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NPO 운동이 시사하는 3가지

[334호 커버스토리]

2018-08-27     김경수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과 문제를 접할 때마다 우리는 국가의 역할을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국가가 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되묻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기업 또한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도 묻게 된다. 우리는 이른바 정부 실패, 시장 실패를 수없이 경험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에 비영리 섹터는 정부와 시장 사이에서 정부나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사회적 요구에 부응해 왔으며 공동체의 가치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오늘날 비영리 단체는 우리 삶에서 그만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학교와 교회뿐 아니라 수많은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병원 등의 전통적 비영리 조직뿐 아니라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 새로운 성격의 조직까지 포함하여 이들을 제3섹터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국의 비영리 운동, 특히 기독 NPO 운동은 역사적으로 미국 NPO 운동으로부터 큰 수혜를 입었다. 근대화 과정을 거쳐 생겨난 비영리 조직들이 서구 기독교 선교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 선교사들이 선교 목적으로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을 설립한 경우가 많았고, 나아가 빈민을 구제하는 복지사업에도 기여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한국의 NPO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 미국 NPO 운동의 특징과 강점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비영리 분야에 몸담아 온 필자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서구, 특별히 미국의 비영리 분야를 배우고 경험하는 기회를 가진 바 있다. 이를 바탕 삼아 미국 NPO 운동에서 배울 점 세 가지를 정리하고, 한국 기독 NPO에 시사하는 점들을 나누고자 한다.  

공동체주의,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다  
미국의 NPO를 움직이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첫째, 공동체주의를 들 수 있다. 역사학자 다니엘 부어스틴(D. Boorstin)은 역사적으로 미국은 정부 이전에 공동체가 먼저 생겼다는 말로 미국 사회의 특징을 말한 바 있다. 프랑스 정치학자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감탄하며 제시한 미국의 정신이 바로 ‘공동체주의’였다. 토크빌은 미국인들이 어떻게 서로를 이용하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이웃을 배려하는지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면서 말했다. “시민들은 자기의 취향에 맞게 형성된 작은 사회로 물러나고 대규모 사회는 스스로 알아서 돌보도록 즐겁게 맡겨버린다.”(1835)

이는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가 조화롭게 흘러간다는 말이다. 최근 미국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M. Sandel)이나 정치학자인 로버트 퍼트넘(R. D. Putnam)은 양극화 문제 해결이나 민주주의 활성화를 토크빌의 공화주의 공동체이론에서 찾고 있다. 미국의 자발적인 시민사회를 객관적인 눈으로 분석한 토크빌의 관점은 미국 NPO 운동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 연구로 유명한 크리스천 학자인 퍼트넘 교수는 《나 홀로 볼링》(원제:Bowling Alone, 페이퍼로드)에서 미국의 사회적 자본이 감소하는 현상을 고찰하면서 미국의 비영리 영역에서 토크빌이 말한 공동체주의가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미국 NPO 운동은 과연 공동체주의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질문이 이어지고 있지만 공동체주의는 여전히 미국 NPO 운동의 특징이자 강점이라 할 수 있다. 왜 그런가?

미국 NPO들은 대부분 지역 공동체 가운데서 일한다. 교회는 말 그대로 지역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미국 워싱턴DC의 세이비어교회는 한국 복음주의 크리스천들에게 새로운 사회참여형 교회 모델로 주목받아 왔다. 세이비어교회를 굳이 교회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역 교회와 패러 처치가 공존하는 하이브리드형 교회로 볼 수 있다. 나아가 NPO의 관점에서 본다면, 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사회의 문제 해결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역 공동체 개발 NPO 역할을 맡고 있다. 세이비어교회는 소규모 공동체 교회 10여 개가 네트워크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소규모 공동체 교회는 지역 공동체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비영리 단체들(NPOs)을 운영해왔다. 지난 50여 년간 세이비어교회는 워싱턴DC의 컬럼비아 하이츠라는 지역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센터 역할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교회가 지역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사회적 자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공동체주의가 깔려 있다.

“교회는 국가의 주인이나 종이 아니라, 국가의 양심이다”라고,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지역 공동체에서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설교를 통해 명료하게 말한 바 있다. NPO 역시 그 단체가 속한 공동체의 양심과 같은 존재이다. 이는 NPO들이 도덕적 영적 권위를 잃어버리면 공동체나 국가도 희망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나 기독 NPO들이 한국 사회의 공공성 위기를 극복하는 길을 미국 NPO의 공동체주의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한다. 

