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유럽교회와 21세기 한국교회, 지독한 평행이론

[331호 한 인문주의자의 시선] 메노키오, 갈릴레오, 청교도, 머튼 테제

2018-05-28     최종원

1. 창조 논쟁에 대한 예비적 고찰
창조론을 둘러싼 논쟁들이 많이 제기됩니다. 창조냐 진화냐를 놓고 주로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이 벌이는 논쟁입니다. 학자들의 아카데믹한 논쟁의 기초는 오류의 가능성에 대한 개방성과 열린 결론을 추구합니다.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면 겸손히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가 학문에 대한 기본 자세입니다. 어떤 과학의 문제에 접근함에 있어 수용할 수 없는 선을 미리 설정해놓고 토론을 하면 의미 있는 논의를 끌어낼 수 없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맥락에서 보자면, 주로 창조과학계와 보수 개혁주의신학 진영에서는 타협 불가능한 엄격한 경계가 있습니다. 서로 상대에게 말을 하지만 대화는 아닙니다. 이 점이 창조론과 진화론을 둘러싼 논쟁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기독교는 보편적인 과학 발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반과학적 태도를 취하지는 않습니다. 유독 기원의 문제, 창조의 문제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비합리적으로 대응하는 이유는 기독교 교리체계의 뿌리를 흔들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일 것입니다. 종교가 가진 초월성을 배제한 채 이성적인 논리로 종교를 비판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창조와 진화를 둘러싸고 생겨난 논쟁은 흥미롭게도, 종교가 초월의 자리에서 내려와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초월적인 창조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창조-진화 관련 논쟁은 성서해석 방법이나, 신학 혹은 과학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권위와 권력과 관계된 문제입니다. 교회나 신학계에서 창조-진화 논쟁을 제기하는 데에는 신학의 권위에 대한 위기의식과 더불어 신적인 교회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주로 권위의 위기를 겪는 보수 신학과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진화론을 반박하고 창조과학을 묵인하거나 옹호하는 데서 그 성격이 잘 드러납니다.

이 글은 창조-진화를 둘러싼 신학과 과학 사이의 논쟁을 거들 목적은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종교와 과학은 어떻게 연결되는지 한 걸음 떨어져서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할 듯 보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종교와 과학이 걸어 온 길과 대화의 가능성을 한 번 따져 보고자 합니다. 

2. 메노키오와 갈릴레오, 평행이론?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종교개혁의 시기로 기억하는 유럽의 16세기는 근대 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근대로의 이행이 일어났던 시기입니다. 이 근대를 연 가장 중요한 사건은 르네상스나 종교개혁이 아니라 ‘과학혁명’입니다. 과학혁명이라는 용어는 기독교 사관에 대한 연구로도 잘 알려진 영국 역사학자 허버트 버터필드가 《근대 과학의 기원》에서 언급한 용어로서, 코페르니쿠스(1473-1543)부터 뉴턴(1643-1727)에 이르는 150년 동안의 과학 발전을 가리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던 교회에는 큰 도전이었습니다.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라는 세계관은 곧 교회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세계관의 반영이기도 했습니다. 종교개혁 전후 교회는 전에 없던 권위의 위기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과학의 발전은 가톨릭 교회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이른바 교의학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때문에 종교개혁은 단순히 교회의 분열로 끝나지 않고 근대 세계 속에서 종교의 권위와 종교적 가르침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제기로 연결되었지요. 
1582년 이탈리아의 프리울리라는 지역에서 작은 방앗간을 하고 있던 메노키오라는 인물이 이단 혐의로 고발되었습니다. 고발 당시 51세였던 그는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신성, 교황과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였습니다. 흙, 공기, 물, 불이 뒤섞인 혼돈의 상황에서 마치 치즈에서 구더기가 나오듯이 물질이 생성되었다는 우주론과 창조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독학으로 글을 깨치고 몇 권의 책을 읽었지만, 누구로부터 사상의 영향력을 받았는지는 명확치 않았습니다.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이단 심문관에게 고문을 당하면서 심문을 받은 그는 결국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여 얼마간의 옥살이를 한 후 석방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석방된 후에도 메노키오는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십수 년이 지난 1599년 추기경 산타 세베리나는 메노키오를 ‘무신론자이자 상습범’으로 규정하고 재조사를 명했습니다. 그는 메노키오의 사안이 심각하고 중대하므로 엄중하게 처벌하여 본보기를 삼아야 한다는 것이 교황의 확고한 의지라고 밝혔습니다.

