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와 문화 인류학의 자리! 여기인가? 저기인가?

〔독자서평〕 선교와 문화 인류학 / 폴 히버트 지음 / 김동화 외 옮김 / 죠이북스 펴냄

2018-08-22     이원영


성탄절이 되면 교회마다 교회학교 아이들의 성극을 쉽게 볼 수 있다. 성극은 마리아의 수태고지와 아기 예수의 탄생, 그리고 동방박사의 방문을 내용으로 한다. 그런데 극중에 난데없이 산타클로스가 뛰어 든다면 어떨까? 이것은 상상이 아닌 현실이다. 한국사회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안에서도 '성탄절'하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한 아기 예수보다 빨간 의상의 산타클로스와 선물꾸러미를 먼저 떠올리곤 한다.(《선교와 문화 인류학》의 1장에 기록된 내용이다.)

▲ 선교와 문화 인류학의 자리. 김동화, 이종도, 이현모, 정흥호 옮김.

폴 히버트는 《선교와 문화 인류학》을 통해 현대 선교 운동은 서구의 식민주의와 기술 문명이 확산되면서 시작되었고, 흔히 서구 선교사는 복음을 서구 문명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 왔다고 지적한다. 그와 더불어 복음에 대한 오해나 왜곡을 없애려면 선교사들에게 타문화와의 관계와 의사소통과 같은 전문 지식이 필요한 제3의 영역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선교사들에게 필요한 전문 지식이란 무엇일까? 첫 번째는 선교사 스스로가 가져야 할 신학적 입장이며, 두 번째는 선교사가 타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문화 인류학적 통찰력이라고 말한다.

개인적 평가인지 몰라도 저자는 문화 인류학적 접근보다 해석학적 문제에 더 공을 들이고 있다. 선교사가 복음을 전달하는 중간자적 입장에서 성서 해석의 작업에서 복음의 왜곡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선교사가 행해야 할 해석자의 위치란 무엇일까?

그동안 해석학은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할까란 문제에만 전착했다. 즉 텍스트의 문법적이고 문자적 해석과 함께 텍스트를 기록한 저자의 기록 목적과 당시의 상황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폴 히버트는 동일한 언어가 지닌 시대와 문화적 간격도 놓치지 않고 있다. 또 저자와 해석자, 텍스트가 쓰여질 당시의 독자와 지금 선교사에게 텍스트의 해석을 듣는 청자의 입장도 놓치지 않는다. 즉 메시지 본질은 동일하지만, 기록 당시의 상황과 오늘의 상황 사이의 차이를 좁히고 연결하는 몫이 선교사에게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교회에서 늘 설교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목회자의 입장에서 《선교와 문화 인류학》에서 말하고 있는 선교지는 멀리 떨어져 있는 타문화권이 아니라 한국교회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성서 텍스트가 기록된 시대와 동떨어진 한국교회에서는 설교자들에 의해 성서가 심히 오해되고 왜곡되고 있기 때문이다.

해석의 작업이 일어나는 층위는 복잡하다. 성서가 쓰인 시대적 배경, 성서를 기록한 저자의 상황, 성서에 기록된 단어의 다층적 의미를 충분히 해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늘날 청자에게 해석자의 무지와 욕망이 뒤섞여 전달되기 때문이다. 즉 복음을 전달하는 이의 자문화적 해석의 틀거리(세계관)에 따른 성서 해석이 청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기현상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선교지는 어디이며 문화 인류학적 해석은 어디에 적용되어야 할까?

한국교회는 메가처지의 가족 세습이 정당화되고, 하나님 나라보다 부정축재자의 이생복락도 모자란지 영생복락까지 보장하는 구원파적 이단 사상을 정통이란 구원론에 교묘히 버무리고 있다. 이는 한국사회에 대한 문화적, 종교적 몰이해와 성서가 말하는 구원사와 기독교적 신학 부재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감히 평가한다.

《선교와 문화 인류학》이란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 선교와 문화 인류학적 이해가 절실한 물리적 장소가 어디인가 묻고 싶다. 여기인가? 저기인가? 한국교회는 기독교에 대해서도 무지하고 한국이란 사회와 문화를 너무 무지하다. 그런 입장에서 선교와 문화 인류학이 실현되어야 할 자리는 저기가 아닌, 여기가 아닐까?

이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