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3무’ 태도와 막스의 체험적 평화 이야기

[326호 민통선 평화 특강]

2018-01-04     정지석 국경선평화학교 대표, 목사
   
▲ 철원 국경선평화학교 <주민 평화 인문학> 시간에 막스 에디거 아시아평화학교 교장이 체험적 삶이 바탕이 된 평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사진: 국경선평화학교 제공)

‘평화’란 말만큼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는 말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쉽게 다 아는 말 같으면서도 막상 설명하려면 단순치 않은 말이 평화입니다. 대개는 전쟁과 반대되는 의미로 이해하지만, 사회적 차별과 억압의 소멸, 비폭력, 굶주림과 질병으로부터의 해방, 마음의 평화와 같은 사회적, 개인적 차원을 두루 포함하는 평화는 그 의미가 넓고 다양하며 복잡합니다. 분명한 점은, 지금 우리 현실은 참된 평화가 절실하게 요청된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현실이면 평화 역시 현실입니다. 전쟁의 현실을 대비하는 노력만큼 평화의 현실을 창조하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이런 평화 실천의 관점에서 교회의 평화 이해와 실천의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론적 평화보다는 실천과 체험에 기반한 평화 이야기를 쓰고자 합니다.

전쟁에 대한 한국교회의 ‘3무’ 태도
우리 현실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지요. 최근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위중합니다. 남북한 분단 상황에서 늘 있어왔던 전쟁 이야기이지만, 이번에는 체감이 될 만큼 전쟁이 가까이 느껴집니다. ‘죽음의 백조’(swan of death)라고 불리는 스텔스 전투기가 한반도 상공을 날고, 핵잠수함과 항공모함이 들어오고, 지상에서는 탱크들이 요란한 굉음을 내면서 전쟁훈련을 합니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과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 발언을 쏟아냅니다. 세계 언론들은 마치 한반도에 전쟁이 임박한 것처럼 보도합니다. 김정은의 전쟁 명령은 곧바로 현실이 될 수 있고, 트럼프는 한국의 전시작전권을 가진 최고 지도자이기에, 이들의 전쟁 발언은 우리로서는 끔찍하고 위태롭습니다.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미국의 트럼프지만 전쟁으로 멸망당하는 사람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기에 불안하고 힘이 듭니다. 더군다나 핵무기가 사용될 수 있는 현대 전쟁은 승자와 패자가 없이 모두가 공멸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전쟁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임에도 한국교회 대다수의 태도는 무관심, 무기력, 무대응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선 이해하는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교회의 무관심은 전쟁을 국가 정치의 문제로 보고 교회가 간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교회의 관심 영역은 개인 내면의 영적인 세계이며, 사회적 정치적 영역은 국가의 책임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관심하는 전쟁은 세속 국가들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영적 전쟁입니다. 마음의 평화가 교회의 관심사이지 세상 국가들간의 평화는 교회의 관심 영역 밖입니다. 아마도 한국교회 신자 대다수도 그렇게 인정하고 믿을 것입니다. 그러니 한반도에서 전쟁 연습이 실행되는 것을 보면서도 한국교회가 무관심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설혹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한국교회는 그저 지켜볼 밖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습니다. 무기력합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그랬습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의 힘을 교회가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국가의 전쟁 승리를 기원하고, 희생자들의 장례식을 해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지금 한반도의 하늘과 바다와 땅위에서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육해공군 100여만 명(남북한 군대와 미군)이 전쟁 대비 연습을 하는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그것을 어떻게 중지시킬 수 있단 말인가요.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을 두고 무기력이라 비난할 수 있는 걸까요? 미국과 북한의 정치 권력자들이 서로 맞서 전쟁을 하겠다는데, 교회가 나서서 평화를 만들겠다는 것이 무모하고 비현실적인 일 아닐까요? 교회를 다니든 다니지 않든 대다수 사람들이 그리 생각할 것입니다. ‘무기력’보단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무대응, 즉 전쟁 문제는 교회의 주요 관심사도 아니고 나선다고 될 일도 아니라면 무대응이 상책입니다. 교회는 교회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리고 어차피 맞이해야 하는 종말의 시대는 전쟁이 필연적인 것입니다. 환란의 날에 교회 신자가 할 일은 참고 인내하면서 선택받아 하늘로 불려 올라가도록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공연히 나서서 전쟁을 막고 평화를 회복하자는 것은 환란 날에 기독교 신자가 할 일은 아닙니다. 이런 종말신앙이 세상 전쟁 문제에 대한 교회의 무대응 태도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무관심과 무기력과 무대응보다 우리의 토론과 숙고가 더 필요한 문제는 교회의 전쟁 지지와 협력입니다. 교회 역사를 돌아보면, 기독교는 전쟁의 종교였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최근 역사적 사례로는 미국 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을 적극 지지했던 미국 교회의 경우입니다. 미국 장로교회와 감리교, 가톨릭 교회는 미국 정부의 전쟁 정책을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지만, 다수의 복음주의 교회와 근본주의 교회 지도자들은 설교대에서, 텔레비전 방송에서 공공연하게 전쟁을 지지하고 부추겼습니다.

