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라서 다행이야

혼자라면 어려웠을 일, 안식

2018-07-30     정동철
   
▲ 일러스트 정동철

터널의 끝자락에서
“여보 이건 터널이야, 막다른 동굴이 아니라구…. 조금만 더 달리면 출구가 있는데 여기서 돌아가는 건 바보 같은 일이야. 돌아갈 수도, 돌아가서도 안 되는 이 막막한 어둠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인내하면서 계속 전진하는 것뿐인 것 같아.”

힘들 때마다 아내에게 했던 말이다. 강원도를 여행할 때 지났던 10km가 넘는 터널이 떠올랐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의 중간쯤에서 잠시나마 ‘이 터널의 끝이 정말 있기나 한 것일까?’ 의심한 적이 있었다.

더러는 나와 같은 의심을 잠시 했을 것 같다. 그렇다고 두려운 나머지 차를 돌려 역주행을 감행하는 이는 없다. 잠시 후면 끝을 알리는 빛이 터널의 출구 쪽에서 비춰 들어올 것이고 그러면 우린 달려온 길보다 훨씬 긴 거리라고 할지라도 안심하며 빠져나가게 된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짧은 레이스가 아니다. 길의 상태가 고속도로처럼 단조롭거나 모두에게 동일한 코스도 아니다. 지도나 교통표지판처럼 친절한 예측 도구도 없다. 마라톤 코스가 42.195km인 것을 몰라서 완주를 못하는 게 아닌 것처럼 레이스가 길고 험하면 지쳐서 주저앉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아내에게 한 말은 그리 현명하지 않은 말이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부모들은 이 고역이 언제쯤 끝날지를 예측하곤 한다. 그러나 그런 예측은 대부분 빗나가기 일쑤다. 누워 있던 아이가 뒤집으면 뒤집어서 힘이 들고, 일어나면 일어나서 사건 사고가 끊임없다. 말을 하고 자의식이 생겨서 손이 좀 덜 간다 싶으면 그때부터는 미운 짓을 하며 마음을 상하게 한다. 이 모든 고역의 끝자락에서 둘째가 들어서면 지루한 노래에 도돌이표가 붙은 것을 발견한 것 같은 허탈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아내는 아이 셋을 키웠고 13년의 세월을 묵묵히 달려왔다. 터널 거의 끝자락에서 우린 멈춰 섰고, 위험한 터널 안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억지로 차를 밀어서 터널을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더 이상 터널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위로도 격려도 아닌 말 따윈 약발이 듣질 않았다. 쉼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탈진
달리던 차가 멈춰 섰다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길이 막혔거나 기계적 결함이 있거나 연료가 떨어지는 경우이다. 13년을 육아와 교육에 전념한 아내의 이야기는 그 원인들 중 하나일 뿐 살아온 모든 날들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부부의 삶을 간단히 키워드로 정리해 봐도 그렇다.

두 아이 출산, 한 아이 입양, 박봉의 선교단체 간사 생활, 잦은 출장과 이주, 좁은 아파트, 홈스쿨, 교회 개척, 아내의 암 투병, 아내의 사직, 나의 사직, 카페 창업, 인테리어 시공, 국밥집 사장, 공동체 생활과 재정 통합, 아파트 입주민 대표, 공동체 주택 건축….

우리가 정리해 본 삶의 키워드는 고난의 행군 혹은 강제 노역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고통도 있었지만 그 모든 순간에 기쁨이 있었으며 스스로 선택한 일들일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 임재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중 하나 혹은 몇 가지가 이상 신호를 보내왔지만 우린 멈출 수 없었다.

