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노후, 가능할까?

[314호 커버스토리]

2016-12-28     도리 비영리단체 ‘명랑마주꾼’ 활동가

“내가 정말로 너나 식구들에게 폐만 끼치고 부담이 된다면, 그래서 나를 스스로 침입자로 여기거나 불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해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이 지상에서 사라지는 게 더 나을 것이다.”
- 《반 고흐, 영혼의 편지》에서

노년에 대한 청년의 상상
100세 시대다. 수명은 길어졌는데 일할 수 있는 나이는 점점 짧아진다. 오십 살에 퇴직한다면, 지금부터 한 달에 얼마를 모아야 할까. 얼마를 벌어야 남은 50년을 ‘명랑한 노후’로 보낼 수 있을까? 무의미한 계산이다.

나는 비영리단체에서 일한다. 나 같은 월급쟁이가 임금노동 없이 50년을 버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대기업에 다니는 내 친구도 사정이 별다르진 않을 것이다. 물려받을 부동산이 있어 ‘건물주’가 되지 않는 한 말이다. 또는 운 좋게 ‘자식이 없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라도 된다면 모를까. (‘부양의무제’ 때문에 성인이 된 자녀가 있는 사람은 아무리 가난해도 지원을 받을 수 없다.) 혹 임대주택이라도 당첨된다면, 정말 행운이다. 1인 가구에 지급되는 생계비는 471,201원. 관리비, 공과금, 식비, 의료비만으로도 빠듯한 살림이다. 시간이 아무리 많이 주어져도 카페에 앉아 느긋하게 책을 읽는다든가, 친구들과 여행을 다닌다든가 하는 일상을 꾸릴 수는 없다. 그저 방안에서 죽지 않고 살아 숨 쉴 수 있을 딱 그만큼의 돈, 그만큼의 여생이 주어진다.

무료하다면 가끔 복지관의 무료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길어야 1~2시간. 그것만으로 시간을 채울 수는 없다. 하루에 5시간을 잔다면 주당 133시간은 깨어있을 나의 시간을 채우기에는, 역부족이다. 물론 수업을 들으며 사람들하고 친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돈 걱정이 앞선다. 어디 앉아 수다를 떨래도, 밥 한 끼를 먹어도 다 돈이지 않은가. 결국은 내 없는 살림이 판판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면 다들 수군대겠지. 젊은 날 뭐하다가 다 늙어서 저리 궁상맞게 사느냐고 은근히 비난하겠지. 동정 받느니 혼자가 편하다.

이건 모두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3년 넘게 내가 만나고, 보고, 들어온 이야기. 그것은 나의 미래이기도 하다. 들을수록 만날수록, 가슴 한편이 뻐근하게 저려오는 이야기들. “뜨끈뜨끈한 방에서 한 번만 자보고 싶어. 방이 원래 후끈해야 하는데…” 하며 방바닥을 짚던 할매의 손. 동사무소에서 김치도 안 갖다준다고 “내가 부자 다 됐나 보다” 하던 할매의 목소리. “즐거운 일은 없죠, 그런 건 없지요” 말하며 늘 혼자 멀뚱히 지낸다던 할배의 표정. 그 모든 것이 그토록 아렸던 건, 나 또한 노년에 별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었다.

고독사 아닌 ‘고립사’

“저녁 6시 되면 쩔뚝거리고 나가는 거야. 줍다가 고물상에 갖다 줘. 다 갖다 줘도 하루 2천 원이여. 우린 달 보고 나갔다가 별 보고 들어와.”
- 이금순 할머니 인터뷰 중

금순 할머니는 22년 전에 영구임대아파트로 이사 왔다. 그 시절에는 아이들이 어렸다. 자녀들이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할머니는 “자연적으로 영세민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월 임대료 20만 원만 안 밀렸으면 하는 욕심뿐이 없었다고 한다. 할머니의 일상은 생각보다 더 고됐다.

