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자기 계시와 ‘지혜’

[315호] 요한계시록 3:20-21

2017-01-31     정재훈 용인 덕성교회 전도사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 3:20-21)

예수의 첫 번째 자기 계시
흔히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계시’라는 단어 ‘아포칼립시스’(Ἀποκάλυψις, 계 1:1)를 구약 히브리어 동사 ‘갈라’(드러내다, גָּלָה)에서 찾는다. 그러나 순전한 명사형의 ‘아포칼립시스’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구약성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신·구약 중간기 지혜문학 가운데 하나인 〈집회서1〉에 단 한 번 등장한다.

κάκωσις ὥρας ἐπιλησμονὴν ποιεῖ τρυφῆς καὶ ἐν συντελείᾳ ἀνθρώπου ἀποκάλυψις ἔργων αὐτοῦ (집회서 11:27)
순간의 고통이 행복을 망각으로 몰아가나 사람의 죽음은 자기 업적의 계시이다. (필자사역)

여기서 ‘계시란 죽음이다’라는 명제는 죽음이야말로 망자의 삶의 감춰진 것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예수의 죽음은 과연 예수를 드러냈는가? 무엇이 드러났는가? 죽임당했던 예수가 〈요한계시록〉 안에서 처음으로 자기를 계시하는 문장은 이렇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7-18) 이 문장을 재구성하면 이렇게 풀 수 있다.

“내가 죽었던 것이 나의 시작이요 영원히 사는 것이 나의 마지막이다. 그러므로 사망의 출구를 내가 찾았고 입구도 내가 막을 수 있다.”

예수의 죽음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출발점이고 예수의 죽음 이후 예수의 계시는 비로소 완성되었다. 〈요한계시록〉의 예수 계시는 〈집회서〉의 한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다.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예수의 자기 계시는 그가 생전에 어떤 언행으로써 자기를 표현하였다 하더라도, 십자가와 부활 없이는 아직 완결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완결된 예수의 자기 계시의 기록이란 측면에서 〈요한복음〉을 잇는 ‘제5복음서’라 할 수 있다. 첫 번째 계시를 말했으니, 필연 두 번째 계시도 있을 것이다.

예수의 두 번째 자기 계시
‘제5의 복음서’인 〈요한계시록〉은 두 번째 예수의 자기 계시를 ‘인자 같은 이’에 이어 ‘하나님의 아들’(계 2:18)이자 ‘생동하는 지혜’(계 3:20-21)로 드러낸다. ‘인자 같은 이’(ὅμοιον υἱὸν ἀνθρώπου, 계 1:13)라는 계시는 단순한 규정이 아니라 이런 의미의 군집을 거느리는 승화된 표현이다. 여기서 잠시 본문과 관련한 이전 설명들을 살펴보자. 미국의 성서신학자 그레고리 비일(G. K. Beale)은 ‘NIGTC 주석’에서 〈요한계시록〉과 〈아가〉 5:2의 비교를 요청한 바 있다.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아 5:2)

 그의 제안은 두 텍스트 간 자구적으로 상당한 유사점이 있으므로 귀 기울일 만하다. 다만 지적해야 할 몇 가지 상이점은 첫째, 〈아가〉의 화자가 사랑하는 이(남편)를 기다리는 아내임과 달리 〈요한계시록〉의 화자는 문밖에 서 있는 이로서 문 안쪽에 있는 사람에게 열 것을 촉구한다는 점. 둘째, 〈아가〉는 갈등의 여지가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랑하는 상대를 기다리는 연인의 연가인 데 반해 〈요한계시록〉은 화자인 그리스도가 ‘만일 문을 여는 자가 있다면’이라는 단서를 설정해야 할 만큼 불확실성 속에서 랑데부의 결과를 상대의 의지에 맡기고 기다리는 입장이라는 점. 셋째, 결정을 보류하는 자들을 향한 설득을 강화하는 재료로 ‘문을 연다면 상급을 제공하겠노라’고 첨언함으로써 〈요한계시록〉에는 〈아가〉에는 없는 낯선 ‘긴장’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최종적으로 〈요한계시록〉은 어떤 상태에 대한 특유의 반전을 꾀하고 있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
 