13년간의 간사 생활은 재정적으로는 열악했다. 보수 전액을 후원에 의존하는 생활인지라 매월 후원 결과에 따라 급여가 달랐다. 모금에 별 재주가 없었던 나는 2011년 당시 매월 130여만 원의 수입으로 버티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 돈은 졸업생들의 정성과 기도의 결실이었고 적지만 부족함이 없었다. 간사 생활을 끝내고 카페와 인테리어 등을 창업한 후로는 훨씬 많은 돈을 벌었지만 이상하게도 긴장은 증폭되었다. 만나가 끊긴 가나안 땅처럼 이제부터는 내 손으로 땀을 흘려야 뭐든 손에 쥘 수 있을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니 이전의 만나가 단순하고 지루했지만 삶의 근본적인 큰 스트레스 하나를 잊게 해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부터다. 사역만 하던 내가 앞으로는 자비량으로 목회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마구 달렸던 건. 생활의 안정을 위한 적절하고도 고정적인 벌이에는 오랜 시간이 들었다. 인테리어 일을 하는 동안은 출장이 많아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늘 미안했다. 그럴 땐 공동체가 큰 힘이었지만, 형제들은 야구에서 투수가 1루에 던지는 견제구처럼 가정에서 너무 멀어지지 말라고 간간이 견제구를 던졌다.

“형님, 형님의 빈자리를 우리가 최선을 다해 보충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삼촌으로서 최선을 다할 뿐 아빠의 부재를 대신 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많이 버는 것도 좋지만 출장을 좀 줄이는 방식으로 일을 할 수는 없을까요? 경우에 따라선 디자인만 하고, 직접 시공은 하지 않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충고에 따라 나는 일을 진행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내 공동체 주택 건축이 시작되면서 공동체 전체가 200%의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에 돌입하게 되었다. 한 손에 창을 들고 한 손에 연장을 들고 성벽 건축을 했던 느헤미야의 일꾼들처럼 모두가 생계를 책임지는 벌이와 공동체 주택 건축을 병행하며 곧 끝날 터널의 출구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때 모두가 떠올렸을 사자성어가 있다면 주마가편(走馬加鞭) 아니었을까?

그러나 우리 가정으로서는 더 이상 지탱하는 것이 버거웠다. 무언가 줄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에 급히 교회에 안식년을 신청했다. 그동안 교회에서 내 역할은 5인의 목회위원 중 1인이었기에 즉시로 안식년 신청이 받아들여졌고 전체 회의에서 결의하여 1년간 교회 사역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공동체 주택 건축은 6개월간 지속되었고 터널의 끝에서 멈춰버린 차를 밀고 나오듯 6개월을 발버둥쳤다. 바라던 공동체 주택을 준공하고 이사를 할 무렵 우리 부부에겐 우리를 객관적으로 바라 볼 시간이 절실했다.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우리가 어디쯤 와 있는지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문제가 된 부분은 어디인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어디인지 정리가 필요했다

뜬금없는 캄보디아
그 무렵 우리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 가정이 캄보디아로부터 급히 귀국을 했다. 12년차 NGO공동체의 리더인 이들은 최근 프놈펜 중심가에 매장을 하나 개업한 후 탈진했다. 이렇게 간단히 얘기할 건 아니지만, 앞에서 말했듯 복잡하고 고된 여정 속에서 얽히고설킨 여러 상황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탈진한 것이었다. 사역의 연수와 형태, 살아온 세월이 우리 가정과 흡사한 이들의 어려움은 그 내용조차 유사하여 충격을 받았다.

장기간 약물과 상담의 도움을 받아야 했기에 급히 귀국했던 그들이 우리 가정을 염려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었으리라.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야 할 캄보디아로 우리를 초청했다. 이 뜬금없는 제안에 한참을 망설였다. 그들도 힘들었을 곳에서 우리가 버틸 수 있을까? 우리가 떠나는 상황이 함께 사는 공동체에게도 큰 짐이 될 터인데 이런 결정이 가능한 것일까? 이러저러한 생각으로 고뇌했다. 선교사 부부와 많은 대화가 이어졌다. 그들이 힘들었던 땅은 그들이 사랑하는 곳이었다. 그들의 가장 빛나는 젊은 시절을 모두 바친 그곳에서의 마지막은 처절했지만 어떤 미움도 후회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인도하신 하나님과 그간의 만남과 성과에 대해 감사가 넘쳤다. 그러나 기쁘지는 않다는 거였다. 그게 그들이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었고 병이 중한 증거였다.

