데올로기 비평’이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며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다는 이 기본적인 생각이야말로 구약과 신약의 모든 가르침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기준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을 좀 더 생각해보자.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어느 계명이 큰지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가지를 가리켜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하셨다(마 22:37~40). 그런데 예수께서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을 가리켜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이르시기도 하셨는데(마 7:12), 바울이 온 율법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하는 것(롬 13:8~10; 갈 5:14)과도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로 대표되는 구약의 핵심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며, 달리 표현하면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구약에 나타난 여러 본문을 평가하고 이해하는 기준이요 규범으로 삼는 것은 충분히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3. 창세기와 우주 창조
이제 집중적으로 살펴보려는 것은 ‘우주 창조’에 대해 창세기와 구약의 견해를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나이를 합산해서 아담이 대략 6천 년 전에 창조되었다는 견해가 17세기에 생겨난 이래, 20세기 과학의 시대에 이르러 좀 더 세련되게 이론화되어 이른바 ‘창조과학’ 운동으로 미국 근본주의 계열에서 새롭게 부각되었다. 하나님 말씀으로서 성경에 대한 강력한 확신과 열정, 역사 비평을 반대하며 주장된 성경의 영감과 문자적 이해에 대한 강조 같은 경향이 어느 정도의 과학적 지식과 결합하면서, ‘창조과학’은 꽤 큰 파급력을 가지고 확산되었다.
이 가운데 성경에 대한 열정과 확신은 아무 비판할 것이 없되, 역사 비평에 대한 오해와 그 반대급부로서 문자적 이해에 대한 집착은 성서학계에서 거의 동의를 끌어내기 어려웠다. 그리고 전문적이지 못한 과학 지식은 과학자 집단에서도 거의 지지를 얻어낼 수 없었다. 그 점에서 사실상 ‘창조과학’ 운동은 신학과 과학 두 분야 모두에서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물론, 특히 한국에서는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기독교인은 명백히 고백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지 창조에 믿음은, 창세기의 진술이 지구와 인간이 어떻게 발생하고 변화되고 만들어졌는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한다고 믿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이 글이 문제 제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아니라 창세기를 지구와 인간의 유래에 대한 과학적 진술로 이해하는 ‘창조과학’이다.
1) 《창조 기사 논쟁》에 나타난 창세기 이해
《창조 기사 논쟁》(새물결플러스)은 창세기 1~2장을 어떻게 이해할지 다섯 명의 구약학자들이 각각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하고, 그 견해에 대한 나머지 학자들의 논평이 차례로 다루어졌다는 점에서 서로의 입장 차이를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리처드 에이버벡(Richard E. Averbeck)은 1~2장이 실제의 창조 기사로서 고대인의 관찰에 입각한 우주생성론과 우주론을 형성한다고 여긴다. 존 월튼(J. H. Walton) 역시 창조 기사가 육안으로 관측한 사실을 기반으로 형성된 고대세계의 과학을 반영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월튼의 경우 창세기 1장이 기능에 대한 서술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에이버벡은 이를 7일 과정으로 묘사한 것이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원하신 7일짜리 패턴을 위한 유비(類比)라고 보며, 고대 이스라엘조차 이 도식을 문자적으로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창조의 한 주간을 유비로 보는 것은 콜린스(C. J. Collins)나 롱맨(T. Longman)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의 공저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토드 비일(Todd S. Beall)은 창세기를 장르상 역사 내러티브로 보면서 문자적으로 읽을 것을 주장한다. 그는 아예 신화로 여기든지 아니면 문자적으로 읽든지 두 가지 방법이 일관된다고 여긴다. 이 부분은 그의 핵심적인 오류이다. 문자적인 의미를 저자가 의도했다 할지라도, 그 문자적 의미는 저자가 의도한 것이며, 저자가 관측하고 발견하고 깨달은 바를 그 시대의 표현으로 전달한 것이다. 오늘날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비일은 본문이 말하는 문자적 이해가 오늘날에도 그대로 타당하다고 여겨버린다는 점에서, 터무니없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는 내러티브라면 모두 사실로 받아들일 태세이다.
창세기가 계시라는 이해로 인해, 그는 창세기가 배경으로 동원하는 세계관을 오늘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일에게 이러한 문자적 읽기의 타당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중요한 근거는 신약 기자들이 창세기를 그렇게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하며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좀 더 다룰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비일은 성서 자체에 의해 성서 해석을 결정할 것인지, 아니면 과학에 의해 좌우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일과 같은 이들은 자신들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성경을 과학적으로 읽으려는 입장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 문자적 읽기를 단행한 후, 그것이 고스란히 지구와 우주의 생성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라고 간주한다. 성경에 대한 문자적 이해가 우주 생성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라고 볼 아무런 이유가 없음에도 그렇게 주장한다. 성경의 문자적 의미가 과학과 안 맞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그것이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그야말로 그들은 과학을 최대한으로 숭배하는 ‘과학주의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존 콜린스(C. John Collins)는 창세기 1~2장이 우주 생성론을 말한다고 보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창세기는 하나님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신 것과 인간의 삶과 사랑, 섬김을 이야기하는 글이다. 창조 기사는 하나님, 세상, 그리고 그들 자신을 돌아볼 기반을 형성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를 찬양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콜린스는 창세기 본문이 지닌 신학적 의도에 집중한다. 그러나 그는 이 본문이 고대 사람들에게 문자적으로 읽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창세기의 날을 유비로 읽지만, 정작 아담의 역사성을 강력히 주장한다는 것은 비일이 지적하듯 그리 일관되어 보이지 않는다.
