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나그네’로 살아가기

[321호 커버스토리]

2017-07-20     김근주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전임연구원

소명과 사명
소명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미한다. 대개 소명은 꽤 특별한 체험과 연관되고 특별히 해야 할 일과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구약 예언자들의 경우가 그러한 소명의 대표적 예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해 구약 예언자들의 활동은 특정한 기간에 한정된다. 우리는 40년가량을 사역한 이사야나 예레미야의 일상이 어떠했는지 알지 못한다. 예언자들 가운데는 아모스나 학개처럼 지극히 짧은 기간을 사역한 이들도 있으며, 이 사역 이전과 이후 그들의 삶이 어떠한지도 알지 못한다.

아모스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 살다가 급작스럽게 그를 찾으시고 부르신 하나님으로 인해 매우 짧은 기간 예언 활동을 하였다. 스스로는 “선지자”가 아니라고까지 말한(암 7:14) 그의 ‘예언 사역’은 특정 기간에 해야 할 일이었던 셈이니, 이 사역은 그의 ‘소명’이라기보다 ‘맡겨진 임무’ 혹은 ‘사신이나 사절이 받은 명령’이라는 뜻(국립국어대사전)을 지닌 ‘사명’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아모스처럼 예상하지 못했는데 사명이 주어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사야(사 6장)처럼 특별한 일에 하나님께서 보낼 자를 찾으실 때 스스로 자원하여 그 사명을 맡는 경우도 있다.

사실, ‘소명’과 ‘사명’을 칼로 무 베듯 구분하는 것은 주관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굳이 차이를 찾아보면, ‘일을 시키다’라는 단어를 지닌 ‘사명’(使命)과는 달리, ‘소명’(召命)이라는 단어에는 ‘부름’이 들어 있다(영어의 calling이나 vocation, 독일어의 Berufung 참고). 그 점에서 가장 근본적인 소명은 하나님의 부르심일 것이다. 첫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생명을 불렀을 때 그것이 그들의 이름이 되었고(창 2:19), 하나님께서 그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세상에 불러내셨을 때 그것이 사람의 이름이 되고 존재 이유와 근원이 되었다. 그래서 일단 ‘소명’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이다. 삶이, 존재가 소명이다.

그렇다면 ‘소명의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과 시간을 주셨음을 깨닫고 믿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때로 그러한 삶 속에서 특별한 일을 특정한 시간에 해야 할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줄 믿고 살아간다. 소명의식은 특별한 일을 해내는 데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하나님이 우리로 세상에 존재케 하셨음을 믿고 고백하는 데서 발견된다.

삶으로서의 소명
아마도 그런 까닭에, 그 지으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은 매우 포괄적이라 여겨진다. 하나님은 함께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명하신다(창 1:28). 그리고 실제로 사람으로 하게 하신 것은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는 것’(창 2:15), 즉 ‘노동’이었다. 이 땅에 사람으로 살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노동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존재케 하신 까닭, 사람을 세상으로 ‘부르신’ 까닭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이 본문을 두고 오해의 여지가 가득한 ‘문화 명령’이라는 명칭이 생겼지만, 이 본문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인간에게 주어진 삶을 충만하게 누리고 즐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 명령은 ‘문화 명령’이 아니라 ‘살아갈 것에 대한 명령’이다. 삶이, 존재가 소명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그저 살아가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책망하시고 때로 격려하신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졌고(창 2:17), 가인에게는 ‘선을 행하라’ ‘죄를 다스리라’는 명령이 주어졌다(창 4:7). (이 명령들의 의미에 대해서는 필자의 책 《복음의 공공성》을 참고하라.) 선을 행하고 죄를 다스리라는 명령도 매우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다. 그러나 창세기 본문은 인간의 삶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증언한다. 가인의 후예들에 대해 이어지는 증언은 소명으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잘 보여준다.

형제 살인으로 인해 쫓겨난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으로 가게 된다. 하나님께서 거하게 하신 땅에서 쫓겨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 역시 에덴에서 쫓겨났고, 이제 가인도 쫓겨난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만나는 사람에게 죽임당하지 않게 하신다(창 4:14-15). 가인의 가는 길은 하나님과 무관한 길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리시느라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은 이제 가인에게 생명을 지킬 수 있는 표를 주셨다. 그러므로 가인의 삶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 그가 그곳에서 걸어가고 살아갈 길과 삶이 있다. 가인 이야기는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다. 이것이 극단적인 사례라면 구약의 가장 첫 책인 창세기의 첫 부분에 제시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이야말로 가인과 완전히 동일한 처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땅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역했다. 계속되는 범죄로 말미암아 이런저런 재앙을 겪었고 그럼에도 돌이키고 순종치 않더니 급기야는 그 땅에서 쫓겨나 바벨론 땅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악을 행한 가인은 “에덴 동쪽” 놋 땅으로 쫓겨났고, 불순종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 동쪽 바벨론 땅으로 쫓겨났다. 이제 그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가인의 모습은 바벨론 포로들의 모습을 그 안에 담고 있고, 끊임없이 범죄하며 이웃을 모른 체하고 억울한 눈물을 방관하는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미 죄인이니, 더 아무렇지도 않게 이웃을 학대하고 방관하고 죽이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쫓겨났던 땅에서라도 하나님을 바랄 것인가?

