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하루하루 파티하듯 살아요"

[308호 그들이 사는 세상] 오두막공동체의 미술선생님 정영란 씨

2016-06-27     이범진 기자
   
▲ ⓒ복음과상황 오지은

경남 합천 산골의 오두막공동체(대표 이재영). 출소자, 장애인, 중독자 등이 마을을 이루어 살아가는 공동체다. 이곳 미술선생님 정영란(55) 씨는 5년 전부터 경계성지능장애를 가진 아들 승준(24) 씨와 들어와 살고 있다. 복상에서 연재된 오두막공동체 이야기("오두막 묵상"과 "오두막에서 만난 사람")에 들어가는 일러스트를 그리기도 했다. 작년 어느 날, 영란 씨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가끔 문자로만 안부를 확인하다가 지난 6월 11일 오두막공동체를 방문해 직접 만났다. 영란 씨가 카페지기로 있는 오두막공동체 내 '들꽃까페'에서 그의 투병생활과 공동체살이를 들었다.

― 오두막공동체에는 언제 어떤 계기로 오게 된 건가요?
2010년 가을에 아들이랑 같이 왔어요. 아이가 경계성지능장애가 있어요. 곧 성인이 될 아이를 어디에 보낼 수가 없더라고요. 복지원 오가는 일상은 너무 단조롭고, 보낼 만한 대안학교도 찾지 못했어요. 공동체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 갖고 있던 터에 오두막공동체를 알게 되어 방문했어요. 산골을 오르내리는데 뭐 거창하고 특별한 것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평안했어요. ‘여기에서 살아야겠다’ 싶었죠.

― 대한민국은 장애인과 그 가족이 살아가기에 결코 쉽지 않은 사회 아닌가요?
그렇죠. 너무 뻔해요. 외국에 나가면 좀 나아진다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는 가족들도 있어요. 어떤 사회적 ‘해결’이 있을까 싶어요. 막막하죠. 특별한 게 없어요. 가장 ‘성공’한 케이스가 패스트푸드점이나 레스토랑에 취직하는 거예요. 그러면 모두 축하해주면서 한 턱 내고 그래요. 처음엔 설거지를 하다가 좀 더 적응하면 서빙도 하고, 그런데 그 다음엔 뭐가 있을까요? 너무 막연해요. 장애아를 둔 부모들의 소원은 아이보다 하루 늦게 죽는 거예요. ‘내가 없으면 우리 아이는 어떻게 살아갈까?’ 항상 염려하며 사는 거죠. 저도 그렇게 벼랑까지 내몰렸었어요. 누가 밀면 죽을 것 같았는데, 그래서 여기로 오게 된 것 같아요.

― 여기는 아들과 함께 살기에 좋은가요?
결국 아이에게 필요한 건 함께 생활할 사람들이라 생각해요. 여기는 서로 다른 장애(어려움)를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도우며 이해를 해줘요. 일반사회에서는 이해받기 어려운 행동들도 다 받아들여져요. 이를테면 문지방을 계속 왔다갔다 하고, 움직여야 할 때 정지하고, 가까운 길을 멀리 돌아서 가고, 매듭을 묶었다 풀었다 반복해요. 도시에 있으면 “왜 그러느냐” 지적받는 삶이죠. 그러나 여기서는 아무도 뭐라고 안해요. 네 마음껏 해라, 해요. 요즘은 며느리를 봤으면 하는 생각도 해요. 예전엔 남의 딸 데려와서 고생시킬까 하는 마음에 그냥 너랑 나는 한 세트로 살다가 가야 한다며 아들의 결혼은 생각도 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이곳에서 장애가 있음에도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부부들을 제법 만나니까, 자신감도 생기고 욕심도 생겨요.  

