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죽음들, 교회가 응답해야 하지 않나요?”
[314호 레드레터 크리스천] 홈리스들의 젊은 벗, 박사라 ‘홈리스행동’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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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과상황 오지은 |
“예수님이 지금 이 땅에 오신다면 노숙인들을 찾아가실 것”이라던 선배의 말에 자원봉사로 참여한 게 시작이었다. 대학원에 다니던 2008년 기독학생 훈련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 뒤로 거리의 노숙인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관계를 쌓아가면서 그들이 왜 ‘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많은 것들이 궁금했던 그는, 그로부터 2년 뒤 홈리스 사역 단체에 정식 활동가로 투신했다. ‘홈리스행동’의 박사라(31) 간사 이야기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토 박아 놓았다. 그러나 이를 마땅하고도 당연한 권리로 알지도, 누리지도 못하는 이 땅의 홈리스들은 오늘도 한 조각 육신을 누일 곳을 찾아 차가운 밤거리를 헤매고 있다. “길거리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죽어가는 현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 사회는 미쳤다”며 격정을 토로하는 박 간사는, 인터뷰를 하러 찾아간 날도 연말에 있을 ‘노숙인 추모제’ 준비로 분주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인터뷰는 작년 11월 10일, 서울 용산경찰서 인근의 홈리스행동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 ‘홈리스행동’이 어떤 단체인지 소개해달라.
2001년 12월에 시작된, 노숙인을 돕는 ‘노숙인 복지와 인권을 실천하는 사람들’(노실사)이 전신이다. 2010년 2월에 ‘홈리스행동’으로 단체명을 바꾸었다. ‘노실사’는 사회복지사들이 주축이 된 모임이었는데, 노숙인에 대한 법적 지원을 요구하고 주장했었다. 당시 IMF 경제위기 이후 급증한 노숙인 문제에 대한 지원 프로그램이나 사업이 많았었지만, 정작 이분들이 아플 때는 치료를 못 받는다거나 예산 삭감으로 인해 의료 지원을 제대로 못 받았다. 그래서 의료 지원체계의 문제를 짚었고, 자립 기반이 마련되지 않아서 사회 복귀나 탈(脫)노숙에 어려움을 겪는 노숙인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법안을 만들도록 촉구하는 일을 했다. 또한 노숙인 문제 당사자들과 함께 목소리를 내는 활동도 벌였다.
그런데 거리의 노숙인 문제뿐 아니라 쪽방이나 고시원에 살던 분들이 노숙인으로 넘어가는 문제도 만만치 않았는데, 이는 일자리 상실과 의료 문제 등과 복합적으로 연결되는 문제여서 ‘안정된 주거가 없는 빈곤 상태’인 홈리스 문제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홈리스행동으로 명칭을 바꾸고 활동 폭을 넓혔다. 길거리 노숙인이나 쪽방, 고시원 거주 홈리스 분들을 위한 야학은 그 결과물 중 하나다. 홈리스행동으로 이름만 바뀐 게 아니라, 더 넓은 의미에서 노숙인 문제를 빈곤의 문제로 보고 활동 범위까지 확대했다. 현재 상근활동가가 모두 네 명인데, 한 명은 1년간 안식년 중이다.
― 사무실 입구에서 <홈리스뉴스>를 봤다. 후원회원 뉴스레터인가?
노실사 시절부터 <떨거둥이>라는 노숙인 당사자 이야기를 담은 소식지를 냈는데, 홈리스행동 때부터는 타블로이드 신문 형태로 발행한다. 하루 몇 백 명이 이용을 하니까 많이 비치하고 있다. 매월 2천 부 정도 인쇄하여 종합보호시설이나 자활시설로 우편발송 한다. 250~300곳 정도의 후원회원들에게도 보내지만, 주된 독자는 거리의 노숙인들이다. 그분들에게 필요한 정보와 소식을 실어서 서울시 무료급식장 같은 노숙인 지원 시설에 배포하고 있다. 우리가 직접 가는 지역에만 배포된다는 한계가 있긴 하다.
― ‘무료급식장’이라고 했는데, 좀 생소한 명칭이다.
