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 구약의 ‘거룩한 전쟁’ 아니다

[333호 국제 이슈: 팔레스타인 샬롬]

2018-07-30     김진양

국제사회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2014년 이후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경계에서 최대의 사상자가 속출하는 등 팔레스타인과 아랍 국가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최근 중동 지역에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잘못된 성서 해석에 기반을 둔 보수적 복음주의 시오니즘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미국 중동 정책의 결과다. 성서가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을 만들고 그들에 대한 약탈을 지지하는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은 종교 갈등 아닌 ‘영토 갈등’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은 회교와 유대교 간의 종교 갈등이 아니라 땅 소유권을 둘러싼 정치적인 갈등이다. 1948년 유엔과 미국의 지지로 건립된 이스라엘은 부재자 재산법을 만들어 팔레스타인의 땅을 몰수했고, 동시에 귀환법을 제정하여 몰수한 땅에 유대인의 이주를 합법화했다. 마치 현대판 모세오경의 정복 설화를 보는 것 같다. 노예에서 해방된 히브리인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이야기가 모세오경의 핵심적인 줄거리다.

애굽 노예에서의 해방과 가나안 땅 정복이라는 모세오경의 줄거리는 이미 출애굽기 3장 속 타지 않는 떨기나무 한가운데에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소명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잘 드러난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보았고, 억압으로 인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기에 나는 그들의 고통을 잘 알고 있다. 이제 내가 내려가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어 아름답고 광대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사람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이 사는 곳으로 데려 가려고 한다. (출 3:7-8, 이하 모두 필자 사역)

앞부분은 애굽의 노예로 고통당하는 히브리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이미지를 보여주는 한편, 뒷부분은 바로 그 자비의 하나님이 가나안 원주민의 땅을 강제로 뺏고 그들의 땅을 히브리인들에게 주신다고 약속하는 상반된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구약성서에 가나안 원주민 나라가 총 23번 나오는데 대부분 모세오경과 여호수아서에 발견된다(참조. 출 3:8; 13:5; 23:23, 28; 33:2; 34:11; 신 20:17; 수 3:10; 9:1; 24:11). 특히 신명기는 하나님이 가나안 원주민을 쫓아내고 전멸할 것을 명령하신다고 언급한다.

네 하나님께서 너를 인도하사 너희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너희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 기르가스 족속,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너희들의 손에 넘겨주리니, 너희들은 그들을 전멸시켜야 한다. 그들과 어떤 언약도 맺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라. (신 7:1-2, 참조. 신 20:1-18)

하지만 가나안 원주민의 땅을 강제로 뺏고 그들을 말살하라는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말씀은 1948년 이후 세워진 이스라엘의 정책에 적용할 수 없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갈등이 마치 ‘히브리인(가나안 정착 이후 이스라엘)-가나안 원주민’ 사이의 갈등과 동일시되는 것은 비역사적이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갈등은 근대 제국주의 식민지배의 결과이지 고대부터 이어온 갈등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가나안 원주민을 전멸하고 그들과 어떤 언약도 맺지 말라는 신명기의 말씀은 모세오경 저자의 역사적 상황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토지와 결부된 풍요다산의 신 바알과 아스다롯은 초기 이스라엘의 신앙과 국가 형성기에 가장 큰 도전임에 분명했다(삿 2:13-15). 또한 야훼 신앙으로 앗시리아 제국주의 패권에 저항한 신명기 저자의 상황을 보여준다(신 13장, 28장 참조). 따라서 신명기 7장의 말씀은 주변 강대국의 패권에 저항해 야훼 유일 신앙을 지키려는 고대 이스라엘의 해방 전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바로의 압제에 맞선 출애굽의 진정한 해방 정신은 가나안 제국주의 패권과의 투쟁에서 완성된 것이다.

팔레스타인 성공회 신부 나임 아틱은 성서가 정치적으로 오용되고 남용된 점을 오래전부터 지적해 왔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주장처럼 아틱 신부는 이스라엘 국가 설립 이후 시오니즘의 시각에서 읽힌 성서 해석에 문제를 제기한다. 아틱 신부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어떤 차원에서 성서가 팔레스타인 기독교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해방신학자들은 출애굽 해방 정신에 기초하여 구약성서를 해방의 근거로 역설하지만 오히려 성서는 팔레스타인을 노예로 전락시킨 종교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Naim S. Ateek, “A Palestinian Perspective: The Bible and Liberation,” in Biblical Studies Alternatively: An
Introductory Reader. ed. Susanne Scholz (New Jersey: Upper Saddle River, 2003), p. 397.