아담과 하와,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찾으신 것은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삶,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선으로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않는 삶, 그리고 선을 행하고 죄를 다스리는 삶,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찾고 부르시는 삶의 내용이다. 가인의 후예는 그 길로 가지 않았고, 창세기는 그들을 자신에게 상처 준 것에 대한 보복으로 사람을 죽였다고 자랑하는 이들로 표현한다(창 4:23-24). 이러한 강력한 보복의 근거는 가인에게 주신 표로 상징되는 일곱 배의 갚음을 확장한 77배의 갚음이다(창 4:15, 24).

숫자 7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가인을 지키실 것을 표현하기 위한 신학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가인에게 주어진 표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 표시였지만, 라멕의 말에 이르러 이 표는 가인-라멕 가족의 우월성과 특별한 신적 보호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신들만이 신의 보호를 받고 있다거나 특별하게 신이 선택한 백성이라는 식의 ‘선민의식’은 이처럼 자신들의 우월함과 지배를 정당화하고 다른 이를 차별하고 억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 일쑤다. 수많은 인종 차별주의와 백인 우월주의, 민족 우월주의는 그 대표적인 예다. 기독교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타 종교에 대해 가혹하게 대하는 것 역시 그 변종일 것이다.

우월한 존재 vs. 있는 모습 그대로의 삶
이러한 파괴와 폭력은 가인의 후예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창 6:11)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3)와 같은 구절은 노아 당시 온 땅에 가득한 ‘폭력’을 명확히 증거한다. 매우 특이해서 성경의 난제라고까지 여겨지는 창세기 6:1-4은 죄악에 대한 심판이라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아마도 소문이 자자한 “용사”라는 존재에 대한 4절의 언급은 1-2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 사이 결합의 결과일 것이다. 이런 결합은 고대 문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들은 곧잘 인간 여성과 결혼하고 그렇게 태어난 이들은 모두 영웅이고 용사다. 우리네 고대 전설에서도 단군과 같은 이 역시 신과 인간 여성의 결합으로 태어난 존재다. 이와 같은 결혼은 대개 그렇게 태어난 이들을 신격화하여 그들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창세기를 비롯한 구약 성경은 이런 존재를 강력히 반대하며 거부한다.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고 이기기 위해서는 더 강한 것, 더 탁월한 것이 필요할 텐데, 성경은 도리어 ‘각기 종류대로’를 강조한다. 섞어서 더 좋은 것을 만들기 시작하면, 그 사회는 자연스레 열등한 것, 못난 것, 뒤처지는 것들을 배제해갈 것이다. 경쟁이 최우선이 되면 열등한 종류는 악한 것으로 규정되고 배제될 것이다. 용사와 영웅이 득세하는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네피림과 용사의 존재에 대한 언급에 곧바로 이어지는 내용이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 그리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한탄과 진노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결합이야말로 대단한 존재를 출생케 하고 굉장한 힘과 세력을 형성하게 할 터인데, 창세기는 이를 두고 죄악의 가득함, 생각과 계획의 악함 그리고 결국 온 땅에 가득한 폭력이라고 단언한다.

하늘과 땅의 뒤섞임이야말로 죄악의 원천이다. 하늘의 존재 같은 뛰어난 사람이야말로 죄악 가득한 세상의 원천이다. 우리는 하늘의 능력을 덧입고 싶어 한다. 우리의 소명은 대개 세상을 구하는 슈퍼맨으로서의 소명이기도 하다. 어떤 계기를 통해 대단한 어떤 능력이 내게 입히게 되고 그때부터 완전히 달라진 나 자신을 나와 세상이 알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러한 용사가 지배하는 세상은 도리어 폭력의 세상일 따름이다. 영웅이 가득한 세상은 도리어 폭력이 가득한 세상이다. 크고 대단한 것이 있으면 좋지만, 그를 추구하면 반드시 작은 것을 소홀히 하고 가벼이 여기게 될 것이다.

