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놓치는, 스쳐가는 ‘죽음’들

[327호 쪽방동네 이야기]

2018-02-01     이재안 부산 동구쪽방 활동가, 풀꽃강물교회 전도사
▲ 중앙동 버럭 할아버지 방과 아이교회에서 준비한 김장김치(위) (사진: 이재안 제공)

가을에 놓친 사랑
‘번개탄 형님’이 회복될 수 있을까? 71년생인 고시원 주민 방씨 형님. 작년 5월 말, 인터넷에서 만난 두 명의 젊은이와 함께 모 여관에서 번개탄을 피우고 생을 마감하려 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본지 2017년 9월호 〈쪽방동네 이야기〉 참고) 당시 일산화탄소 2차 중독으로 이미 뇌 신경에 손상이 많이 진행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8월 7일 병원 면회 때는 나를 알아보셨다. 이후 내가 사는 만덕2동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요양병원으로 옮기셨다.

그렇게 무심하게 해가 바뀌어 올 1월 6일 밤, 갑자기 방씨 형님이 떠올라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영락공원 홈페이지 고인 검색을 했다. 이를 어쩌나…. 이름이 있다. 사망 일시는 10월 24일, 한참이 지나고서야 안 것이다. 9월부터 ‘면회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미루다가 이제야 알게 됐다. 게다가 가족이 포기한 모양인지 무연고실에 안치되었다. 방씨 형님께 죄송한 마음뿐이다. 작년 11월 29일, 다른 분 모셔드리러 영락공원에 잠시 갔었는데…. 설마 했다. 그렇게 빨리 가실 줄이야.

‘미안해요. 가을에 놓친 사랑. 이번 주 토요일 찾아뵐게요.’

12월, 누울 자리 없던 아기 예수
중앙동 쪽방의 일명 ‘버럭 할아버지’. 엄청 허름한 방에 조용히 사시는데 방문만 열면 버럭! 버럭!! 하신다. 그곳 도배가 시급하다. 동인고등학교 동창회에서 동구쪽방상담소에 후원하면서 별도로 후원한 이불 세트를 깔아드렸다.

낙원여인숙 이씨 아저씨. 수년간 노숙하다가 팔을 다치셔서 여인숙 생활을 하신다. 습관적으로 야밤까지 노숙하다가 늦게야 방으로 오신다. 집중적인 치료와 관리가 필요한 분이라, 이번 주부터 특별 관리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이불 세트도 전달했고, 동인고 동창회 분들이 함께 이불을 깔아드렸다. 방에서 이야기도 나누었다. 모두 여섯 분께 전달했다. 포근한 밤 되기를.

올해 친구로 만나게 된 아이교회에서 김장 김치를 가져와 쪽방주민들을 찾아왔다. 참으로 고맙다. 성탄절 전날 12월 24일, 아이교회랑 풀꽃강물교회가 함께 예배를 드렸다. 쪽방주민들과 예수 탄생의 소망을 누렸다. 아파트 사람들은 한밤중 시끄럽다 불만인 듯하지만, 쪽방주민들은 마냥 좋아하신다. 캄캄한 쪽방 여인숙 골목 어귀에 울려 퍼지는 찬양.

“노~엘~ 노~엘~ 노~엘~ 노~엘~ 이스라엘 왕~이 나~아~셨~네.”

몇몇이 준비한 작은 촛불과 함께 우리의 마음도 촉촉하게 젖는다. 춥지 않다.

밤 9시가 되어 다시 부산역으로 향했다. 아프고 배고프고 추운 분들이 머무는 곳. 준비한 떡과 음료를 나누었다. 아이교회 목사님이 “저~쪽에 계신 분이 많이 아픈 것 같아요” 한다. 좀전에 2층 대합실 쪽에서 잠시 마주쳤던 젊은 남성이다. 그쪽으로 가 다시 자세히 보았다. 배가 많이 나와 있다. 복수가 찬 것이다. 양쪽 다리도 많이 부어 있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이름은 J 씨, 몇 달간 술을 많이 먹었단다.

