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가족은 ‘안전’하십니까?

[335호 믿는 '페미'들의 직설]

2018-09-20     폴짝
   
▲ Created by Donna Bamard / CC BY-SA 2.0

가부장제 가족 안에서 자란 나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이후, 내가 바라보던 세상은 완전히 뒤집혔고, 나는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획득했다. 그 과정에서 전공이나 취향, 의사소통 습관 등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구조와 정책 같은 거시적인 부분까지 새롭게 정의하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변화했고, 때로는 겹겹이 눌러 붙은 다양한 층위의 욕망을 분리해 내느라 한없이 느리고 답답했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괴롭히고, 답답하게 만든 것 중 하나는 바로 ‘가족’이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모부(母父)가 만들어 놓은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살아왔다. 2녀 1남의 ‘큰딸’로 태어나, 모부의 양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 울타리 안에서 교육을 받았고, 입고 마시며 성장했다. 그러니까 나는 자라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것을 가족, 그중에서도 모부로부터 제공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적인 돌봄과 지지와 지원과는 별개로, 가족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충실하게,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형성되어 유지되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것과 그 가족이 가부장제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 이 두 가지를 통합하여 인정하고 해석하는 일은 어려웠다. 내가 그토록 깨부수고 싶은 가부장제의 그늘 아래서 나는 자랐고, 여전히 그 구조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족 관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차별을 마주할 때면 숨이 막히고 화가 났다. 가족은 화목했지만 그 안에는 위계와 질서라고 불리는 차별이 엄연히 있었고, 이를 인정하는 것이 때로는 스스로에 대한 부정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페미니스트가 되면서 ‘당연하다고 여기던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겠다’고 다짐한 나는 우리 가족의 모습을 새롭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집안일을 하는 것이 가부장제를 공고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과 검열은 내려놓고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을 하나씩 바꿔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결심을 하고서 내가 가족들에게 가장 먼저 한 이야기는 ‘집안일을 평등하게 나누자’가 아니라 ‘자기가 먹은 밥그릇은 각자 싱크대에 가져다 놓자’ ‘가장 마지막에 밥을 다 먹은 사람이 식탁을 정리하자’였다. 처음부터 거창하고 위대한 변화를 가지고 올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걸음마도 못 뗀 이에게 달리기를 시킬 순 없었다. 시작은 가장 기본적인 생활습관을 바꾸는 걸 목표로 했다. 이러한 시도들은 아주 작은 일조차도 모두 ‘여성’에게 떠넘기고, 그 돌봄에 기생하는, 내가 그토록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가족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예상 못한’ 엄마의 반응
평생을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밥 잘 먹고 살았던 아빠의 저항은 예상했었다. 아빠는 자기가 ‘왜 그런 것까지 해야 하냐’며 밥그릇을 치우지 않고 자리를 떴다. 때로는 자신은 일도 하고 정신적 노동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집안일을 하지 않는 것이 정당하다고도 주장했다. (우리 집은 모부가 맞벌이를 한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계속해서 아빠를 밀어붙일 각오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후후, 그럴 줄 알았지’ 하며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아뿔싸, 내가 예상 못했던 건 엄마의 반응이었다. ‘얼씨구, 지화자’하며 반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빗나갔다. 내가 아빠에게 “아빠, 밥그릇 치워야지” “아빠가 다 먹고 식탁 좀 정리해줘” 등의 요구를 할 때면 엄마는 “내가 다 민망해. 아빠한테 그러지 좀 마. 내가 하면 되는데 왜 아빠까지 힘들게 해”라며 시종일관 나를 나무랐다. (물론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총대를 메고 아빠와 가족 구조를 변화시키면 그 누구보다도 엄마에게 우선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엄마와 가장 많이 부딪힌다는 것이 이상했다. 엄마는 내가 가족들에게 집안일을 나누어 하자고 말하는 것과 더불어 ‘노브라’로 외출하는 것, 연상인 애인을 오빠가 아니라 ‘너’라고 부르는 것들까지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답답한 마음에 엄마와 대화해 보니 엄마는 아빠를 향한 내 행동이 자기 삶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엄마는 딸인 내가 결혼을 하지 않겠다거나, 우리 집이 평등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면 ‘내가 삶을 잘못 살았나, 내가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 딸이 저런 생각을 하나’ 싶어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주구장창 ‘가부장제는 실패했다’ 선포하던 나와 달리 엄마에겐 그것이 삶이었다. 가부장제는 세대를 넘어 전승되면서 험상궂은 파괴자의 얼굴이 아니라 순하고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남자들이 여성의 희생을 대놓고 강요하지 않아도 여성이 여성에게 가부장제를 전수하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세대 간 전승을 끊기 위해서는 엄마에게 먼저 변화의 필요성을 납득시키기로 했다. 엄마에게 “기혼 유자녀 20대 여성의 행복지수가 가장 낮다고 하더라. 엄마는 20대에 삼남매를 키웠으니 이제는 식구들 밥걱정 없이 편하고 즐겁게 지냈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어디선가 전해들은 ‘가전제품이 잘 나와서 집안일이 쉬운 거라면 정말로 자동으로 밥이 되는지 보자며 밥솥 취사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는 에피소드를 엄마에게 들려주기도 한다. 여전히 엄마는 딸에게 집안일을 쉽게 부탁하고 기대하지만 아들과 남편에게는 그러지 못한다. 그래도 나는 엄마가 집안일을 당신의 본업으로 여기지 않도록, 엄마가 가족들을 돌보는 일에서 행복을 느껴서 기꺼이 그렇게 한다면 그건 호의로 하는 것이지 식구들이 그것을 누리는 게 당연한 것은 아님을 알기를 바라며 엄마와의 유쾌한 연대를 기대하고 있다.

