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촛불은 신음하는 이웃 곁으로

[324호 커버스토리]

2017-10-27     이영란 <터기리마을신문> 주간, 본지 편집위원

턱거리 사람들과의 만남
저녁 어스름이 내리자 마을의 집들에 하나둘씩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베란다 창밖으로 보이는 마을은 조용하고 한적해 보인다. 하지만 집집마다 처한 시간들은 모두 다를 것이다. 어느 집에는 저녁을 준비하며 밥상머리에 둘러앉은 가족도 있겠지만, 어느 집에는 아버지의 술병을 뺏는 엄마의 넋두리에 불안한 눈빛을 보내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엄마가 없는 9살 지훈(가명), 7살 영훈(가명) 형제의 아버지는 오늘도 밤늦게 돌아올 것이고, 아이들은 라면 하나에 식은 밥을 말아 넣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 1월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바람에 걷기조차 힘들어진 김남수(가명) 할아버지는 오늘도 다리를 질질 끌며 병원에 다녀오셨을 것이다. 남편이 죽고, 연락이 끊긴 자식들을 그리워하며 혼자 살아가는 노기옥(가명) 할머니가 경로당에서 돌아오실 시간일 것이며, 거동이 불편해 열댓 평 되는 집에서도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구미자(가명) 할머니는 오늘도 ‘나눔의 집’에서 배달해준 반찬 뚜껑을 열고 있을 확률이 높다.

   
▲ <터기리마을신문>발송 전에 함께 '화이팅'을 외치는 모습 (사진: 이영란 제공)

실패한 자영업자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이 사람들이 나의 삶 속으로 들어올 줄은, 글쎄 하나님께서나 알았으려나, 꿈에도 몰랐던 일이었다. 

여러 가지로 지쳐 있던 나는 십여 년 넘게 해온 월간지 기자 일을 접고, 동두천 시내에 작은 식당을 열었다. 요리에 관심이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열게 된 ‘책과함께라면’이라는 식당은 책도 보고(간혹 판매도 하고) 라면을 비롯한 음식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식당이 잘 운영되면 차츰 공연이나 시낭송도 여는 그런 문화 공간으로 만들고 싶은 바람도 있었다. 어쨌든 여차저차 해서 결론으로 남은 것은, ‘책과함께라면’이 일 년 만에 문을 닫았다는 사실이다.

왜 일 년 만에 문을 닫았는가 하는 물음에는 다만 지난 7월 2일 발표된 국세청 통계를 보여드리는 것으로 가늠하겠다. 국세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새로 창업한 사업자는 122만6천443명으로 전년보다 3.0% 늘었으며, 반면 폐업한 사업자는 90만9천202명이라고 한다. 나는 그 90만9천202명 중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또한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자영업자는 작년 기준으로 550만 명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고 하며 실제 자영업자 5명 중 1명은 월 평균 수입이 100만 원 미만인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책과함께라면’은 이러한 월 평균 수입에도 한참을 못 미쳤다.

하지만 포부를 가지고 열었던 식당을 폐업하면서도 그리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왜 그런지 곰곰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그 일 년 동안 만났던 사람들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난 시절 ‘책과함께라면’을 하는 동안 손님들은 많지 않았지만, 손님이 인연으로 발전하여 꼬리에 꼬리를 문 인연을 만들어가는 희한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혹자는 동두천에 몇 년 동안 산 사람보다 내가 동두천 사람들을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등의 격려(?)를 할 정도였으니까.

▲ <터기리마을신문>

<터기리마을신문>을 통해 마을로 들어가다
그중 결정적 인연은 동두천 성공회 ‘나눔의 집’과의 만남이었다. ‘나눔의 집’ 관계자들과 만나게 된 계기는 ‘책과함께라면’ 간판 글을 써주신 판화가 선생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 때문이었다. ‘나눔의 집’ 관계자들과 차 한 잔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끝에 마을신문을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을신문과 관련하여 내가 드릴 수 있는 조언을 하는 동안 그곳의 신부님은 내가 월간지 기자였다는 점을 들어 마을신문 기자 교육을 해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해왔다. 당시 일에 치여 사는 것에 넌더리가 났던 나는 순간 망설였지만, 5회에 걸친 기자 교육만 해주고 신문 제작 여부 등은 부담스러우면 안 해도 된다는 조건을 듣고 결국 승낙을 했다. 하지만 웬걸, 기자 교육이 끝난 뒤에도 나는 신문 발행을 위한 일뿐 아니라 자의반 타의반으로 각종 마을 일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렇게 탄생된 신문이 <터기리마을신문>이다. 이 신문은 동두천의 광암동, 탑동동 등의 지역인 턱거리 마을을 중심으로 발간되고 있는데, 어느새 4호를 준비 중에 있다. 그동안 나는 점점 이 마을에 빠져들었다. 결국 거주지까지 턱거리 마을로 옮기는 결단을 했다. 동두천 시민이자 턱거리 마을 주민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턱거리 마을 사람들을 점점 더 많이 만나게 되었고, 이 마을만이 가진 특수한 성격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턱거리 마을은 왕방산과 해룡산이 주변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근처의 왕방계곡과 쇠목계곡 등이 있어 자연경관이 매우 수려하다. 동두천의 허파라 불릴 정도로 청정한 자연환경 탓인지 아기자기하고 예쁜 카페가 곳곳에 들어서 있고, 한편엔 전원마을이 형성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턱거리 마을은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애잔한 살림살이가 고만고만한 가난한 동네임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미군기지와 인접해 있어 한때 호황을 누린 적도 있었다지만, 미군들이 거의 빠져나간 지금은 생계 수단을 잃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일거리가 없어, 이 마을의 가난의 굴레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조금이라도 젊은 사람들은 이 마을을 빠져나가기 일쑤여서, 마을의 평균 연령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높은 편이다.