‘달 보고 나갔다, 별 보고 들어온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다. 폐지는 저녁에 나오기 때문에 저녁 6시면 집을 나선다. 폐지를 주워 몇 차례 고물상에 주고 집에 돌아오면 새벽 6시. 그마저도 하루 2천 원, 많으면 5천 원 벌 때가 대다수다. 아주 가끔 이웃의 누군가 세상을 떠나, 버린 옷을 뭉텅이로 팔면 그때야 만 원짜리를 만져본다. 그렇게 모으고 모은 돈으로 임대료 20만 원을 낸다. 할머니의 일상은 온통 임대료 20만 원을 내기 위한 노동뿐이었다. 집에 찾아간 날, 현관문도 열어줄 수 없을 정도로 할머니는 다리가 아팠다. 그런 다리로 할머니는 나와 처음 만난 날도 폐지를 줍고 있었다.

금순 할머니를 처음 만난 건, 정 씨 아저씨네 집을 청소하던 날이었다. ‘고독사.’ 기사나 책으로나 봤던 이야기였다. 정 씨 아저씨는 홀로 집에서 생을 마감했다. 아저씨가 발견된 건 며칠이 지나서였다. 옆집의 신고 덕분이었다. 그제야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저씨는 무연고자가 아니었다. 유가족은 유품 정리를 못 하겠다며 통장님한테 통사정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던 나는 그날 그저 통장님을 돕겠다며 자청하여 방 청소에 따라나섰다. 집 앞에는 경비 아저씨와 금순 할머니 두 분이 있었다. 처음에 난 금순 할머니가 당연히 ‘유가족’이려니 생각했다. 짐을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 혼자 그 집을 치우게 놔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할머니는 주워다 팔 물건을 고르고 있었던 것이다.

정작 가족은 내가 막 도착했을 때, 떠난 사람들이었다. 나중에서야 친구 이야기를 듣고 알았다. 통장님 심부름으로 에탄올과 아저씨가 생전 좋아했다던 막걸리를 사 가느라 나는 유가족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청소가 끝나자, 같이 갔던 친구가 펑펑 울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그냥 가는 걸 봤다고 했다. 이혼한 부인이 “저 가구는 산 지 얼마 안 된 거니 가져가 써도 된다”고 했단다. 어떻게 가족이 있는데 그럴 수 있냐며 한참을 통곡했다. 먹먹했다. 가족이 있다면 마땅히 가족이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나처럼 생전 본 적도 없는 이가 누군가의 유품을 치운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얼결에 통장님을 돕겠다고 따라갔지만, 상황이 그 지경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어떻게 가족을 버려둘 수 있을까?’ 그날 이후 이 생각을 수백 번, 수천 번은 했다. ‘나라도 그랬을까?’ 나라고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보살필 수 있었을까. 보살필 마음이 있다 해도, 일을 안 하면 어떻게 먹고 살았을까.

후유증은 생각보다 길었다. 시신이 오래 머물던 방의 냄새가 온몸에서 가시질 않았다. 그보다 더 오래갔던 건 ‘대체 사람이 왜 혼자 죽어가야 하는 걸까. 가족도 있는 사람이었는데…’라는 질문이었다. 죽음보다 더 우리를 괴롭힌 건 삶의 문제였다. 죽음은 삶을 반영했다. 왜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이 아무 손길 없이 혼자 지내야 했을까. 생전의 아저씨는 그저 ‘고독한 사람’이었을까. ‘고독’에 대한 선택권이 아저씨에게 있었을까. 선택이 아니라면 그건 ‘고립’이지 않을까. 돈 벌 능력이 없는 아무 쓸모없는 인간은 먹고 살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이 사회가 그를 ‘고립’시킨 게 아닐까.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얼마나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할까.

