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목소리를 찾아서: 인정하다, 사로잡다, 나아가다

[325호 교회 언니, '종교와 여성'을 말하다]

2017-11-28     양혜원 《교회 언니, 여성을 말하다》 저자

내가 이화여대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던 때 전공 분야는 크게 이론, 방법론, 성(sexuality), 노동, 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중에서 이론과 방법론은 필수였고, 성, 노동, 가족은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 세 과목을 모두 들었다. 하지만 나는 끝내 성을 듣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미루다가 결국 듣기 시작했는데, 그 학기에 임신을 하는 바람에 입덧으로 고생하다 결국 모든 과목을 취소하고 한 과목만 들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가 남긴 한 과목은 부담이 제일 적은 과목이었다. (성은 부담이 크기로 유명한 과목이었다.)

내가 성을 계속 피한 이유는 그것이 이성애의 규범, 그러니까 내가 유지하고 있는 결혼과 가족의 틀을 정면으로 도전했기 때문이다. 노동이나 가족 연구는 어느 정도 그 규범 안에서 할 수 있는 연구지만, 성은 사회제도 중에서 젠더/성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고 이를 기반으로 모든 것을 분석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이성애자에게는 다소 불편한 도전이 될 수 있다. (물론 그래서 오히려 아주 신선하기도 하다.) 이성애자인 나에게 이것은 단지 동성애를 범죄화하는 정상성의 규범을 해체한다거나, 동성애 결혼도 인권의 한 영역으로 합법화해야 한다는 차원의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보다는, 남자를 사랑하는, 또는 남자와 결혼하는 여자가 할 수 있는 페미니즘의 방식 혹은 한계를 묻는 문제로 다가온다.

이성애자의 페미니즘
페미니즘은 남녀의 권력 관계를 문제 삼는다. 그 권력 관계는 오랫동안 남성의 우월성을 지지하는 체계적인 제도에 의해 유지되어 왔는데, 그 제도를 통칭 ‘가부장제’라 부른다. 아버지를 머리로 하는 구질서의 사회를 벗어나 민주주의 신질서로 들어서면서는 이 가부장제가 아버지의 제도가 아닌 아버지/남편의 제도로 바뀌었다. 즉 (적어도 서구 사회의 경우) 남자들끼리는 형제애(brotherhood)가 형성되었지만 거기에서 여성은 여전히 배제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제도를 분석하고 비판하고 도전하고 바꾸려 하는 것이 페미니즘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이 제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로 길러졌기 때문에 서로 이성애의 관계로 들어갈 때 자기 문화가 구현하는 가부장제의 성규범을 어느 정도 따를 수밖에 없다.

이성에게 서로 끌리고 구애를 하는 과정은 상대에게서 남성적 혹은 여성적 매력을 느끼고 끌리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그렇게 끌리는 상대와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인 의미 체계 안에서 그 신호를 주고받고 수락하는 과정이다. 이성에게 끌리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규범적인 남성성 및 여성성이 생물학적 차원의 끌림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끌림은 연애, 그리고 나아가서 결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듯이 연애와 결혼은 다르다. 결혼은 제도이고, 오랫동안 가부장제를 유지해온 기제이기 때문에 가부장제를 벗어나고자 하는 여성에게 적잖은 갈등을 안겨준다. 그래서 이 제도를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이성애자로서 상대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자 하는 여성은 결혼제도 밖에서 자신의 주도 하에 이성과 관계를 맺기로 선택할 수 있지만, 여전히 사회는 가부장제의 규칙을 따르기 때문에 이것은 어느 정도 모험을 감수하는 길이 된다.

그런데 막상 용기를 내서 이 모험의 길을 가기로 했다 해도 자신의 통제 밖에 있는 중요한 변수가 바로 상대 남성이다. 나의 자율성과 인간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남자를, 그러면서도 자신의 책임은 소홀히 하지 않는 남자를 가부장제 사회에서 만나는 운은 어쩌면 전생에 나라를 구한 정도의 공덕이 필요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의미 있고 만족스러운 관계가 반드시 이성애 관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좋은 친구 관계 안에서 만족을 찾을 수도 있고 동성과의 성애적인 관계에서 찾을 수도 있다. 결혼한 여성도 이성애의 대상인 남편보다는 자식과 더 친밀할 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고, 그 외에 친정 가족이나 다른 여성친구들과 더 의미 있는 관계를 맺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결혼이라는 제도 안으로 들어간 여성은 가부장적 이성애의 규범을 어느 정도 따라야 결혼에 이르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 제도를 거부한 여성과는 또 경험이 다르다. 