<터기리마을신문> 2호 발간을 준비할 때 이곳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파출소장을 인터뷰했는데, 몇 시간씩 마을을 다녀 봐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서너 명에 불과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과장도 아닌 것이 나도 이 마을을 지나는 동안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잘 만나볼 수 없었다.

또한 턱거리 마을은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 마을 언덕에 세워진 동두천복합화력발전소와 그로 인한 보상 문제로 세워진 세탁 공장으로 인해 이웃 간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심각한 상태라는 점이다.

지난 달 이곳 마을회관에서 새로운 주민위원장을 뽑는 투표가 있어 달려가 보았는데, 거기 모인 사람들은 발전소에서 받은 마을기금으로 세워진 세탁 공장(세탁 공장이 세워지게 된 이유는 마을 사람들이 예전에 미군기지에서 나오는 세탁물을 세탁해주며 살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의 부실한 운영과, 전임 주민위원장의 횡령 건 등으로 쌓인 울분을 터트리곤 했다. 그중 한 분이 하신 말씀이 내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어린애 들쳐 엎고 낮이나 밤이나 발전소 반대 투쟁에 나서서 그 긴 시간을 다 바쳤는데, 정작 발전소에서 준 마을기금은 마을 발전에는 쓰이지 못하고 한 사람(전 주민위원장 등)이 전횡했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것만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져서 살 수가 없어요.”

관계성 회복이 중요하다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예전의 마을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난하게 살아도, 이웃 간에 정도 도탑고, 참 살기 좋은 곳”이라는 말씀을 한결 같이 하시곤 했다. 시내와 지리적으로는 멀지 않지만, 분지처럼 형성된 이 마을은 시골 마을처럼 마을공동체가 오롯이 살아 있던 곳이었다. 어쩌면 <터기리마을신문>이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분열과 갈등으로 마음을 다친 이웃들과 그동안 정보력 부족으로 손해를 감수해야 했던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음으로써 서로 화합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 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점에서 <터기리마을신문>에 모든 마을 주민이 인터뷰나 사진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 나름대로 세운 계획이기도 하다.

마을에서 살면서, 마을 일을 하면서, 나는 턱거리 마을의 마을공동체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관계의 회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는 비단 턱거리 마을뿐만이 아니다. 어떠한 지역공동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관계 회복을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가장 기초적인 부분은 서로간의 진심어린 소통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진심어린 소통은 개인과 개인 간은 물론이고, 개인과 이웃, 개인과 마을, 마을과 시(市), 시와 정부 등으로 나아갈수록 필요하다. 배제되고 소외되는 관계가 지속되는 한 마을공동체의 발전은 어려움에 처한다.

우리가 살아갈 미래를 설계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 중 하나가 개별화되어 있는 세태이다. 모든 문제를 개별적으로 풀어야 하는 현실은 경쟁을 유발하고, 그 안에서 배제와 도태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모두들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현실만 남아버린다. 문제를 개별화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 바로 공동체성 회복이다. 이 공동체성은 먼저 가정에서 이루어지고, 그 다음으론 마을로 나아가 마을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 공동체성 회복으로 마을이 곧 학교가 되고, 쉼터가 되고,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 마을이 곧 지역을 구성하는 요소이며, 나아가 국가를 구성하는 단위이다. 마을에서 개별화의 사슬을 끊어 버리고, 공동체성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나아갈 때 누구도 소외와 배제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다.

   
▲ <터기리마을신문> 편집회의 모습 (사진: 이영란 제공)


성공회 ‘나눔의 집’의 활동
우리가 ‘가난하다’고 얘기할 때 주로 경제적인 부분에서 접근하지만, 이 가난이라는 것은 물질뿐 아니라 정서적·영적 소외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 시인이 가난하다고 하자. 그럴 때 그는 물질적으로는 가난할지언정 정서적으로 가난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러할 때 이곳 턱거리 마을에서 만난 성공회 ‘나눔의 집’의 활동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동두천 나눔의 집 사제인 김현호 신부는 ‘나눔의 집’을 소개하면서 십자가를 먼저 내세우는 포교보다는 삶 속에서 예수님의 정신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하는 곳이라고 했다.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적 우선성’을 고백하면서 가난한 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가난한 지역에 들어가는 것이 우선이라는 얘기다.

