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냉면의 예배학

[331호 올곧게 읽는 성경]

2018-05-28     박영호
   
▲ 조금씩 긴장을 풀고 무장해제 된 그 만찬의 리듬, 그 모든 기억들이 김 위원장의 의식/무의식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욕망을 빚어내는 재료가 될 것이다. (사진: 2018 남북정상회담 홈페이지)

남북정상회담이 끝났다. 4월 27일, 역사적인 하루 일정을 마치고 북으로 돌아가는 김정은 위원장의 벤츠 자동차를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평양으로 가는 먼 길, 그는 아내와 함께 무슨 대화를 나누며 갈까?’

그날 만찬에서 현송월과 윤도현이 듀엣으로 부른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흥얼거리며 갔을 것 같다. 생모의 애창곡이라고 했지, 아마. 문재인 대통령 부부는 무슨 대화를 나누며 갔을까? 모르긴 해도 저녁으로 먹은 평양 옥류관 냉면 맛 품평이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 경제, 군사 등의 굵직한 의제들도 많았지만, 무슨 음식을 먹고 무슨 노래를 들으며 사는가 역시 인간에게 소중하므로, 그들 역시 인간이므로 가족 간의 대화에서 이런 내용이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서구인들이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지배적 틀을 형성했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만이 아니다, 먹는 존재이고, 춤추고 노래하는 존재이다. 때로는 구성진 노랫가락이 그 어떤 탄탄한 논리보다 더 크게 우리 마음을 흔든다. 인간은 몸을 가진, 몸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욕망의 대상이 된 평양냉면의 맛
한국이 서구를 통해 전해 받은 기독교는 ‘생각하는 인간’에 초점을 맞춘 종교였다. 바른 교리를 머릿속에 탑재하고 있는 것이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자격으로 여겨졌다. 제자훈련 역시 성경공부가 주 내용을 차지한다. 신학자 제임스 스미스는 사람이 가진 생각과 세계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 욕망을 보아야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을 제시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신앙 역시 그렇다. 스미스는 ‘욕망하는 인간’이라는 화두로 서구의 기독교가 하나님을 이해하고, 신앙을 정의하고 전수해오던 방식 전체에 도전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에 가 닿는 예배의 가능성에서 기독교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이 주장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했다. 회담의 성공 여부는 두 정상이 만나 무슨 결론을 내느냐 못지않게, 그 만남을 양측의 주민들이 어떻게 인식하여 받아들이는지에 달려 있다. 남한에서 연일 냉면집들이 미어터지고, “평양 옥류관 가서 냉면 먹는 것”이 많은 국민들의 버킷리스트에 오르고 있다. 남북관계에 복잡하게 얽힌 엄정한 주제들까지도 한 곁으로 밀어낸, 남북 주민들의 강렬한 욕망의 대상이 된 평양냉면의 맛이 한반도를 평화로 향하게 하는 엄청난 에너지를 모아내고 있다. 평양냉면의 이런 인기에 회담을 기획한 이들도 무척 놀랐다고 한다.

정상회담 이전에 남과 북이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하나의 하키팀을 이루어 몸으로 부대끼는 일이 먼저 있었다. 미처 봄이 오기 전에 남과 북을 오가며 봄을 노래한 가수들도 있었다. ‘봄이 온다’라는 무대 장식에 그려진 꽃들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핑퐁외교’라는 말이 있듯이 양국의 중요한 정치적 결정으로 가는 길에 깔아 놓는 레드카펫 정도 아닌가? 그러나 막상 봄이 오고 보니, 꽃은 봄의 배경이 아니라 주인공이더라! 남과 북이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고, 같은 꽃향기를 맡고, 한 팀이 되어 땀이 쭉 빠질 정도로 뛰노는 것은 정상회담으로 가는 분위기 조성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정상회담을 포함한 외교적 노력이 가져올 세상의 진정한 실체일지 모른다.

우리의 예배가 그렇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노래한다. 그런데 흔히 ‘준비찬송’이라는 말로 격하하는 습관이 있고, 예배 시간에 늦어도 설교 시작 전에만 들어가면 ‘많이 늦지는 않았다’고 자위한다. 메시지는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지나치게 메시지 중심으로 정위(定位)된다. 머리가 강조되는 사이, 몸의 중요성은 사라졌다. ‘좋은 설교’가 곧 ‘좋은 예배’라 여긴다면 집에서 매끄러운 설교 영상을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예배 전통은 다르게 말한다.

맛의 기억, 몸의 기억
기독교 예전의 핵심은 세례와 성찬이다. 성찬은 먹는 행위이다. 그것도 “몸을 먹는다”는, 이상하게 들릴 만큼 물질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행위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신 방법은 저 멀리서 ‘신적인 지혜’ 혹은 ‘바른 교리’를 수여해주시는 것이 아니었다. 직접 인간의 몸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사셨고, 그 몸으로 인간을 사랑하셨고, 마침내 몸을 주셨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혹은 매일 모여서 함께 떡과 잔을 나누면서, 몸을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몸의 사랑이다. 어떻게 기억하는가? 주님은 말씀하신다. 

