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가 아닌 '판타지'를 좇는 사람들에게

〔독자 서평〕 창조과학과 세대주의 / 윤철민 / CLC

2017-07-03     임채정

1. 믿고 싶은 대로 볼 수 있는 ‘섭리’

필자는 모태신앙이며, 그 중에도 목사아들이라는 딱딱한 껍질에 쌓인 채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다. 믿어지지 않아도, ‘굳게 믿으며’ 신앙을 이어왔다. 심지어 장로교 고신 측에 속해서 일명 극보수의 신앙교육을 받아왔다. 성경이 무오함을 믿고,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을 굳게 믿었다. (물론, 이것은 어찌 보면 개혁주의적 성경해석을 배우기 전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하나님도 믿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며 죽었다 살아나는 예수님도 믿었으며, 요한계시록의 그 새 하늘과 새 땅도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무천년설에 의거한 개혁주의 해석으로) 믿었다.

그러다가 중2병이 찾아왔다. 믿고 싶은데 믿어지지 않았다. 교회를 다닐 이유도,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애타게 찾을 이유도 없어지는 듯했다. 그때 내게 ‘창조과학’이 다가왔다. 창조과학이 제시하는 자료들과 설명들은 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창세기를 펴면 마치 태초의 하나님과 함께 있는 느낌이었으며, 욥기의 리워야단과 베헤못을 볼 때면 인류와 함께 노는 공룡들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필자는 신앙을 ‘되찾았다.’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창조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해주었던 겪이며, 이는 하나님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놀라운 섭리였음을 나는 인정한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고 한동안 허공에 시선을 둘 수 밖에 없었다.

2. 믿어야 할 바를 알게 하는 ‘지식’

창조과학이 좋았던 이유는 성경을 부정하는 세상의 ‘진화론’을 진실 되게 바로잡아 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창조과학의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즐거웠던 것이다. 더 적나라한 표현을 들자면, ‘선택적으로 수입’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지적으로 무리가 없는,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실용적인 믿음을 키우기 좋은 것들로만.

▲ 15,000원

이 책은 총 4부로 이루어져있고, 부록에는 저자가 소개하는 주석들이 명명되고 있다. 내용이 분리되어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창조과학이 세대주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소개한다, 아니, 변증한다. 세대주의는 쉽게 말하자면, 신구약 시대를 자신들의 신학적 견해에 따라 여러 세대로 구분하고, 우리가 그 ‘마지막’ 세대를 살고 있다는 사상이다. 중요한 건, 이 세대가 ‘마지막’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끝’을 알고 있다는 교만이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성경도 ‘말세’라는 표현을 하지만, 성경은 ‘그 날과 그 시는 오직 성부하나님만 아신다’고 증언한다. 이 작은 차이는 곧 우리의 믿음 전체를 흔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어야 할지가 바뀌기 때문이다.

‘알파를 알면 오메가를 알 수 있다.’ 마지막을 안다는 것에서 역으로 논지를 전개하여, 세상의 시작 즉, 창조를 안다고 이야기하는 교만. 그것이 창조과학이 범한 실수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그 교만의 뿌리를 고대-중세-현대-21세기에 이르기까지 꼬리를 물고 추적해 들어간다. 필자가 가장 놀랐던 것은 개혁주의 신앙의 울타리에서 흔히 들었던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부터 마르틴 루터와 심지어, 칼빈까지 저자의 문장 위에서 검열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저자의 논지를 전개하기 위해 억지 논리를 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역사가 진행될 때, ‘그 시대 사람 중 한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었던 오류라 지적하고 있다.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2부까지 20세기 이전의 창조과학의 역사들을 강물이 흐르듯이 흘러오다 보니 어느덧 현대 창조과학의 모체가 다 형성되어 있었다. 그것을 다시 ‘대 학자’들이 정리하기에 이른다. 문제는 이러한 창조과학을 현대에 들어와서 반석으로 삼고 있는 기독교에 아무런 ‘비판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여러 이단들의 이름이 제시되면서, 그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 땅의 ‘알파’ 스토리가 창조과학임을 제시한다. 그래야 그들이 원하는 ‘오메가’ 즉, 종말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우리의 계산속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인 사실은 이단들과 함께 이러한 창조과학을 철저하게 옹호하는 사람들이 소위,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라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남침례교’가 이를 옹호하고 있으며, 필자의 의견으로는 한국에서는 고신이나 성경의 무오함을 주장하는 보수적인 교단이라면 누구나 창조과학을 정설로 채택하고 있다. 혹여나 이에 이견을 제시하면 ‘창조를 믿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된다. 무엇을 믿을지에 대한 문제가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3. 창조를 믿는가, 과학적인 창조를 믿는가, 판타지를 믿는가