전쟁 참여 지지는 다만 미국 교회만이 아니라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할 때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지지하고 독려했습니다. 지금 미국과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데도 많은 한국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북한 공산주의 정권과의 전쟁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전쟁을 주장하는 배경에는 ‘정당한 전쟁론’이라는, 오랫동안 교회가 취해 왔던 ‘전쟁 신학’이 깔려 있습니다. 이 점은 다음에 좀더 상세히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평화는 총을 내려놓는 것
평화는 실천 현장에서 체험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에 따라 평화운동가로서 평생을 산 사람의 이야기를 최근 접하면서 저는 평화는 실천 현장에서 체험되는 생생한 삶의 진실임을 깨달았습니다.

막스 에디거(Max Ediger, 72세). 그는 미국인으로서 아시아에서 평생을 평화운동가로 살아왔습니다. 열아홉 살에 대학 2학년을 마치고 자신이 배운 신앙 양심에 따라 베트남 전쟁 징병을 거부하고, 아프리카 빈민촌에서 봉사활동(대안 복무)을 하고, 베트남, 태국, 그리고 지금은 캄보디아에 살면서 아시아 평화학교(School of Peace in Asia) 교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20대 청년시절 막스는 베트남의 가난한 농촌 마을을 돕는 개발(development)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우물을 파고, 농사일을 돕는 개발 사업은 전쟁 상황에서는 부질없는 일이었습니다. 폭격과 전투는 모든 노력을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었지요. 이런 경험을 통해 그는 전쟁을 중지시키고 막는 평화운동의 필요성을 체험적으로 습득했습니다. 그는 미국 정부의 베트남 전쟁 정책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고, 반전 평화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북베트남 혁명군 병사들이 총을 들지 않고 사이공 거리에 들어오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전쟁 승리자들이 총을 들지 않고 거리를 다니자, 집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한두 명씩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총을 들지 않은 혁명군들은 평범한 시민들에게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혁명군들도 사이공 시민들에게 총을 겨눌 의사가 없었습니다. 막스는 이 경험에서 평화가 무엇인가를 이해했습니다. 평화는 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총을 들고 전쟁을 했던 병사들이 총을 내려놓고 시민들 속으로 들어왔을 때, 전쟁은 끝나고 평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막스의 체험은 평화의 중요하고도 상징적인 행동을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평화 이론에서는 이것을 반군사주의, 군축이라고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는 적이 친구가 되는 변화
막스는 미국인입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인은 베트콩 병사들에게는 적이었습니다.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은 철수하면서 막스에게 베트남을 떠나라,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러나 막스와 친구들은 베트남을 떠나지 않고 남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막스와 친구들은 사이공 거리로 나왔습니다. 외국인을 본 ‘혁명군 병사’(막스는 베트콩 군인들을 그렇게 불렀다)들이 다가와 ‘어디서 온 사람들이냐’고 물었습니다. 잠깐 주저했지만 막스는 미국 사람이라 대답했지요. 혁명군 병사들은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해를 당한 일이 있는지, 미국의 가족들이 베트남에 남아 있는 막스가 안전하게 지내는지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미국인이란 이유로 못살게 굴면 자신들에게 알려달라 했답니다. 그들은 적국이었던 미국인 막스를 친구로 대해준 것입니다.

