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삐 풀린 세계화’와 종교의 역할
[310호 해외 특별기고]
이 글은 미로슬라브 볼프 예일대 교수와 한국IVP의 허락 하에 Flourishing: Why We Need Religion in a Globalized World(Yale University Press, 한국IVP 근간)의 내용을 발췌·구성한 것이다. 볼프 교수에게 ‘세계화와 종교’를 주제로 원고 청탁을 했으나, 집필 일정상 고사하는 대신, 같은 주제를 다루는 이 책의 내용을 발췌하여 사용하기를 수락했다. 직접 인용은 겹따옴표로 표시했으며(인용문 끝 괄호 안의 숫자는 원문 페이지), 그밖의 내용은 이 책의 한국어판 번역자로서 발췌자가 덧붙인 것이다.
오늘날 전 세계의 빠른 변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낙관적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는 불안과 불확실성을 가져다주는 것 같다. 이러한 불안에 대해 볼프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미지의 위협’과 현대인의 불안, 그리고 ‘일상 세계’에 대하여
“기후 변화가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퍼질 가능성이 있고, 권력과 부와 기술의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새롭게 부상하는 인공 지능이 인간을 무용하게 만들려 하고, 적을 불사르고 참수하고 위대한 문명 유산을 파괴하는 야만적인 태러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등 이러한 위협들은 많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각각의 위협이 무엇인지 규명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한편으론 미지(未知)의 위협이기도 하다. 때로 ‘알지만 알 수 없는’ 것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러한 위협들은 우리의 미래를 불안하게 만든다. 또한 그것은 바로의 꿈에 나온 첫 무리의 비쩍 마른 소에 불과할 뿐(창 41) 더 많은 비쩍 마른 소들, 그러니까 ‘알지만 알 수 없는,’ 우리가 아직 인식도 못하는 위험들이 뒤따를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괴롭힌다.”(ix-x)
이러한 “알지만 알 수 없는” 불안 앞에서 ‘세상’과 늘 어느 정도의 긴장과 대립의 입장을 취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라는 질문을 달고 살면서도 정작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어찌할 바 모름은 방어적이 되어 폭력적으로 변하는 종교 집단과, 아예 세상을 떠나 산속에 파묻히는 종교 집단의 양극단 어디 즈음에 서 있는 많은 종교인들의 모습일 것이다.
볼프는 오늘날 불안을 야기하는 주요 세계 질서인 “세계화”라는 현상과 그가 (원시 종교와는 구분되는 의미에서) “세계” 종교라고 일컫는 것 사이의 관계를 살핀다. 아울러 종교의 시각과 공공 사회(혹은 국가 사회)의 시각을 두루 조명하는데, 그에 앞서 근대 이후의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인 일상 세계에 대한 설명을 먼저 한다.
“애덤 스미스의 이론과 마르크스의 이론에서든 아니면 오늘날의 세계화된 세계에서든 시장의 중요성은 ‘일상적 삶에 대한 확언’과 연결되어 있다.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그것을 ‘근대 문명에서 가장 강력한 사상’ 중 하나라고 규명했다. 종교적 명상, 철학적 성찰, 혹은 공적 논의와 같은 좀더 고상한 삶이 아니라, 일과 가족이 있는 삶, 건강과 부와 장수의 삶, 편안하고 고통이 없는 삶. 이것이 바로 인간이 우선적으로 누리고자 애써야 하는 것이라고 근대성은 우리에게 촉구한다. 일상적 삶은 단순히 고상한 삶의 하부구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애덤 스미스의 말로 표현하자면, ‘모든 예술, 과학, 법률과 정부, 지혜, 심지어 미덕 자체도’ 일상적 삶에 봉사해야 한다.”(42)
고삐 풀린 세계화에 대한 종교의 역할
볼프에 의하면 일상 세계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종교와 대립될 것 같지만 사실은 조금 더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세계 종교와 세계화의 관계에는 구조적 양가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세계 종교가 일상적 삶에 쓰이는 상품을 구매하는 것과 그것이 분배되는 방식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특정 조건 하에서 세계화를 긍정할 수 있다. 사실 유대교와 기독교—특히 개신교의 위대한 개혁가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이 16세기 초에 주창한 형식의 기독교—는 일상적 삶에 대한 근대적 확언과 현재와 같은 양태의 세계화의 주요 기원 중 하나다. 반면에 현재 나타나는 세계 종교와 세계화 사이의 갈등의 핵심도 일상적 삶에 대한 것인데,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좋은 인생에서 일상적 삶에 쓰이는 상품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것이다. 세계화는 사람의 욕망과 에너지와 창조성을 평면적인 일상적 삶에만 집중시키는 반면, 초월적 영역을 범속의 영역 우위에 두는 세계 종교는 우리가 무엇보다도 초월적 영역에 마음을 두어야만 일상적 삶을 제대로 향유하고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44)
위 인용글에서 보듯, 세계화와 세계 종교 사이의 “구조적 양가성”에서 종교가 세계화를 비판하는 기준은, 볼프의 표현대로 하면, “말씀”과 “빵”의 관계다. 그러나 종교도 이 말씀과 빵의 관계에서 자신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지 못할 때가 있다.
