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가 낯익어서 망친 학기 혹은 역사의 과정 이해하기

[321호 교회 언니, '종교와 여성'을 말하다]

2017-07-20     양혜원 《교회 언니, 여성을 말하다》 저자

유학 생활 중 특별히 힘들었던 시기가 두 번 있었다. 첫 번째가 종교개혁 역사 수업을 들었던 두 번째 학기이고, 두 번째가 박사 시험 마치고 논문을 쓰던 첫 학기였다. 비중 있는 과목을 두 개 신청하고 나머지 하나는 학점 배점이 낮은 수업을 신청했던 첫 학기와 달리, 비중 있는 과목을 세 개나 신청했던 두 번째 학기는 풀타임으로 공부하는 미국 학생들과 동일한 학업량을 처음으로 소화해야 했던 첫 학기라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오직 토론으로만 진행하는 세미나 형식의 대학원 수업 특성 상 그 주 수업할 내용을 읽어가지 않으면 수업 자체가 불가능했는데, 그 읽어가야 할 양이 정말 어마어마했다. 두 번째 학기에는 종교개혁 역사 외에도 그리스도교 첫 1천년 역사 수업도 같이 들었는데, 신학교 출신이 아닌 내게는 두 과목이 다 처음 접하는 과목이라 내용 파악하기도 바빴다.

‘프라이머리 소스’와 ‘세컨더리 소스’
인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종류의 자료를 다룬다. 영어로 primary source(1차 자료)와 secondary source(2차 자료)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 초기 기독교 사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순교자 저스틴, 제롬, 오리겐, 아우구스티누스 등 그 시대에 기독교 형성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의 글이 1차 자료가 되고, 그 시대와 그들의 글에 대해서 연구한 다른 학자들의 글은 2차 자료가 된다. 역사학자의 경우는 그 시대의 공식 문서, 묘비명, 편지, 일기, 연설문 등이 다 1차 자료가 될 수 있다. (근래에 와서는 구술사의 경우처럼 면접도 1차 자료가 된다.) 그리스도교 첫 1천년 역사 수업의 경우 교수는 1차 자료와 2차 자료를 같이 읽게 했고, 종교개혁 역사 수업의 경우는 1차 자료만 수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2차 자료는 각 사람이 비중 있는 연구서 하나씩을 맡아서 발표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2차 자료는 1차 자료를 읽는 방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2차 자료는 1차 자료가 어떻게 읽혀야 하는지에 대한 학자들의 논의와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경학자들에게 성경은 1차 자료가 되는데, 이때 학자들은 성경을 “맨 눈”으로 읽지 않는다. 많이들 기억하고 있겠지만, 유진 피터슨은 《이 책을 먹으라》에서 윌리엄 틴들의 번역에 기초해 언어를 고상하게 다듬은 흠정역(KJV) 성경을 비판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소박한 번역을 귀족과 왕족의 취향에 어울리게 다듬음으로써, 성경의 원 취지-하나님의 백성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피터슨의 성경관에서 비롯되는 해석으로서, 이와 대치되는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은 성경은 마땅히 일상 언어와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과 인간이 동급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 정경도 인간의 일상 언어와 쉽게 섞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두 입장은 성경이라는 1차 자료에 대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관점은 수용하되, 성과 속의 의미, 그리고 거룩의 재현 방식에 대해 차이를 보이는 견해들이다. 이러한 견해들을 여러 증빙 자료를 가지고 논증한 것이 2차 자료를 구성한다.

그러나 1차 자료와 2차 자료의 경계는 유동적이다. 예를 들어, 1차 자료에 대해서 2차 자료가 무엇이라고 말해왔는지 그 역사를 보고자 한다면, 2차 자료가 1차 자료가 된다.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와 칼뱅과 에라스무스와 쯔빙글리 등이 쓴 글은 그 당시에는 2차 자료였겠지만, 지금은 다 1차 자료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현대 서구의 학계가 형성한 연구 방법이기 때문에 당시에는 이러한 구분으로 이해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종교개혁의 중요한 성과 중 하나는 성경이 누구나 접할 수 있는 1차 자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어, 라틴어, 한문, 아랍어 등으로 기록된 고대 문서 중에서 성경만큼 방대하게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문서가 없다. 그러나 아무래도 성경 시대와 현 시대의 시간적, 지리적, 문화적 간극이 큰 만큼 읽는다고 누구다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주석과 주해와 설교집을 읽는다.

