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전의 희미한 스케치

[314호 더불어 한몸살이] 프롤로그

2016-12-28     정동철 ‘반디마을’ 올인 멤버
   
▲ 그림: 정동철 제공

후우후우, 후루룩~.

이른 아침 건장한 남자 여섯이 작업복 차림으로 카페에 둘러앉아 어제 나온 청와대 발 낡은 뉴스를 안주 삼아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다. 아까워서 아껴먹던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말끔히 비우고 나서야 오늘의 작업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한다.

“자, 오늘은 명수와 병진이가 준웅이를 도와서 현관 쪽 데크 작업을 해주고, 주영이와 형기는 나랑 화장실 타일 작업을 하자. 주영인 지난번 기술학교에서 3개월간 타일 작업을 배웠으니 오늘 실력 발휘 좀 해봐.”

이렇게 몇 마디 브리핑만으로 형제들은 일사분란하게 제자리를 찾아가 능숙하게 제 몫의 일을 감당한다. 벌써 두 달째 이어지는 공사이다 보니 그럴 만도 하다. 우리 공동체는 최근 큰 도전 앞에 서 있다. 351평의 부지를 매입하여 네 가정의 주거 공간과 카페, 그리고 커뮤니티 센터를 리모델링하는 중이다. 공동체 형제들이 저마다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시간을 내어 혼돈 속에 있던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외부에는 거의 의뢰하지 않고 우리 공동체 형제들의 노동력으로 이 거대한 과업을 이뤄가고 있다.

어디 형제들뿐이랴! 때론 아이들도 이 노역에 큰 몫을 감당한다. 여느 아이들처럼 체험 삼아 재밌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지루하고 힘들지만 현장에 꼭 필요한 일들을 묵묵히 도와준다. 주로 벽돌, 잔디, 흙, 폐기물 같이 다양한 소재들을 다루지만 작업 내용은 단순해서 ‘나르기’가 대부분이다. 자매들은 형제들이 작업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 카페 일을 대신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일꾼들의 간식을 챙긴다.

때때로 교회 성도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함께 먼지를 뒤집어쓰기도 한다. 더러는 재정을 후원해주거나 간식을 지원해주기도 하는 훈훈함이 있다. 이게 다 돈 때문이다. 재정이 충분했다면 외주를 주고 말 일이었다. 그러나 넉넉치 않은 재정 여건 탓에 재정 절감을 위한 아이디어는 더욱 노동 집약적이 되었고, 다양한 사람이 함께 일할 시간도 많아졌다. 물론 하루에 할 일을 이틀 동안 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긴 하다. 그래도 함께 일할 친구를 얻었으며 여러 도움의 손길에 감동하면서 더디지만 별 탈 없이 일이 되어가고 있다. ‘반디마을’의 토대(platform)가 이렇게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여러 이름이 하나의 이름으로
우리 공동체의 이름은 ‘반디마을’이다. 전에는 ‘볕 좋은 동네’로 불렸고, ‘잇다 공동체’로 부르는 이들도 있었으며, ‘몸 된 교회’로 굳게 믿고 있는 이들도 있다. 이는 우리 공동체의 전체 그림을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오해이다. 새로운 터전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지금, 흩어져 있던 것들이 드디어 한 공간에 들어왔고, 이들을 아우를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다. 그래서 논의 끝에 작은 빛이 연합하면 큰 빛을 이루는 공동체가 되길 기대하며 ‘반디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부르기로 했다.

반디마을을 이해하려면 한 장의 약도가 필요하다. 그리 복잡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게 알 만한 모양도 아니라서 우리 공동체의 밑그림에 해당하는 간략한 설명을 하려고 한다. 2006년부터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세 가지 실험으로 공동체를 시작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지금 실재(實在)한다면 우리가 물리적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에서 그의 나라가 이뤄지도록 실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세 공간은 교회, 직장, 가정이다. 우리 공동체의 복잡한 이름들은 바로 이 세 가지 실험 때문에 생긴 것이다.