우리 부부는 그들의 말에 너무나 공감했다. 사랑하지만 고통스러웠던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들을 홀로 보낼 수 없다는 핑계와 우리를 객관적으로 봐야 할 시간을 확보하자는 생각에서 마음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공동체 회의에서 이 안건이 몇 차례에 걸쳐 다뤄진 후 어렵게 공동체의 승낙이 떨어졌다. 쉼에 대한 논란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 공동체의 첫 번째 안식년이라는 점에서 논의할 부분이 많았다. 교회로부터 받은 안식년이 6개월 남은 시점, 건축이 완료된 새 집으로 급히 짐을 옮겨 놓고 캄보디아로 떠나게 되었다.

응급 상황
이사를 끝냈으나 다시 짐을 싸는 기묘한 상황이 되었다. 5개월은 여행자로서 불편을 감내하며 버티기에는 긴 기간이기에 생활인으로서 살아갈 짐을 꾸려야 했다. 그야말로 ‘이삿짐’이었다. 떠나는 건 결정되었지만 급히 짐을 싸는 마음은 마치 야반도주를 하는 양 떠나는 그날까지도 편치 않았다. 결국 떠나는 날 아침, 갑작스런 복통이 몰려왔다. 고통의 정도와 위치를 보아 과거에도 겪은 적이 있는 요로결석 증상 같았다. 그때도 이틀은 꼬박 진통제를 맞고 힘들게 견뎠던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출국은 안 될 말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고 나는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병원까지 걸리는 10분의 시간이 한없이 멀고 길게 느껴졌다. 도착부터 시작된 문진(問診)은 왜 또 그렇게 길고 여러 번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은 이미 캄보디아에서의 안식, 티켓 환불, 가족의 실망 같은 것은 하나도 떠오르질 않고 통증이 가라앉기를 바라는 간절함과 진통제를 더디 주는 간호사에 대한 분노뿐이었다.

그러던 한순간 허리 뒷편 어디에선가 ‘뚝’ 하는 느낌이 들면서 통증이 가라앉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화장실에서 확인해보니 소변을 통해 작은 알갱이가 빠져 나오는 게 보였고 급히 전화를 걸어 아내와 아이들에게 짐을 가지고 공항셔틀버스 정류장으로 나오게 하였다. 병원에서는 문진 외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니 수납할 것도 없다며 바로 귀가할 수 있도록 빠른 조치를 해주었다. 항공 티켓 역시 외국의 판매 사이트에서 구매한 것이라 연결이 늦어져서 취소와 환불을 못한 상태였다. 30분 전에 공항으로 가면 되었던 것처럼 이대로 출발하면 될 일이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가족은 마치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풀려난 사람을 맞이하듯 기쁨과 안도가 겹친 표정이었고, 우리는 최근 경험한 적 없는 해방감과 환희로 즐거이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를 타고 비행기를 갈아타는 등 12시간 여가 걸린 여정 중에 나는 우리에게 일어난 이 일을 되뇌었다. 떠나기 전까지 내 안에 있었던 불편한 마음들은 무엇이었을까? 미안함, 두려움, 무기력…. 미안함은 그동안 잘해주지 못한 가족에 대한 마음이었고, 두려움은 우리의 부재로 인한 공동체의 긴장과 재정적 압박에 대한 마음이었으며, 무기력함은 낯선 곳에서의 생활에 대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짧은 순간에 그것들을 환희로 바꾸셨다. 하나님이 잘 다녀오라고 등을 떠미시는 것 같았다.