서구 지성사의 전환과 종교개혁
서구의 지성사를 살펴보면 1차 자료와 2차 자료의 관계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들이 있다. 종교개혁 시대가 그랬고, 좀더 최근의 예로는 탈식민 시대가 그랬다. ‘탈식민 시대’란 말 그대로 서구의 종속에서 탈(脫)하는 시대라는 뜻으로서, 서구 중심주의를 비판하며 그 시각으로 형성된 지식의 계보에 도전한다. 그래서 성경의 경우도, 탈식민 관점으로 읽으면 정복자 관점은 유럽 사회의 식민지 확장을 정당화한 것으로 비판되고, 대신에 정복당한 자의 정당성이 부각된다. 그러니까 성경과 칼을 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던 정복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보고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아니면 성경은 아무리 새롭게 해석해도 정복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데서 벗어날 수 없다며 아예 성경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버리는 것도 지성사의 중요한 전환인데, 후기 구조주의 입장은 1차 자료의 존재 자체를 의문시한다. 1차 자료는 1차 자료로 구성된 것일 뿐, 거기에 어떤 본원적 권위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도 대문자 B가 아닌 소문자 b로 써야 한다고도 한다.

이러한 새로운 렌즈가 부상하게 된 연원이 누구 혹은 어디에 있는지 꼭 집어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흔히 루터나 칼뱅처럼, 혹은 푸코나 데리다나 에드워드 사이드나 가야트리 스피박처럼 특정 시대를 대변하는 사상가들만을 기억하고 그래서 마치 그들이 어느 날 홀연히 새로운 빛을 들고 온 것처럼 인식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축적된 지성사의 전환점에 무리(crowd)가 집중하는 현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도 그런 현상이었다. 루터로 대변되는 무리의 힘이 서구 역사의 큰 전환을 이룬 것이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어떠한 이유에서건 오래 살아남은 몇 명을 기억한다. 그런데 현대의 사상가보다 루터나 칼뱅 같은 사람이 (그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좀더 독보적이고 항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물론 종교 때문이다. 현대의 사상가들과 달리 이들은 하나님의 뜻으로 움직였다는 해석의 아우라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 Portrait of Martin Luther as an Augustinian Monk (Wikimedia Commons)

이 종교의 아우라는 매우 중요하다. 내가 500여 년 전에 루터가 쓴 글을 읽으면서도 전혀 시대의 간극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수업 시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사고의 정지를 느끼면서, 토론에 참여하기가 힘들었다. 다 아는 것 같으면서도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혹은 상관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내색해서는 안 되는 수업에서 이 1차 자료를 가지고 논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거기에서 나는 어느 위치에 서야 하는지도 잘 감이 오지 않았다. 이것이 만약 신학교 수업이었다면 사뭇 분위기가 달랐을 것이다. 신학교는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공통 분모와 전제를 가지고 있고, 그 신앙을 표방하는 게 금기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학으로서 그리스도교를 공부하는 것과 신학으로서 그리스도교를 공부하는 것의 차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룰 기회가 있겠지만, 나의 두 번째 학기는 그러한 차이들을 이해하는 첫 관문이 되었다.

여성주의 관점이 지식 형성에 끼친 영향
종교여성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그러한 관문의 중요한 매개는 아무래도 여성학이었다. 서구 지성사의 중요한 전환들을 위에서 간략하게 몇 가지 언급했는데, 그러한 전환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전환이 여성주의 관점이다. 여성주의 관점을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여자도 남자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물론 구체적으로는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그래서 남자가 인간으로서 누리는 모든 것을 여자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중에서 근대 사회에서 특히 중요했던 것은 교육의 기회와 참정권이었다. 종교개혁이 여성을 위해 해준 게 있다면,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정도의 문자 교육 기회를 준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성경을 읽는 게 개인의 구원에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의 기회와 참정권을 얻고도 여성의 지위나 하는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분과 학문으로서 대학에 자리잡기 시작한 시기가 (미국의 경우) 대략 1970년대이다. 그렇다면 여성주의 관점이 지식 형성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여성주의는 크게 두 가지를 하는데, 하나는 여성 자체에 대한 왜곡된 지식을 교정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여성에 대한 그리고 여성에 의한 지식을 형성하여 남성 중심의 지식을 교정하는 것이다. 1929년에 나온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 보면, 여성에 대한 책은 많지만 그것은 전부 남성이 여성에 대해서 쓴 책이고, 그 견해는 다양하지만 한 가지 일관된 점은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관점이라고 지적한다. 그 이유는 남성들이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여성을 열등하게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울프는 말한다. 시몬느 드 보봐르도 《제 2의 성》에서 비슷한 견해를 제시하는데, 여성은 남성이 자기를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대상 혹은 타자로서 자신의 두려움과 욕망 등을 투사하는 거울의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여성을 비하하거나 찬양하는 남성 저자의 문학은 있지만 여성 저자의 문학은 드물고, 그보다 더 드문 것은 여성의 역사였다. 남성 저자들에게 여성의 경험이나 현실은 기록을 남길 만한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은 여성에 대한 지식을 형성할 1차 자료와 2차 자료가 심각하게 왜곡되었거나 부재함을 뜻한다. 따라서 이러한 왜곡과 부재를 해결하는 것이 여성주의가 학문 영역에서 하는 일이다.