아빠·남동생에게 시도하는 끊임없는 대화와 충돌
그렇다면 아빠나 남동생에게는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까? 나는 전략이랄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불편함을 만들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은 이사 후 새로 방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막내 남동생과 나 사이의 대화 내용이다.

남동생: 가위바위보 해서 지는 사람은 남자답게 결과에 승복하는 거야. 다른 말하기 없기.

나: 아니 잠깐. 여기에 왜 ‘남자답게’를 붙여야 해. 나랑 얘(둘째 여동생)는 남자가 아니잖아. 가위바위보해서 지면 남자답게 말고 ‘인간답게’ 결과에 승복하는 거야.

이 대화 후 우리는 가위바위보를 했다. 남동생이 이 짧은 대화로 어떤 생각을 했을진 모르지만 적어도 하나는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이런 걸 신경 쓰고 예민하게 구는 사람도 있군.’ 그리고 아빠와는 본격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고, 많이 싸운다.

아빠: 폴짝아. 아빠는 딸 가진 부모지만…, 너희가 사회에서 존재감이 있으면 좋겠다. 사회에서 각자의 자리가 있으면 좋겠어. 가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회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역할을 하면 좋겠어. (아이러니한 것은 아빠는 아이들이 어릴 땐 엄마가 집에 있으면 좋겠다면서 엄마의 구직 활동을 막았다. 엄마는 모든 자녀를 데리고 아빠가 운영하는 가게를 지키거나 간혹 부업만 했다. 엄마가 일을 시작한 건 가계 사정이 어려워지면서였다.)

나 : 그래? 그러려면 아빠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해.

아빠 : 뭐? 페미니스트? 아빠는 ‘–이즘’은 다 싫어. … 사회를 따뜻하게 바라보고 사랑해야지.

나 : 아빠, 50대 기혼남성의 사회와 40대 기혼여성의 사회, 그리고 20대 비혼여성의 사회는 다 다를걸. 다 덮어놓고 사회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개인의 경험을 너무 납작하게 만드는 거 아니야? ….

아빠 : 그렇긴 하지.

나는 끊임없이 대화와 충돌을 시도하고 있고, 대부분의 경우 아빠와 동생은 대화를 피한다. 하지만 위의 짧은 대화로도 알 수 있듯이 ‘집안일은 남의 일’로 여기는 우리 아빠도 안다. 여성들이 사회에서 얼마나 쉽게 지워지고 잊혔는지를. 여성들이 주체적인 개인으로 여겨지기보단 얼마나 쉽게 도구로 여겨졌는지를. 자신의 엄마와 누나들이, 공부를 잘 하던 이성 친구들이, 젊은 나이에 자신과 결혼한 아내가 사회에서 자리를 잃어가는 걸 지켜봤기 때문이다. 아직 아빠는 왜 ‘아빠의 바람’이 이루어지려면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 못한 것 같지만 적어도 큰딸이 ‘성차별’을 불편해한다는 사실은 인지했다. 그리고 자기 나름으로 노력한다. 이젠 적어도 내가 있을 때는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치우고, 식탁을 정리하는 기본 소양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변화의 속도는 더디고, 지칠 때가 많아서 나는 자주 ‘내 원가족의 변화는 여기까지 일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한다. 다 바꿔 버리겠다던 1년 반 전의 나는 이제 변화에는 그들 몫의 노력이 필요함을 인정하고 책임을 내려놓고 있다. (아직 분노는 내려놓지 못했다.) 그럼에도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고 바란다. 우리 가족이 아빠와 남동생에게만 편하게 쉴 수 있는 휴식과 안식처가 아니라 나와 엄마, 여동생에게도 성차별로부터 안전하고 편안한 안식처가 되기를.
 


폴짝(필명)
대학에서 사회복지와 아동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는 여성 복지를 공부하고 있다. 전공보다 ‘캠퍼스와 세상속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더 열심히 했지만 캠퍼스에서도 세상 속에서도 성평등 없이는 하나님 나라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주 괴롭고, 많이 외롭던 시간에 믿는페미를 만났고, 현재는 믿는페미 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