슈퍼맨 같은 영웅적 존재 때문에 이 땅이 아름다워지지 않는다. 아름답고 능력 있기 위해 하늘의 특별한 무엇이 필요한 게 아니다. 내게 있는 약함을 애써 부정하고 더 강하고 뛰어난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연약한 사람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창세기와 구약은 사람을 가장 높이 여기고 긍정한다. ‘뒤섞어서 더 나은 것 만들기’는 진리에서 멀다. 그 자체로 귀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의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부르신다. 노아 본문의 핵심은 그렇게 생명을 존중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홍수 이후의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은 다른 무엇이 아닌 ‘생명에 대한 존중’이었으니(창 9:1-7), 이야말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나그네 인생
‘소명’이라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릴 존재는 아브라함일 것이다. 아브라함의 시작은 ‘그의 고향’을 떠나 ‘하나님께서 보여줄 땅’으로의 이동이라는 점(창 12:1)에서, 나그네살이는 소명의 외적 형식이라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향한 소명의 알맹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창 18:19)으로 표현된다.

그들은 일상을 살아간다. 창세기는 얼마 안 되는 분량으로 2백 년에 가까운 족장들의 삶을 단번에 일별한다. 여기에 나오는 족장들의 삶은 매우 헌신적이거나 경건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가뭄을 피해 애굽과 블레셋으로 이동하며, 자신의 부인을 누이라 번번이 속인다. 함정을 파서 상대방을 몰살시킴으로 상대의 잘못을 보복하는가 하면, 자신을 계속해서 속인 외삼촌을 또 다른 속임수로 갚아주기도 한다. 형제들이 일치단결해서 동생을 죽일까 팔아넘길까 의논하고, 시아버지는 홀로 된 며느리와의 약속을 도외시하며, 형제들은 동생의 보복이 두려워 벌벌 떨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의 생애는 ‘소명에 충성스러운 삶’ 같아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그들에게 주신 약속을 재확인하시되, 그들의 구체적인 삶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 단적인 예는 야곱이다. 가장 경건한 삶의 전형이라 할 수 있을 요셉의 삶조차도 열렬하게 사명감에 가득 찬 신앙인의 모습과 꽤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그들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창 4:26; 8:20; 12:8; 13:18; 16:13; 21:33; 26:25; 33:20; 35:7, 14-15; 47:31).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마침내는 애굽 땅까지 떠돌며 내려가게 되지만,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은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 그래서 이들의 모습은 어떤 문화를 만들어 내거나 나라를 이루어내는 모습이 아니라 주로 곳곳을 떠돌며 형성된 에피소드들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행하는 삶이 ‘나그네’로 떠도는 일상을 통해 구현된다.

나그네 인생을 둘러싼 여러 일화 가운데서도 부인을 누이라 속인 사건이 세 번이나 반복된 것과 디나의 성폭행 사건은 근본적으로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나그네들이 어떻게 위험에 쉽게 노출되는지,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가장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 이가 여성들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의 여자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지라면 그 땅 원주민들과 결혼하는 것이 안전한 삶의 길이며, 기혼 여성은 자칫 가족 전체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땅 원주민이 아니라 나그네, 흘러들어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에서 번번이 무사히 탈출하고 그에 더해 많은 재물까지 얻게 되었다는 내용은 근본적으로 나그네의 보호자 되시는 하나님을 증언한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신 10:17-18). 신명기는 이 말씀 앞에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권면한다(신 10:16).

이에 따르면, 할례의 본질은 육체가 아니라 신 가운데 신이신 여호와께서 나그네를 사랑하여 떡과 옷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고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놀랍게도 신명기 본문은 나그네와 할례를 연결한다. 할례는 선택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 부름 받은 백성의 삶은 나그네를 사랑하는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나그네 인생은 부름 받은 백성, 소명 가운데 살아가는 백성의 본질에 닿아 있다.

이 점은 창세기에서 할례받은 아브라함(17장)에게 일어난 첫 사건으로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놓여 있다는 점을 새롭게 이해하게 한다. 99세의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에게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명하시며(창 17:1), 그로 말미암아 민족들과 왕들이 나오게 되리라 약속하신다(17:6). “여러 민족의 아버지”(17:5)인 아브라함이 맞닥뜨린 첫 상황은 18장에서 볼 수 있는 나그네 환대다. 이어지는 19장은 소돔 땅을 찾은 나그네에 대한 롯의 대접과 소돔 사람들의 대접을 대조한다. 20장은 블레셋 그랄 땅에 아브라함이 나그네로 머물게 된 사건을 다룬다. 그러므로 17장의 할례 이래, 18-20장은 ‘나그네 대접’이라는 주제로 한데 묶을 수 있다.