트램퍼 롱맨은 1~2장이 비유 언어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하면서 저자와 독자 모두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콜린스와 비슷하게 롱맨은 이 본문이 하나님, 인간, 세계에 관해 풍성한 교훈을 준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본문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비일이 주장하듯, 신약과 교부 문헌 그리고 오늘까지도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다는 점을 롱맨은 간과한다. 그래서 롱맨은 역사적 아담이 실존 인물일 필요가 없다고 여기지만, 바울이 아담을 실존 인물로 여겼다는 피터 엔즈(Peter Enns)의 주장도 반대한다. 롱맨에게 창세기는 ‘신학적 역사’라는 장르에 해당하며, 이 용어는 객관적 사실 규명과는 무관하게 신학을 전달하기 위한 매개로서의 역사 사용을 의미한다. 비일은 당연히 이런 식의 용어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고 비꼰다.
존 월튼은 고대 이스라엘의 시각으로 본문을 읽을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본문에서 진화의 증거를 찾는 것이나 “바라”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를 읽는 것 모두를 배격한다. 그는 고대인의 사고방식이 진리를 전달하는 하나님의 소통 방식으로 쓰인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는 고대의 우주관과 연관하여, 무엇인가 창조된다는 것은 기능이 생겨나고 주어졌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물질 우주 존재론이 아니라 기능 우주 존재론을 주장한다. 그래서 1장 2절을 물질이 이미 존재하지만 기능이 부여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긴다. 그에게 ‘만들다’는 ‘제 기능을 하게 되다’이다. 하나님이 어느 시점에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겠지만, 그에게 창세기 1장은 물질의 기원이 아니라 기능의 기원을 이야기한다고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기능에서 물질로 옮겨간 까닭을 그는 헬레니즘의 영향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그는 고대 근동이 우주와 성소를 연결시키고 있으며, 성소를 확립한 이후에 안식을 누리는 것과 창세기의 안식을 연결시킨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7일은 ‘우주적 성전의 취임식을 나타내는 7일’이며, 이 본문에서 실제의 우주 창조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읽는 것 자체가 본문과는 거리가 먼 시도가 될 것이다. 그에게 에덴은 성소이며 아담과 하와는 제사장으로, 사람의 기능을 보여주는 “원형적 대표자”이다.
그러나 에이버벡이 비판하듯, 기능적 창조에 대한 그의 풀이는 본문이 자명하게 말하고 있는 바를 애써 달리 생각하려는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고대 근동에서 우주 창조와 성소 창조를 연관시키는 문헌으로 그가 제시하는 모든 문헌 증거들은 본문 자체에 성소에 대한 명백한 언급이 존재하지만, 창세기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간과한다. 그는 요세푸스와 필로의 글에 나타나는 우주·성소 모델을 주장하지만, 이 두 사람이 헬레니즘 세계 안에서 유대 신앙을 보편화하기 위해 애썼던 이들임을 고려하면, 이들의 주장과 창세기를 연결시키는 것은 적절치 않다. 요세푸스와 필로의 시대에 그리 멀지 않던 초기 교회 교부들의 물질 창조 견해를 부당하다고 비판했던 것과는 모순되는 태도인 것이다. 나아가 월튼은 헬레니즘이 고대 근동적 세계관을 다 지워버렸다고까지 선언했다! 레벤슨(Jon D. Levenson)을 인용하면서 이사야 66장 1절에 있는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성소라는 언급도 끌어오지만, 이 본문 역시 하나님의 안식할 처소라는 명백한 언급이 있다.
