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 있는 청년의 삶과 소명의 길

[321호 커버스토리]

2017-07-20     김은혜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와문화 교수

교회를 떠나는 ‘불안’한 청년들
한국 사회에서 절망에 쌓인, 아픈 청춘들이 자꾸만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에게 이제 가슴 설레는 청춘예찬은 사라진 지 오래다. 최근 청년들이 가장 공감하는 단어는 ‘불안’이다. 청년실업 해결을 위한 다양한 정책들이 언급되지만 희망을 주기엔 역부족이다. 옛날에는 ‘부모가 가난해도 내가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며 살았다. 그러나 지금 청년들에게는 그날이 없어졌다.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게 된 것이다. 내일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과 좌절이 청년들 사이에 빠르게 번지고 있다. 절망이 청년들의 생기 있는 시간들을 삼켜버리는 듯하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20세기 독일 영화감독 파스빈더의 영화 제목은 21세기 한국 청년의 현실을 설명해준다. 더욱 심각한 것은 2000년 이후 20-30대 청년들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사실이다. 2011년 사망 원인 통계에 따르면 20대 청년 사망자 가운데 47.2%가 자살로 목숨을 끊었다. 2012년 세계보건기구가 조사한 주요 60개국 가운데 한국 청년 사망률은 18.2%로 세계 9위였다. 전체 연령대와 비교했을 때 20대가 삶을 비관적으로 여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상대적으로 더 잦다는 얘기다. 사회문제인 자살률을 줄이기 위해서는 “왜 20대의 자살 비중이 가장 높은 것인지” 먼저 고민해보고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청년들이 교회를 등지고 떠난다. 교회 안에서 개혁을 시도하기보단,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젊은이들이 떠나는 교회는 희망이 없다. 개신교 교단마다 주일학교 학생 감소로 인한 다음세대에 대한 염려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청년들의 빠른 이탈은 한국교회의 가까운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사회의 총체적 위기 속에서 불안한 교회 청년들은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과 불통으로 인해 교회를 향한 실망이 깊어지고 있다. 불안, 불만, 불신 그리고 불통 등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단어들이다.

‘3포 세대’, 즉 결혼·직장·연애를 포기한 세대라는 자조도 이미 오래전 이야기가 되었다. 2015년 서울노동권익센터가 발표한 ‘실질 청년실업률’은 31.8%로, 오늘날 청년 3명 중 1명은 실업상태에 처해 있다. 이는 독립과 결혼이 늦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취업난에 시달리는 2030세대의 실업우울증이 증가하고 체념과 죄책감이 사회공포증으로 발전하여, 심하게는 대인기피증까지 불러일으킨다. 즉, 지금의 청년실업은 청년우울증을 낳고 있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절망은 청년들로 하여금 흔히 겪는 한 번의 실패에도 영원히 재기할 수 없다는 불안을 심어주게 된다.

이러한 청년세대의 불안에 대한 사회적 반응은 2000년대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위로’와 ‘치유’의 책들에서 나타났다. 물질적 고통뿐 아니라 패배의식으로 인한 정신의 황폐함과 절망으로 허덕이는 청년들에게 대중문화는 낭만적인 ‘힐링’을 상업화하여, 미디어마다 마약과도 같은 거짓된 위로와 치유들이 넘쳐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청년문제는 현실을 정직하게 대면할 수 있는 용기와 변화에 대한 의지 없이 거짓된 위로나 상업적 희망으로는 불가능하다.

“영성을 추구하나 종교적이지 않은”
이제 청년들은 전통적 교회의 억압적인 제도나 교리적 강요로부터 떠나 자유를 갈망하고,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인생을 주도할 만한 가치를 발견하기 위하여 교단의 경계뿐 아니라 더 나아가 종교의 경계를 주저하지 않고 넘나든다. 최근 서구사회의 문화 현상을 대표하는, “영성을 추구하나 종교적이지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 청년 세대들은 제도적 종교는 꺼리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영적 갈급함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청년들이 더 이상 교회의 가르침과 사회 속 일상적 삶 사이에서 의미 있는 연관성을 발견하지 못하는 현실을 시사한다.