노숙인 법에 규정된 급식 시설을 ‘급식소’라고 하는데, 시설 여건이 거기에 못 미쳐서 ‘급식장’이라 부른다. 이른 바 ‘디자인 서울’을 내세웠던 오세훈 시장 때 노숙인 급식 시설이 없어져서 길거리에서 굶는 사람이 많았다. 시장이 바뀐 뒤, 제대로 된 급식을 할 수 있는 공간, 남 눈치 안 보고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서울시에 요청해서 시 차원에서 건물을 마련한 걸로 기억한다. 2016년 5월이던가, 4층 건물에다 급식 공간을 배치하고 도서관이나 사무실도 생기더라. 그 건물 짓고 급식장 시작할 때 주변 상가에서 반대 많이 했다. 물론 급식장으로 급식봉사 오는 단체들도 많았는데, 종교 행위(예배)가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배드리고 나면 건빵 한 봉지 주거나, 후원받았다면서 출처 불명의 음식을 가져오는 식이었다. 대부분 생색내기였고 직접 조리한 음식을 제공하는 경우는 없었다. 노숙인 법에 따르면 관리감독 하에서 위생적인 음식을 제공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론 그게 안 되니까 노숙인 분들은 건빵 한 봉지 죽 한 그릇 먹으려고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눈치 안 보고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만으로도 많아 나아진 거다. 식사하시는 분들에게 물어보면, ‘굴러 가려고 연료 섭취하는 거’라고들 하셨다. 나중에는 급식봉사 때 종교 행위는 기도만 하는 정도로 바뀐 걸로 안다.
주거나 일자리 문제는 수치로 드러나는 반면, 급식 문제는 가시적인 성과 측정이 어렵다 보니 예산 배정도 잘 안 되는 거 같다. 식사의 질이라는 게 건강과도 직결되는 문제 아닌가. 균형 잡힌 영양 식단을 먹어야 ‘굴러 가면서’ 일도 하고 건강도 유지해나갈 수 있을 텐데 식사가 부실하니 건강 문제로 다 나타난다. 몇 년 후에 다시 만나면 젊은 사람도 옥수수 알 빠진 것처럼 치아가 하나도 안 남아 있다.
― 홈리스의 경우, 안정적인 주거 문제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쪽방 독거인이 돈 없으면 길거리 노숙인 되는 거고, 노숙인이 노가다 해서 24만 원 생기면 쪽방 들어가는 거다. 이분들이 인간으로서 머물 수 있는 최소한의 사적 공간이 필요한데, 전에는 피시방에서 지내곤 했다. 반나절 노가다 하고 피시방 가서 잠시 쪽잠이라도 눈 붙이는 거다. 그런데 서울역 주변으로 상가들이 새로 들어서면서 그 많던 피시방이 많이 없어졌다. 홈리스 분들이 머물 공간이 그만큼 사라져 버린 것이다.
― 길거리 노숙에서 쪽방으로 옮겨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거리 노숙에서 쪽방으로 진입할 수 있는 경로는 여러 가지다. 우선, 일용직을 뛰어서 하루 혹은 며칠 일해서 번 돈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다음으로, 임시주거비 지원이 있는데 까다롭긴 하지만 그게 되면 들어갈 수 있다. 노숙생활이 6개월 미만일 때 긴급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 선정 절차가 까다로워서 수요에 비해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쪽방에 들어가면 사례 관리를 통해서 쪽방 거주가 유지되어야 하는데, 선정 기준에 부합되지 않아서 다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시설 싫어하는 분들은 아예 계속 나와서 지내신다. 쪽방이나 고시원은 거리 노숙을 일단 벗어나는 주거 형태인 거고, 거기서 지내다가도 (정부 지원이든 개인 수입이든) 조건이 안 되면 금세 다시 노숙으로 돌아오는 거다. 게다가 쪽방 밀집 지역들이 개인(소유주) 용도 변경이나 도심 재개발 영향으로 큰 건물이 들어서면서 계속 소멸되어가는 추세다. 그 결과 얼마 남지 않은 쪽방은 가격(주거비)이 그만큼 또 올라가니까, 재개발 때문에 쫓겨나간다.