최근 미국의 NPO 운동은 인터넷의 발전에 힘입어서 지역 공동체를 넘어서 세계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모델들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NPO 스타트업들은 SNS를 기반으로 세계 공동체를 위한 사업을 펼치고 있는데, 전통적인 공동체주의가 글로벌 공동체주의로 확장되는 모양새이다. 예를 들어 키바(Kiva)라는 단체는 마이크로 파이낸스 형태의 대출을 통해 미국에 있는 기부자와 돈을 도움이 필요한 제3세계의 소규모 사업과 현지인들에게 SNS를 활용하여 연결하고 중개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 가운데서도 우리는 공동체주의를 발견할 수 있다. 공간적인 제약을 넘어 세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제 역할을 감당하고자 하는 세계시민의식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공동체주의 관점에서 미국 NPO 운동은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공익을 위한 공적 존재로서 지역 공동체뿐 아니라 세계 공동체에서도 그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공동체주의는 미국 NPO 운동의 철학적 기초이자 정신적 힘이다.         

자원봉사, 공동체를 결속하다
미국 비영리 운동을 움직이는 힘으로 둘째, 자발성 즉 자원봉사(Volunteering)를 들 수 있다. 자원봉사는 기부 문화와 함께 미국 비영리 운동의 주도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미국 사회의 자원봉사 참여율은 25.4%인 반면(2013), 한국은 12.8% 정도에 그친다(2013, 통계청). 미국인들은 이웃이 곤란에 처할 때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자원봉사란 “타인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보상 없이 내주는 일체의 행위를 의미하거나 사회 또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을 자발적으로 무상으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Wilson) 자원봉사는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이익을 초월하여 행동하는 힘이고, 누군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발적 결단력을 의미한다. 자원봉사의 정신은 무엇보다 자발성, 무보수성, 공익성에 있으며, 이에 더해 이타성, 조직성, 지속성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공동체주의와 자원봉사는 불가분의 관계일 수밖에 없다. 이는 공동체의 문제 해결을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임을 만들어 공동의 노력을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미국 사회의 자원봉사는 국가 정체성을 드러내는 자발적 결사체 역할을 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민과 독립전쟁의 역사 속에서 미국인들의 생존은 상부상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혼돈의 시대인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미국에는 NPO들이 많이 생겨났으며 이 단체들의 자원봉사 활동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미국은 국가 정체성을 드러내는 자발적 모임들을 통해 오랜 기간에 걸쳐서 자원봉사 시스템을 갖추어 왔고, 세세한 사항까지 관리해 오고 있다. 미국 자원봉사의 또 다른 강점은 조직화된 지원체계에 있다. 미국은 1993년 설립된 연방정부 기관인 CNCS(The Corporation for National and Community Service, 국가와 공동체 봉사를 위한 협회)를 통해 자원봉사를 활성화해 왔다. CNCS는 미국 최대의 자원봉사 지원단체로 비영리 영역을 강화하고 국가가 직면한 각종 도전에 대응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9·11 테러와 허리케인 카트리나 참사의 충격을 이겨낸 힘이 바로 자원봉사에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리하자면, 미국 NPO 운동에서 나타나는 자원봉사는 공동체를 결속하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국가 정체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발성을 통한 자원봉사는 사람들간의 신뢰와 유대, 네트워크를 만들어 사회적 자본의 형태로 사회 공동체를 세워 나가는 데 기여한다.