이러한 청년들은 교회 내 기성세대의 신앙생활을 보며,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이 그다지 행복해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동시에 교회를 떠나 흥청망청 사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영적인 것을 열망하고 신 없이도 선하게 살아갈 수 있으며, 현생 이후의 삶을 전제하지 않아도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실제로 그런 삶을 위해 가치 있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삶을 헌신하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청년 현실은 신앙이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생활세계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데 실패했으며, 더 좋은 삶을 제시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신앙과 삶의 괴리는 필연적인 문제를 낳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상실시키고 회의감을 안겨주며, 종교적 형식주의와 교리적 경직성에 빠져 삶의 생명력을 잃게 만든다. 또한 고립된 교회주의는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청년들을 위한 책임 있는 훈련과 양육을 불가능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생활세계와 삶의 현장에서 이렇게 무능하고 무기력한 걸까? 사실 천국에 대한 소망은 분명 이 땅에 사는 신앙인들의 삶을 질적으로 전환하는 근원적 힘이다. 영생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 죽음의 문제를 다르게 볼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서의 삶이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 한국교회는 행위보다 믿음의 우위성을 가르쳐온 개혁교회의 전통을 다시 성찰하고 그 전통이 지닌 결핍을 보완하기 위해 삶을 신앙의 세계로 불러들여야 한다. 이제 교회는 미래세대를 부둥켜안고 신앙과 삶이 동떨어지고 분리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특별한 삶의 방식으로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셨던 것처럼, 기독청년들로 하여금 신앙의 힘으로 믿음과 삶을 엮어가는 힘을 키워나가도록 도와야 한다.

이 글에서는 청년 예수의 삶의 가치를 탐구하고 오늘날 세계 시장이 조작하는 ‘욕구’에 빠져 시들어가는 청춘을 끝내고 직업(직업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적 자원을 정당하게 취득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며, 사회적 지위를 결정해주는 동시에 자아를 실현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일련의 행위이다.)과 일 사이에서 청년들의 삶, 사랑과 노동을 생각해본다. 새로운 삶의 방식은 기존 것들의 해체와 성찰을 전제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추구하지 않고서는, 가능한 것도 이룰 수 없다. 즉, 우리가 꿈꾸거나 믿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없다. 단숨에 온 세상을 바꾸려는 태도는 오만이다. 아무런 희생과 헌신 없이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변해야 세상이 변하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함께 꿈꾸는 세상: 거룩한 일상과 고귀한 노동
한국 사회에서 청년문제 연구가 시작된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이루어진 대부분의 연구는 청년에 대한 ‘현실 인식’ 수준이고, 이렇다 할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계의 연구에서도 교회 청년 이탈에 대한 간단한 설문과 그에 따른 분석만 있을 뿐, 청년문제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 역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 청년문제에 대한 정부나 사회 지도층 등에서 다양한 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청년세대의 반응은 차갑기만 하다. 구직과 취업이라는 치열하고 냉정한 관문이 주는 압박과 무한경쟁 속에서 상존하는 불안, 잠재하는 실업의 상황을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청년들의 삶의 현실은 단순히 ‘위기’라고 말하기엔 이미 공고하게 고착화·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젊은 부부가 아기 낳고 싶지 않은 나라가 가장 나쁜 나라이고, 청년들이 사랑조차 하기 어려운 상태가 가장 나쁜 상태이다. 사랑과 성(性)과 일과 결혼은, 청년들의 삶에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살아있음의 의미를 주는 핵심 가치들이다. 그렇기에, 이 모든 것들이 어렵고 때로는 포기 대상이 되어야 하는 청년세대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 사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일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직업을 가지려 한다.