사실 페미니스트의 신념으로 결혼을 거부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그랬지만, 자라면서 그리고 운 좋게 사회생활에서도 크게 차별 받지 않은 여성이 처음 피부로 경험하는 차별은 결혼제도 안에서다. 그래도 많은 경우 일단은 결혼을 감행한다. 그 안에서 많은 일을 겪으면서 그래도 타협하며 살아갈 여지가 있으면 머물 것이고 아니면 이혼, 혹은 결혼의 해소에 이를 것이다. 싱글이건 ‘돌싱’(돌아온 싱글)이건 유배우이건 다양한 사례와 상황들이 있겠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이성과 의미 있는 성애적 관계를 이어가고자 할 경우, 상대가 남성중심 사회에서 남성으로 길러진 이상 어느 정도의 수용이나 포기 혹은 타협을 수반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친밀성의 영역은 이념의 잣대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를 사랑하는, 혹은 남자와 결혼한 여성의 페미니즘의 방식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속사정
박완서 선생이 75년엔가 쓴 흥미로운 에세이가 있다. 나중에 생각이 좀 바뀌시기는 했지만, 이 에세이에서는 지붕 아래서의 남녀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법이나 제도면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부부 사이에서는 무언가 본질적인 불평등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내용이다. 뒤늦게 등단해서 한참 글을 쓸 때도 박완서 선생은 남편의 저녁 상만큼은 늘 직접 차렸고, 막내가 학교에 들어가기는 했어도 아이가 다섯이니 여전히 바쁘셨다. 옛날 분이시고 시어머니도 모셨으니 그 바쁜 와중에도 아침에 남편 출근 준비-손수건에서부터 양복 챙기기까지-도 계속 하셨는데, 밤새 글을 쓰느라 잠을 설친 어느 날 남편에게 이제 이런 건 당신이 좀 챙기라며 ‘우리도 남녀 평등 좀 합시다’ 했더니, 그날 밤 남편이 거나하게 취해 들어와서 양복을 받아 들려는 박완서 선생에게 아 괜찮다고, 평등한 사이인데 당신이 뭘 이런 걸 하냐고 하셨단다. 그래서 박완서 선생이 달래면서 무슨 평등이냐고 난 종이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머니 같은 그 기분이 아주 편했다는 말로 글을 맺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 어머니 세대가 택하실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타협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딸들에게도 이러한 타협을 지혜로 전수하셨을 것이다. 남자란 족속은 이렇게 달래가며 데리고 살아야 한다고. 모두 애 같다고. 그러나 우리 세대의 여성들은 그렇게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이러한 어머니 역할을 거부하고 성인 대 성인으로 만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남자들이 애 같은 게 아니라, 아들 낳은 어머니만이 여성에게 의미 있는 인생이었던 사회에서는 남편을 애처럼 대해야 여성들이 그나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렇게 해서 생긴 기형적인 ‘모자 관계’는 여자는 물론 남자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남편의 출장 가방을 챙겨주지 않았고, 셔츠도 다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 일을 하는 여성들이 있었고, 그 의미와 이유는 각자의 상황과 관계에 따라 다 달랐을 것이다.

일례로 박완서 선생의 자녀 세대인 공지영 작가는 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서 주인공 여자가 요즘 말로 썸을 타는 남자의 더러운 양말을 보고 빨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묘사를 한 것으로 페미니스트들의 질타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욕을 먹을 것을 알고도 그 묘사를 넣었다고 하는데, 그런 애틋한 감정들도 거부하는 페미니즘은 너무 남성적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후일담 문학이라는 비판을 받은 것도 투쟁의 고귀함을 문학으로 승화하기보다는 개인의 내면적 갈등, 연애 감정 이런 것들을 다루어서였는데,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대중적인 인기는 더 누렸던 듯하다. 그는 운동권 사람들은 그런 고민도 안 하나, 그렇다면 너무 비인간적이지 않나, 생각했다고 한다.

이처럼 이성애의 관계는 남자로 길러진 남자의 변수도 있지만, 여자로 길러진 나 자신의 감성 구조도 하나의 변수가 된다. 이러한 감성 구조는 본질적인 게 아니지만, 몸을 매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변하지도 않는다. 내가 남자의 어깨에 팔을 얹는 것과 남자가 내 어깨에 팔을 얹는 것의 의미가 행위 코드의 해석을 넘어 몸으로 체험되는 느낌이 다른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내가 무엇에서 사랑을 느끼냐 하는 것은 학습에 의해 혹은 인생의 시기에 따라 바뀌기도 하지만 바뀌지 않기도 한다. 연애 코드라고 하는 것은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그것은 늘 성별화되어 있어서, 예를 들면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남성성을 상실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때와 달리 이제는 요리하는 남자가 멋있을 수 있지만, 그 남자가 수다스럽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실 요리하는 남자가 멋있어 보이려면 근육이나 돈이나 아버지의 자상함과 같은 다른 남성성의 상징을 충분히 갖추어야 한다.)