“가장 큰 유혹은 유일신론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거짓 신을 섬기는 게 아니다. 풍요할 때나 가난할 때나 가장 큰 유혹은 인간이 떡으로만 사는 것처럼 믿고 사는 것, 마치 그들의 삶 전체가 세상의 상품을 만들고 개선하고 분배하는 것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처럼 믿고 사는 것이다. 거짓 신을 섬기는 것, 혹은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단순한 식량 공급자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 큰 유혹에 굴복한 결과이다.
‘일상적 실재’로만, 그리고 ‘일상적 실재’만을 위해서 살면 우리는 안절부절 못하게 되고, 안절부절 못함으로써 더 정의롭고 자비롭고 자상한 인간적 실천과 사회적 환경 조성을 방해할 뿐 아니라, 경쟁과 사회적 불의와 환경 파괴를 낳는다.”(22)
결국 종교도 단지 종교이기 때문에 세계화의 세력보다 선한 게 아니라 언제나 세계화의 흐름에 휘둘릴 수 있다. 볼프는 세계화를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세계화가 세계 종교로 하여금 자기 본분에 더 충실하게끔 도전하는 면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고삐 풀린 세계화는 인간에게 복이기보다는 고통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는 종교의 개혁과 갱신을 촉구하면서 세계화가 진정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 되도록 길들일 것을 제안한다.
‘세계 종교’가 가진 6가지 동질 구조
그렇다면 왜 ‘기독교’가 아닌 ‘종교’인가? 이러한 중대한 과제 앞에서 종교들은 힘을 합하기보다는 서로 경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볼프에 의하면 기독교, 이슬람, 불교, 유대교, 힌두교, 유교와 같은 세계 종교들은 모두가 보편적 주장을 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리고 보편적인 주장을 하기 때문에 자신의 메시지를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라는 임무를 준다. 이러한 보편주의적 주장은 또한 배타주의의 특징을 낳는데 그것이 바로 종교들이 서로 충돌하는 이유다. 그래서 볼프는,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종교가 세계화로 인한 여러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기는커녕 오히려 문제를 발생시킨다고 지적한다고 말한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문제의 해결사이기보다는 주범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커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볼프는 종교가 역사적으로 자행한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원래 종교들이 지닌 메시지와 자원으로 눈을 돌리게 하면서 그것이 왜 세계화에 필요한지를 피력한다.
볼프는 세계 종교가 가진 중요한 자원이자 특징을 여섯 가지의 동질적 구조로 정리한다.
첫째, 세계 종교는 실재를 “두 가지의 세계”로 설명한다. 반드시 이원론적인 것은 아니지만, 서로 연관되어 있기는 하나 두 개의 범주로 구분되는 영역을 제시하는데, 실재를 초월적 영역과 일상적 영역으로 구분하고 초월적 영역을 우선시한다.
둘째, 세계 종교는 인간을 개인으로 본다. 초월적 존재는 사람을 원래의 공동체에서 따로 불러 내어 하나의 문화에 국한되지 않는, 그러나 지역적으로 구현되는 종교 공동체에 집어 넣거나, 자기 공동체 안에 내버려두되 개인적 전유를 명령한다.
셋째, 세계 종교는 보편적 주장을 한다. 세계 종교는 자신의 지역 문화에 상관 없이 모든 인간에게 진리이고 정의롭고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주장한다. 그리고 (예를 들어 고통에 속박된 것, 죄의 문제, 지도의 부족처럼) 인간의 곤경에 대해 진단을 하고 (계몽,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 신에 대한 복종처럼)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준다.
넷째, 세계 종교는 일상적인 번영을 능가하는 선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계 종교는 일상적인 번영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그 너머의 선에 관심이 있다. 인간은 건강, 부, 그리고 장수를 누리지 못해도 선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람은 심지어 “(십자가 죽음과 같은) 실패”를 통해서도, 혹은 “(환생의 순환을 끝내는 것처럼) 번영의 영토를 완전히 떠나도” 선에 도달할 수 있다.
다섯째, 세계 종교는 구분되는 문화적 체계다. 세계 종교는 자율적인 체제로서, 주어진 문화적 정치적 공동체와 (반드시 분리된 것은 아니어도) 구분된다. 따라서 세계 종교는 “모든 정치적 인종적 경계를 초월할 수 있으며, 스스로를 다른 문화에 이식할 수 있다.”