‘나눔의 집’은 지역공동체 형성과 가난한 이웃의 자립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1986년 9월 상계동 나눔의 집을 여는 것을 시작으로 현재 9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기자 시절 이 나눔의 집을 취재하지 못한 게 한스러울 정도로 나눔의 집 영성과 활동이 마음에 든다. 하지만 뒤늦게라도 나눔의 집과 인연을 맺은 것에 대해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몰라도 겉으로 “하나님의 뜻이다” “그분이 인도하셨다” 등의 말을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지나고 보면 내가 가는 길에 ‘그분의 뜻’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동두천 ‘나눔의 집’과의 만남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가난한 지역에 들어가서 함께 가난한 자들과 살아가면서 성숙한 지역사회를 만들어내고, 그와 더불어 교회도 함께 성숙해 나가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나눔의 집’ 존재 이유 중 하나다. 누구를 위해서 일한다, 혹은 봉사한다는 식이 아니라 함께 극복해 나가며 서로가 스스로 ‘나눔의 집’이 되어 나누는 현장을 나는 이곳 동두천 ‘나눔의 집’에서 경험하고 있다.

오늘도 ‘나눔의 집’에서는 홀로 계신 어르신들을 위해 반찬을 만들어 배달할 것이고, 늦게 오는 부모를 대신해 아이들을 먹이고, 공부시키고, 고민을 상담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고, 마을을 좀 더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벽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활동들보다 우선하는 ‘나눔의 집’ 사역은 마을 사람들 곁에서 항상 함께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일, 그리고 올바른 지역공동체를 위해 주민들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 그리하여 우리는 이웃이며, 친구이며, 동지임을 확인시켜 주는 일일 것이다.

경제우선주의라는 지배질서를 넘어
그동안 한국 사회는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도덕적 타락을 용인해왔다. 그러한 한국 사회의 지배 질서는 각 개인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경제우선주의에 매몰되어 진정 소중한 것들을 꺼내보려 하지 않았다. 각자가 지니고 있을 소중한 것들은 먼지가 쌓인 채 제 빛을 발하지 못하였다.

그건 어떤 이에게는 우정이고, 또 어떤 이에게는 사랑이며, 여유나 감성, 믿음이나 의리, 혹은 평화나 연대이기도 할 것이다.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없었다. 다만 꺼내어 들고, 먼지를 닦을 만한 마음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자본에 지배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태도, 돈에 종속되지 않고 더 가치 있는 삶을 지향하는 자세, 그리고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 지녔던 그 첫 마음이 무엇인가를 늘 성찰하는 마음가짐은 언제고 우리에게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이는 돈을 외면하라는 것도 아니요, 자본주의를 무작정 거부하자는 뜻도 아니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는 결국 자신의 용기와 주변의 격려가 필요할 뿐 아니라, 다름을 용인하는 더 높은 수준의 사회 질서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지난 시기 우리는 소통을 하지 않는 정부와 국가에 대해 “이게 나라냐”라고 외치며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진심을 담아 촛불을 밝혔고, 그 거대한 촛불의 물결은 세계에서도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정권 교체로 이어졌다. 막혀버린 말의 길을 연대의 함성으로 뚫어 냈으며, 위에서 아래로 내리누르며 소통을 방해하는 힘들에 맞서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 촛불의 불씨를 서로 나누며 소통의 감동을 이끌어냈다.

우리는 그 광장에서 단지 촛불만 든 게 아니었다. 서로가 각성했고, 각성한 한 사람의 힘이 거대한 물결로 파도쳐 적폐를 청산할 수 있는 힘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하여 지금 새롭게 탄생한 정권은 각성한 국민의 힘을 믿고, 두려움 없이 나아가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다. ‘흐르는 것이 어디 물뿐’이겠는가. 우리도 그렇고, 시대도 그러하다. 변혁의 시대를 한 몸으로 살아낸 우리의 역사가 실로 자랑스럽다. 하지만 반역의 세력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 현실 또한 잊지 말고, 우리 마음 속 어딘가에 늘 촛불 하나 피워 둘 일이다.

광장을 떠난 우리는 가정으로, 마을로 돌아왔다. 광장에서 배운 촛불의 힘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켜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가 딛고 선 마을공동체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전히 우리 곁에는 신음하는 이웃들이 있고, 그들은 생각 외로 가까이에 있다.

어둠이 가득 내려앉은 턱거리 마을은 하나 둘씩 불빛이 꺼져가고 있다. ‘턱에 숨이 차오를 정도’로 높은 고갯길을 건너와야 들어올 수 있는 턱거리 마을, 이 늦은 시간에도 턱에 숨이 차도록 걸어와 대문을 열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라틴어수업》(한동일, 흐름출판)을 펼치다가 로마의 편지 인사라는 이 문장이 눈이 띄었다.

“당신이 잘 있으면 나는 잘 있습니다.”(Si vales bene, valeo 시 발레스 베네, 발레오)

힘든 하루를 정리하고 있을 나의 이웃과 그 모든 이웃에게 드리고 싶은 말이다.

 

이영란
본지 편집위원. 월간 <기독교사상> 기자로 오랫동안 일했으며, 지금은 <터기리마을신문> 주간을 맡고 있다. 쓴 책으로 《그 사람에게 가는 길》(공저) 《오재식 회고록-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