1970년대의 유명한 미국의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예순의 나이에 열 살 연상의 부자 남자와 결혼을 했을 때,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너 마저!”라는 탄식이 있었다. 그리고 나의 지도교수는 일흔의 나이에 열 살 연하의 남성과 결혼을 하셨는데, 그때도 주위에서 “그 사람이?”라는 반응이 있었다. 마흔에 이혼을 하고 종교여성학 분야를 개척해서 페미니스트로서 정말 세계를 누비며 살던 교수님은 예순을 조금 넘긴 나이에 그 남자를 만났고, 몇 년간 동거를 하다가 결국 결혼에 이르렀다. 그 사이에 지도교수는 뇌출혈로 죽을 고비를 넘겼고 기적 같이 모든 기능을 정상적으로 회복하고 난 후 그 남자는 (아주 낭만적인) 청혼을 했고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 두 사람의 속사정을 다 알 수 없지만, 이 소식을 접한 주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분이 결혼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변절과 변명
물론 이러한 개인사가 반드시 페미니즘에 대한 변절을 의미하는 것도, 페미니즘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삶이란 것은 이념이 담아내지 못하는 지점들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회에 걸쳐서 나는 이 이야기를 한 듯하다.

여성학에서 말하는 ‘경험으로서의 모성’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가부장제 안에서 확립된 ‘제도로서의 모성’이 아닌, 여성이 주체가 되어서 경험하는 모성을 뜻한다. 제도로서의 모성은 정상 결혼과 정상 가정의 범주에서 부계의 아이를 양육하는 순종적인 아내이자 헌신적인 어머니의 역할을 여성에게 부과한다. 그와 달리 경험으로서의 모성은 어떠한 조건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임신을 했건, 그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에서 여성 자신이 주체가 되는 것이며, 따라서 다양한 형태와 방식의 모성을 다 긍정한다. 경험으로서의 모성에서는 비난 받는 모성이 있을 수 없다. 모성은 어떠해야 한다는, 가부장제가 부과하는 규범이 없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들이 결혼에 대해서는 대개 회의적이어도 모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이유는 여성이 여성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중요한 몸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도 밖에 존재한다는 것은 제도와 무관하다는 게 아니라 제도와 긴장 및 타협 관계에 있다는 것이고, 특히 모성처럼 아이가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타협이 많이 관여하게 된다. 나의 페미니스트 의식과 별개로 아이든 남편이든 연인이든 부모든 다른 누군가의 인생이 엮일 때 선택은 복잡해진다. 내가 이념을 싫어하는 이유는 이러한 선택들에 대해서 변절의 행위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든 남에게든 변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기 목소리를 찾는 과정은 여성주의에 대해서든, 기독교-유교 혼합의 도덕주의에 대해서든 이러한 변명들이 필요하지 않게 되는 과정이 아닐까.

유학 생활 동안 참 심플하게 살았다. 누군가의 특별한 초대가 있지 않는 한 명절도 조용히 혼자 보냈다. 박사 시험 준비로 한창 바쁠 때는 초대가 있어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어울릴 커뮤니티를 찾을 수도 있었지만, 한번 어울리기 시작하면 내 시간을 자유롭게 통제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에 차라리 혼자 있는 편을 택했다. 파리에서 철학 박사를 5년만에 끝낸 친구도 나와 비슷한 생활을 했다고 했는데, 너무 아무하고도 안 어울려서 한국 학생들로부터 욕까지 먹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아예 내 존재 자체를 드러내지 않았으니 욕 먹을 일도 없었다. 나보다 훨씬 먼저 유학을 간 친구여서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금방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내가 유학 생활을 해보니 그 친구도 이런 시간을 보냈겠구나 싶었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반문화적인 선택을 한 것 같아서 그런 배경에 호기심을 가질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부담스러웠다. 아이가 아직 초등학생인데 혼자서 유학 와 있는 한국 여자는 그런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어쩌다 남편이 목사인 것을 알게 되면 호기심은 더 증폭될 게 뻔했다. 교회가 얼마나 좁은 바닥이던가.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이라 너무 많은 것을 넘겨 짚으려 했고, 미국 사람은 ‘미국 사람’이라 너무 많은 설명을 필요로 했다. 지금은 너무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여겨져서 우습지도 않은데, 처음 1년 정도는 무슨 큰 비밀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지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음을 터놓을 만한 상대가 생기면 나의 선택을 정당화하고 방어하는 말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말들이 참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대가 무엇을 어떻게 말해도 자신이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게 인간의 습성이다. 이것은 딱히 의식적인 행동도 비도덕적인 행동도 아니다. 왜냐하면 일차적인 이해는 내 경험과 의미 체계의 틀 안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공통으로 경험하는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공감대를 형성해 가지만, 우리가 자연스럽게 여기는 문화적 범주-그것이 주류 문화이건 하위 문화이건-들 안에 깔끔하게 들어오지 않는 경험들은 어쩌면 영원히 이해 불가로 남을지도 모른다. 경험은 언어를 매개로 전달되는데, 언어는 문화적 규범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모두가 알아들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생기기 전에는 전달  불가의 경험이 존재하는 것이다.  