― ‘홈리스 야학’은 어떻게 운영하고 있나?
홈리스 상태는 경제적인 빈곤뿐 아니라 교육과 문화로부터 배제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분들은 문화를 누릴 여력이 없으니 술 마시는 것밖에 달리 할 게 없다. 과거 노실사 때 노숙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활동으로 거리에서 공연이나 영화, 그림 그리기 등을 한 달에 한 번씩 진행했다고 들었다. 하다 보니 한글 모르는 분들도 상당히 있고, 또 컴퓨터 하고 싶어하는 분들도 적잖았다. 그분들이 세상과 소통할 기회라 여겨서 주말 배움터를 열어 한글도 배우고, 노래도 함께 부르고, 기타나 오카리나 연주 그리고 요리 교실도 열었다. 컴퓨터는 주로 주말에 한글 사용법을 중심으로 배웠는데, 여러 명이 함께 수업할 공간이 없어서 봉고차 안에 컴퓨터 여러 대를 쑤셔넣고 옮겨다니며 넓은 사무실 공간을 공짜로 빌려주면 거기서 짐 풀고 설치했다가 다시 정리하는 데만 수십 시간이 걸렸다. 마치 떠돌이 유랑극단 같았는데, 홈리스행동으로 단체명을 바꾸고 활동범위를 넓히면서 빈곤운동단체들이 연대해서 ‘아랫마을’이라는 공동 공간을 마련하면서 수업 공간으로도 활용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홈리스 분들이 주말에만 만나는 게 너무 아쉽다고 해서 월, 화, 수요일 3일로 늘어났다. 2010년 8월말부터 주말 배움터에서 ‘야학’으로 전환하면서 훨씬 더 안정적으로 운영해 왔는데, 월·화요일에 기초 학문이나 문화 활동을 진행하고 수요일에 홈리스 관련 정책이나 사업에 대해서 배우는 ‘권리 수업’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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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과상황 오지은 |
― 어떤 계기로 홈리스행동 활동가로 일하게 되었나?
대학원 재학중이던 2008년에 기독학생 훈련프로그램에 참여했었는데, 선배가 불러서 갔더니 생뚱맞게 ‘예수의 현장성’을 얘기하면서 “예수님이 지금 이 땅에 오시면 어디 가겠냐” 묻더라. 난 평소 장애인에 관심이 많아서 장애인들 찾아가실 거라고 했더니 선배가 “노숙인들 찾아가실 것”이라고 하더라. 그 말이 크게 와닿아 영등포 지역 노숙인 상담활동에 자원봉사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매주 목요일에 노숙인 만나는 자원활동단체로 가서 거리에 계신 분들을 대놓고 만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두 달 따라다니다가 그 뒤로 조금씩 궁금한 거 물어보고 대화하면서 관계가 쌓이다 보니까 진짜 의문이 들더라. ‘이분들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왜 거리에서 잠을 자야 하나? 어디에서 밥을 먹고 몸 아플 땐 어디서 치료를 받나?’ 많은 것들이 궁금해졌고, 워낙 친해지다 보니 내 얘기도 하고 그분들 살아오신 얘기도 듣다가 답답함을 느꼈다. 전에도 야학 교사도 하고 봉사 활동하면서 아이들도 만나봤는데, 노숙인에 비하면 다른 분들은 그마나 처지가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리 수업에도 참여하면서 점점 더 문제의식이 쌓여 갔고, 노실사에서 홈리스행동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나도 마음이 움직여서 정식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그게 2010년이었다.
― 자원활동까지 합쳐서 8년간 일해왔는데, 이제는 거리에서 만난 분들이 단순히 봉사 대상이 아니라 한 분 한 분 사연을 지닌 개별적 존재로 보일 것 같다.
매주 만나니까 친척보다 친밀하다. 정해진 시간에 꾸준히 찾아가니까 나를 기다려주신다. 나도 갈 때 빈손으로 안 가고 먹을 거라도 챙겨들고 가고, 그렇게 친해지니까 그분들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실감할 수밖에 없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눈에 보이니까 더 마음이 쓰이고, 특히 여성 홈리스 분들은 아무래도 더 마음이 쓰인다. 이분들이 왜 거리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비슷한 패턴이 발견되는데, 그걸 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된 구조적 문제들, 불평등한 사회 구조 말이다. 이 사회가 미쳤구나, 길거리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다가 죽어가는데도 이걸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다니…. 기독교인으로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홈리스행동 활동가로 일하면서 이른바 ‘무연사’나 ‘고립사’를 얼마나 목격해왔나?
