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

[325호 쪽방동네 이야기]

2017-11-28     이재안 부산 동구쪽방 활동가, 풀꽃강물교회 전도사
   
▲ 쪽방주민들과 송도 바닷가에서 (사진: 이재안 제공)

지난 11월 5일, 풀꽃강물교회 기초공동체 예배를 마치고 교우들과 함께 돼지국밥 한 그릇씩 나누고 부산역 앞 전망대로 향했다. 망원경 속 또렷하게 떠오른 달을 보며 큰아들을 서울로 보냈다. 3개월 넘게 거의 매일 통화하고 주말마다 만나 놀았다. 공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전국 기능대회에 입상해 회사에 취직한 지 1년여의 세월이 흘러갔다. 이제 새로운 공동체로 보냈다. 우리들도 떠나보낸다.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술 때문에 힘들어하는 삼촌들을 뒤로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나게 될 것이다.

서울 강북구의 한 마을에 터를 잡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또래들과 모여 함께 예배드리며 삶을 나누고 수련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어릴 적부터 크고 화려한 신앙보다는 소박하지만 진중하게 공동체를 가꾸어가는 삶을 신앙으로 배워가기를 바랐다. 좋은 선배들 만나 깊은 배움과 깨달음이 있기를 바란다. 부산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좋은 영향력을 끼쳐주길.

송도 바닷가 햇볕 맞으며
부산은 11월 2일이라도 햇볕이 따스하다. 바닷가에 와도 봄날이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부는 듯하다. 송도해수욕장 바닷가에서 쪽방주민들과 한적한 오후 드라이브를 즐기는데, 들려오는 소식. “교회 교인 수가 8만 명이라서 의기양양하군요.” 짜증이 난다. 딱 다섯 명 민중들의 숨결을 들으면서 드는 생각이다. 교회가 소금과 빛이 아닌가? 서울의 어느 교회가 아버지 목사가 교회를 책임지다가 이제 아들이 맡는다고들 하니, 난리다. 쪽방주민들 다섯 명과 함께하는 소박한 일상이 난 더 귀하다.

종교개혁 500주년은 지나갔다
창문 밖, 부산항에는 이미 노을이 졌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포럼에 앉아 있다. 그때가 1517년 10월 31일, 그 10월 31일이 딱 500년이란다.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본다. 순교와 죽음을 불사하는 것은 고사하고, ‘먹고 살려고 연명하는 기독교’와 ‘기존의 관성을 타파하고 혁신하는 기독교’ 사이에서 무슨 고민들을 하고 있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삶의 자리에서 피어나고 삶의 현장에서 우러나는 그런 기독교는 어디에 있는가? 11시 대예배를 준비하러 예배당을 잘 꾸미고, 선교를 준비하려 땅을 구입하고, 돈을 빌려서 건축을 하니, 여러 가지 헌금봉투를 만들게 되고, 밝디밝은 조명에 예배찬양(?)을 기획하고 미국산 좋은 음향기기와 비싼 스피커로 치장하고 마이크는 최고급으로 설치한다. 예수 잘 믿으려고 그렇게 하는 걸까. 창녀는 떠나고 동성애자는 두려워하고, 냄새나는 노숙인에게는 국수만 던져주면서. 예수를 잘 믿으려고 그렇게 하는 걸까.

그냥, 싸구려 중고 기타로 만족하고, 앰프 없이 생목으로 성경을 읽고, 초딩 리코더와 피리와 멜로디언으로 찬양하고, 집에서 삼삼오오 모여 식은 밥 먹고 예배를 드리면 충분하다. 멋 부리고 예수 따를 건가, 고만고만하게 사회적 지위와 체면으로 신앙할 건가. 높고 화려한 곳에 예수가 있다고 여긴다면, 엄청난 착각이다. 새벽시장 상인들의 목소리에, 구치소 교도소 면회실에, 홍등가 불빛 아래에, 부산역 구석에, 고통당하는 노동자의 투쟁 현장에 예수와 제자들의 발 냄새와 땀방울이 있다.
벌거벗은 신앙하자.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뭔가? 평신도인가 성직자인가, 그런 것 다 쓸데없다. 내 삶의 현장에서 자리에서 기존의 관성을 깨고 살아가자. 다른 이에 대한 괜한 기대는 버리고 당신 스스로 일어나라, 행동하라, 움직여라. 그러면 신앙 동지들이 붙는다. 정말 요즘 교회가, 교인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가?

말은 아끼고 어깨를 토닥토닥
오늘은 천안까지 가서, 옛적 교회 인연을 만났다. 중딩 고딩이었던 아이들이, 어느덧 20대 후반, 30대 초반이 되어 함께 인생 고민을 나누었다. 서로의 눈을 맞추고 목소리에 귀 기울여 인생의 희로애락을 같이 나누다 보면 공감되는 지혜가 있으리라. 