“이를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행해야 기억할 수 있다. 머리가 기억하는 것보다 몸이 기억하는 것이 더 근원에 가깝다. 사람이 기억상실증에 걸려 가족도 못 알아보고 자기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어도, 자전거 타는 법, 수영하는 법은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한다. 피아니스트는 피아노 치는 법을 기억한다. 요한복음은 성찬의 자리에 세족을 가져다 놓고 있다. 이 역시 진한 육체 접촉을 남긴 기억이다. 이 몸의 기억이 사도들이 이후로 감당해야 했던 사역의 무게, 핍박의 세월을 견디게 하는 힘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고정희의 시, 〈겨울 사랑〉 중에서)

4월 27일 하루 동안,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유난히 손잡는 장면을 자주 보여주었다. 세계의 관심이 집중된 무대인 만큼 우애를 과시하는 차원이 없을 수는 없겠으나, 비록 과시라 하더라도 감촉의 기억은 남는 법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몸이 그 느낌을 어떻게 기억할지, 그 기억이 앞으로 그가 가는 길에 어떤 힘으로 작용할지 궁금하다. 유난히 따사로웠던 그날의 햇빛, 아내와 동생을 옆에 두고 서로의 눈치를 보아가며 조금씩 긴장을 풀고 무장해제 된 그 만찬의 리듬, 그 모든 기억들이 김 위원장의 의식/무의식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욕망을 빚어내는 재료가 될 것이다.

세례 역시 진한 감촉을 남기는 몸의 사건이다. 통째로 물에 잠길 때의 경험은 몸의 기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오래전 출애굽한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마른 땅바닥을 밟았던, 그 느낌으로 기억되는 곳이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판문점은 분단의 상징이었고, 두 정상이 산책한 곳은 고 정주영 회장이 소 떼를 몰고 북으로 올라가는 퍼포먼스를 연출했던 곳이기도 하다. 두 정상의 동선은 우리 민족의 삶에 잠재되어 있던 기억들을 호출한다.

요단강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세례는 출애굽의 기억에 기대어 이제 진정한 해방의 삶이 시작되리라는 사실을 알리는 퍼포먼스로 기능한다.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강을 건너던 백성들의 마음을 채웠던 기대는 이제 같은 이름을 쓰는 갈릴리 출신 청년이 제시하는 새 세계에 대한 기대로 되살아난다. 세례는 그 출발부터 기억과 상상이 만나는 자리였다. 이후 제도화된 세례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기억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렇게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력이 요구되는 지점으로 세례자들을 이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초대교회가 성도들에게 세례를 주며 선언한 말씀이다. 세례를 통해 존재의 강을 건넌 이들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디는 것이다. 모든 사회적 차별이 철폐된 사회, 그런 세계가 다가올 것을 상상하며 그 마음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는 예배
그 삶은 무엇보다 한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는 사건으로 현시된다(갈 2장). 한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기도 껄끄러운 사람들이 함께 밥을 나누어 먹는 의례(ritual)를 통해, 분열과 차별에 익숙하던 몸이 화해의 몸으로 바뀌는 것이다. 반복되는 몸의 의례는 습관을 만들고, 생각을 바꾸고,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런 과정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런 파격적인 식탁의 모험을 감행하던 이들에게 강경파들이 들이닥친다. 강경파란 원래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이들도 세례를 받았을 텐데, 그리스도로 인해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고 있음을 알았을 텐데, 그들의 상상력은 기존 사회관계를 뛰어넘는 행동으로 발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중간에서 우물쭈물하던 중도파도 있었다. 이들이 강경보수파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식탁으로부터 물러났을 때, 바울은 그 유명한 ‘이신칭의’ 신학을 무기로 그들에게 정면으로 맞선다. 몸의 기억과 감각이 방향을 잃을 때, 신학과 교리가 길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우리 감각의 나침반이 세상 문화의 강한 자기장에 흔들릴 때는 교과서적 지식이 필요하다. (신학무용론은 무책임하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는 지나치게 교리 의존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바울이 투쟁한 것은 신학 토론의 자리에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가 어우러져 함께 밥 먹는 자리의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평양냉면의 맛과 ‘그 겨울의 찻집’ 노랫가락이 이끄는 감성에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다. 인간이 욕망하는 존재임을 자각하자는 것과 욕망에 따라 살자는 말은 다르다. 헨리 나우웬의 조언에 귀 기울여 보자.