거리에 있는 분들은 한동안 안보이면 걱정이 된다. 그러다 한참 지나서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곤 한다. 지하도에서 노숙하는 경우는 아침에 다같이 잠자리 접고 분주할 때 안 움직이는 분 있으면 죽은 거라고 한다. 그렇게 돌아가신 뒤 고인의 시신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처음엔 몰랐다. 그런데 50대 초반의 (주거 지원) 수급자 한 분이 자활사업에 참여하시다가 쉬는 시간에 앉은 채로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일이 있다. 형제들이 있어서 연락이 갔지만 돈이 없어서 장례를 못 치르겠다고 해서 우리(홈리스행동)랑 ‘동자동 사랑방’이 함께 장례를 치러드렸다. 죽음을 곁에서 직접 목격하진 못했지만, 죽음 이후가 이런 거구나 얼핏 느꼈다. 가족들이 시신 인도를 거부하는 경우, 쪽방이나 거리에서 돌아가시는 분들 장례를 일일이 다 치러드릴 수도 없고 참 난감하다. 무연고 사망 관련 장례법이 있는데, 그에 준해서 무연고 사망자로 처리한 뒤 보통은 영안실에 모셨다가 화장하고 끝낸다. 어떤 분은 수십 년 만에 매형과 연락이 닿았는데 자기들이 장례하겠다고 해서 가보니까 장례식 하면서 조문을 받아서 조의금을 받고 있었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분이었는데, 우리가 조문을 가니까 창피한지 고인이 노숙인이었다는 건 밝히지도 않더라.
―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분이 있나?
2008년도부터 재작년까지 계속 거리에서 만나온 염 할아버지가 있다. 2010년에 쪽방으로 모셨고 수급자가 되신 분인데 내 결혼식 때도 오셨다. 우리 사무실이 서대문에 있을 땐 서대문 근처에 방을 얻겠다고 하셨는데, 나도 걱정이 돼서 가까이 계시라 했다. 70대 중반에 걸을 힘도 없어서 고시원에서만 지내셨는데, 응급상황에서 병원에 모시고 갔지만 응급실에 방치된 채 있다가 보호자가 없다는 이유로 입원을 거부당했다. 할아버지가 주거 지원 수급자인데다 모시고 간 병원이 3차병원으로 큰 병원이었는데 입원비 부담 능력도 없고 보호자도 없다고 입원 거부당해서 쩔쩔맸다. 간병할 사람도 없지 않느냐 해서 우리가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간병할 테니 입원시켜달라 했지만 어렵겠다면서 저렴한 요양병원을 소개해주었다. 거기 모셨을 때 말끔히 씻고 나서 김밥 먹고 싶다고 하셨는데, 다음날 문안 갔더니 돌아가셨더라. 찾아보니 가족이 있어서 아들과 딸에게 연락을 했더니, 시신 인도를 거부해서 시신포기각서를 받은 뒤 ‘나눔과나눔’에 연락해서 공영 장례 절차에 따라 화장을 했다. 화장한 무연고 사망자의 유골은 하나의 유골함에다 그냥 계속 쏟아붓는다. 그걸 산골(散骨)이라고 한다. 염 할아버지의 경우, 자식들이 돈이 없어 시신 인도를 거부한 게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베트남전 참전 유공자로, 사우디에도 건설 노동자로 갔었고, 해외에 가서 고생해서 번 돈을 모두 가족들에게 보내셨다. 그 돈으로 자식들은 공부도 하고 할 건 다 했더라. 할아버지는 귀국한 뒤 건설붐 일었을 때 빚을 내 덤프트럭을 샀는데 연쇄 부도 때문에 일감은 없고 트럭 사느라 얻은 빚으로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가족들 사이도 소원해졌다. 그런 분들은 제대로 된 직장을 잡기가 거의 어렵다. 설령 일이 있어도 규칙적이지도 않고. 그렇게 오랜 세월을 홀로 살아오셨는데, 이 경우 ‘국가보다 가족이 수급 신청자를 부양해야 한다’는 부양의무자 제도가 문제다. 가족과 단절된 세월이 이미 십수 년인데, 자녀들이 돈 많이 벌면 뭐 하나. 법적으로는 가족이어도 실질적으로는 할아버지에게 1원 한 푼 안 보내는 남인데.