먼저 교회를 개척했는데 이 교회의 이름이 ‘몸 된 교회’이다. 그리고 함께 일할 일터를 만들어 보려고 카페와 인테리어업체를 만들었는데 이들이 각각 ‘카페 잇다’와 ‘디자인 잇다’이다. 이후 우리는 경주 변두리에 주거공동체를 시작했는데 이 이름이 ‘볕 좋은 동네’였다. 이들의 중심엔 ‘올인(all in) 멤버’ 네 가정이 존재한다. 이 네 가정은 재정을 통합하여 공유하고 나눠 쓰며 살아가는데, 이 모든 실험의 중심에 서 있다. 최근 우리는 교육도 함께하고 있다. 홈스쿨을 연대한 ‘빌리지 스쿨’(마을 학교) 형태를 넘어 성인 대상의 평생교육까지 고민하면서 학교 이름을 ‘반디배움터’라 부른다.

결국 ‘반디마을’이라는 하나의 이름 안에 서로 연계성이 없어 보이는 이름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세 가지 실험’이라는 하나의 정신에서 시작된 조직들이며 우리 공동체의 열정과 고민이 녹아든 현장이다. 또한 앞으로 써나가게 될 공동체  이야기에 등장할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 기억을 끄집어내야 한다. 지금 내 눈 앞에 역동적으로 꿈틀대는 이 공동체가 그 땐 그저 흐릿한 ‘연필 스케치’ 같았다.

이십대 시절, 그의 죽음에서 삶을 깨닫다
1999년 여름, 나는 스물아홉의 나이로 IVF(한국기독학생회) 간사가 되기 위해 면접을 받고 있었다. 면접관이 내게 던진 질문은 사역의 방법론에 대한 것이었다.

“자네는 포항이라는 지역으로 가서 개척 사역을 하게 될 텐데, 어떤 방법으로 사역을 감당하려고 하나?”

잠시 호흡을 고르며 생각한 뒤, 평소 마음에 담아두었던 진솔한 고백으로 답을 대신했다.

“제가 지금까지 이 공동체에 남아 있고 사역자로 헌신하도록 제 삶을 바꾼 원동력은 함께 살면서 나를 다듬어 준 형제들의 열정입니다. 저는 어떤 가르침과 나눔보다 함께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간사가 된다면 제가 섬겨야 할 친구들과 함께 살면서 삶으로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땐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알지 못하였기에 1분만에 내뱉어 버렸다. 세월이 흘러 그 순간을 추억할 때면 ‘내가 아무것도 몰라서 용감했구나’ 생각이 든다. 그러나 모르고 시작한 그 일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이라는 확신은 변함이 없다. 그때 모난 나를 품어주었던 IVF의 형들도 나처럼 부지중에, 아무것도 몰라서 선을 베풀었던 걸까?

1991년에 새내기로 입학한 울산대학은 당시 타지 유학생이 많았다. 기숙시설이 부족해서 자취방 임대업이 성행했으며 IVF 형제들이 삼삼오오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 무렵 나도 자취를 했는데 타지생활로 외로움을 많이 탔던 터라 자주 그들의 공동생활구역을 기웃거리곤 했다. ‘IVF 하우스’로 불렸던 그 소굴(?)에는 나처럼 뭘 모르는 친구들이 득실거렸다. 밥도 많이 축냈다. 별다른 반찬도 없었는데 거기에 둘러앉으면 이상하게 입맛이 더 당겼다. 밤이 길었던 겨울엔 이런 저런 얘기로 시간을 보내다가 자고 온 적도 많았다. 어느 해 여름엔 폭우로 내 반지하 자취방이 침수되어 아예 몇 주 동안 얹혀 살기도 했다.