남아 있는 재판 기록에 따르면,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8세도 메노키오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엄중하게 처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결국 메노키오는 16세기의 끝자락인 1599년 11월과 12월 사이의 어느 날 이단 혐의로 처형되었습니다. 그는 고문을 당하며 그의 사상에 영향을 준 배후를 묻는 질문에 끝끝내 “오직 저 스스로 읽었을 뿐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탈리아 역사학자 카를로 긴즈부르그는 1976년 이 재판에 대한 기록을 《치즈와 구더기》라는 책으로 남겨 그의 삶을 역사 속에서 복원하였습니다.

▲ 30년의 간격을 두고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았던 두 이탈리아인 메노키오(왼쪽)와 갈릴레오의 삶은, 일개 방앗간지기와 당대 엘리트 과학자라는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상과 과학 이론에 대한 교회의 탄압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이미지: 위키미디어 코먼스 외)

메노키오보다 약 30년 후에 프리울리로부터 직선거리로 약 460km 남짓 떨어진 피사에서 갈릴레오(1564-1642)가 출생했습니다. 그는 가톨릭 교회가 전통적으로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 즉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순환한다’는 천동설을 배격합니다. 태양계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며, 태양을 따라 지구가 순환한다는 지동설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 주장으로 가톨릭 교회와의 논쟁 중심에 서게 됩니다. 1615년 교황청 종교재판소는 갈리레오의 주장이 트리엔트 공의회의 주장에 배치되며 프로테스탄트주의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혐의를 씌웁니다. 흥미롭게도 이는 메노키오 재판에 적용된 혐의와 동일합니다. 1616년 교황 바오로 5세는 갈릴레오에 대한 조사를 담당했던 추기경 벨라르미네에게 갈릴레오의 지동설 주장을 철회하도록 명령합니다.

그 후 10여 년 동안 갈릴레오는 이에 관련된 논란에서 비껴나 평온한 일상의 삶을 누립니다. 그러나 1630년 《두 가지 주요 태양계 구조설에 관한 대화》를 저술하여 다시 한 번 천동설을 비판하고 지동설을 옹호했습니다. 그 결과 1633년 교황청은 다시 갈릴레오를 이단 혐의로 종교재판에 회부합니다. 갈릴레오는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고령에다 거의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아 옥살이는 면하고 가택연금된 채 일생을 보냈습니다. 이 재판 후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이 말은 갈릴레오 사후 그의 추종자들이 지어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 듯합니다.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재판에 대해 사과하고 갈릴레오를 공식적으로 복권하였습니다.

약 30년의 간격을 두고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았던 두 이탈리아인의 삶, 한 번도 주목받지 못했던 민중과 당대 엘리트 과학자라는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요소가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어설프게 평행이론을 논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의 사상과 재판기록은 단순히 한 개인의 특이한 삶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흥미로울 수는 있으나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신분이나 사회적 명성 등을 비추어볼 때 동시대 같은 공간에 살았다 하더라도 동선이 겹치기 쉽지 않았을 이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공간은 종교재판소입니다. 그 공통된 내용은 당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생성된 새로운 사상과 과학의 주장에 대한 교회의 탄압입니다. 갈릴레오는 그렇다 쳐도 일개 지방의 방앗간지기에 불과한 메노키오의 주장에 대해 교황청이 직접 개입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삶과 주장이 단순한 개인의 돌출적인 주장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것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독점적인 지위를 상실한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사고와 과학발전의 도전으로 권위의 위기를 겪습니다. 그 결과 가톨릭 교회는 제도교회의 전통뿐 아니라 성서의 권위를 재해석합니다. 흔히 보수 프로테스탄트가 독점한 것으로 비춰지는 성서 영감설에 대한 본격적인 신학적 담론이 다름 아닌 이 시기 가톨릭 교회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위 두 사건이 벌어진 것과 비슷한 시기 스페인의 도미니크회 수사 멜치오르 카노(1509-1560)는 성서의 축자영감설 혹은 완전영감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모든 단어뿐 아니라 모든 일점일획이 성령의 감동으로 작성되었으며, 어떠한 오류도 들어 있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역시 도미니크회 수사인 도밍고 바네즈(1528-1604)도 성령께서 성서의 모든 내용을 감동하셨을 뿐 아니라, 글자 한 자 한 자까지도 말씀하시고 암시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과학 발전과 새로운 사상의 도전에 대해 제도교회를 통한 신앙의 신비와 초월만을 강조한 반동적인 대응의 또 다른 사례입니다.