― 염 할아버지를 꽤 오랜 기간 돌봐드렸는데, 자식들에게 거부당해 무연고 장례를 치렀을 때 심정이 어땠나.
눈물밖에 안 나왔다. 동정이 아니라, 어쩌다 생의 마지막이 이렇게 되셨을까 싶었다. 할아버지 살아계셨을 때, 찾아갈 때마다 불이 꺼져 있었다. 불이 높은 데 있으니까 켜지도 못하시고, 방 안에는 담배 냄새가 매캐한데 몸이 아프니 치우시지도 못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외로운 생활을 할 수가 있을까’ 말문이 막혔다. 집 안에만 혼자 계시니까 위험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요양원 같은데 모시려 했는데 싫다고 고집을 부리셨다. 어떻게든 외부랑 연결시켜드리고 싶었는데 잘 안 됐다. 뵈러 갈 때 쪽방에 짙게 배인 담배냄새 날 때마다 너무 외롭다고 느껴졌다. 침대 밑에 똥 싼 바지가 있는 날도 있었다. 화장실 가기도 힘드시니까, 창피해서 그렇게 밀어 넣으신 건데 그런 모습이 또 너무 가슴 아프고….
돌아가신 뒤 고시원에서 계속 할아버지 짐 치우라고, 손님 받아야 한다고 연락 와서 안식년 들어간 활동가 하고 짐을 치우러 갔는데, 방 구석에 봉지 하나 꺼내면 바퀴벌레가 수십 마리 몰려나왔다. 냉장고를 여니까 사면이 다 시커멓게 썩어 있고, 방 정리를 하는데 너무 외롭게 느껴지더라. 국가유공자 관련 서류는 여기저기 막 꽂혀 있고, 손이 닿는 데마다 과자나 담배 부스러기가 있고, 끊임없이 쓰레기가 나오는데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대형 쓰레기봉투 두 포대가 나왔는데, 안경, 사진, 새 양말 몇 켤레 말고 쓸 만한 거라곤 성경책 하나 나왔다. 딴에는 찾아뵙는다고 했지만, ‘철저히 외로웠겠구나’ 자괴감이 들었다.
―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하는 일이 회의가 들지 않나?
돌아가셨다는 소식 접했거나 장례 치를 땐 그렇진 않았다.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우리를 알고 있어서 우리라도 이분을 보내드릴 수 있구나 싶어서. 회의가 드는 건 제도적인 한계에 부딪힐 때다. 부양의무제 기준 때문에 홈리스 분이 쪽방에서 지낼 수 없는 상황이 생기면 속이 터지고 홧병이 날 지경이다. 제도적인 개선이 안 되는 사이에 자꾸만 벼랑으로 내몰리는 죽음들, 거리에서 죽어가는 죽음들을 보면서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럴 땐 미칠 것 같은 심정이 든다. 일을 하다 보면 제도뿐 아니라 사람한테 화나는 경우도 있다. 개인 탓이 아니라, 차별을 너무 당하며 살다 보니 무기력해지는 모습들을 자주 목격하는데 그럴 때마다 또 화가 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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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과상황 오지은 |
―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인가.