우리는 그이 생각에 전체 일정을 마치고 다시 부산역을 찾았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급히 의료원 응급실로 모시고 가니, 고환에 부종이 심하다고 큰 병원으로 가라며 우리를 정중하게 밀어낸다. 급히 고시원을 구해 그분을 뉘었다. 누울 자리 없던 아기 예수님처럼, 고이. 깨끗한 내복과 속옷, 세면도구 등 간단한 식사도 준비했다. 

닫혀 있는 작은 방, 차라리 노숙이 나을까
작년 12월, 차가운 바닷바람이 시작된 해운대 해수욕장을 심야에 잠시 들렸다. 종합지원센터 현장대응팀과 함께한다. 한여름에 뵈었던 분을 떠올리다가 지난 4일에 일어난 일을 듣게 되었다. 해운대 해수욕장 가기 전, 거리 노상에서 50대 덩치 큰 아저씨가 노숙하시다가 입원 치료 후 고시원에 입주하셨단다. 여섯 번 정도는 뵙고 상담을 했던 기억이 있는 분이다.

여름이 지날 무렵, 병원 입원과 퇴원을 거치면서, 이후에 비교적 쉬운 식당일을 하시게 되었다. 그런데 지난겨울이 무척이나 힘들었던 것 같다. 마음이 힘들어 며칠 만에 그만두고는 술을 많이 드셨단다. 고시원 근처에서 술 드시다가 쓰러져 응급 입원을 하셨으나 본인 치료 거부로 퇴원을 하셨다. 그 직후 다시 쓰러져 실려가 즉시 심폐소생술을 받았으나 결국 소천하셨다. 노숙하다가 고시원에 살게 되었다고 안정되는 게 아니다. 집중적인 안전망이 필요하다.

역설이다. 사람이 많이 지나가는 추운 노상이 오히려 나을 수 있다. 좁은 방에 들어가면 외로움으로 외로움으로 더 빨려 들어간다.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고 사람의 온기를 전혀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도록, 인연이 이어지도록 할 수는 없을까? 한 사람,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몇 명의 노력이 필요할까? 마을 하나가 필요한 걸까. 그저 지극정성으로 살고 싶을 뿐이다.

작은 비석 하나뿐
작년 11월 마지막 월요일부터, 공동체지도력훈련원 목회동지회에 참여해서 이틀 동안 귀한 만남,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진주의 민들레공동체, 합천의 오두막공동체를 잠시 방문하고 사천의 헤세드공동체에서 하룻밤 묵으며 깊은 마음을 나누었다. 다음날, 전북 남원의 동광원, 보성의 예솔원, 목포의 디아코니아 자매회를 방문했다. 특별히 동광원 식구들은 맨발의 성자로 불린 이현필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그의 제자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의 삶을 따라 기도하며 순결, 순명, 청빈의 삶을 살았다. 동광원은 고아와 과부처럼 헐벗고 굶주린 사람과 약한 사람을 돌보는 영성 수도공동체다.

   
 

무엇보다 직접 성경을 읽고 스스로 복음을 깨달아 한국의 자생적 공동체로 이어졌다는 데에 의미가 깊다. 동광원을 둘러보는 동안, 18세 때 독신으로 서원하여 현재 90세까지 72년간 기도와 수도 그리고 봉사의 삶을 살아오신 김금남 원장님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 때 남원교회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단다. 교회들이 문을 닫고 핍박당할 때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30리 넘는 지리산 골짜기로 올라가 예배를 드리셨단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시려 했던 이야기를 생생한 증언으로 들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 난리 통에 고아와 부랑자들 그리고 병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면서 수도의 삶, 수십 년의 산 역사를 생생하게 들었다.

지난 8월 14일 소천하신 박공순 언님의 묘소에 잠시 찾아뵈었다. 뒤편 언덕에 그저 소박한 평토장에 작은 비석 하나 있다.