저자가 후반부에 이르러 ‘창조과학’이라는 용어를 설명한다. 과학적 창조와 동의어로 제시되지만, 필자는 동의하기 힘들어졌다. ‘과학적’이라는 단어는 통용되는 일반 상식에 의하면 1)객관적이며 2)증명 혹은 재현이 가능해야 한다. 하지만 창조과학의 맹점들을 따지고 들면, (진화론도 결코 과학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창조‘론’(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설’)에 가깝다. 주장을 표현하고 있으며, 증명된 것들의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조가 과학이어야 하는가?

필자는 창조‘과학’으로 신앙을 견고히 했음을 앞서 말했다. 그것은 은혜였다. 하지만 믿고 보니, 창조를 증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불신’이었다고 느낀다. 창조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많아지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창조라는 용어를 제외하고 여러 가지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때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자신의 생각과 추측을 ‘보다 이해되는 범위로’ 설명할 뿐이다. 그렇다면 창조는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임이 확실하다.

저자는 ‘판타지’를 버리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성경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추측은 추측에서 그치는 것이 좋다. 그러한 판타지를 마치 ‘증명 가능한’ 어떤 것인냥 끄집어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음’을 믿어야 하고, 그것만 확실히 믿으면 된다. ‘어떻게’의 문제를 초월해야 한다.

4. 왜 창조과학을 ‘비판’해야 하는가?

한편 필자의 교회는 ‘늙은 교회’이다. ‘좋은 게 좋고’, ‘덕을 세우는 방향’으로 의사를 표시하는 게 미덕으로 여겨지는 교회이다. 어른들이 훨씬 많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어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아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믿는 게 안 좋나? 왜 창조과학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

‘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를 이, 끝 단. 이단이다. 너무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저자가 말하듯, ‘창세기를 세대주의적으로 읽고 요한계시록은 개혁주의적으로 읽는’ 것은 불가능 하다. 즉, 종말과 재림에 대해서도 잘못된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창조과학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동시에 ‘종말이 언제냐면...’ 하고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위험하다.

처음에는 책을 읽는 동안 조금 못마땅하고 찝찝했던 것이 사실이다. 약 10년 이상을 옳다고 믿어온 것이 이단적인 외침이며, 그릇된 것임을 알았을 때 누구든 그럴 것이다. 심지어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멍했다. 그렇게 시작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나’라는 질문에 답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 그렇다면 도대체 달라지는 게 무엇인가? 거기서 멈춘 것이다. ‘하나님이 도대체 언제 세상을 만드셨지? 도대체 태초가 언제야?’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기로 한 것이다.

5. 하나님의 영역을 남겨두기. 그리고 은혜로 살기

창조신앙은 반드시 필요하며, 그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 것이고, 곧 부활신앙으로도 이어진다. 마침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종말신앙으로도 이어진다. 그러나 창조신앙은 창조를 증명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믿으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인간의 것만 인간에게..”. 농담 섞인 패러디이지만, 그저 웃어 넘길 일은 아니다. 거기서부터 은혜가 시작된다.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창조와 지금도 우리를 돌보시는 섭리로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일만 남아있다. 혹시 여전히 예전의 필자와 같이, 진화에 대한 이야기만 들으면 성경책 집어 들고 대판 싸워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같은, ‘부담스러운 은혜’를 누리는 성도들이 있다면 조심스럽고 강력하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판타지’를 버리고 은혜로 살도록.

 

임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