사랑하고 결혼하고 안전하게 아이를 낳고 바르게 키울 수 없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세계 저출산 1위의 사회, 일에 밀려서 양육이 무가치하고 경제논리에 출산을 포기해야만 하는 생명 가치를 상실한 사회에서 생기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먹이고 입히고 돌보는 변변치 않은 듯 보이는 일들이 실은 신성한 일임을 아는 사회는 건강하다. 이렇게 우리의 삶 현장과 사회적 맥락 속에서 청년들의 삶은 점점 팍팍해지고 청년들의 실제적 고민은 교회 활동과 동떨어져 있다. 청년들은 신앙을 포기하고 직업을 찾고 구직에 올인 할수록 거룩함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인가?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공감의 연대와 자기다운 삶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이제 우리는 쉬지 않고 뛰게 만드는 삶의 러닝머신 위에서 내려와 잠시 숨을 고르며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욕망에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한다.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포기당한 그 자리에서 자신을 다시 볼 수 있어야 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피로사회’라 정의하며, 성과중심의 사회와 긍정이 넘치는 사회가 주는 정신적 피로감이 우울증과 낙오자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유고슬라비아 출생의 철학자이자 비판이론가인 슬라보예 지젝은 현대 자본주의가 가진 문제점에 천착하면서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사람이 ‘제품’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을 비판한다. 그 예로, 토익(TOEIC)과 오픽(OPIC)으로 대표되는 외국어 구사 능력, 봉사활동, 공모전 활동과 같은 ‘계량화’된 기준들이 한 개인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고 있는 현상을 지적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신이 정말 자신의 모습일까?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다움을 위해 용기를 내자.

때로 청년들은 대중문화와 소비의 영역, 혹은 온라인을 매개로 한 ‘네트워크화된 개인주의’ 흐름에 눈을 돌리고 탐닉하거나 동참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대다수 청년 주체들이 일상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과 불확실성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도피일 뿐이다. 일상에 편재된 소비문화와 스타일에 대한 탐닉과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현실을 부유하는 자화상이 복잡하게 어우러진 불확실한 미래가 그들의 삶에 고착되어 절망은 더 깊어진다. 하지만 자신을 단순한 피해자로 바라보며 자기 개혁 없이, 구조의 문제만을 말하는 사회 비판도 정직한 희망을 만들기 어렵다. 더군다나 아프고 힘든 청춘들에게 대안 없이 말하는 어쭙잖은 위로나 감정적 공감은 오히려 더 깊은 절망으로 그들을 밀어 넣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이 시대 청년들의 절망과 좌절의 목소리가 개인들의 문제나 실패와는 상관없이 구조적인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청년들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공감의 연대’이다. ‘나’라는 개별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우리’라는 의식의 출발이 필요하다. ‘우리’가 같이 고통 받고 상처받고 있다는 공감과 연대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기독청년들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변화에 대한 열정, 그리고 잘못된 구조와 왜곡된 문화에 대한 바른 인식가운데 더 좋은 세상을 향해 함께 연대하자. 이러한 개인의 결단과 청년 연대는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한 희망의 전제가 될 것이다.

삶에는 정답이 없기에 우리 각자의 삶은 정답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비한 차원을 가진다. 이는 개개인이 하나님의 가능성이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도 불가능한 것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삶을 바꾸는 것은 늘 아주 작은 지점에서 시작된다. 오늘 하루의 소중함을 알고 충만히 살아야 영원을 누릴 수 있다. 스펙에 밀리고 시험에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일자리가 아닌, 작지만 내 일을 키울 수 있는 확실한 일자리를 찾으면서 스스로 시각을 달리하고 시야를 넓혀야 한다.