여섯째, 세계 종교는 일상적 실재의 변화를 가져온다. 세계 종교는 삶에 대한 긍정을 “삶과의 다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것은 실재를 초월적 영역과 일상적 영역으로 나누고 초월적 영역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이다. 금욕주의와 예언주의는 일상적 실재를 초월적 질서에 부합시키는 두 가지 기본 방식이다. 금욕주의의 관행은 인간의 몸과 영혼을 초월적 질서에 적응시키는 데에 쓰이는 반면, 예언적 참여는 이 세상의 상황을 초월적 질서에 맞게 조정하는 데에 쓰인다. (67~69)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계 종교가 실재를 두 개의 세계로 본다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일상적 현실이나 구조 그리고 지역성과 건강한 긴장 관계를 맺는 다. 이처럼 일상을 부인하지 않되 그것과 건강한 긴장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 종교의 장점이고, 바로 세계화가 진정 인간을 위해 일하도록 길들일 수 있는 종교의 자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익히 알 듯, 인간은 먼저 “말씀”으로 살아야 “빵”(혹은 “떡”)도 잘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배타주의와 정치적 다원주의
볼프는 그러나 세계화를 길들이기 위한 공동의 노력에서 그 “말씀”이 반드시 기독교의 말씀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종교적 배타주의와 정치적 다원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그는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진정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종교를 존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존중이 다원주의의 특징을 갖는 현대 사회에서 모두에게 꼭 필요한 미덕이라고 주장한다.
보편적 주장을 하는 배타적 종교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위에서 인용한 두 번째 항목과 연관이 있는데, 바로 모든 세계 종교는 인간을 개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인간을 개인으로 본다는 것은 자기에게 무엇이 옳고 좋은지를 스스로 판단해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고, 그러한 선택은 강제나 강요 없이 이루어져야 하며, 그렇게 이루어진 선택은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비판적 참여와 설득이 배제되지는 않지만 그것 역시 이러한 기본적인 존중의 태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볼프의 주장이다. 그는 이것이 기독교의 원래 정신과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내적 확신을 가지고 자유롭게 신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여기서 자유를 행하는 행위자의 성격은 현대 서구의 문화가 규정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말이다). 사도 바울은 “마음으로 믿는다”고 했는데, 이 말은 단순히 환경의 영향에 순응해서가 아니라, 혹은 무력으로 가해지는 명령에 순종해서가 아니라, 존재의 중심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롬 10:10).
고대 로마 때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에 반대한 교부 테르툴리아누스(160~220)는 이렇게 썼다. 신들이 “억지로 바치는 제물을 좋아할 리 없기” 때문에 “자유인이 자기 의지에 반해서” 종교적인 의식에 참여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불의하다.” 이 관점은 후일 밀라노 칙령(313)에 참고가 되었는데, 이 칙령은 “각자가 원하는 종교가 무엇이든 그것을 따를 수 있는 자유를 모든 사람에게” 허용했다. 왜냐하면 “최고의 신”은 오직 “자유로운 정신”으로만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행위이다. 강요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초기의 기독교와 현대의 기독교 모두 이 부분에 동의한다.”(108)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본다면, 세계화로 인한 여러 문제를 대하는 자세에서 기독교인이 다른 종교인과 특별히 구분될 것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개인주의”라는 세속적 개념을 기독교에 도입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위의 인용은 그러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볼프가 자신의 주장이 기독교 전통에 근거함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또한 서구의 정치적 다원주의도 신실한 종교적 배타주의자였던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1603~1683)와 같은 사람들의 종교적 자유에 대한 신념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자기 공동체 안에서의 표현과 공공의 장에서의 표현이 달라야 함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다름은 분절이나 구획화라기보다는 연속성 있는 원칙이 상황과 대상에 따라 다르게 구현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기독교 변증의 전통이기도 한데, 실제로 볼프는 기독교 변증의 개발도 공공의 문제에 참여하는 종교의 긍정적인 사례로 제시한다.
‘공공의 문제’ 참여와 미국 기독교 우파
또한 볼프는 공공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존중이라는 원칙을 바탕으로 하면서 자기 종교의 색깔을 가지고 논쟁과 토론에 참여하는 긍정적 사례로서 미국의 기독교 우파를 꼽는다. 그는 특별히 존 쉴즈(Jon Shields)의 연구서인 《기독교 우파의 민주주의적 미덕》 (The Democratic Virtues of the Christian Right)을 참고한다.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이들은 기독교 우파의 부끄러움이지 지도자들이 아니다. 게다가 비판자들은 기독교 우파의 민주주의적인 성격을 그들의 정책 목적에 초점을 맞춰서 평가한다. 그러나 정책이란 의견이 다룰 수밖에 없는 사안이고 정치적 논쟁의 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문제는 기독교 우파가 얼마나 민주주의적인 미덕을 갖추고 있느냐인데, 그것을 결정하는 최우선 방법은 그들이 ‘참여와 공공 토론에 가져오는 효과’에 대해 묻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효과는 무엇인가?