3. 청교도와 머튼 테제 
이탈리아의 메노키오나 갈릴레오의 사례에서 본다면 과학혁명과 가톨릭 교회는 그리 생산적인 관계를 지닌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시기를 약간 뒤로 옮겨 잉글랜드의 사례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잉글랜드 내전(1642-1651)은 왕당파와 의회파의 갈등 끝에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하고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이 권좌에 올려놓습니다. 잉글랜드에 장로회의 정치 이념을 이식하고자 시도했다는 점에서 흔히 ‘청교도혁명’이라고도 부릅니다. 내전 기간 동안 의회는 왕권을 견제하기 위하여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개최하여 장로회 정치에 기반한 예배 및 신앙규범, 교리문답서 등을 제정합니다. 국왕의 처형(1649)도 이 총회가 한창 진행되던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교리문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어떤 책에서는 종교개혁의 완성이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이루어졌다는 평가도 내렸습니다만, 웨스트민스터 총회 자체가 잉글랜드가 정치·사회적으로 불안정한 내전 상태에서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잉글랜드 내에서의 유산은 초라합니다.

크롬웰 부자의 독재정치 이후 1660년 왕정복고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잉글랜드에서 한 번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비운의 고백서가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칼뱅의 가르침과 장로교 정치체제를 도입하여 잉글랜드를 모범적인 프로테스탄트 국가로 만들고자 했지만 대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잉글랜드 내에서는 칼뱅의 이념을 따르는 개혁교회는 아주 소수 존재하지만 교회 정치 제도로서의 장로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장로교 교세가 강한 한국의 신학 지형도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결과를 높이 평가할 수는 있습니다. 미국 해외선교연구센터(OMSC)가 발행한 2013년 〈세계선교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장로교인의 비율은 전체 기독교 인구 대비 0.8%라고 합니다. 주로 미국과 한국에 교세가 형성되어 있고, 특히 한국 장로교인이 3분의 1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반영해 보자면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리 적절하지 않습니다.

잉글랜드 내전 후 정치 시스템과 종교 의식은 국교회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장로교인, 침례교인, 칼뱅주의자, 퀘이커교도, 유니테리언 등은 비국교도로 분류되어 공립학교 및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 입학이 금지되었고, 국교회 성찬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의 공직 진출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차별은 청교도들에게 의도하지 않은 역할을 맡겼습니다. 내전 이후 청교도들이 과학 분야에서 두드러진 공헌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역사는 때로 아이러니를 통해 형성됩니다. 그 중심에는 1660년에 설립된 ‘로열 소사이어티’(The Royal Society of London for the Improvement of Natural Knowledge, 자연 지식의 향상을 위한 런던 왕립학회. 줄여서 ‘왕립학회’라고도 함)가 있습니다. 로열 소사이어티는 청교도에 의해, 청교도를 위해 만들어진 기관은 아닙니다. 비국교도에 대한 대학 입학 제한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청교도들이 로열 소사이어티에 들어가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공식적인 단체로서 로열 소사이어티의 성립은 새로운 지식에 대한 갈망과 더불어 당시 대표적인 고등 교육 기관이었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의 침체기와 맞물려 상승 작용을 했습니다. 교육받은 성직자의 양성이라는 ‘옥스브리지’의 주요 기능은 종교개혁 이후에도 변함없이 유지되었고 신학의 학문적 우위는 여전히 지속되었습니다.

물론 인문주의의 유입과 이어지는 자연철학에 대한 관심의 확산은 대학에서도 나타난 현상이었으나, 신학을 중심으로 한 지식의 통합이라는 중세적 관점이 여전히 유지되었습니다. 신학 외의 모든 학문들은 신학 공부를 위한 준비 과정 정도로 여겨졌고 자연 철학은 스콜라 철학의 기반이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실험적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소위 베이컨주의는 당시의 대학에서는 수용되지 못했습니다. 통합적인 학문으로서 신학의 지위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 로열 소사이어티의 가장 큰 특징을 두 가지로 들 수 있습니다. 첫째, 모든 종류의 신학과 종교적 토론을 금한 것입니다. 둘째, 자연철학과 과학에 대한 집중입니다. 이러한 시각은 분명 잉글랜드 청교도들이 추구했던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로열 소사이어티가 자리를 잡아나가면서 점차로 영국 내에서 개신교는 합리적인 종교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습니다.