종교개혁 시대와 관련하여 예를 들어보자면, 흔히 르네상스나 종교개혁은 인류 사회가 어떤 발전을 이룬 시기로 제시된다. 일례로 오늘날 탐구와 실험에 기초한 지식은 진보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면, 권위에 기초한 지식은 구시대의 악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개신교가 가톨릭보다 진보의 이미지가 (적어도 서구에서는) 강한 이유는 사제의 중보에 의지하던 제도를 개혁해 누구나 평등하게 성만찬에 접근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다는 역사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여성의 경험에서 바라보면 다른 그림이 나온다.

종교개혁과 여성주의 관점
르네상스 시대가 오고 종교개혁의 시대가 와도 여성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제약이 많아졌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우선 수녀원들이 문을 닫는 바람에 제한적이나마 여성들이 종교적인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길이 막혔다. 종교개혁의 시대가 와도 여성들은 종교 지도자의 자리에서 배제되었는데, 개신교의 경우 아내와 어머니로 사는 길 이외에 추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삶의 방식마저 잃은 것이다. 물론 수녀가 되는 길도 집에 어느 정도 재산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고, 수도원 및 독신 제도는 평범하게 결혼해서 살아가는 사람과 성직으로 부름 받은 사람 사이의 종교적 위계를 형성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고 사제/수사와 수녀 사이의 위계도 여전히 존재했다. 하지만 지난 번 글에서 언급한 아빌라의 테레사나 노리치의 줄리언와 같은 영향력 있는 여성 종교인의 출현은 그들의 성직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개신교에서도 영향력 있는 여성 종교인들이 나왔지만, 그들이 목사의 아내가 아닌 목사나 신학자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주류 개신교는 성직 제도를 거부하는 듯하면서도 여전히 목사나 장로 등의 안수직은 그대로 둠으로써 유사 성직 제도를 발전시켰고, 거기에서 여성은 (대략 20세기 중반까지) 배제했기 때문이다.

한편 종교개혁이 표방한 만인제사장 이론은 남편의 가부장권을 강화했다. 이 말은 이렇게 생각해보면 쉬울 것이다. 한 사회가 하나의 종교를 믿으면서 종교 생활과 시민 생활이 분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성직자와 일반 성도가 위계적으로 구분되고 독신 성직에 더 큰 종교적 가치와 권위를 둘 경우 가정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이미 세속에 더 가까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로서 그들의 도덕성에 대한 기대치가 그리 높지 않다. 종교개혁은 한편으로 도덕성 우위의 대결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개혁가들은 독신으로 살면서도 귀부인을 음탕한 눈으로 바라보며 호시탐탐 꼬드길 기회를 노리는 성직자들을 그림 등으로 희화화하면서, 집안을 잘 다스리고 책임 있는 시민의 역할을 하는 일반 가장들의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했다. 거룩을 재현하는 별도의 성직자 그룹을 제거하고, 모두가 거룩을 재현하는 삶을 살게 하려는 개혁가들의 기획은 가정을 거룩이 실현되는 단위로 격상시켰고, 그것은 곧 권위 있는 남편과 순종하는 아내, 주도하는 남편과 보조하는 아내의 성역할을 의미했다. 그렇게 가정의 “성스러움”을 강조함으로써 가정에서의 성역할이 이전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 되었다. (가톨릭도 이전보다 가정의 성스러움을 더 강조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요셉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개혁가들은 성직의 위계에는 도전했지만 성의 위계는 지지했고, 그래서 여성의 가장 고귀한 소명은 이제 “어머니”가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학자들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 칭송되는 이 시대에 여성에 대한 제약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심해졌다는 데 동의한다. 역사학자 메리 E. 위스너-행스(Merry E. Wiesner-Hanks)는 중세에는 여성이 농노의 병역 의무를 채우지 않기 때문에 열등하다고 보았다면, 16세기에는 정치적 통합을 위해 6세기의 로마법이 부활되면서 그 법의 여성관을 따라 여성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연약하기 때문에 열등하다고 보았다고 지적한다. 한편 계몽주의 시대 이후 과학의 발전도 여성의 지위 향상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는데, 여성이 “왜” 열등한지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제를 뒤집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전제가 강화된 것이다.