군입대 이후 휴가 나오면 젤 먼저 달려갔던 곳, 제대 후 자취방이 되어 버린 곳, 그곳에도 분명 희노애락이 존재했을 텐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형들의 웃는 얼굴만 생각이 난다. 혈육보다 더 따뜻했던 이 ‘주거공동체’ 안에서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말뿐 아니라 생활로 실현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체득했고,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제자도요 영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갔다. 그때 함께 살았던 형들 중에는 이름도 생소한 투르크메니스탄이라는 나라에서 순교한 손병수 선교사가 있었다. 병수 형은 내게 그저 잘해준 선배가 아니었다. 당시로서는 내가 알 수 없었던 확신에 차서 이해할 수 없는 곳으로 훌훌 떠나버리더니 어느 날 충격적인 죽음으로 돌아와 나의 신앙과 소명을 태풍처럼 흔들었다.

1년 여 간 그의 죽음의 의미를 알지 못해 방황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알고 싶었던 죽음의 의미에 대해선 아무런 답을 얻지 못한 채 거꾸로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 죽음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나는 거기에 너무 집중했던 것이다. 죽음은 하나님의 몫이다. 방법과 때는 그분의 손에 달렸다. 그러므로 한 인간의 삶을 회고할 때 그의 죽음을 본받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한 인간의 선택이며 열정이기 때문이다.

급히 형이 남긴 삶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사고로 죽던 날까지 성실히 현지 언어를 공부하던 노트, 친절하고 부지런해서 기억에 많이 남아있다던 하숙집 아주머니의 인터뷰 내용, 맑고 깊은 영성으로 주변 사람들을 정화시켜주었다는 동료들의 증언, 그리고 내 기억 속 형의 모습은 순수하고 재밌고 사랑이 넘쳐서 투르크메니스탄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로부터 방황은 끝이 났고 그가 죽도록 좇아간 예수님을 나도 따라 살아보고 싶어졌다. 때마침 IVF에 캠퍼스 간사가 필요했고, 자질이 부족한 줄 알았지만 결과는 내게 속한 것이 아니었고 나의 선택은 그분의 음성에 반응하는 것이었기에 지원서를 써냈다.

실패와 위태로움 가운데로 뛰어들다
모르고 덤빈 용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해 IVF 포항지역 간사가 되었고 면접 때 말한 대로 학생 한 명과 함께 자취방을 공유하여 살며 사역을 시작했다. 함께 살아서 불편한 것들은 학생 시절 이미 경험한 것이었으므로 대체로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다만 그 친구를 위해 일상생활을 지도하는 차원에서 이런 저런 잔소리를 한 게 문제였다.

“물을 다 마신 빈 물병은 냉장고에 그냥 놔두지 말아라.” “이불 위에서 라면 뽀개 먹지 말아라.” “늦게 들어오게 되면 언제쯤 들어오는지 미리 연락이라도 해라.” “나 없을 때 친구들 데려와서 몰래 게임하지 말아라.” 뭐 이런 내용이 주를 이뤘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학생들이 부쩍 나를 어색하게 대한다 싶더니 마침내 한 친구가 다가와 면담을 요청했다. 그 친구는 자기 문제가 아닌 나와 자취하던 친구에 대한 이야기였다.

“간사님, K에게 좀 잘해주세요. K가 간사님 너무 힘들다고 만나는 친구들마다 하소연을 하고 다닙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랬구나, 힘들었구나…. 짜식, 나한테 직접 말하지….’ 이런 저런 생각에 잠이 오질 않았다. 사실 그 친구는 입대를 앞둔 상황에서 자신의 방만한 생활습관 때문에 군 생활에 자신이 없다며 ‘생활지도를 해달라’고 해서 서로 합의하에 했던 일이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나의 사역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것과 훈계하여 다듬는 것, 삶의 본이 되는 것을 어떻게 적절히 융합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렇게 무지와 미숙함 가운데서도 분명한 건 내가 조금씩 자라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학생들과의 공동생활로 사역의 구심점이 형성되어 가고 있을 무렵, 이런 사역 방식이 일대 위기를 맞게 되었다. 내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게 된 것이다.

2002년 봄 나는 결혼을 했고 사역 방식도 불가피하게 궤도 수정을 해야만 했다. 결혼 후 아내는 누군가 우리 집을 방문하고자 한다면 3일 전에 미리 약속을 잡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 요청을 거의 들어준 적이 없다. 청년의 시기가 그러하듯 그들의 필요는 늘 느닷없고 다급하다. 적시를 놓치면 실마리가 엉킬 때도 많았다. 욕을 먹든 말든 무례한 침입은 줄을 이었다.