잉글랜드의 청교도는 가장 급진적으로 성서 중심의 국가를 추구하던 집단이었습니다. 좀 더 정밀하게 신앙을 규정하고 성서의 가르침을 해석하고자 했지만, 실제로 더 큰 충돌이 내부에서 빚어졌습니다. 이에 대한 반성의 과정에서 성서 해석 너머에 있는 보편적 이성에 대한 추구가 등장했습니다. 곧 중세 기독교 유럽의 도래 이후 지속되어 오던 교회 중심의 세계관의 해체가 내부로부터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대 상황에 따른 청교도의 불가피한 수동적인 선택이었을까요, 아니면 칼뱅주의 이념 자체에 과학 발전의 토대가 들어 있었을까요?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은 청교도 사상 자체에 과학 발전을 이끌어 온 친연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머튼 테제’라고 부릅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직업의 소명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 발달에 기여하였다는 ‘베버 테제’를 주장한 바 있습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머튼의 주장은 이 베버 테제의 과학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교도가 과학혁명을 이끌었음을 주장하는 머튼 테제는 기독교와 과학의 선순환을 그립니다. 그는 가치와 이상을 중요시하는 ‘청교도 에토스’가 17세기 잉글랜드의 과학 문명을 고양시키는 데에도 기여했다고 보았습니다. 머튼 테제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칼뱅주의 에토스는 영적인 세계뿐 아니라 물질적인 세계에도 동등한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 둘째, 그에 따라 사회복지와 공공의 이익을 건설적으로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에 대해 로열 소사이어티가 청교도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며, 청교도만의 가치이기보다는 17세기 잉글랜드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취한 과학에 대한 태도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머튼 테제를 따른다면 근대 과학혁명을 이끈 산실로 평가받는 로열 소사이어티는 가장 보수적인 청교도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역설을 보입니다.

메노키오나 갈릴레오 사례에서 보듯 17세기 교회는 과학 변화에 수동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이 시기 가톨릭 교회에서 기계적 영감설과 같은 성서 무오설이 먼저 나왔다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계몽주의와 과학혁명 등 지성 세계의 급작스런 변화에 맞서 신앙고백을 강화함으로 대응한 교회의 대응은 수세에 몰린 위기의식의 반영이었습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기독교 사상사》에서 객관적인 관찰자의 시각으로 볼 때 16, 17세기 교리문답서를 포함하여 정통주의 시대의 신학 발전이 지성사의 관점에서는 반계몽주의의적이자 죽어가는 학문으로 보인다고 냉정하게 평가했습니다. 이 신앙고백주의(confessionalism)는 신학의 공통된 토대를 놓으려 하기보다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는 데만 급급하게 만들었다고도 했습니다.

위와 같은 17세기의 시대 분위기에서 청교도와 로열 소사이어티가 연결된다는 사실은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색다르게 읽을 수 있는 여지를 줍니다. 적어도 청교도와 로열 소사이어티의 연결점은 종교가 과학혁명에, 또한 시대의 지성계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참여를 한 예외적 사례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가 21세기 소위 말하는 복음주의, 보수 개혁주의 진영에 적용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 '청교도가 과학혁명을 이끌었다'는 머튼 테제에 따르면, 근대 과학혁명을 이끈 산실로 평가받는 영국 로열 소사이어티(왕립협회)가 가장 보수적인 청교도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역설이 나온다. 1952년의 로열 소사이어티 모습. (사진: GFHund/위키미디어 코먼스)

4. 신학의 고착화된 틀을 넘어 과학과의 대화로 나아가기 
17세기 유럽교회가 겪었던 권위의 위기를 오롯하게 21세기 한국교회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교회 자체적으로 반복되는 윤리적 도덕적 위기와 함께 과학 발전이 던지는 신학의 위기도 있습니다. 창조와 진화 논쟁, 아담의 역사성 논쟁 등도 큰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교회의 대응은 반지성주의와 유사지성주의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반지성주의라 함은 특정한 신학적 교리적 주장과 다른 학문 분야의 정합성을 추구하는 시도를 포기하고 기존의 신앙고백적 입장만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진화론을 반대하는 중요한 논거로 사용하는 것은 그저 우연한 반복이 아닙니다. 유사지성주의는 적극적으로 교리와 과학이 정합성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창조과학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한국교회와 같이 칼뱅주의 세계관을 따르는 흐름이 여전히 강한 풍토에서 반지성주의는 효과적으로 수용됩니다. 반지성주의는 도전받을수록 더 확고한 것에 집착합니다. 간편하게 ‘진리 대 비진리’ 구도를 만듭니다. ‘창조 대 진화’라는 이 구도는 ‘신앙 대 불신앙’이라는 구도로 손쉽게 치환됩니다. 창조과학을 신봉하는 이들은 ‘젊은 지구론’을 믿지 않는 것은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합니다. 그들은 고민스러운 부분에 대해 논리적인 답을 제시하고, 믿어야 할 바를 일목요연하게 과학의 이름으로 보여주고자 합니다. 하지만 너무 쉬운 것은 답이 아닐 수 있습니다.