부산 살다가 고딩 때 천안으로 올라간 친구는, 20대 초반에 결혼해서 20대 후반에는 두 아들의 엄마가 되었다. 그런데 남편 문제로 고민이 많다. 열심히 살아 집도 장만했는데 남편 때문에 힘든 파도가 닥쳐왔다. 30대 초반 미혼인 친구는 부모님 문제로, 결혼 고민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부모님의 건강이나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 배우자를 만나더라도 양가 부모님을 만족시켜줄 상황이 되지 못해 힘들다 한다. 그래도 본인이 가장 중요하다, 본인이 즐기고 본인 스스로가 일어서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말은 아끼지만 서로의 어깨를 토닥인다. 힘을 낸다. 나도 올 11월 15일이면 결혼 20주년인데, 살아온 시간이 쉽지 않았다. 힘들었다. 이제는 듬직한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가는 이들이 호두과자와 식사를 대접했다. 큰 사랑을 오히려 듬뿍 받는다. 간호사 친구가 따스한 손길로 돈 5만 원을 예쁜 봉투에 넣어준다. 고맙다. 다음엔 대구에서 만나기를 기약했다. 저마다 힘겨운 상황에서도 더불어 나눈다. 그 나눔에서 버텨낼 힘이 솟는다.

▲ 순디 누님 부부. (사진: 이재안 제공)

가을 낭만의 배신
루터 선배가 이룩한 개혁 500주년이 다음주 10월 31일이란다. 그래서 개신교가 생겼다고 하는데 이 동네 사람들은 관심이 별로 없다. 어제 동네 잔치에서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노래를 부르니 친구들은 그게 좋다고 “앵콜! 앵콜!” 한다. 다들 씁쓸한 가을 낭만을 즐기고 있다.

71년생 ‘순디 누님’은 5개월 전부터 같이 살게 된 형님과 함께,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기를 뱄다고 싱글벙글하기에, 하도 이상하여 산부인과에 가서 초음파 검사를 해보게 했다.

“절대 임신 아닌데예, 생리 안 한 지 3개월이니 폐경 검사 합시더예.”

의사 선생님, 느무느무 칼처럼 말씀하시니, 누님 눈에 눈물 글썽글썽. 어깨 토닥토닥 두드리며 위로한다. 이웃에게 중고 유모차도 구하고, 유아용품도 사려고 들떠 계셨는데…. 지난 2주 동안 짝꿍 아저씨가 사준 신발이 좋다며 연신 싱글벙글하셨는데….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누군가 그랬더라. 그분의 은총이 간절할 뿐이다.

   
▲ 공간 '달품'은 부산반빈곤센터, 윤웅태동지정신계승사업회, 치유목공방, 그리고 풀꽃강물친구들이 함께 운영하는 협동공간으로 지역 주민들과 활동가들을 위한 곳이다. 휠체어 장애인의 접근이 가능한 카페 같은 공간이다. (사진: 이재안 제공)

공간 ‘달품’ 이야기
풀꽃강물 친구로 어우러지는 부산 반빈곤센터 손우영 사무국장의 나눔 인사로 공간 ‘달품’의 오픈 소식을 전한다.

협소한 공간에 50여 명이 넘는 분들이 찾아와 주셨습니다. ‘자리가 없으면 어쩌나, 서서 밥 먹으면 어쩌나, 음식이 부족하면 어쩌나…’ 사실, 걱정이 많았습니다.^^ 역시, 모든 걱정은 기우이지요. 사무국이 닿지 않는 빈 곳, 부족한 부분들이 자연스럽게 채워지면서 큰 불편 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울산에서 찾아와주신 박 동지. 수술 후 요양 중임에도 불구하고 지팡이 짚고 사상구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와주신 김 어르신. 두 아이들을 데리고 와주신 인근 주민 회원 가족.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공유해주신 말하기손님 다섯 분. 바쁜 일정에 참석하지 못하고 마음으로 함께해주신 분들. 그리고 무엇보다 개소식 준비와 정리 과정에 몸과 마음 다해 함께해주신 분들.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공간 ‘달품’ 희망나무를 보며 다시 일상을 시작합니다. 오늘도 주민들은 달품 앞에서 잠시 쉼을 가집니다. ‘달품’이 동구 지역 주민들과 활동가들에게 쉼과 치유의 공간, 꿈과 희망이 채워지는 공간으로 지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조금씩 나아가겠습니다. 공간 ‘달품’은 여전히 회원분들과 연대자분들의 후원과 활동으로 채워집니다! 이 귀한 공간을 함께 채워 갑시다!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가는 자들이 결국은 연대한다. 자신의 소리로. 10월 27일 밤 12시 05분, 달품 개소식 마치고 혼자 사시는 우씨 형님 댁 양산까지 바래다주니 곧 12시가 넘는다. 집으로 가면 중2 둘째 수현이는 자고 있으려나. 동네에 십자가는 참 많다. 치킨집 치킨 냄새가 참 좋다.

지난 2016년 10월 25일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슬라브 씨를 만나서 인연을 맺고 11월 말, 하늘나라로 보내드린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복상 독자들과 이 이야기를 나눈 지도 1년이다. 거칠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항상 부족하다. 그냥 그렇게 받아 주시기 바란다. 어김없이 깊어가는 가을, 곧 성큼 겨울이 된다. 한국교회는 더 매서운 겨울, 깊은 어둠으로 들어가는 것 같으나, 머지않아 따스한 봄바람이 불 것이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깝고, 새벽이 깊을수록 밝은 아침을 기대하듯이.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계속 나누고 싶다.

 

이재안
잠자리 눈물만큼의 정(情)이라도 찔끔찔끔 나누며 살아가는 작디작은 풀꽃강물교회 식구이며, 부산 동구지역을 중심으로 ‘혼살이’ 아저씨 아줌마 할매 할배들과 찌지고 뽁고 욕먹고 욕하며 살아가는 40대 유부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