한편, 톰 라이트는 《요한계시록》(IVP) 67쪽에서 ‘멀리 떠나 있던 주인 이야기’를 〈요한계시록〉에 대입시킨다. 그는 ‘문 앞에 선 이’를 ‘집주인’이라고 보는데 (그의 설명이 없으므로) 내 추측으로는 독일의 롤로프(Roloff)의 책 《Siehe, ich stehe vor der Tuer und klopfe》(1989, ‘볼지어다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니’)에 크게 의지한 것 같다.(452-466쪽) ‘문 앞에 선 이’를 먼 길을 떠나 있는 주인으로 보는 롤로프의 설명은 눅 12:36-38의 내용과 유사하다.(눅 12:41-46, 막 13:34도 참고)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그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눅 12:36-38)

그러나 롤로프는 마틴 카러(Martin Karrer, 독일 신·구교 합동 EKK 주석 계시록 필자)의 주요한 반대 의견에 직면해야만 했다. 카러가 볼 때 노크하는 사람은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다. 독자 중에는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2 카러는 내게 입버릇처럼 “비슷하다는 것에서 작업을 멈추면 안 되며 날카롭게 차이점을 더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주인’도 아니고 ‘손님’도 아닌 전혀 다른 관점에서 해석을 시도한 필자의 해석에 대해 ‘쇼킹하다!’며 반가워했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13)를 주제로 쓸 때 더 명확해질 것이다. 더불어 저명한 두 학자가 왜 ‘주인’이냐 ‘손님’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다투었는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지혜’ 그리스도 
이 본문(계 3:20-21)은 〈요한계시록〉 속 여러 이미지들 중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위 장면의 출처다. 자세히 분석하면 이 그림에는 세 개의 예수 그림이 나란히 묶여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일에서는 요한계시록을 그림언어[Bildsprache]라 말한다.)

1)문 앞에서 선 예수,  2)공동식사하는 예수,  3)하나님과 보좌를 공유하신 예수. 이렇게 하나의 영상을 세 장면으로 나눈 후, 세 그림의 성서적 배경을 찾아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여러 장면들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보이는 예수의 모습을 종합하면, 일관성 있는 하나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작업을 위해서는 먼저, 본문과 지혜문학3을 비교해보아야 한다.

   

※ 지혜서는 70인역 성경의 일부분. 가톨릭에서는 제2정경(正經)으로 채택하였으며, 《공동번역 성경》(외경부)에도 들어가 있다. 


잠언 8장과의 비교: ‘아멘’
사실 잠언 8장은 ‘라오디게아에 보낸 편지’ 서문이 존재하게 된 근거이기도 하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계 3:14). 여기서 ‘아멘’ ‘충성’ ‘참됨’ 그리고 ‘창조의 근본’ 이 네 단어들은 어떤 관계인가? (놀라지 마시라!) 히브리어로 위 단어들은 다 같은 하나의 단어로 모아지고 사실 거기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 주인공이 바로 ‘아멘’이다. 이는 ‘אָמוֹן’이라 쓰고 ‘지혜’라 읽는데, 지면 관계상 한 단어만 설명한다.

‘창조의 근본’이란 말은 잠언 8:30에서 나왔다. 이 ‘창조의 근본’은 남아공 스텔렌보스 대학의 〈잠언〉 전문가 쿡(J. Cook) 교수에 의하면 ‘제2의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는 ‘지혜’를 ‘제2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단 한 차례의 만남이었지만 스텔렌보스 대학을 방문했을 때 그는 나에게 ‘복음’과 전체 《성서》를 관통하는 인상 깊은 영감의 확신을 심어주었다. 당시 우리가 나눈 대화의 주제는 〈잠언〉의 ‘지혜’가 〈요한계시록〉 전반에 걸쳐 예수의 정체성을 확립했다는 필자의 논문에 관한 것이었다.4 잠언 8장의 ‘지혜’(그리스도)는 어느 특정한 문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들이 있는 닫힌 문 앞이라면 어디에나 서 계신 분이다. 우리의 어리석음은 (우리의 닫힌 문을 두드리시는) 그분을 영접할 때만 극복된다. 