30대 초반의 젊은 분인데, 중학교 나와서 일용직으로 중국집 주방 일을 하다 다쳤다. 그 때문에 한참 쉬다가 돈이 떨어져서 고시원에 사정도 못해보고 거리로 나온 분이었다. 거리 생활하다가 나를 만났는데, 긴급 복지지원을 신청하자고 해서 쪽방을 들어갔는데, 제대로 일을 나가지 못해서 방세도 제대로 못내다가 결국 도로 거리로 나왔다. 왜 연락 안했냐니까 도와달라고 하기 미안해서 그랬다고, 그렇게 눌려 지내온 모습을 보면서 답답한 마음에 ‘나이도 젊은 분이 그러면 어떡하냐’고 화를 냈다. 그분은 자신이 20년 넘게 해온 일이 있었지만, 실패만 거듭해온 인생 경험 탓에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는 거였다. 사회 안전망의 혜택에 대해 소개 받거나 교육 받은 적도 없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도 모르게 화가 나고, 내가 답답하게 왜 이러고 있나 싶기도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 무연사나 고립사를 인간관계 결함이나 의지력 결핍, 경제적 노력 부족 등으로 인한 ‘개인적 문제’로 보는 시각이 있다.
서울역 주변에 흔히 눈에 띄는 분들을 보면서 하는 말일 거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말하는 건, 이분들이 처음부터 거리에 주저앉아서 술만 먹거나 노숙하면서 아무 일도 안 한 게 아니라는 거다. 그분들 한 분 한 분 만나보면 노숙의 상황으로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인력시장에는 새벽마다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뽑아가는 인원은 정해져 있는데, 나이 제한이나 건강 상태, 혈압 체크에서 걸리면 현장에서 ‘빠꾸’당할 수밖에 없다. 누가 80대 할아버지에게 노가를 시켜주겠나. 다들 일하고 싶지만 인력시장 진입에 제약이 크다. 그래도 그분들은 계속 시도한다. 재래시장 같은 데 가서 짐 끌어주는 일도 하려고 하고, 여성 홈리스의 경우 봉제공장에서 일했던 분들은 하월곡동 같은 데 돌아다니면서 일자리를 찾는다. 노숙인 종합지원센터 구직등록처도 계속 찾아가고, 인터넷 하시는 분들은 워크넷으로 일자리를 계속 알아본다.
문제는 계속 시도는 하지만 일을 한다 치더라도 경제적 빈곤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거다. 노숙인 일자리들이 한 달에 15일 일해서 50만 원 버는데, 방 구하고 나면 생활 자립이 어렵다. 게다가 단기 저임금 일자리라서 의욕을 갖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공공근로 같은 경우는 6개월 지나면 다시 일이 없어진다. 공공연한 차별도 문제다. 예전 이명박 정부 때 대형 건설 사업과 연계해서 노숙인 일자리 사업을 벌였는데, 현장에서 일하는 노숙인들의 안전모에 ‘노숙인’ 딱지를 붙여 놓아서 왕따를 당했다. 한 번 노숙인 딱지가 붙으면 같이 말도 안하고 밥도 안 먹는다. 그런 거 못 견뎌서 나온 분들이 적지 않았다. 이건 차별에 차별을 얹은 거다.
이분들 신발이 정말 빨리 닳는다. 여기저기 일자리 찾아 계속 돌아다니고, 그런데 계속 실패만 거듭하니까 ‘난 안돼’ 하면서 술을 마시게 되고, 그게 또 알콜의존증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손가락질 당하는 대상이 되고 그것 때문에 괴로우니까 또 술을 마신다. 이 과정이 무한 반복되고, 결국 그분들에 대한 인식은 공공장소를 차지하는 ‘불필요한 인간들’이 되는 거다. 배고프니까 라면이라도, 술이라도 한 잔 먹으려면 구걸을 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그걸 노동이라고 보지만 정작 시민들은 그분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취급하고 때리기도 한다. 경찰들도 그분들을 함부로 대하고, 언론에 비치는 것도 부정적인 화면들뿐이다. 정작 노숙인들 가운데 돈 생기면 다 풀어서 다른 노숙인들이랑 함께 나눠 먹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 홈리스 문제에 대해 교회의 대응은 어떻다고 보나.
