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314호 커버스토리]
하늘에서 서울 땅을 내려다 본 적이 있습니다. 이곳은 아파트 단지, 저곳은 빌라촌. 한눈에 보아도 반듯하게 구별되어 있습니다. 이전에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한 동네에 어우러져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자는 쌀을 풀어야 했고, 가난한 자는 서로의 생계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제는 서로 존재를 알 수 없게 된 거 같습니다. 동네에 들어선 아파트는 단지를 이루더니 길을 막아버렸고, 하나였던 마을이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세상으로 나뉘었습니다. 마을은 쪼개져 가고 있고, 구분된 울타리 안에서 이제 끼리끼리만 어울릴 뿐입니다.
‘강도 만난 자’와 고립된 이웃
슬프게도 교회 역시 사정은 비슷해 보입니다. 많은 대형 교회, 부자 교회들은 점점 폐쇄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더니, 언제인가부터 풍요롭지 않으면 하나님을 잘 믿지 않아서 벌 받는 것이라 그러고, 여러 사회적 소수자를 비난하더니, 이제는 자신만이 천국이라는 곳에 갈 수 있는 의로운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이제 곧 성탄절이 다가오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구를 자주 마주하겠지요.
성경을 꺼내 이웃에 대한 구절을 찾아봅니다. 누가복음 10:27 이하가 뜹니다. “내 이웃이 누구인가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겁게도 예수가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가더라.” 이 뒤에 예수는 그 사람을 지나간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의 태도를 말하면서, 사마리아인이 그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었음을 설명합니다.
생각해보면 제사장은 교회의 수장이고 충분히 이 자를 돌볼 수 있는 재력을 가진 자였습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정부, 혹은 복지 정책이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는 거의 죽게 된 자를 그저 버리고 갑니다. 레위인 역시 법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로, 따져보면 오늘날의 판사 정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그저 지나갑니다. 단지 사마리아인만이 그를 돌보고 치료할 뿐이었지요.
떠올려보면 고립사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라도, 복지도, 법도 돌보지 않아 거의 죽게 된 자가 만나지는 이 하나 없어 정말로 죽도록 방치된 것이니까요. 그래서 성경은 거의 죽게 된 그 사람의 이웃은 사마리아인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의 이웃이 누구였는지도 생각해봄직합니다. 이웃에는 흔히 이웃 ‘사이’, 이웃 ‘지간’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처럼, 일방통행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마리아인의 이웃 역시 ‘강도를 만나, 벗겨지고 맞아서 거의 죽게 되자 버려진 자’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그자를 그저 안쓰러운 자로 내려다 본 것이 아니라 동등한 이웃의 위치로 본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이어 예수는 말합니다. “가서 너도 이(사마리아인)와 같이 하라.”(눅 10:37)
성경을 덮고 나니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그렇다면 내 이웃은 누구일까? 지금 이 순간, 억울하게 빼앗겼는데도 외면당하고 고립되어 있는 나의 진짜 이웃은 누구인 걸까? 아찔하게도 꽤 많은 사람이 떠오릅니다. 용산참사, 쌍용차, 세월호 유가족, 장애인, 그리고 우리가 만나왔던 홀몸 어르신.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생각하니, ‘정치에 중립을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정작 함께 있어야 할 존재들로부터 제일 먼 곳에 숨어버린 교회들이 함께 떠오릅니다. ‘이웃’이라는 단어 앞에도, ‘신앙공동체’라는 단어 앞에도 ‘자신들을 위한’이 삽입된 것 같아 서글퍼집니다.
보이지 않는 곳의 따스한 손길들
다시 첫 구절을 바라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 한 문장에 담긴 내용을 어찌 다 가늠할 수 있겠냐만, 어쩐지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돌아보게 됩니다. 우월감에 도취한 채 내미는 수혜의 손길,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에 내미는 가면 쓴 손길, 준 만큼 되돌려 받고 싶은 마음에 내미는 나를 위한 손길. 내미는 손은 하나인데 그 마음에는 여러 가지가 담겨 있나 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 손길 말고, 네 몸 하나를 그토록 사리는 만큼 네 이웃도 그렇게 아끼라고 말하나 봅니다.
