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침묵은 우상 때문이다
〔독자서평〕 불온한 독서 / 아거 지음 / 새물결플러스 펴냄
책을 읽다가 화가 나서 덮어버렸다. 몇 번을 그랬다. 화가 나는 일들이 적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양심”(117쪽, 저자는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설문 중 언급되었던 ‘행동하는 양심’에 대해 말한다)으로 살아왔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도 행동하지 못한다. 과거는 잊고 싶고, 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것이 우리 평범한 사람들이다. 어른이 되고 싶은 것이다. 나이 많고 돈 많고 권력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복종하는 인간이 아니라 복종시키는 인간이 되고 싶다. 적어도 인생의 몇 가지 영역에서는 복종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있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사회부적응자가 얼마나 될까? 적응하고 싶지도 않은 나라. 인간이 사회에 적응해야할까 사회가 인간에게 적응해야 할까? 답답하고 갑갑하기도 하지만, 내 눈앞에 주어진 인생의 무게는 타인의 인생을 외면시킨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조용히 침묵한다.
아거는 우상을 "사람들이 절대적이라 믿는 것, 한 치의 비판도 허용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믿는 힘을 가진 ‘실체’"라고 생각한다. 절대적 충성과 복종이 당연시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침묵은 우상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음의 성경구절이 생각난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115:5-8)”
우상과 그를 섬기는 자는 입도 뻥끗 못하는 모양이다.
“다들 자살하기 일보 직전 같은데, 왜 그렇게 밝고 친절한지 모르겠다.”(141쪽)
프랑스인 ‘희완’이 한국 사람들을 보고 한 말이다. 이 말이 왜 이렇게 아픈지 모르겠다. 뭐가 그리 좋아서 밝은 것일까? 자살하기 좋아서 밝을 수는 없지 않은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밝은 것과 친절한 것 역시 복종하는 모습인 것 같다. ‘표정관리’라는 단어를 처음 배운 것은 군대에서이다. 혼날 때도 표정관리를 잘해야 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모두에게 표정관리는 필수이다. 문득 검찰에 출석하며 질문하는 기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표정관리를 하지 못했던 높으신 양반이 떠오른다. 자살하기 일보 직전도, 밝고 친절한 것도, 표정관리를 잘하는 것도 다수의 ‘을’에게만 해당되는가보다.
‘당시 관행이었다’는 말로 무마하며 장관의 자리에 오른다.(202쪽) 관행이었다는 말을 매우 자주 듣는다. 가장 좋은 핑계이다. 관행이 뭐라고 이렇게 설득력이 있는 것일까? 표절도, 받은 돈도, 준 돈도, 그 금액도 모두 높으신 양반들에게는 관행이었다. 그 관행 나도 한번 받아보자. 왜 높으신 양반들만 저리도 좋은 관행을 가지고 계신 것인가? 러시아 속담에 “자리가 그 사람을 명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그 자리를 명예롭게 만든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가 맞는 듯하다.(203쪽)
프롬은 “인간이 복종할 줄만 알고 불복종하지 못한다면 그는 노예이다. 반면에 불복종할 줄만 알고 복종하지 못한다면 그는 혁명가가 아니라 반도(叛徒)에 불과하다”며 복종을 타율적 순종과 자율적 순종으로 나누어 설명한다.(261쪽) 이는 자신의 판단과 의지로 사는가 아닌가에 따라 나눈 것이다. 주체적으로 살면 자율적 순종이라는 것이다. 아거는 주체적 삶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의 길을 가자고 말한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 지금 이 사회와 내 삶에 대해 사유하고 성찰하는 인간이 많아지고, 그들의 작은 행동, 작은 불복종에 사람들이 공감하고 연대할 때 개인은 좀 더 자유로워지고, 이 사회 역시 진보할 것이다.”
세상은 계속해서 복종과 불복종, 자유와 억압의 반복이었다.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는데 더 힘들어지고, 더 힘들어지는 것 같았는데 나아진다. 이러한 반복의 과정이 영원한 진자운동이 아니기를 바란다. 조금씩 올라가는 상향진자운동이기를 바란다.
정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