만족스런 의사소통이 이렇게 어려움에도 사람은 말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인정이나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때로는 그저 조금이라도 들을 귀가 있어주었으면 하는 심정에서 입을 열기도 한다. 나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클 때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대의 반응에 서운하고 화가 날 수 있다. 그러한 기대가 없을 때는 그냥 말을 한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지만, 그러다 보면 차라리 말을 말 걸 그랬다 싶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입을 잘 열지 않게 되는 게 아닐까. 적어도 속사정들에 대해서는 말이다.

논문을 써보니, 누가 한 권의 책을 썼다면, 적어도 그 한 권 만큼의 속사정 이야기가 따로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실제로 요즘은 연구서와 별개로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따로 책이나 논문으로 쓰기도 한다.) 여하튼,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말을 아끼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고, 잘 설명하면 이해받을 거라는 착각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기 변호와 변명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연민의 학문
지금도 연구를 하면서 느끼는 거지만, 나의 접근법은 내 인생처럼 어느 분과에도 깔끔하게 맞아 들지 않는다. 종교, 문학, 역사, 여성학을 오가면서 인간의 경험을 조금 더 통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데, 고민만큼 만족스럽게 글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애매한 위치에 있는 나 자신의 모습에 늘 당당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내게 신앙이 있는 것에 감사한다.

요즘 내게 있어 신앙이란 연민이다. 살아보니 사는 게 참 쉽지 않다. 그래서 나를 포함해서 어떻게든 살아내는 사람들이 대견하다. 심지어 나도 한번씩 이런 연민을 느끼는데, 신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얼마나 무한한 연민을 느끼겠는가. 종교도 페미니즘도 다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문제나 잘못을 덮고 가자는 말도 아니고 변화를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기준은 높고 꿈은 크지만 시작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라는 것이다. 그때 저기에 비해 지금 여기는 무엇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복잡하다. 그래서 섣부른 판단보다는 깊은 심호흡이 필요할 때가 많다. 그리고 나서 미국 작가 앤 라못의 말대로 새 한 마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사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유학 생활 내내 같은 방에서 살았다. 귀국 채비를 마치고 처음 입주할 때의 모습인 기본 가구만 갖춘 텅 빈 방에 서니 한편으로는 가슴이 벅차면서 또 한편으로는 눈물이 왈칵했다. 이곳에서 4년 4개월간 나라는 존재와 마주하며 산과 계곡 그리고 광야를 지났다. 나를 인정하고, 내게 주어진 것을 사로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조금은 알게 된 시간이었다. 박사 과정의 희생물로 이를 두 개나 바쳐야 했지만, 큰 병이나 사고 없이 이 과정을 마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음에 이 방의 주인이 될 사람을 위해 짧게 복을 빌고 나와 사무실에 열쇠를 반납했다. 졸업식도 안 하고 간다고 친구들이 서운해 했지만, 그렇게 내 인생의 가장 큰 모험이 조용히 일단락되었다.

 

양혜원
본지 해외편집위원. 서울대에서 불문학을,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했다. 1997년부터 번역가의 길에 들어서 유진 피터슨, 헨리 나우웬, 존 스토트, 톰 라이트, 알리스터 맥그래스 등 주요 기독교 저자들의 책을 번역했다. 미국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고, 올해 9월부터 일본 난잔종교문화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유진 피터슨 읽기》 《교회 언니, 여성을 말하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