특히, 미국의 기독교 자원봉사는 ‘패러 처치 기독교’ 또는 ‘패러 처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독특하면서도 자발성이 강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지역 교회가 담당하기 어려운 특수한 분야 사역이나 해외선교를 패러 처치(para-church, 교회동역단체)가 감당해 왔는데, 패러 처치는 특별히 복음주의 기독교 안에서 두드러지는 운동으로 한국에서도 복음주의 선교단체들이 이 전통을 이어받아 비영리 운동의 한 축을 감당하고 있다.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 자원봉사의 대표적인 예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학생자발운동(SVM, Student Volunteer Movement)이다. 이 운동으로 세계선교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학생들의 숫자가 20,500명이었다는 점보다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 운동의 결과로 수많은 학생·해외선교단체들이 탄생했고 선교 대중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선교단체 상당수가 SVM을 통해 전 세계로 확장되거나 새로 생겨났다. SVM이 한국의 근현대 NPO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 선교사들과 단체들이 우리나라를 포함한 제3세계에 미국식 기독 NPO들을 이식했다는 사실이다. SVM을 이끌었던 리더 중 한 명이었던 존 모트는 그의 책에서 학생자발운동을 통한 세계선교에 필요한 세 가지를 이야기했다. 그는 기도(prayer power), 사람(people power), 재정(money power)의 세 가지 파워가 이 세대에 세계복음화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하다고 소개하면서 이러한 자원들이 자발성에 의해 동원될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필란트로피, 조직적 공익 행동으로 나아가다
미국 비영리 운동을 움직이는 세 번째 힘은 필란트로피(Philanthropy)로, 우리말로는 기부 문화로 번역할 수 있다. 자원봉사와 더불어 미국 NPO 운동의 힘은 바로 이 필란트로피에서 나오는데,  필란트로피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자발적이고 조직적인 행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 성경이나 고전에서 자선(charity)의 윤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자선의 다른 면이 필란트로피이다. 자선이 개인적인 차원이라면 필란트로피는 조직적인 차원의 행위이며, 자선이 대증적 요법이라면 필란트로피는 문제의 근본을 치유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자선이 구제(relief)에 머무는 데 비해 필란트로피는 개발(development)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필란트로피는 미국의 자본주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과잉 자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도화·조직화된 필란트로피가 미국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북유럽의 복지모델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대표적인 예가 재단(Foundation)의 존재이다. 카네기, 록펠러 등 막대한 부를 획득한 기업인들이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하면서 기부 문화가 사회 전반에 정착되는 데 일조했다. 그들의 재원이 장학재단을 비롯하여 대학 및 공공도서관, 박물관을 건립하는 데 쓰였으며, 이로 인해 혜택을 누린 많은 사람들이 또다시 기부 활동에 참여하면서 필란트로피가 크게 확산될 수 있었다.

한편, 부유층에 의해 조성된 재단들은 항상 계급사회의 지속성 내에서 존재해 왔다. 기부의 시혜자인 부유층은 필란트로피라는 조직적 자선 행동을 통해 빈곤을 부분적으로 완화함으로써 빈곤층의 저항과 도전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빈곤층의 위협으로부터 부유층은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재단의 돈은 부유층이 거둔 부정한 이익의 재투자일 뿐이기에 공적인 영역에서 이들이 행하는 역할로 인해서 민주주의가 뿌리째 위협받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재단은 문화적 제국주의를 조장하는 기관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기업이나 부유한 개인이 부를 출연하여 만든 사적 재단의 한계와 문제점을 인식한 결과 등장한 것이 바로 독립재단(public-independent foundation)들이다. 대표적인 예가 지역공동체재단(community foundation)으로, 작지만 뜻 있는 소규모 기금을 모아서 운영하는 재단 형태로 대도시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여기에 모인 기금들은 지역 사회 곳곳의 필요에 사용된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변호사 시절 이 모델을 한국에 도입하여 만든 재단이  바로 ‘아름다운재단’(The Beautiful Foundation, 2000년)이다. 
        
미국에서는 여전히 빌 게이츠나 마크 저커버그 같은 갑부들이 재단을 통해 막대한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이야기가 일상적인 뉴스로 나오지만, 실상 이 같은 대규모 기부보다 더 미국의 기부 문화를 특징짓는 것은 바로 어린이와 저소득층까지 확산되어 있는 개인들의 높은 기부 참여이다. 실제 미국 사회의 개인 기부액은 전체 기부액의 약 75%를 차지한다. 이렇듯 미국 필란트로피의 가장 큰 특징은 정부나 기업이 아닌 풀뿌리 차원의 기부 참여이며, 다양한 독립재단들이 투명하게 운영됨으로써 기부 문화가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필란트로피가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기부 문화는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 변해왔지만 신라시대부터 존재했던 계나 두레, 품앗이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협동조직인 계는 돈이나 곡식을 얼마씩 거두어 필요한 사람이 우선 이용하게 하는 형태로 상부상조와 공동이익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계에 마을 공동체의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마을 전체가 곧 하나의 계와 같았다는 것이다. 사실 토크빌이 관찰한 미국인들의 공동체주의와는 조금 다르겠지만, 우리 사회에도 공동체 연대의식이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비영리 운동 역시 이러한 자생적인 나눔과 협동이라는 기부 문화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근대화와 더불어 19세기 후반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서구의 조직적인 비영리 운동의 이식은 전통적인 기부 문화와 결합하여 우리의 사회적 자본을 형성했다. 개인적으로 볼 때, 1999년은 한국의 필란트로피 역사에서 전환점을 이룬 해이다. 기업이나 정부에 의한 재단 설립이 아닌 소위 독립재단들이 출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환경재단, 여성재단,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등). 기독교 내에서는 개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한 사적 재단들이 존재해 왔지만, 공익을 위한 재단을 찾아보기 힘든 점은 아쉬운 일이다.