처음엔 교회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어느 순간부터 진실을 알게 되었는데 홈리스 분들이 그러더라. “더럽고 치사하다. 나 불교신잔데 예배 참석해야 밥 주고, 꼭 뭘 해야 밥을 준다.” “새벽부터 교회 찾아다니면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할렐루야 난리 치고 나면 4천원 받고, 거기 끝나면 다른 교회 가서 예배드리고 또 천 원 받는다. 일요일이 제일 바쁘다.” 그분들 얘기 듣고 깜짝 놀랐다. 예배드리면 돈을 준다고? 돈으로 사람을 채우고 돈으로 예배 참석 대가를 지불한다? 그뿐 아니었다. 예배에 참석하면 따로 구분해서 앉힌 뒤 예배 중에 ‘노숙인들 위해 기도해드리자’면서 일으켜 세우는데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피해서 정말 가기 싫다고, 그래도 돈을 주니까 그 돈 몇 푼 때문에 간다고 하더라. 교회가 결코 순수한 마음에서 구제금을 베푸는 게 아니구나 생각했다. 교회마다 다르지만, 홈리스 분 1인당 500원을 책정한 교회도 있다. 어이가 없어서 목사님한테 얘기했다. 교회가 인색하기도 하지만, 거리의 홈리스를 세심하게 배려하지 않는구나, 먹는 걸로 더럽고 치사하게 굴고 예배 참석 대가로 500원, 천 원 주면서 약자를 멸시하는구나 싶었다.
교회는 문턱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고가의 장비 때문에 다 문을 걸어잠갔다. 물론 우리 교회의 경우, 평소에 문을 열어놨다가 다 털린 적이 있긴 하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교회 문턱부터 안으로 들어갈 사람을 따로 구분하면서, 홈리스 분들이 교회 가면 ‘또 왔냐’고, 휴지 한 장 쓰려 해도 ‘물건 함부로 쓰지 말라’고 야박하게 대해야 하나. 예배와 관련해서도 조심스럽게 사랑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꼭 예배에 공개적으로 앉혀 놓아야만 예배를 드리는 건가. 이 문제에 관해서는 목사님이나 장로님들 생각이 바뀌셔야 할 거 같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급식 말고도 많지 않나. 사회적으로 제도 개선이나 법적 지원에 관해 홈리스 당사자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이를 반영해서 교단 차원에서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거다. 이를테면, 부양의무 제도 개선을 위한 설교를 할 수도 있지 않나. 사회문제를 교회가 약자를 위하고 섬기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게 중요하다. 교회 안에도 가난하고 소외되고 외로운 사람들이 많지 않나.
― 무연사나 고립사가 한국교회에 던지는 도전이 있다면…?
예전에 돌아가신 홈리스 분 중에 가톨릭교인이 있었다. 이분도 딱히 연고가 없이 돌아가셨는데, 장례 과정을 보면서 나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당시 그분 다니시던 성당에서 가톨릭장으로 장례를 책임졌는데, 기초생활수급자에 외로웠던 분이지만 같은 성당 신도들이 장례식장에 몰려와서 마지막 가시는 길이 외롭지 않고 시끌벅적했다. 성당 분들이 계속 와서 미사(예배)를 드리고, 장례식장이 비지 않게 돌아가면서 자리를 지켰다. 장례식 날에 고인의 관이 그 성당을 들렀다 가고 신도들이 장지까지 함께 가서 다같이 보내주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다. 모든 성당이 다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도 돈도 남은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수급자의 마지막 길을 공동체(성당과 신도들)가 정성스럽게 보내주는 모습을 보면서 교회도 이렇게 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절실했다. 실제로 돌아가신 분 중에 교회 집사님이 한 분 있었는데, 평소 다니시던 교회쪽에 물어보니까 고인의 장례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어서 많이 놀랐다. 고령화에다 인구절벽 시대가 오고 1인 가구가 점점 더 많아진다는데, 이게 국가 차원에서 대응해야 할 사회문제이기도 하지만 교회 차원에서도 선구적으로 가교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사랑의 공동체라고 말로만 백날 떠들면 뭐 하나.
아직은 많은 죽음을 지켜보지 못했지만, 지금도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기억이 생생하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살았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온 동네 분들이 몰려와서 집에서 장례를 치렀던 기억이 따뜻하게 남아 있다. 그런 게 공동체 아닐까. 죽음은 결국 삶의 다른 모습인데 우리 사회가 자연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공동체적으로 추모하는 여건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교회가 그런 분위기를 앞서 만들어갈 수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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