아브라함, 롯,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삶의 영역에 찾아온 나그네를 어떻게 대하는가? 아브라함과 롯은 그야말로 온 정성을 다해 나그네들을 환대하고 자신들의 삶 속에 초대한다. 그에 비해 소돔 사람들은 약자요 소수인 나그네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성적인 욕망을 충족하고자 다수의 힘을 이용해 성폭행을 시도한다. 그리고 블레셋의 경우 따로 자세한 언급은 없지만,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라는 아브라함의 말(20:11)에서 대략 그 대응방식을 엿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 가운데 찾아온 나그네들을 어떻게 대하는가로 나타난다. 나그네를 함부로 다룬 아비멜렉 집의 태가 닫힐 뻔했으나(20:17-18),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돌보셨고 마침내 그녀는 이삭을 낳았다(21:1-2). 열방의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신 약속과 그 약속의 실현 사이에 나그네 주제를 지닌 본문이 배열되었다는 점은, 열방의 조상이라는 영예의 본질이 나그네 환대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나그네에 대한 강조는 주인의 며느리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난 아브라함의 하인이 하나님께서 택한 여성을 알아보는 표지로, 나그네인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언급하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24:12-14). 이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야곱에 대한 라반의 대응 역시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온 낯선(심지어 친척이라 해도) 이들, 지켜주고 막아줄 방패가 없는 이들에 대해 다수의 힘 가진 기존 세력이 어떻게 대하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물을 파지만 계속 쫓겨나야 하는 이삭의 삶과 애굽 땅에서 비록 인정받아도 한 순간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는 요셉 역시 나그네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이삭은 우물에 매여 살지 않고 어디든 옮겨가며 그가 가는 곳마다 우물을 얻게 된다. 그리고 요셉 역시 어디든 옮겨가며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곳에 임하게 한다. 비록 자신들의 삶은 고되되, 그들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된다. 이러한 사명은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단행한 토지 개혁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의 토지 개혁으로 말미암아 모든 애굽 사람들은 왕 앞에서 동등해졌고 누구나 경작을 원하면 국가로부터 토지를 분배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땅은 소유가 아니라 이용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요셉은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극히 불행했던 삶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의 생명을 건지고(45:7-8), 그들뿐 아니라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50:20)하기 위함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소돔과 관련된 아브라함의 또 다른 행동도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소돔이 연루된 국제적인 전쟁 통에 포로로 끌려간 롯을 구출한다(창 14장). 특이하게도 창세기 본문은 이 부분에서만 유독 아브라함을 두고 “히브리 사람”이라 부른다(14:13). 창세기에서 “히브리 사람”은 ‘흘러들어온 사람’을 가리키는 일종의 천대의 표시다(39:14, 17; 40:15; 41:12; 43:32). 아브라함은 가나안 원주민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이었고, 그의 이름은 아직 “아브람”이지만, 자신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14:14-15) 롯을 구출하는 일에 뛰어든다. 그래서 롯의 가족만 구출한 것이 아니라 무수한 소돔 사람들까지도 살려 내었다(14:16, 21). 그는 자신이 이룬 것을 지키고 보존하는 데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부를 걸고 사람을 살려낸다.

나그네로 살며 나그네를 환대하는 삶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는다. 나그네지만 할 일을 하며 살아간다. 이삭은 그저 열심히 우물을 파는 일상을 살았고, 야곱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고 가족을 이루고 지켜내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간다. 요셉은 어느 곳에 가든지 온 맘 다해 그 일을 했고, 가는 곳마다 상관의 인정을 받았다. 거의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 없이 그는 보디발 집에서 허드렛일을, 감옥에서 간수를 보조하는 일을, 그리고 애굽 왕실에서는 곡식을 관리하는 총리의 일을 감당했다.

그야말로 그들은 일상을 살아간 이들이며 자기 삶에 충실한 이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삶은 “소명”이라는 말이 흔히 지닌 뉘앙스에 비해 그리 ‘뜨거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야말로 생육하고 번성하며 살아갔다. 그들에게는 삶이 소명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평생을 나그네로 떠돌았고, 그로 인해 온갖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나그네임에도 다른 나그네를 영접하며 구하고 살렸다.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의 삶에 대해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이라 표현한다. 창세기에서 정의와 공의는 나그네로 살며 나그네를 환대하는 삶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서 볼 수 있는 소명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정의와 공의의 일상’이라 말할 수 있다.

소명을 생각한다는 것이 어떤 특별한 부르심을 떠올리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존재케 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 그리고 나그네로 평생 살아가되 또 다른 불안하고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는 나그네를 영접하는 것, 그것이 소명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풍성한 삶으로의 부르심이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의 본질적 소명이다.



김근주
학부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신학교에 가게 되었고 결코 상상해본 적 없는 목사가 되었다. 예언자들이 외치는 심판뿐 아니라 회복의 메시지야말로 예수께서 이 땅에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알짬임을 깨닫고, 이를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며 살기를 소망한다. 소망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는 연구나 준행, 가르침 모두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서울대, 장신대 신대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복음의 공공성》 《소예언서 1: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특강 예레미야》 《이사야가 본 환상》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