한국 기독 NPO와 공공성 회복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에서 공공성 위기가 현실이 되었음을 보여준 사건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성장지상주의, 성과와 경쟁 등을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공공성의 가치는 우선순위를 갖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공공성은 개인의 삶과는 무관한  국가적인 것, 국가의 것으로만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는 공공성이 무너질 때 개인의 삶이 어떻게 부서지는지 전 국민에게 처절하게 각인해주었다.

한국교회 역시 사회적 공신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최근 복음주의 안에서도 공공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으나 공공성이 무엇이고 공공성의 주체는 누구인지 명확하게 정리되지는 않은 듯하다. 이는 공공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추상적인 탓도 있지만, 한국교회에 공공성이라는 단어가 그리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는 대체로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러 있었다. 이제부터라도 공공성을 회복하고 공익적 참여를 위해 애써야 한다. 우리가 미국의 NPO 운동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점은 교회를 포함한 비영리 조직을 통해 공익적인 다양한 공공재 서비스를 생산하고 제공하는 일을 시작해야 하며, 사회의 일원으로서 이를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좀 더 욕심을 내자면, 우리만의 고유한 NPO 모델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 NPO들은 기독교가 한국에 전파되면서 이식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고유하면서도 전통적인 정신을 담아내는 NPO들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아쉬움이 있다. 최근 마을 중심의 교회 개척 혹은 하이브리드형 목회를 추구하는 교회 운동들이 이러한 한국형 기독 NPO 모델로 떠오르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실제로 많은 비영리 단체가 하이드리드 조직으로 발전·변화하고 있다(Hustinx). 그러한 예로서, 교회를 개척하면서 비영리 단체를 함께 병행하거나,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형태를 병행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서 잃어버린 기독교의 공공성을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다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또한 기부 활동을 개인적 자선의 차원에서 필란트로피 차원으로 바꾸어야 한다. 한국의 기부는 여전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기부자의 열정을 표현하는 수준에 머무는 정도이다. 2011년 개인 기부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이 기부에 참여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는 ‘동정심’이었다. 그 뒤를 이어 사회적 책임, 개인적 행복감, 종교적 신념 등이 동기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부 동기가 아직은 사적 소비 모델(private consumption model)에 더 가깝다고 해석할 수 있다. 자선도 필요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기부 문화를 통해 공공재 모델(public goods model), 즉 개인의 기부 행위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을 위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는 모델을 정착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기부 문화는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교육하고 실천하는 일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미국 NPO 운동을 움직이는 세 가지 힘을 살펴보고 한국 기독 NPO에 주는 시사점들을 찾아보았다. 공동체주의, 자원봉사, 필란트로피는 미국 사회와 미국의 비영리 영역을 독특하게 만들어 온 주도적인 특징이다. 사실 이 세 가지는 모두 성경의 저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되풀이하는 내용들이다. 자발성에 기초한 헌신과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에 잘 나타나 있고, 초대교회에서 엿볼 수 있는 공동체주의는 자원봉사와 항상 맞닿아 있다. 공적 사역을 위한 필란트로피 역시 신구약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세 가지 힘을 통해 자유롭게 예배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돌보고, 효과적인 자원봉사와 담대한 선교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복음주의 기독 NPO들이 이 세 가지 특성을 살려서 기독 NPO 운동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펼쳐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김경수
NPO 운동 빌더이자 컨설턴트.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이스턴 대학교에서 NPO 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쳤고, 워싱턴DC의 웨슬리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워싱턴 디아스포라교회를 개척했으며, 현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코리안디아스포라 리더십센터(KDLC) 이사로도 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