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질’ 논란과 기본소득제
[309호 대중문화 짚어주는 남자]
재작년 땅콩 회항 사건으로 갑질에 대한 사회적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그 전후로도 우리 사회의 특권층이라고 일컬어지는 갑들의 횡포는 계속됐다. 직장, 학교, 종교 가릴 것 없이 권리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갑은 권력의 비대칭 관계에 있는 을에게 부당한 요구를 해왔다. 그런데 요즘 들어 갑질과 더불어 ‘을질’이라는 새로운 조어가 언론에서 심심찮게 목격된다. 여기서 ‘을질’은 갑질과 마찬가지로 ‘을’ 뒤에 좋지 않은 행위를 비하하는 뜻을 지닌 접미사 ‘질’을 붙인 신조어로, 을이 권리관계에서는 약자이지만 실제로는 갑처럼 굴며 갑에게 횡포를 부리는 부당행위를 뜻한다.
최근 을질 논란은 힙합 듀오 리쌍의 건물에 세 들어 장사하던 서윤수 씨(곱창집 ‘우장창창’ 사장)가 강제집행에 저항하는 일에서 제기됐다. 관련 기사 포털 댓글창에는 “영구 임대했냐 도대체 몇 년이 흘렀는데 안 나가고 버티냐. 완전 슈퍼 을질 쩌네”(kimh****) “내 건물 내 맘대로 한다는데 뭐가 문제인가?”(hyun****) 등 세입자에 대한 비판적 댓글이 지배적이었다. 한 포털 기사에 달린 댓글 905개를 모두 확인해본 결과, 840개 댓글이 리쌍을 옹호하며 서 씨를 힐난하는 댓글이었고, 60개 정도가 현행 상가임대차보호법을 문제 삼는 글이었다. 다른 포털 기사에 달린 댓글들도 마찬가지였다. 9할 이상의 여론이 세입자가 약자 코스프레를 하며 을질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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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주를 옹호하는 을들의 정체
누리꾼들이 시쳇말로 버튼이 눌린(‘공분을 사다’는 뜻의 인터넷 속어) 이유는 건물주인 리쌍이 계약 기간을 충분히 보장해주고 법대로 계약 해지 통보를 했는데도 서 씨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리쌍의 연예인 신분을 이용해 언론 플레이를 한다는 데 있다.
누리꾼들은 이 과정에서 어쨌든 서 씨가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장사를 해왔다는 데 주목한다. 해당 건물이 본인 것이 아닌데 5년을 넘기고도 남의 건물에서 장사를 하려는 것은 세입자의 진상이며 을의 횡포라는 것이다. 게다가 누리꾼들은 법적 의무가 없는 보상금 1억8,000만 원을 세입자에게 보전해준 리쌍을 높게 사며 그를 ‘천사 건물주’로까지 평가한다. 반면에 서 씨는 법 위에서 부당한 이익을 얻어내려는 ‘슈퍼 을’로 취급된다.
여기서, 건물을 매입하자마자 2년밖에 장사하지 않은 세입자를 내쫓으려고 했던 건물주 리쌍의 행위는 부당한 것 아니냐는, 4억3,000만 원을 투자한 세입자를 지하로 내쫓고 1억8,000만 원을 보전해 준 것은 약탈에 가까운 것 아니냐는, 재계약 후 2년 만에 또다시 강제집행까지 감행한 리쌍이 너무한 건 아니냐는 주장은 ‘법대로’의 명분 앞에 쉽사리 무시되고 법을 따르지 않는 세입자는 을질로 비난받는다.
사실 “법대로”라는 말은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강자의 언어에 속한다. 게다가 을질이라는 말은 다분히 갑의 위치에 있는 자가 약자인 을을 무시하거나 폄훼할 때 쓰게 된 언어이다. 하지만 이러한 강자의 언어는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약자의 입을 통해 발화되고 있다. “모든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다”라는 마르크스의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증명하듯이, 지배적 여론은 갑의 위치에 있는 건물주 리쌍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 상당수의 국민이 건물주가 되길 꿈꾸는 현실에서 누리꾼들이 건물주인 리쌍에게 동일시되어 약자인 세입자의 저항을 을질로 비난하는 것은 이해 못할 일도 아닌 듯하다.
하지만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부가 사회의 계급을 결정한다는 이른바 수저 계급론이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담론으로 받아들여진 현실을 고려할 때, 흙수저 계층이 금수저인 건물주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건 아무래도 동의하기 어렵다. 포털 정보에 따르면 앞서 905개의 댓글을 단 누리꾼 상당수는 20~30대 청년들(20대 37%, 30대 41%)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들은 수저 계급론에 가장 공감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논리에 따르면 리쌍을 편든 이들이 건물주가 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그런데도 대중이 리쌍 편을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건물주가 될 수 없는 현실을 잘 알고 있는데도 건물주에게 공감하는 현상은 마르크스가 말한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대중은 언젠가는 건물주가 될 수 있다는 헛된 희망 때문에 건물주에게 감정 이입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을질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댓글을 다는 알바정도로 봐야 하는 걸까.
을질 논란을 넘어 미래를 향한 상상력으로
아무리 ‘노오오력’을 해도 건물주가 될 수 없는 이들이 처지가 같을 수밖에 없는 세입자에게 ‘을질’이라는 기괴한 딱지를 붙이는 현실은, ‘대립된 두 규정의 통일’이라는 헤겔의 변증법 논리의 현실적 증명처럼 보인다. 약자가 자기 이해를 배신하면서까지 강자의 편에 서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그의 책 《까다로운 주체》에서 이러한 모순적 현실이 지배 관념으로 굳어지는 이데올로기의 작동 원리를 변증법적으로 분석한다. 그는 이데올로기의 성공은 ‘피지배자 다수의 본래적 열망’과 ‘지배 세력의 이익을 표현하는 특수한 내용’ 사이의 긴장에 있다고 진단한다. 가령 성공적 이데올로기의 대표 사례는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진리는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다’는 피억압자들의 유토피아적 갈망을, 기존의 지배관계와 양립 가능한 것으로 재표명함으로써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됐다. 을질 논란에 이 이데올로기 작동 원리를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돈 걱정 없는, 인간다운 삶’이라는 대중의 유토피아적 갈망을 세입자를 내쫓는 건물주라는 갑의 위치로 통합시킴으로써 을질이라는 발언이 지배적인 여론이 됐다고 말이다.
사실 대중의 이러한 본래적 열망은 얼마 전 스위스에서 국민투표로 시도된 기본소득제의 아이디어와 맞닿아 있다.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일정 수입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제는 국민 모두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제안된 제도이다. 비록 이 제안은 다수의 반대로 부결됐지만 대중의 본래적 열망을 보편적 제도로 담아내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시도였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을질 논란은 미래의 상상력을 담아낼 그릇의 부재로 인해 생긴 비극일지도 모르겠다.
정재원
대학원에서 문화연구를 전공하고 문화 해석과 향유 네트워크 ‘에디공’에서 프로그래머로, 연구집단 카이로스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먹고사니즘’과 행복 추구를 훌쩍 넘어선 삶을 위해 평신도 공동체를 실험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