1967년 이후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 건설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1980년 이후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추방되거나 학살당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받는 박해는 애굽의 히브리인들이 바로의 압제 아래 받았던 박해와는 전혀 다르다. 히브리인과 달리 팔레스타인 사람은 외부에서 유입된 침략자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원주민이다. 출애굽기의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탈출하는 것이 해방을 의미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은 자신들의 땅 안에서 해방을 추구한다.(Mitri Raheb, I Am A Palestinian Christian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5), p. 89.) 즉, 모세오경에서 말하는 약속의 땅은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이 함께 사는 공존의 땅의 개념으로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과 구약의 ‘거룩한 전쟁’ 개념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책이 바로 여호수아서다. 고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설화는 근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복과 약탈을 정당화하는 데 가장 많이 사용된 책이다. 과연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의 해결을 위해 여호수아서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가나안의 원주민을 무찌르는 기록은 소위 인종청소에 가까운 무자비한 전쟁을 보여주고 있다(수 2-12장). 이 무자비한 ‘인종청소’는 사실 야훼 하나님의 승인 아래 여호수아가 가나안 원주민과 치른 전쟁이다.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겁내지 마라! 군사를 거느리고 아이성으로 가라! 보라! 내가 아이성의 왕과 백성과 그 땅을 내 손에 주었다.” (수 8:1)

더구나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여리고성의 남녀노소뿐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동물을 다 전멸하라고 명령하신다(수 6:17-21, 참조 8:18-23; 10:40). 그러나 야훼 하나님의 명령은 인종청소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전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거룩한 전쟁은 고대 사회 전쟁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으로서 여호수아의 여리고 성 함락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여리고 성 함락은 군사적인 방법이 아니라 종교적인 형태인 예전을 통해 야훼 하나님이 직접 전쟁에 참여하는 거룩한 전쟁인 것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땅을 불법적으로 빼앗고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을 학살하고 추방하는 이스라엘의 만행에 거룩한 전쟁의 개념이 결코 적용될 수 없다.

민중의 시각으로 여호수아서를 해석한 문익환 목사는 여호수아의 거룩한 전쟁은 농민 해방군이 출애굽 해방군과 합세하여 애굽의 착취자를 추방한 해방 전쟁이라고 하였다. 여호수아가 보낸 두 명의 정탐꾼을 숨겨준 창녀 라합과의 동맹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수 2:1, 3; 6:17, 23). 그 어떤 전쟁도 거룩하지 않은 것처럼 고대의 거룩한 전쟁 개념은 오늘날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에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서의 거룩한 전쟁은 야훼 하나님에 대항하는 적들에 대항하여 하나님이 직접 싸우시는 전쟁이기 때문이다.(문익환, 《히브리 민중사》 (삼민사, 1990), 35-73쪽.)

점령의 체제에서 공존의 체제로
종종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이 한반도의 상황과 비교되어 언급된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과 한반도의 분쟁이 서구 제국주의의 결과라는 차원에서 같은 맥락으로 비교 될 수 있다. 지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한반도와 팔레스타인은 매우 유사한 상황이다. 중동 지역으로 제국주의를 팽창하고자 하는 유럽 열강에게 있어서 팔레스타인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한반도도 동북아시아에서 아주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있다. 이스라엘이 쌓아올린 분리장벽은 한반도의 철조망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분쟁은 한반도의 분쟁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한반도 문제는 한 민족의 분단이 가져온 분쟁의 역사라고 한다면,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문제는 다른 민족 간 땅의 소유권을 둘러싼 강제 이주 정책이다. 한반도 분쟁의 종식은 남북 간 화해와 통일을 의미하지만,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의 종식은 두 민족이 한 지역에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찾는 데 있다. 두 나라가 한 나라가 되어서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은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1967년 이후 시작된 이스라엘 강제 점령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두 나라가 한 땅에 공존하는 평화로운 공존 제안을 지지한다. 또한 최고 8m에 이르는 분리장벽을 세우고 곳곳에 검문소를 설치하여 팔레스타인에 대한 인권유린과 고립 정책에 강력히 반대한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이 공존하는 참된 평화를 위해 힘쓰는 에큐메니컬 화해의 일꾼들의 노고에 적극적으로 환영하며 지속적으로 동참해 왔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불법적인 만행을 정당화하는 시오니즘적인 성서 해석은 잘못됐다. 약속의 땅 개념에서 공존의 땅 개념으로, 거룩한 전쟁의 개념이 아닌 함께 공존의 세상을 만드는 해방 전쟁으로, 그리고 점령의 체제에서 공존의 체제를 통해 팔레스타인-이스라엘에 진정한 평화가 오기를 희망한다.

 

김진양
미국 연합감리교회 세계선교부 선교사로 세계교회협의회에서 정의/평화 순례팀과 한반도를 위한 평화사역을 하고 있다. 연합감리교회 북일리노이 연회 정회원이며, 시카고 루터란 신학교에서 외래교수로 구약학을 가르쳤다. 한국에서는 한국기독교장로회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