잠언 9장과의 비교: ‘지혜의 집’
잠언 9장의 ‘지혜’는 일곱 기둥을 세워 집을 지은 분이다. ‘일곱’(שֶׁבַע)이라는 수는 ‘약속하다’는 히브리어 동사(שׁבע)와 뿌리가 같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언약의 계약이 실은 지혜가 세운 집의 기둥이라는 뜻이다. 언약에 관하여 요한1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2:25) 역시나 예수는 계 1:18에서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선포한다.

‘지혜’의 또 다른 이름은 ‘영원한 생명’이다. 따라서 구약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 나무를 가리켰던 ‘메노라’(Menorah), 즉 가지가 일곱인 촛대를 〈요한계시록〉에서 교회로 해석하는 것은 ‘지혜 예수’와 ‘교회’와의 관계가 신비의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빌러벡(Strack H. L./P. Billerbeck) 같은 유대인 주석가들은 이러한 해석의 발전을 설명하는 단초가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 공동체의 자의식 속에 이미 존재했다고 본다.(《Rev.》, 1926) ‘지혜의 집’에서 있어야 할 일은 이제 지혜가 베푼 식물(食物)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공동)식사라는 점이 명확해진다. 공동식사로 ‘지혜’와 ‘어리석은 자’는 하나가 된다.

지혜서 9장과의 비교: ‘지혜’ 예수
중간기 ‘지혜문학’을 통해 유대인들은 지혜가 하늘 하나님의 보좌에 있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함께 있길 원했다. “… 하나님 영광의 보좌에서 지혜를 보내소서, 지혜가 나와 함께할 수 있도록….”(지혜서 9:10) 더 중요한 지점은 지혜와 ‘함께’하지 못한다면 ‘구원’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지혜서 9:18) 요한의 편지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보좌에 오르셔서 지상의 싸움을 이긴 교회와 동석한다는 약속으로 끝나게 되는 것은, 당시 백성들의 유구한 구원 희망이 그때에야 비로소 이뤄진다는 위대한 선포이다. 지혜에게 걸었던 구원의 소망을 예수가 실현한다는 것.

중간기 ‘지혜문학’과 달리 〈요한계시록〉은 지혜가 구체적으로 예수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리고 하늘 보좌에서 지혜인 예수가 내려와서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이신 예수께서 교회를 데리고 하늘 하나님 보좌로 상승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상승’은 하늘 예루살렘이 하강함으로써 달성된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 이러한 상승과 하강의 교차는 이 땅을 더럽게만 보지 않는 하늘 보좌 주인의 ‘지혜의 변증법’이다. 보좌에서 지혜만 보내달라는 백성들의 요구를, 주님은 보좌를 통째로 내려보냄으로 성취하셨다. 할렐루야! 

참으로 그러하다! 〈요한계시록〉 일곱 서신의 마지막 최종 편은 첫 번째 계시 ‘인자 같은 이’의 정체가 바로 소피아(Sophia), 즉 ‘지혜’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과 〈잠언〉은 비교의 선상에 오르는 일이 없었고 지금도 물론 없다. ‘계시문학은 예언에서 발전되었다’는 프리드리히 뤼케(F. Lücke)의 고정관념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본지 2017년 1월호 참조) 필자의 작은 발견이 차후 연구에 있어 지혜문학, 특별히 〈잠언〉에 대한 탐구를 진작시켜 〈요한계시록〉의 이해가 한층 심화되길 기대한다.