그러고보니 난 얼마나 내 몸을 존중하고 있는지 살피게 됩니다. 끼니는 영양가 있게 고루 먹었는지, 옷은 따뜻하게 잘 걸치고 있는지, 잠잘 곳은 편안한지, 맑은 공기는 마시고 있는지, 소중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잘 듣고 있는지. 그렇게 몸을 둘러싼 세상을 더듬어보니, 새삼 내 몸이 건강해지려면 다른 사람의 몸도 건강해야 한다는 걸 배웁니다.
이전에 한 농부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네가 먹는 밥 한 끼에 얼마나 많은 생명의 손길이 담겨있는지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때 처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햇살과 바람과 흙이 건강해야 자라는 벼도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을요. 그 벼를 돌보는 농부의 심신이 건강해야 그것을 먹는 우리도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을요. 돌아보니 눈에 보이지 않아 소중한 줄 몰랐던 수많은 존재가 실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이웃이었습니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고, 노동권을 위해 투쟁하는 분들이 있기에 우리는 좀 더 나은 근무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다행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따금 따뜻한 소식이 전해져옵니다. 소외된 사람, 버려진 동물, 학대받는 자연과 이웃 사이를 맺고 사는 몇몇 교회들의 이야기입니다. 신이 만드신 모든 숨결을 존중하고 품어내고자 고민하는 흔적이 담겨 있습니다. 예배 때마다 버려지는 주보 용지를 재활용하고, 화학 약품을 사용하지 않는 농사를 짓고, 유기 동물들을 돌보고, 다른 교회에서는 외면하는 사회적 소수자들과 더불어 예배하는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에는 가톨릭에서 반려동물을 축복해주는 의식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동물은 신께서 친히 만드시고 보시기 좋았다고 말씀하신 존재이며, 인간에게 반려동물은 더없이 사랑스럽고 가족과도 같은 존재임을 인정한 것이지요.
이처럼 조금씩 이웃의 경계를 허물기 위한 노력을 마주하고 있으면, 많은 기독교인이 좋아하는 구절이 떠오릅니다.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 참조) 의로운 신 외에 의로운 존재는 하나도 없음을, 그렇기에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말하는 구절입니다. 머리로는 끄덕여지고 입으로는 암송되는 이 구절을 우리는 얼마나 행하며 사는 것일까요. 내 눈 속의 들보는 선이지만, 남의 눈 속의 티는 악이라는 기준. 말로는 판단의 기준을 신에게 둔다고 하면서, 정작 신의 자리에 있던 건 자신이 아니었는지요.
오늘도 저희 동네에는 교회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수요일 저녁이면 몇몇 할머니들의 목소리만 무반주로 흐르던 교회였습니다. 보기 드물게 여성 목사님의 설교가 퍼지던 교회였습니다. 소리 없이 생겼다가 소리 없이 사라진 이 교회의 존재를 다른 교회들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한 동네에 들어선 수많은 교회가 서로의 존재를 외면하고, 서로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보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제는 내 교회 신자, 네 교회 신자로 이웃을 가르려는 욕심은 내려놓고, 함께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조각난 동네를 잇다 보면, 구석 어딘가에서 빼앗기고 방치되어 더는 홀로 살아내기가 버거운 존재를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 존재가 사람이든, 동물이든, 꽃이든, 교회이든, 그와 더불어 먹으라 했던 신의 마음이 당신에게도 피어난다면 참 좋겠습니다.
명랑마주꾼 단비
‘명랑마주꾼’(www.hellomapo.com)은 서울 마포구 성산동을 중심으로 도시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고립에 주목하여 활동하는 비영리단체다. “삶은 진지하고, 예술은 명랑하다”는 기치 아래 다큐 영상, 에세이, 그림, 음악 등 문화예술을 활용하는 이 단체의 이름에 들어 있는 ‘명랑’은 고립되고 소외된 마음을 마주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글을 쓴 명랑마주꾼 ‘단비’는 시골풍경이 좋아서 옥상에 스티로폼텃밭을 수줍게 가꾸면서, 이유 없이 프랑스 동화를 번역하고 싶어져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