우리는 흔히 욕망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욕망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떤 욕망은 다루기 힘들고 난폭하며,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합니다.
또 어떤 욕망은 우리들로 하여금 깊게 생각하게 하며, 커다란 비전을 보게도 합니다.
또 다른 욕망은 우리들에게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또 어떤 욕망은 우리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게도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욕망은 다른 모든 욕망의 길잡이가 되는 욕망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육체, 생각, 마음 그리고 영혼은 서로가 적이 되어, 우리 내면의 생활은 큰 혼란에 빠지고 우리를 낙담과 자기 파괴로 인도합니다.
영적인 훈련은 우리의 모든 욕망을 뿌리 뽑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많은 욕망을 정리해서, 하나 하나의 욕망이 서로 도움이 되게 하고, 모두 함께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영혼의 양식》 중에서)

인간의 고통은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다양한 욕망들이 서로 충돌하는 데 있다. 내 욕망을 따라 나에게 있는 많은 우선순위들이, 가치들이 충돌하는 것이다. 날씬하고 건강해지고 싶은 욕망도 있지만, 마음껏 먹고 싶은 욕망도 있다. 자신의 삶을 책임 있게 꾸리고 싶은 욕망도 있지만, 자유롭게 놀고 싶은 욕망도 있다. 욕망을 ‘극복’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 다양한 욕망들이 서로를 적으로 여기지 않고, 서로를 인정하며, 더 근원적인 욕망의 존재를 인정하며, 때로 서로의 자리를 내주는 것이 잘 사는 길이다. 욕망들이 질서를 잡아가는 것, 가장 깊고 근원적인 욕망에의 충족에 가 닿는 것이 예배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서로 자리를 내주는 비움이 요구되기 때문에, 어떤 욕망도 절대적인 자리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 학생이라고 해서 공부가 언제나 우선순위가 아니듯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언제나 우선순위가 아닐 수 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이라는 한마디로 재단하기에 우리 삶은 너무 복잡하고, 너무 미묘하고, 너무 골치 아프고, 너무 아름답다. 어떤 욕망이 너무 세속적이라고 지레 짓누르는 것도 좋지 않다. 감정을 짓누르고 욕망을 부정하고, 교과서적인 삶을 사느라 우리는 너무 지쳐 있고 너무 경직되어 있다. 지적으로 경도된 마음의 습관은 예배에서도 선포된 내용의 옳고 그름을 따지느라 바쁘다.

우리의 기도를 위해 주님이 직접 주신 주기도문이라는 교과서가 있음에도, 우리는 기도하면서 “무엇을 구해야 할지(롬 8장)” 모를 때가 더 많다. 어쩌면 그것은 복이다. 그 틈이 있기에 우리 가운데 성령의 숨결이 스며들 여지가 있는 것이다. 시시각각 다른 소리, 다른 빛을 내며 굽이쳐 흘러가는 냇물처럼, 생명의 리듬을 따라가는 것이 은혜의 삶이다. 우리는 예배 안에서 한층 고양된 감각으로, 조금 더 밝아진 눈으로 자신을 보고 세계를 본다. 그리고 그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며, 상상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나의 판단, 나의 몸, 나의 감각, 나의 욕망은 살아 있어야 한다. 살아있는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맛보아 알지어다’
이상에서 지나치게 생각 중심으로 정립된 인간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인식의 한계를 지적했지만, 사실 그 어근인 ‘sapio’는 “맛보다”라는 말이다. 맛보는 것은 그냥 먹는 것과 다르다. 먹는 것이 음식을 내 몸 안으로 넣는 수동적, 기계적 행위라면, 맛보는 것은 참여적 행위이다. 살짝 먹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뱉을 자유가 있어야 맛을 볼 수 있다. 감탄고토(甘呑苦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이 기회주의자의 속성처럼 쓰이지만, 사실은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 익혀온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이는 잘 살 수 있는, 번영의 전략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면 우리 입맛도 하나님의 작품 아닐까?

물론 우리의 입맛은 오도된 욕망과 과도한 양념, 화학첨가물로 교란되어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총체적 회복이 가능하다면 우리 입맛도 하나님이 회복시키시지 않을까? 그래서 시편은 우리에게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34:8)”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억지로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다 싶으면 뱉어도 된다는 말일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의 후진 입맛, 낙후된 감각도 일단 인정하고 일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자신감이 든든하다.

평양냉면의 맛을 타고 우리 곁을 찾아온 평화의 봄바람, 왠지 이번은 전과 다를 것 같다. 생각은 바뀔 수 있지만, 한 번 맛본 것은 잊기 힘들기 때문이다.

 

박영호
성서를 제대로 읽는 모든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믿는 성서학자. 장로회신학대학교, 예일 대학교, 시카고 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공부했다. 유학 중에 약속의교회를 개척하여 10년 동안 섬겼고, 2005년에 한일장신대학교에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미주 코스타를 비롯한 국내외 각종 집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빌립보서》 《성경을 보는 눈》(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