자신의 삶이란 다른 것이지 그른 것이 아님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청년들의 삶은 스스로가 상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귀한 작품으로서, 타인과 비교되기보다 구별되어야 하고, 최고의 삶보다는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 된다. 혼자 열 걸음보다 함께 한 걸음을 가는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진정한 열정과 행복을 추구하며 일하는 청년들에게 도전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신명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새로운 삶의 방식: 신명나는 청년의 삶과 행복한 직업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을 나타내는 신학적 도전은 ‘만인사제설’과 ‘직업소명설’이다. 루터의 만인사제설은 당시 상황에서는 매우 급진적이었으나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만 영향력이 있었고, ‘직업소명론’은 교회를 넘어 직장과 일터와 노동의 현장을 하나님의 영적인 소명을 실현하는 장소로 확대했다. 이는 “신으로부터 자기 몫의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는다”라는 의미로, 직업은 곧 소명이라는 것과 노동의 신성함을 역설하였다. 루터는 노동을 하지 않는 무위도식을 “구걸은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것이고, 윤리에 어긋나며, 인간 존엄성에도 어긋난다”라는 논리로 반대했다. 그러나 배우자와의 사별, 질병, 강자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약자를 착취하는 구조적 악 등으로 가난해진 사람들을 돕는 일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곤경에 처한 형제를 돕고 섬기는 것이며, 이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큰 예배”라고 말했다.

즉 ‘신의 부름’이란 뜻의 ‘소명’(Berufung)은 중세 시대에 영적 직무뿐 아니라 세속 직업도 하나님의 소명임을 일깨웠다. 더 나아가 루터에게 직업은 하나님이 주신 일자리이기 때문에, 각자에게 맡겨진 직업엔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다. 또한 직업은 자기 생계를 위한 일뿐 아니라 이웃을 섬기는 일이 함께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직업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곧 성직이며 더 나아가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직업을 통해 이웃을 섬기는 일이 곧 직업으로 예배 이후의 예배의 삶을 이어가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자들에게게 직업(Beruf)은 곧 소명(Berufung, Calling)이다.

소명의 진정한 의미는 생활의 거룩함의 발견이다. 만인사제설과 직업소명설 이 두 가지가 중세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의미는 일상의 거룩함의 회복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직업은 생계와 경제적 수단으로서의 일을 넘어 행복하기 위해 일해야 한다. 이렇게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의 명령에 따라 이웃을 위한 사랑 실천의 장으로서 종교개혁자들의 일과 직업 개념은, 자아실현을 강조하며 소비적 삶을 강요하는 현대의 직업 개념과 차이를 보인다.

기독청년은 목적이 아니라 가치를 지향해야 행복한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 ‘욕망’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는 생기 있는 삶과 스스로 ‘자신 되기’를 선택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삶을 위해, 청년은 일해야 한다. 기독청년에게 일은 거룩한 사랑의 실현체이며, 직업은 이웃과 함께 사랑하며 섬기며 살아가는 거룩한 예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기독청년들이 함께 꿈꿀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생존과 자아실현을 위해 직업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죽어라 일해도 누구는 생존조차 어렵고 누구는 소비의 노예가 되어 모두가 절망한다. 이 불안한 청년 현실의 실체를 밝히고 불분명한 두려움을 걷어내면,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각자의 ‘소명대로’ ‘자신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 무엇보다 청년 예수의 삶의 가치를 지향해야 행복한 삶이 가능하고 노동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를 행복하게 해줄 직업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행복을 느껴야 한다. 청년 예수의 활동에서 하나님 나라는 항상 현재적으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과 자신의 삶 현장에 내재하는 신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하자. 성/속의 이분법을 넘어서 복음으로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세상과 생활에서 복음으로 빛나는 청년들이 되자. 자신답게 살아가기 위해 행복할 권리뿐 아니라 화낼 권리, 슬플 권리까지도 적극적으로 누리며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소명으로 받아서 성실하게 일하자.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아 비관습적 삶의 태도로 물질주의, 소비문화, 외모중심주의에 저항하며 주체적으로 일과 꿈 사이에서 직업과 일 사이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며 치열하게 살아가자.

 

김은혜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을 졸업한 뒤 드류 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클레어먼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예지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NCCK 신학전문위원, 한국기독교윤리학회 부회장,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와문화 교수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