에이버벡과 비일을 제외한다면, 콜린스와 롱맨, 월튼은 창세기에서 지구 생성에 대해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고 여긴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들에게 창세기 본문은 신학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한 본문이다. 비일의 경우, 그러한 신학적 읽기에 동의하면서 동시에 문자적 읽기 자체도 전적으로 존중한다. 이들의 견해는 나름의 일관성이 있지만, 에이버벡의 경우, 한편으로는 문자적으로 본문을 읽고 다른 한편 7일 패턴 같은 경우는 문자적으로 읽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깨어진다. 이 경우 어떤 것은 문자적으로 읽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지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그는 네 개의 강에 대한 언급이 이 본문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표지라고 여긴다. 그에 대해 롱맨 같은 이는 반대한다. 그렇지만, 창세기의 저자와 독자가 에이버벡이 주장하듯 에덴을 실제 역사로 읽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저자는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어딘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 점에서 창세기의 문자적 읽기를 주장하는 토드 비일의 견해는 흥미롭다. 그야말로 소수의 구약학자들만이 비일의 견해에 동의하겠지만, 적어도 그의 해석은 일관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일관되게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풀어간다. 그에 비해 어떤 학자들은 어떤 본문들은 문자적으로 풀고 어떤 본문들은 상징이나 비유로 풀어간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흔들린다. 그리고 고대 이스라엘이 창세기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보지 않고 비유적으로 읽었을 것이라는 다른 학자들의 주장은 비일보다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 책 2부 7장에 실린 주드 데이비스의 글은, 토드 비일의 해석을 지지하면서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지구 창조’를 제안하기도 한다. 비일이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읽는 중요한 근거들 가운데 하나는 신약 성경과 이후 교회의 구약 이해이다. 신약 성경의 기자들과 교부들이 구약을 문자적으로 읽었다면 오늘 우리가 달리 읽어야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이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이 묻는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실제로 창세기는 세상이 7일만에 창조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상징 혹은 비유 언어가 쓰였다고 롱맨처럼 주장할 근거가 그리 객관적이지는 않다. 가령 7일이 상징이면 첫째 날의 빛은 상징인가, 아닌가? 첫째 날의 빛이 상징이면 넷째 날의 두 광명은 상징인가, 아닌가? 그 점에서 우리는 창세기의 저자와 창세기의 내용을 듣는 청중과 독자들은 명백히 세상이 물리적인 7일 동안 창조되었다고 믿었으리라 여겨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창세기의 주장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구약과 신약 안에는 우리가 문화적으로 판단하는 내용들도 있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내용도 있다. 세상 창조에 대해 창세기 저자가 이해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창세기를 하나님 말씀으로 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비일과 그에게 동의하는 이들이 주장하듯, 신약 기자들은 구약을 문자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신약 기자들의 그러한 견해가 우리가 지금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견해는 아니다. 가령 신약 기자가 이사야서 1~39장 부분과 40~55장 부분을 모두 이사야의 글로 인용한다 하더라도(가령, 요 12:38~41의 사 53:1과 6:10 인용), 그것이 이사야서의 저자 문제에 대한 정답으로 보아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의 표현은 초대 교회 당시 유대교의 이사야서 저자 문제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을 따름이다. 나아가, 예수께서 요나와 니느웨 사람에 대해 인용하셨다는 사실이 요나서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문자적 이해에 기반하여 세상이 물리적인 7일에 창조되었다고 보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이해를 제대로 반영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창세기의 진술을 지구와 인간의 나이에 대한 근거로 삼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저자의 의도가 중요하다고 흔히 말하지만, 창세기 저자가 물질적인 7일 창조를 생각했다고 해서 그것이 오늘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라고 여길 수는 없다. 창세기는 고대인의 인식과 세계관, 고대의 구체적인 역사와 일상을 배경으로 해서,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를 드러내고 있는 책이다. 창세기가 고대인의 세계관과 인식을 재료로 사용했다는 것은 창세기가 추상적 진리의 모음집이 아니라 살아있는 피와 살을 가진 이들의 역사 현실에 결부된 책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 점이 롱맨이 사용하는 ‘신학적 역사’라는 다소 애매할 수 있는 표현의 의미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창세기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은 그 피와 살을 가진 이들의 인식과 세계관을 통해 창세기가 세세토록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 그리고 그가 부르신 백성의 삶이다.
비일과 같은 이들의 도전은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를 일관되게 읽을 필요성을 제기한다. 창세기가 의미하는 바를 그 배경이 되는 우주관과 역사적 상황의 틀 안에서 문자적으로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창세기의 그 어떤 부분도 간과되거나 사소하게 여겨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고고문헌학을 전공하는 것이 아닌 한, 그 시대와 배경과 틀 안에서 창세기가 의도한 바를 오늘 달라지고 변화된 우리 시대의 상황과 틀 안에서 풀어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창세기 전체를 신학적으로 읽을 필요가 생긴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의 문자적 읽기는 창세기의 신학적 읽기의 필수적인 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김근주
학부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신학교에 가게 되었과 결코 상상해본 적 없는 목사가 되었다. 예언자들이 외치는 심판뿐 아니라 회복의 메시지야말로 예수께서 이 땅에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알짬임을 깨닫고, 이를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며 살기를 소망한다. 소망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는 연구나 준행, 가르침 모두에서 '서우적거리는 중'이다. 서울대, 장로회신학대학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소예언서 1: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특강 예레미야》 《이사야가 본 환상》 《느헤미야 팟캐스트 1: 세습 목사, 힐링이 필요해?》(공저)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