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스터 맥그래스에게 듣는 '우주적 하나님'

〔독자서평〕 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 알리스터 맥그래스 / 복있는사람

2017-08-17     박종범

흔히들 말하는 ‘모태신앙’으로 교회 문턱을 어려서부터 넘나들며 각종 성경공부와 주일학교(수련회)를 거쳐 온 나는 (정말 부끄럽게도) 기독교 진리에 대한 ‘확신’만을 강조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렇기에 우리가 수호하고자 하는 ‘가치’에 대한 변증 대신 교회에 대한 비방으로만 들리는 비신자들의 ‘질문’을 무시했다. (특히 아버지께서 군에서 복무하셨기에 나의 인생의 절반은 군 교회에서 시간이었고, 제대로 된 교회교육의 기회가 부족했던 이유는 확실히 잦은 이사와 함께 군 교회 안에서의 교회교육의 한계점에 기인한다.)

이런 나의 외골수적(혹은 맹목적) 신앙의 틀을 깨부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여느 때처럼 기독교 서적을 빌리려고 두리번대던 서가에서 만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었다. 그 당시 책을 사고 읽는 것이 마냥 즐거운 시기였던지라 그 책이 기독교 커뮤니티에서 ‘불온서적’으로 취급받는지에 구애받지 않고 이리저리 읽었다. 사실 도킨스의 책을 읽고 고등학생이던 내가 할 수 있었던 생각은 (엉뚱하게도) 신앙에 대한 회의가 아니라 과학의 적, 나아가 인류의 적으로 매도당한 종교의 가치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였다. 조금 전개가 급진적이긴 하다만, 그때 만날 수 있게 된 사람이 도킨스의 주장을 전면 반박한 ‘알리스터 맥그래스’였다. (이후 군 복무를 하던 중 읽었던 그의 저작 《회의에서 확신으로》를 읽고서 그의 저작을 열성적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 과학과 신앙은 공존할 수 있는가? (홍종락 옮김) 16,000원

《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는 그의 이전작인 《정교하게 조율된 우주》의 2부작이라 생각될 만큼 하나님 만드신 우주와 존재에 대한 오랜 사색의 흔적이 물씬 묻어난 작품이다. 아울러서 맥그래스의 지난 행보에 대해서 배경 지식이 없는 독자들이 읽기에도 무난할 만큼 저자는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술회하듯 솔직담백하게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맥그래스가 기독교 역사를 기술했던 전공자였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정말 친절하다. 그는 자칫 딱딱하고 먼 산을 바라보게 되는 ‘(과학과 종교를 기틀로 한)우주 이야기’가 그 무엇보다 우리의 가슴을 떨리게 하는 일임을 책의 첫 장부터 제시하고 있다. 유한한 우리가 무한한 우주, 그 너머의 창조주를 알아가는 일은 광활한 우주와 존재의 깊이를 탐험하기 위한 도구를 결정하고자 “과학인가, 종교인가”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우리에게 “둘 다 의미가 있음!”을 알려준다.

“종교는 가장 가까운 별까지의 거리를 알려 줄 수 없고, 과학은 인생의 의미를 말해 줄 수 없다. 그러나 둘은 각각 더 큰 그림의 일부이며, 어느 하나나 둘 다를 배제하는 순간 우리의 인생관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 책의 시작부에서 발췌

이 책에서 나의 흥미를 끈 부분은 5장의 ‘다윈과 진화론’이었다. 책에서 맥그래스도 언급하였듯이, 오랫동안 창조론의 적으로 칭해진 ‘다윈주의’는 사실 시간이 지나면서 발전을 빙자한 여러 사설들에 의해 오염된 것이지 처음부터 창조를 부정하기 위해 수립된 가설이 아님을 5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윈 스스로도 자신의 탐구가 무신론적 주장으로 변질되는 것을 적대시했다. 또한 당시 소설가이자 기독교 사회 개혁가였던 찰스 킹슬리는 학문활동이 창조론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를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알게 해주는 ‘고상한 신 인식’으로 칭함으로 다윈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있다.

물론 다윈의 사상이 종교적 우려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맥그래스는 다윈의 주장이 인간과 동물의 조상을 동일시 할 여지가 분명하며, 다윈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고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앙고백에 위배되는 부분들이 있음을 논리적인 열거를 통해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다윈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이야기를 마치지 않는다. 기독교가 다윈의 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다면 지금 다윈주의를 반대하기 위한 창조론 수립에 매진한 나머지 과학을 경시하는 경향성을 띄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탄식을 쏟아낸다.과학과 종교, 보다 분명히 말해 과학과 신앙은 양립할 수 있다. 아니, 양립해야만 한다. 비록 과학은 그 이름의 권위를 빌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에게 이용당했지만,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이것이 과학의 잘못이 아니라 과학적이지 않은 것을 과학이라 칭한 이들에게 잘못이 있음을 분명히 한다.

책의 후반부에서 맥그래스는 “이 책은 과학이나 종교를 옹호하기 위함이 아님”을 여러 번에 걸쳐서 강조하고 있다. 그는 순전히 과학이 주는 시사점을 신자들에게 설명하고, 종교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갖는 이들에게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을 설명하는 기독교를 설명하고자 이 책을 저술했다. 나아가 우리는 여기서 ‘우주’라는 단어가 단순히 그 우주 그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하나님’을 지칭하는 표현이라는 것으로 우리의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언제나 부족하기만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 지으신 이 세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신앙을 견지한 가운데 과학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탐구활동을 이어가야 한다. 특별히 과학과 신학의 대화란 주제로 교계에서도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이 모여서 합리성이 결여된 오늘날의 신앙들을 뒤바꿀 기폭제가 되었으면 한다.

박종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