‘인자 같은’ vs. ‘인자’
그렇다면 요한은 왜 ‘인자 같은 이’와 ‘지혜’를 동일인으로 보았을까? 1장부터 3장을 종합하면, 계시의 핵심은 흩어진 기독론을 하나로 모으고 있다. 2장 18절을 보라.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인자 같은 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고 있다. 1)인자 같은 이(계 1:13), 2)하나님의 아들(계 2:18) 그리고 3)지혜(계 3:20-1)로 확장되는 표현은 결국 부활하신 예수(계 1:18)를 의미한다.

여기서 짚고 갈 문제는 ‘지혜’가 구약과 중간기 문헌에서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다이내믹한 행위의 주체자로서 의미를 갖는, 종교사적으로는 ‘하나님의 딸’(이집트 여신 ‘마아트’(Maat))로 여겨졌다는 사실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인자 그리스도’와 ‘지혜 그리스도’의 신비한 결합이 계시문학에서 완성되었음을 볼 수 있는 단초다. 실로 예수의 자기 계시의 백미(白眉)가 아닐 수 없다. “예수의(에 관한) 계시(Ἀποκάλυψι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라.”(계 1:1) 

이해를 위해 AD 79년으로 가보자. 8월 24일 베수비오 산(山) 분화로 화산재와 분석에 묻혀 파괴된 도시 폼페이(Pompeii)는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이자 로마 귀족의 휴양지였다.5 폼페이의 제우스 신전은 부인 헤라와 함께 그의 딸인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가 함께 숭배되고 있었다. 역사적 사건들에서 얻은 교훈을 은유적 표현의 여러 그림에 의미 깊게 담아낸 요한이라면 하나님의 분명한 심판으로 보였던 폼페이의 멸망이 그들이 섬겼던 ‘여신’과 무관치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이집트와 그레코-로만(Greco-Roman) 문화에서 공히 추앙받던 지혜·전쟁의 여신6으로부터 아우라(aura)를 가져와 예수에게 드림이 마땅한 과제였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온전한’ 인간상을 남성성과 여성성의 합일에서 찾았던 1세기 당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지점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딸’이라는 두 개의 상반된 정체성이 예수 그리스도 즉 ‘사람의 아들’에서 하나로 수렴된다는 점일 것이다. “인자 ‘같은’ 이”라는 표현에서 꼬리표 ‘같은’은 하나님의 ‘아들’과 ‘지혜’라는 두 개의 일치될 수 없을 것 같던 정체성이 예수 안에서 하나로 일치됨을 나타낸다. 그러한 합일을 한 몸에 지닌 그리스도의 출현(계시)은 일찍이 인간 지성사에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지혜’와의 합일을 통해 예수의 자기 계시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예수가 더 이상 ‘인자 같은 이’가 아니라 유일무이한 ‘인자’임이 확인되는 계시록적 계시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이 부분에 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 글에서 이어갈 것이다.)

   
▲ 알브레히트 뒤러의 요한계시록 연작 판화 "St John eating the book"

2017년 한국의 ‘계시록’
아이러니한 것은 기독교가 성적 정체성 문제에 있어 주후 1세기에 선점했던 이런 독보적 창의성을 상실한 오늘날의 성차별이다. 이러한 상상력과 문화력의 퇴보야말로 ‘666’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우리들의 예수는 미혼모의 몸에서 나셨으나 미혼모의 굴레를 끊으셨고, 버림받은 여인들을 변호하시고, 창녀에게서 장례 의식을 치르신 분이다. 그분은 또한 부활의 첫 기쁨을 (소유물에서 사람으로 부활한) 여인들과 나누신 (여인들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기독교계의 성서 해석이 단지 ‘마초의 책’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치부하고 아예 성서연구를 단념하거나 배제하려는 지향(가령 일부 급진적 여성신학적 관점)이 있다면, 재고되길 바란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 뿌리가 얕은 알량한 교리를 무기로 여성들을 차별한다면, 그것을 정녕 기독교라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그리스도는 ‘인자’가 아니다. 그들의 그리스도는 언제까지나 비밀로 닫힌 “인자 ‘같은’ 이”로 남을 수밖에 없다. 진실로 두려운 것은 도래할 재앙이 아니라 극복된 적이 없이 시공을 초월해 편재해 있는 모순이다.