이 경험을 통해 막스는 마음 속에 두 가지 약속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평생 지키며 살았습니다. 첫째, 국가와 정부, 그리고 교회가 정해주는 적과 친구를 그대로 따르지 않을 것이며, 누가 친구이고 적인지는 자신이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두려움에 의해 자기 삶을 결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무언가가 두려워서, 무서워서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한다든지, 하고 싶은 일을 안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막스가 20대 청년시절 베트남에서 적으로부터 친구로 대우받으면서 한 이 마음의 약속이 그를 평화운동가로 변화시켰고, 그 어떤 평화 이론보다도 감동적인 평화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평화는 사람을 적과 친구로 나누지 않는 것이며,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막스는 이것을 체험을 통해 배웠고, 평화가 좋은 삶의 길임을 확신했으며,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평화운동은 단계적 변혁운동
사회 불의가 판을 치는 현실 속에서 평화는 어떻게 가능합니까? 평화는 불의한 상황을 불평하는 데 머물지 않고 불의를 변화시켜 정의를 만들고 더 나은 상황을 향해 노력하는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변혁 활동입니다. 체험을 통해 말하는 막스의 증언은 우리가 경청하고 깊이 숙고할 만합니다.

막스는 1980년대 후반 버마(미얀마)와 태국 국경의 난민 캠프에서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버마에서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났고, 군인들의 학살에 쫓겨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태국 난민 캠프로 왔습니다. 그들은 막스에게 총을 달라했습니다. 총만 있으면 버마의 수도 랭군을 탈환할 수 있다고 했지요. 그러나 막스는 줄 총도 없었거니와 총을 들고 들어가면 모두 군인들에게 죽게 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막스는 총 대신 이들과 앉아 대화하는 워크숍과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그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였습니다. 버마 난민들은 자신들이 겪은 불의한 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불의한 교육제도, 언론 탄압, 거주 이전의 부자유 등 그들이 겪는 불의는 너무나 생생한 증언이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직접 겪은 일들이기에 불의한 점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고칠 수 있을지, 그들 자신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개혁하자는 쪽으로 할 일의 방향이 잡혔습니다. 한꺼번에 다 변혁할 수는 없으니 하나씩 단계적으로 해보자 했습니다. 좋은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왔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고 함께 힘을 모아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불평과 절망의 분위기가 무언가 희망적인을 일을 해보자는 적극적인 실천의 활력으로 바뀌었습니다.

막스는 이 경험을 통해 평화운동을 새로이 이해했습니다. 평화는 건설(peace-building)하는 운동이기보다는 변혁(transforming)하는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평화운동은 이미 정해져 있는 어떤 이상형을 실현하거나 그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겪고 있는 불의를 하나씩 단계적으로 변혁하여 더 좋고 나은 삶으로 실천하는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평화운동은 희망의 운동이고, 즐겁고 적극적으로 더 나은 것을 창조하는 운동입니다.

 


정지석
휴전 상태인 한반도를 비롯, 전 세계 분쟁지역을 섬길 ‘평화 일꾼’(peacemaker)을 키워내는 국경선평화학교 설립자이자 대표. 한신대 신대원에서 신학(M.Div.)을 공부했고, 아일랜드 평화에큐메니칼대학원에서 에큐메니칼 평화학 석사(M.Phil in Trinity College), 영국 버밍험 우드브룩 퀘이커대학원에서 평화학 박사(Ph.D in Sunderland Univ.)를 마쳤다. 이후 한신대 신대원과 성공회 대학원에서 평화신학을 강의하고 새길교회 등에서 사역했다. 2010년 새로운 소명의 삶을 찾고자 미국 퀘이커 영성평화학교 펜들힐(Pendle Hill)로 갔고, 기도 가운데 ‘철원으로 가서 남북한 평화를 일구라’는 소명을 받고 2011년 9월 무작정 철원으로 들어와 2013년 3월 1일 국경선평화학교를 열었다. 본지 315호(2017년 2월호)에 인터뷰가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