새롭게 발견한 사역
겨울의 정점에서 떠나 1년 내내 여름인 캄보디아에 도착했다. “캄보디아에는 더운 날과 더 더운 날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날씨도 우리를 반기는 듯 봄날 같은 시원함이 이례적으로 지속되었다. 다소 어색했던 집과 골목과 큰 길가가 눈에 들어올 무렵이 되어서야 캄보디아의 제대로 된 뜨거운 맛을 경험했다. 선교사 부부의 친절하고도 헌신적인 도움으로 우린 제법 잘 적응했고 우리 자신만 오롯이 신경 쓰면 되는 환경을 누렸다.

아이들도 이 낯선 환경을 ‘버텨야 할 곳’에서 ‘살아야 할 곳’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그러자 이내 이런저런 즐거운 에피소드가 쏟아졌다. 음식, 언어, 친구, 교통, 쇼핑 등의 차이가 견디거나 회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삶의 다양함으로 받아들여지는 기간이었다. 적어도 5개월은 우리 가정에 그런 기간이었다. 습관이 바뀌기에 충분한 기간인지라 마음먹기에 따라 잠시나마 캄보디아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기간이었다. 이제는 돌아와 “한국 쌀은 너무 통통한 것 같아요, 한국은 너무 깨끗해요, 우리나라 날씨가 시원해요”라고 말하는 걸 보면 확실히 그렇다.

그 사이 아내와 난 무엇을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히 한 게 없다. 우리 자신의 상태와 앞으로 어찌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만 잔뜩 하다가 돌아왔다. 처음엔 이런저런 일로 선교지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보다는 우리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며 우리가 전보다 더 나은 상태가 되길 간절히 바랐다. 캄보디아에 와 있는 선교사들의 삶을 엿보면서는 그들이 많은 스트레스로 인해 상당수(대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때론 자기부정으로, 때론 수치감으로, 때론 정죄감으로 스스로를 압박하여 자신과 가족과 사역을 무너뜨린다.

성과와 능력을 중시하는 한국인 선교사들은 자매 선교사들이 어떤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지를 과시하듯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매 선교사들에겐 낯선 환경에서 아이 하나 돌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헌신은 낯선 선교지에서는 든든한 베이스캠프와 같은 것이지만 그들의 열심에는 아무런 보상이 없다. 반드시 보상을 받거나 칭찬을 들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별다른 격려나 보상이 없는 분위기는 그들의 일이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기게 하고, 그 결과 그들 자신을 무가치하게 느끼게 만든다.

현지에서 만난 한 해맑은 자매 선교사님이 생각난다. 그분은 우울증으로 상담과 약의 도움을 받은 후 지금은 많이 회복된 분이셨다. 주변에서 다른 선교사들과 비교하듯 ‘선교사님은 어떤 사역을 하십니까’ 물어보면 그분은 망설임 없이 환희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신다.

“네, 저는 자기 돌봄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로서 자기 자신을 건강하게 돌보는 일이 숨길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니라는 거다. 한 세월 열심히 달려온 상흔으로 우울증을 얻었고 용기 내어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는 이 어쩌면 힘겨운 사역에 주어진 훈장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5개월간의 안식은 우리에게 분명한 방향을 보여주었다. 공동체가 지향하는 것은 결국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숙 아닌가? 그러려면 개인이 전인적으로 건강하도록 공동체가 지원하고 배려하는 것이 마땅하다. 공동체의 맏형인 내가 쉬어야 했던 이유도 어쩌면 그 때문일지 모른다. 혼자라면 어려웠을 안식을 공동체는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런 선례를 통해 우리 공동체가 안식과 자기 돌봄 사역을 귀히 여기며 앞으로 더욱 성숙해지리라고 기대해 본다.

 

정동철
1971년생으로 울산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공부한 뒤 IVF(한국기독학생회) 캠퍼스간사로 14년 동안 섬겼다. 지금은 ‘디자인 잇다’ 대표로 일하면서, 몸된교회 전도사로 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