이처럼 어떤 사건이 모두에게 동일한 효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여성주의 관점의 학문은 밝혀냄으로써 새로운 지식 형성에 기여했다. 여성의 경험을 따라 기록된 역사를 보면 역사의 중요한 시기들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 그래서 여성에게는 르네상스가 없었다는 말도 나왔다. 비슷한 맥락에서 여성에게 종교개혁의 의미는 무엇일까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지지한 여성에 대한 연구는 아빌라의 테레사와 같은 가톨릭 여성에 대한 연구보다 늦게 이루어졌다. 여성의 종교적 영향력이 공적으로 유의미했던 시대는 오히려 종교 개혁 시대가 완료되기 이전이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여성학’이 생성되기까지
지난 번 글에서 수녀원에 갇힌 여성들의 종교성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한 것은 종교개혁 이후이며 그 이유가 개신교가 더 진보적이어서라기보다는 종교의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일단 앞의 이야기로 왜 개신교를 더 진보적이라고 할 수 없는지는 설명이 되었을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안에서 영향을 미친 여성들은 남성 목사와는 달리 교회의 공식 직분이 아니라 아내나 어머니의 자리에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성 안수가 보편적으로 허용되기 전까지는) 스스로 목사가 되기보다는 목사의 아내가 되는 길이 종교적 소명을 실현하는 길이 되었다.

한편, 종교개혁 이후 서구 사회에서 그리스도교가 조금씩 공적 영향력을 잃기 시작한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몇 가지만 나열하자면 오랜 종교 전쟁으로 피폐한 나라들이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기 시작했고, 개신교와 가톨릭이 경쟁하면서 소속에 대한 요구가 생기자 거기에 부담을 느낀 신자들이 오히려 개인주의 신앙을 더 발전시키기도 했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교회와 신학이 담당했던 이 세상의 존재 방식에 대한 설명을 과학이 대체하기도 했다. 종교가 공적 영역에서 점점 물러나면서 종교 지도자의 자리도 매력을 잃기 시작했다. 20세기에 오면 공적 영역에서 종교의 영향력은 현저히 줄어드는데, 그러면서 여성 안수에 대한 저항도 줄어들었다. 지난 번 글에 언급한 그레이스 잰슨이라고 하는 학자는, 종교가 이미 사유화된 상황에서 여성의 종교적 영향력이나 지도력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비판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여성주의 지식의 형성이 종교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사람들은 보는 것일까? 이것 역시 여러 가지 방향에서 생각할 수 있지만,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근래까지는 여성주의와 종교는 서로 대치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종교가 가부장제를 지지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이 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평등의 이념을 종교 안에서도 추구하기 시작했고,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을 중요한 의제로 삼기 시작했다. 종교여성학이라는 분과의 생성은 이러한 흐름의 영향이기도 하다. 한편 최근에는 종교는 종교대로 두면서 그 안에서 여성의 경험을 재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보수주의 여성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나타나는 것인데, 한국의 맥락과 아울러 이에 대해서는 다음 번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결론적으로, 500년 혹은 2천년을 뛰어 넘는 종교의 힘은 여성인 나에게는 복합적인 경험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종교의 힘은 보편성의 힘이기도 하다. 보편성이란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적용된다는 뜻이다. 유럽 지역에서 500년 전에 일어난 사건과 문서를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자신의 전통으로 보게 되는 이유도 이러한 보편성에 근거한다. 나는 이러한 보편성을 나쁘게만 보지 않는다. 보편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특정 그룹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라는 입장은 이제 어느 정도 정설이 되었다.

지난 번에도 말한 것처럼 우리는 다양성의 시대에 살고 있고, 다양성은 어느 그룹도 다른 그룹을 대변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성과 인종과 문화와 종교를 초월하여 다양한 사람들을 같은 인간의 범주에 포함하고 그들 사이의 평등을 주장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500년 혹은 2천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친숙함은 그 자체로서 묘한 감동이 있기도 하다. 여기에 도대체 어떤 힘이 있어서 이렇게 오랜 세월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보편성은 세월뿐 아니라 공간을 뛰어넘는 힘도 있어서, 보츠와나의 어느 가톨릭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깊은 울림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깨어 있지” 않으면 그 힘은 여성을 종속시키는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여성들에게 무엇보다도 깊은 신앙이 필요한 이유는, 그리스도교는 내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는 확신과 더불어 아직도 우리를 잘 모르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들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다. 

 

양혜원
본지 해외편집위원. 서울대에서 불문학을,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했다. 1997년부터 번역가의 길에 들어서 유진 피터슨, 헨리 나우웬, 존 스토트, 톰 라이트, 알리스터 맥그래스 등 주요 기독교 저자들의 책을 번역했다. 미국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고, 올해 9월부터 일본 난잔종교문화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유진 피터슨 읽기》 《교회 언니, 여성을 말하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