― 지난해 암 선고를 받았잖아요. 생각이 많아지셨을 것 같아요.
처음엔 좀 실망했어요. 오두막공동체에서 만 3년이 지났고, 이쯤 되면 하나님의 어떤 선물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던 때였거든요. 그런데 암 진단을 받으니까, 황당하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두려웠어요. 내가 죽으면, 우리 아이는? 그런데 내가 없어도 우리 아이와 함께해줄 공동체를 떠올리니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그리고 선물이라 생각하기로 했어요. 암은 그저 포장지일 뿐이다! 서울에서 머물며 치료를 받았는데, 아들이 보고 싶기는 했지만 걱정은 안 했어요. 공동체 사람들과 함께 잘 있을 걸 아니까요. 오히려 힘들었던 것은 공동체에 대한 향수였어요. 우리 공동체의 냄새를 맡고 싶었어요.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고 항암치료 받고 곧바로 여기 왔어요. 주사 한 번 맞으면 하루 내내 심하게 멀미하는 느낌이거든요. 1~2주는 몸이 무척 아파요. 그래도 꼭 여기에 와서 지냈어요. 좀 나아진다 싶으면 서울 가서 또 주사 맞고 오고. 또 아프고. 그렇게 1년의 세월을 보냈어요. 지나고 나니까 하나님의 선물이 확실해요. 처음에 포장지만 보고 그게 예쁘지 않다고 내가 힘들어 했구나 싶더라고요. 그 기간 내면의 성장을 참 많이 했어요.

― 미술선생님이면서 카페지기를 하고 있는데요.
여기 오기 전까지 화실이나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응용미술을 전공해서 그런지 이렇게 꾸미고 하는 게 익숙해요. 난 아들 때문에 여기에 왔는데, 시골에 살면서 좋아하는 그림도 실컷 그리고 카페도 관리하고 있네요. 계획에 없던 일인데, 너무 행복한 일이죠.

― 이 카페 공간은 공동체 식구들에게도 의미가 깊을 것 같아요.
맞아요. 예배드리는 ‘공간’과는 또 다른 분위기죠. 평소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소통하는 공간이기도 해요. 시골은 60대도 새댁이거든요. 30~40대 청년들도 여기서는 다 ‘아이들’이죠.(웃음) 어린 자매들이 어른들 앞에서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여기서 우리끼리 주고받아요. 그렇게 갈등도 해소되고, 함께 자라가는 거죠. 오전 중 이곳을 오가는 이들의 표정을 보면 다들 생동감이 넘쳐요. 식구들 모두 편하게 이용하고요. 앞으로는 여기서 영화도 보고, 공연도 열고 하려고요. 

―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나요?
물론 있죠. 처음엔 돈 없이 산다는 게 참 어려웠는데 일단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되니까 안심은 되더라고요. 통장은 곤란하지 않을 정도로 채워져요. 카페 오는 식구들이나 손님들 반 이상은 커피를 공짜로 마시거든요. 그런데 더 얹어 주고 가는 분들 덕에 커피 원두도 사고 적절한 수준에서 운영되고 있어요. 개인 소비를 할 정도로 여유가 생길 때도 있고요. 생활비는 도시 생활비의 5분의 1 정도밖에 들지 않을 걸요?

   
 

― 인간관계가 어렵지는 않았나요?
처음엔 어려웠죠. 내가 그래도 정신적, 신체적으로 어려움이 덜한 편이니까 뭔가를 더 해줘야 할 것 같고 급한 마음이 있었어요. 그렇게 되면 주변을 둘러보지 않고 일을 하게 되니까 크고 작은 갈등이 발생해요. 5년쯤 지나니까 이제 좀 알겠어요. 관계 안에서 조율도 할 수 있게 되었고요. 나도 매일매일 다듬어져 가는구나 싶어요. 얼마 전 대표님께서 “공동체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심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 말씀 들으면 ‘아, 그렇구나!’ 힘 빠지면서 시원해지고 그래요.

― ‘매일매일 만들어져 가는’ 기분은 어떤가요? 부럽네요.
작년에 치료받으면서 읽은 《꾸뻬 씨의 행복 여행》에 보니 ‘하루를 파티하듯이 산다’는 표현이 있더라고요. 무척 와 닿았어요. 공동체에서의 삶이 그래요. 아팠을 때라 더 공감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절망의 끝에서 있다가 여기에 와서 이제는 희망을 얻고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파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