첫째, 많은 기독교 우파 조직들은 ‘20세기 미국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소외된 유권자 그룹 중 하나인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을 성공적으로 동원함으로써 더 참여적인 민주주의를 만들게’ 도왔다. 기독교 우파의 이러한 동원력의 성공보다 놀랍고 그만큼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공공 토론에 미친 영향이다. 서른 개의 기독교 우파 조직들의 자료와 그 지도자들과의 인터뷰에 근거해서 쉴즈는 이 지도자들이 ‘일반 활동가들에게 토론의 규범, 특히 예의와 존중의 실천, 들음과 질문을 통한 진정한 대화의 계발, 신학적 호소의 금지, 그리고 신중한 도덕적 논리 제시’를 계속해서 가르쳤다고 결론지었다.
비판자들은 기독교 우파 지도자들이 이러한 가치를 가르치는 데에는 매우 실용적인 인센티브가 있기 때문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활동가들이 그 규칙을 잘 따르면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에 도달할 확률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운동의 지도자들이 그 규범을 거룩한 책, 즉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활동가들은 복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에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정기적으로 지도를 받는다. 그리고 신자들이 거짓 증언하는 것을 하나님이 금지하시기 때문에 정직할 것을 격려한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변증 단체들은 해마다 수천 명의 시민들에게 성경적인 논쟁보다는 철학적인 논쟁을 할 것을 가르친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믿음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쉴즈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 우파의 지도자와 활동가들이 보기에 토론의 규범을 무시하는 것은 단순히 현명하지 못한 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성실하지 못한 것이다.
기독교 우파가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이 목표를 무척 싫어할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며, 기독교 우파 활동가들과 그들의 동조자들도 같은 말을 할 것이다. 민주적인 참여의 요점은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인생의 비전에 맞게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란 결국 이러한 의견의 차이들을,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존중하면서 협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협상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정확히 무엇이 ‘존중’인지를 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나의 목적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기독교 우파의 종교적 배타주의가 그들이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미덕을 지키면서 민주적인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배타주의적 신앙이 가르치는 가치를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토론의 규범으로 번역해냈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정치 프로젝트로서 다원주의에 잘 부합시킬 수 있는 현대의 가장 두드러지는 종교적 배타주의자들의 예이다.” (156~158)
미국 기독교 우파의 가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다소 당황스러울 수 있겠지만, 적어도 볼프는 이것이 바로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 자기 신앙을 지키면서도 한 사회 안에서 함께 폭력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제시한다.
종교적 배타주의가 세계화된 세계에 유익한 이유
마지막으로, 종교적 다원주의가 아닌 특별히 종교적 배타주의가 다원적 특징을 가지는 세계화된 세계에 왜 유익한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다음을 인용한다.
“기독교 우파는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한 가지 토론의 규범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어떠한 진리든 잠정적으로 믿고 있다가 반대의 증거가 제시되면 금세 그것을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그들은 다른 종교 배타주의자들과 같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진리라고 믿는 것을 확고하고 끈질기게 붙잡는다. 그러나 어떠한 삶이 살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진리를 가볍게 붙잡는 것은 전혀 미덕이 아닐 수 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세계화된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좋은 인생에 대한 진리를 느슨하게 붙잡는 게 아니라 꽉 붙잡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계 종교의 추종자들이 좋은 인생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신념을 버리게 만들고 싶어지지 않는 한, 그러니까 그들이 정치적 다원주의를 지지하는 한 말이다.” (158~159)
자신은 진리를 꽉 붙잡되 남에게 강요는 하지 않는 것. 볼프의 주장이 옳다면 선교의 특징을 가진 종교들이 이것을 현실적으로 얼마나 잘 소화해낼 수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미로슬라브 볼프
전 세계 신학자와 종교 지도자들이 주목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크로아티아 출신으로 크로아티아 복음주의 신학대학(B.A.), 미국 풀러 신학교(M.A.)에서 공부하고, 독일 튀빙겐 대학교에서 위르겐 몰트만의 지도로 박사 학위(Dr. Theol.)와 교수 자격(Dr. Theol. habil)을 취득했다. 풀러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지금은 예일 대학교에서 신학과 윤리학을 가르친다. 종교와 인류 공영의 문제, 세계화, 화해, 노동과 영성 문제 등의 주제를 연구하고 있다.
양혜원
본지 해외편집위원. 서울대에서 불문학을,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했다. 1993년 말부터 번역가의 길에 들어서 유진 피터슨, 헨리 나우웬, 존 스토트, 톰 라이트 등 주요 기독교 저자들의 책을 번역해 왔다. 현재 미국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의 Women's Studies in Religion 과정에서 박사 논문을 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