한편 나는 헌법재판소의 탄핵 변론에서 변호인들의 파렴치한 입을 통해 예수를 자청했던 우리의 행정부 수반을 생각해본다. 그녀는 여성 아닌 여성(필요할 때만 여성)으로 마초적 초법으로 국가와 국민 위에 군림하며 권력을 독점 사유화해오다 민중의 비폭력 혁명으로 탄핵되어 벌거벗은 대통령이 되었다. 그녀는 비밀의 문 안쪽에서 측근들의 비리를 도와주고, 거기에 기생해 영화를 누리며 국민들과는 완전히 대화를 끊고 살았다. 저 청와대의 문이 열리는 날 그녀에게 닥칠 운명은 잔치의 만찬일까? 세월호 유가족, 미수습자 가족들의 무수하고 간절한 노크에 단 한 번도 응한 적이 없는 그녀는 도대체 사람의 심장을 가진 걸까?

그녀의 만찬장에는 늘 그녀가 아끼는 마법사들이 가득했다. 문밖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머리가 깨지고 심장이 찢겨져 죽는 순간까지도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귀하냐?” 묻는 공주병으로 살았던 그녀. 만백성의 피와 눈물을 모아 채운 잔으로 우상(권력)에게 건배했던 그녀가 이제 방자하게도 값없이 피 흘리신 예수를 자청하고 나섰다. 한 사람을 위한, 한 가족을 위한 쇼에 만천하가 들러리를 서게 했던 그녀가 이제 우리 모두와 동석하시고 함께 먹고 마시겠다며 십자가의 죽음을 마다치 않으셨던 예수를 자기라 한다.

그러니 〈요한계시록〉은 하나님 아들 예수의 편지다. ‘그’가 누구신지, ‘그’를 분명히 분별하라는.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눅 21:8, 개역한글) 

 

각주
1) 집회서(Ecclesiasticus)는 코이네 그리스어로 번역되거나 집필된 구약성경인 ‘70인역 성경’의 일부분이다. ‘Wisdom of Jesus the Son of Sirach’라고도 하며, 도덕적 지침과 권면 등이 수록됐다.
2) 마틴 카러의《Brief》(편지로서의 계시록), 215쪽.
3) 구약성서의 잠언, 욥기, 전도서, 그리고 지혜서 등을 역사서, 예언문학과 구별해서 ‘지혜문학’(Wisdom literature)이라고 총칭한다.
4) ‘지혜 그리스도’에 관한 논의는 1950년대 독일 튀빙겐의 하르트무트 게제(H. Gese)의 ‘지혜론’ 이후 프렌쉬콥스키 등을 통해 심화되어온, 독일 학계에서는 전혀 낯설지 않은 주제이다.
5) 화산 분출 시점은 예루살렘 점령과 파괴를 지휘했던 티투스 장군의 아버지이자 당시 황제였던 베스파시아누스 사망 두 달 후였다.
6) 아테나에 관해서는 사에구사 가즈코의 《여성을 위한 그리스 신화》 참조.

 

정재훈
대한신학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 독일 뷔르츠부르크와 튀빙겐 대학교를 거쳐 부퍼탈 신학교를 졸업(Mag.Th)했다. 10여 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한신대 신대원을 졸업(M.Div)하고 현재 용인 덕성교회에서 청년학생부를 지도하고 있다. 토요일 밤마다 대치교회 성서학당을 통해 요한문서들을 강해하고 탁상담화를 진행한다. 전공 논문은 〈요한계시록 인자 기독론〉이며, 현재는 ‘요한계시록’ ‘지혜’ ‘기독론’을 연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