친구는 나보다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날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물었다. “그날 이후, 당신은 어떤가요?” 금순 할머니를 다시 만난 것도 그 과정에서였다. 금순 할머니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정 씨 아저씨네 옆집이었다. 가장 먼저 아저씨를 발견하고 신고를 했다던 부부. 옆집 아저씨는 부부 모두 장애인이라며 “장애인은 아예 자식을 안 낳는 게 낫다”고 했다. 자식이 셋인데도, 연락되면 지원금을 받을 수 없어 모두 연을 끊었다. (끊었다는 표현이 맞는 걸까.) 정부에서 자식들과 연락을 하는지, 통화 내역까지 다 조회한다. 몰래 연락하면 안 되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에는 “속상해서 안 보고 사는 게 낫다”고 답했다. 몰래 오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불안하다고. 옆집에서 감시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이웃과도 왕래하지 않는다고 했다. 방 안에는 양초, 퀼트, 조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울할 적마다 복지관에 가서 만들어 온 작품들이다. “복지관에 가도 1시간 금방 끝나고 오지. 그러다 집에 들어오면 또 답답한 거야. 꼭 감옥에 갇힌 기분이야.”

노동 이후의 삶
금순 할머니는 스스로를 ‘배고파 죽을 지경이어도 배 터져 죽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아무리 가난해도 자식이 있으면, 수급자가 될 수 없는 ‘부양의무제’ 때문이다. 가끔 자식을 볼 수는 있으나, 온통 노동으로 가득 찬 칠순 노인의 삶. 반대로 지원을 받아 편히 살지만, 영영 자식과 연을 끊고 사는 육십 대 부부. 두 삶 모두 아이러니하긴 마찬가지이다.

‘부양의무제.’ 현행법은 가난의 책임을 모두 다 개인에게 떠넘기기 바쁘다. ‘가난한 이’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두 가지다. 동정하거나, 비난하거나. 결국, 모두 ‘네 탓’이라는 거다. 네가 무지하고, 무력하며, 무능해서 안 됐지만,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게을렀던 건 모두 ‘개인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노동을 열심히 했음에도 가난하다면 그건 네가 분수에 맞지 않게 낭비를 해왔다는 증거다!

이것은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일종의 모욕이다. 고되게 노동하며 살아온 가난한 노인에게 주어진 삶은 두 가지뿐이다.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노동을 하거나, 멍하게 방 안에 앉아 TV를 보거나. 오늘도 TV에서는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새로운 기계가 끊임없이 소개되고, 그들의 자녀들은 일자리를 잃을 것이다. 인간의 노동은 점점 기계가 대체하는데,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모욕당한다. 모욕당하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은 내 방뿐이다. 주기적으로 리모델링을 해줘서 멀끔하고 비도 새지 않는 안전한 내 집, 내 방.

인간(人間)이란 단어에 ‘사이 간(間)’ 자가 들어간 건 우연이 아니다. 그만큼 사람에게 ‘관계’와 그 안에서 받는 인정과 사랑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복지정책은 그 관계를 끊어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 기저에는 가난에 대한 깊은 편견이 자리 잡고 있다. 가난한 개인을 비난하는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 방에 들어앉을 ‘누군가’가 계속 바뀔 뿐이다. 방 안에서든, 밖에서든 이제는 ‘노동 이후의 삶’을 상상하고 그려내는 힘이 필요하다.

손에 닿는 존재를 돕고 보살피는 일도 물론 중요하고 고귀하다. 내가 만난 노인들 대부분 교회, 복지관에서 받는 쌀, 반찬들 덕분에 조금이나마 생활의 근심을 던다고 했다. 하지만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는 삶’ 이상의 ‘존엄성 있는 노후’를 이제 새로운 복지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노동 이후의 삶. ‘시간의 빈곤’ 뒤에 오는 ‘시간의 습격’에 우리는 어떤 상상으로 대응할 것인가. ‘명랑한 노후’는 그 상상의 폭에 달렸다.


명랑마주꾼 도리
‘명랑마주꾼’(www.hellomapo.com)은 서울 마포구 성산동을 중심으로 도시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고립에 주목하여 활동하는 비영리단체다. “삶은 진지하고, 예술은 명랑하다”는 기치 아래 다큐 영상, 에세이, 그림, 음악 등 문화예술을 활용하는 이 단체의 이름에 들어 있는 ‘명랑’은 고립되고 소외된 마음을 마주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글을 쓴 명랑마주꾼 ‘도리’는 고민과 걱정이 많은 맏딸로, 늘 답 없이 움직이고 로드맵도 채 그리지 않지만 그래서 불쑥불쑥 튀어오르는 사건들을 마주하며 사는 게 나름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