새해, 두 손 모아 간절한 기도
지난 12월 19일 화요일 밤 10시 4분에 하늘나라로 가신 71년생 권씨 누님. 그 사흘 전 이른 아침 꿈에 미소 지으며 스쳤다. 그래도 권씨 누님은 12년 전 헤어진 남편과 세 자녀가 찾아와 영락공원에 함께했다. 그걸로 아픈 마음을 다잡는다. 너무 젊은 나이라 안타깝다. 2011년 12월이었나, 노숙하시다가 여인숙에 입주하러 와서 처음 뵙고, 지난 6년 동안 더불어 지냈다. 그 날들이 무심히 스쳐 간다.
우리네 일상, 하루하루가 힘겨운 날들이 많다. 너무너무 힘드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분들이 부산에서만 하루 평균 3명이라는 말도 들었다. 자신 한 몸 추스르며 살아가기에도 너무 힘든 세상이다.

지난 12월 16일 토요일 오전 즈음, 또 한 분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넘어지셔서 지구대를 통해 B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급히 수술하셨다. 곧바로 외과중환자실로 옮겨졌고 밤 10시가 넘어서야 잠시 면회를 했다. 담당 간호사는 혼수상태라 사람을 못 알아본다고 했지만, 이름을 부르니 몸을 꿈틀거리셨다.

동주민센터의 친절한 김 주무관이 입원 직후 가족에게 연락을 했지만 “시신이 되어도 포기한다”라는 답변이 왔단다. 말하지 못할 애환이 있을까. 무연고 아닌 무연고. 무연고이지만 무연고는 아닌, 뭔가 가슴 아픈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잘 계시는지 행정적인 연락이 가능한 김 주무관에게 물으니 ‘그냥 그런 상태’로 계신다고 한다. 실은 26일부터 하루 두 번씩 B 종합병원을 갔었다. 24일 밤에 부산역에서 응급실로 데려갔던 J 씨를 고시원으로 데려왔다가 다시 26일에 B 종합병원으로 재입원시킨 터였다. 응급실에 29일까지 있었기에 같은 병원에 있는 그분을 뵐 수 있었다. 가족이 아니라는 핑계로 중환자실 면회하기가 쉽지 않겠거니 포기했다.

해가 바뀌고 1월 4일, 또다시 B 종합병원을 찾았다. 요양병원에 계신 장인어른께서 기침이 심하셔서 급히 호흡기 치료로 가게 된 것. 그때도 그분을 뵈러 중환자실에 못 갔다. 일요일이었던 7일에도 예배 모임을 마치고 저녁 7시 즈음에 병원으로 갔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뵈었지만, 그때도 중환자실에는 못 갔다.

지난 8일 오후 1시경, 김 주무관에게 그분 안부를 묻고는 J 씨를 비롯해 다른 입원한 분들을 만나고 오는 길, 동행한 주민 어르신 한 분과 의견을 나누었다. “그분도 분명 무연고가 될 텐데 우리가 장례로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어르신은 흔쾌히 “그렇게 하자” 하셨다. 그렇게 오던 길에 상담소 K 선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김 주무관에게서 중환자실에 있는 그분이 소천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은 잠시 눌러두고 영정사진을 준비하고 장례 절차를 밟았다. 그런데 그분은 넘어져 지구대를 통해 입원했기 때문에 ‘병사’가 아니라 ‘외인사’라고 한다. 부검을 해야 한단다. 사흘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

나 자신 하나 지키기 힘든 세상이라지만, 그분 가시는 길에 두 손 모아 마음 함께해주시길 빈다. 두 손 모아 간절한 기도 한마디씩 보태주시길. 하늘의 평화가 있기를.


이재안
잠자리 눈물만큼의 정(情)이라도 찔끔찔끔 나누며 살아가는 작디작은 풀꽃강물교회 식구이며, 부산 동구지역을 중심으로 ‘혼살이’ 아저씨 아줌마 할매 할배들과 찌지고 뽁고 욕먹고 욕하며 살아가는 40대 유부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