또한 주로 개혁주의 신학계에서 제기되는 창조-진화와 관련된 대응 담론 역시 크게 보아 이 구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을 수 있는 것으로, 논리로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신비를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신비가 인간의 이해로 다 설명될 수 있다면 신비가 아닙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당면한 과학의 도전으로 인한 위기를 교리에 대한 강조나 창조과학 신봉으로 도피하는 것은 진지해 보이긴 하나 외부에서 보기에는 어설픈 대응입니다. 메노키오나 갈릴레오를 대했던 교황청의 태도는 그 시대 종교의 과학에 대한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즉, 종교의 인식 범위 안에서 과학을 수용하겠다는 지극히 편협한 시각을 드러낸 것입니다.

교회 내의 검열 문화는 여전합니다. 메노키오의 “오직 저 스스로 읽었습니다” 또는 갈릴레오의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혼잣말은 17세기만의 것이 아닙니다. 21세기 실제 교회 현장에서 창조와 진화의 관계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면 ‘성경을 믿지 않는다. 진화론자다’라는 식의 규정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집니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대중들에게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는 논리입니다.

개혁주의신학을 하는 분들이나 창조과학을 옹호하는 분들은 진화론을 수용하면 기존의 구원의 틀이 무너진다고 합니다. 아담의 역사성이 부정되면 원죄 교리와 대속 교리가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나아가 살펴보면, 세계 기독교의 다른 한 축인 동방교회에서는 원죄의 유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기독교 전통 역시 오늘까지 이어져 옵니다. 그러므로 진화론에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반(反)기독교세계관이라고 규정하거나, 교리와 성경의 무오성에 심각하게 도전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완벽하게 설득력을 지니지 못합니다. 그뿐 아니라 특정한 신학 이념 때문에 보편적으로 합의된 학문적 성과를 외면하는 것은 결코 학문을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과학의 연구 성과를 신학에 적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과학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반면, 교리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경 해석에 대한 오랜 교회의 전통 가운데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7세기 근대과학의 공세 앞에 가톨릭 교회 역시 성경의 무오설과 교회의 전통이라는 논리로 대응했습니다. 천동설을 방어하고, 지동설을 주장하는 이들을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21세기 근대과학의 도전 앞에 선 한국교회 역시 ‘성경의 무오성’과 ‘교회의 권위’로 대응합니다. 가장 현실적인 결과가 창조-진화 논쟁을 배격하고 젊은 지구론을 주장하는 창조과학을 암묵적으로 묵인하거나 명시적으로 지지하는 것입니다. 17세기 가톨릭 교회와 21세기 한국교회의 대응 속에서 지독한 평행이론을 봅니다. 

지난 5월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맞았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모든 것을 경제 문제로 환원하는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핵심 교리는 폐기되었으나, 비판적 성찰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는 다양하게 진화하여 21세기에도 필요한 담론을 생성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신학은 여전히 지나치게 교조화되어 남아 있습니다. 예컨대 칼뱅의 사상도 고등 칼뱅주의라는 말은 있어도, 그를 발전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후기 칼뱅주의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보수주의 신학도 기존의 틀에 고착되기보다 시대의 맥락 속에서 새롭게 발전하고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는 결국 신학자들, 구체적으로는 교의학자들이 해야 할 작업일 것입니다. 기성의 틀을 변할 수 없는 유일한 틀로만 붙든다면 갈수록 신학이 설 자리는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과학과 같은 유사지성주의 견해가 성경 중심주의와 복음주의 세계관이라는 허울 아래 유지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정말 ‘성경과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 것일까요? ‘오래된 지구론’이나 진화 이론을 수용하면 기독교의 근간이 무너진다고 정색하는 이들의 주장에서 “나라를 통째로 넘기시겠습니까?”와 같은 공감되지 않는 문구가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요?

자신들이 설정한 신학적 틀 안에서 다른 것에 대해서는 눈을 막고 귀를 닫는 것은 지적인 오만이자 태만입니다. 종교에 초월의 영역이 개입된다고 해서 맹목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의 정합성에 대한 최종 판단은 교의학자의 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교회가 속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교회의 가르침의 적실성을 인정할 때 교리의 정합성은 확정됩니다.

신학자들은 텍스트뿐 아니라, 사회의 시각이 무엇인지 역시 고민해야 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어깨에 힘을 빼고 콘텍스트를 읽는 노력이 그 누구보다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런 태도를 ‘학문하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이 기반 위에 이제부터라도 창조와 진화에 대해 과학과 신학 사이의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