그런데 묘한 변화가 가정에 일었다. 별 다른 게 없음에도 우리 집을 찾아온 학생들은 함께 집밥을 먹고, 보드게임을 하고, 밤새워 얘기하며 마음을 열어갔다. 학생들의 변화도 놀라웠지만 가장 큰 변화는 우리 가정에 있었다. 함께함의 풍요로움과 위안, 제자로서 하나 됨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맛보게 된 것이다. 아내와의 긴 대화 끝에 결혼 2년 만에 공동생활을 결정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가 가진 전 재산에다 융자를 얻어 큰 평수의 빌라를 임대했다. 함께 사역하던 세 명의 친구들과 바로 옆 아파트에 학생들의 공동체까지 함께하여 기막힌 공동생활이 시작되었다.

적나라한 ‘생얼’의 시간 속에서 조금씩 자라가다
삶을 공유한다는 것은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함께 하는 것과 같은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 때가 많다. 그야말로 서로 ‘생얼’을 수시로 마주하는 민망함이 깔려 있는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 말라고 하시던 주님의 말씀을 역행하여, 늘 우리의 고민은 거기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꺾이지 않는 고집과 무정함과 섭섭함으로 모난 자아가 서로의 마음에 고랑을 내기도 한다.

이런 생활을 선택한 내게 선배들이 걱정하는 마음으로 충고를 해주었다. “사역의 현장에서 만난 이들을 집에서 또 만나는 것은 매우 지치는 일이다. 적절한 쉼과 혼자만의 안식이 없다면 이 사역은 오래가지 못한다.”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쉽게 수긍할 수는 없었다. 공동체로 살아본 경험이 없는 선배들의 충고였기 때문이다. 나는 함께 살고 있었고 선배들의 우려가 어떤 의미인지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분들이 모르는 것도 있었는데 서로 의지하는 데서 오는 위안과 숨겨져 있던 죄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험이 그런 것이었다. 

공동체가 시작되던 날 큰 딸 진이가 태어났다. 우리 부부의 모든 에너지와 재정은 반쪽이 났다. 사역의 현장에서 만난 이들을 집에서 또 부딪힘으로 생기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고, 사역자로서 무력하기 그지없는 창피한 순간이 이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가 날마다 빽빽 울어댔다. 우리의 상황이 하도 처절하여 사역자인 나도 사역의 대상인 저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요청 혹은 말 못할 사정에 너나없이 기꺼이 삼촌 이모가 되어주었다. 우리 부부는 더 이상 사역자의 신비감을 가질 수는 없었지만 위로와 자유함을 얻었고 그들에게 기대는 법을 배웠다.

이 경험을 통해 훗날 나는 절대 단독 목회를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팀 사역이 단지 역할의 분담만이 아니라 상호 의존이라는 것도 이때 배웠다. 아내가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하면서는 하루씩 돌아가며 아이를 돌봐주기까지 했는데 여기에는 당연히 아이의 똥 기저귀를 가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모두가 서툰 육아라서 우리는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아이 돌봄일지’를 함께 쓰기도 했다. 물론 우리 부부를 통해 미혼자들은 결혼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부작용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의 기억이 나쁘지만은 않았을 거라는 확신도 있다. 그중 한 명이 지금 우리와 함께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 후 나는 포항 사역이 마무리되어 울산으로 이사를 왔고 우리들의 애틋한 실험도 종말을 고했다. 하지만 지금의 반디마을 공동체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후의 아이디어들은 이 밑그림이 없었다면 그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작은 실험은 큰 실험의 발판이 된다. 앞으로 나는 그 작은 실험들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조금씩 소개할 생각이다.


정동철
1971년생으로 울산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한 뒤 IVF(한국기독학생회) 캠퍼스간사로 14년 동안 섬겼다. 지금은 ‘디자인잇다’ 대표로 일하면서, 몸 된 교회 전도사로 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