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감 찾는 게 뭐가 문제냐고요?

[337호 믿는 '페미'들의 직설]

2018-11-28     달밤

서울의 모 신학대학원 여학생회가 믿는페미 활동가인 도라희년을 학술제에 초청했다기에 기쁜 마음으로 동행했다. 신학생 대상 강의는 처음이라 긴장한 티가 역력했지만 희년은 그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강연을 잘 해냈다. 배정한 시간에 딱 맞게 발표하고 질의응답으로 넘어가는데, 손을 번쩍번쩍 들며 용감하게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거반 남성인 풍경에 새삼스레 웃음이 났다. 그래도 무려 페미니즘 강연에 남성들이 많이 왔으니 희망적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한 사람이 이렇게 질문했다. “그동안 주로 남자가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이제는 여자 목사도 늘어나고 있다. 남성 목사가 반려자를 찾을 때 사모의 조건을 따지듯이 여성도 목사가 되면 사부의 조건을 따지게 되지 않겠는가?” 똑같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이해한 요지를 간추리자면 이렇다. 강의 중에 남성 신학생과 목회자들의 습성을 꼬집으며 배우자 기도를 한답시고 사모감의 조건을 따지는 경향을 비판했던 터였다. 질문자는 이 내용에 항변하듯 반문한 것이겠다. ‘목회자가 사모감을 찾는 게 뭐가 문제지?’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나는 인지상정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마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인지상정에 대한 예문으로 이런 문장이 있다. ‘마음이 불안하면 누구에겐가 의지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목회는 어렵다. 신학교에 입학하고 교회에서 신학생, 그리고 전도사로 사역한다고 해서 갑자기 하나님과 특별한 교감이 일어나는 게 아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크게 다르지 않고, 신학을 배우기 전과 후가 엄청나게 달라지는 게 아닌데도 ‘전도사’의 자리에 서고 나면 전문적인 ‘영적 리더’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만 같다.

교인들은 목회자를 기다려주지 못한다. 전도사나 목사에게 허점이 보이면 유명하고 유능한 다른 목사들과 비교하거나 아쉬워한다. 전도사가 되어 전도사로서 완성되거나 목사가 되어 목사로서 성숙해가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시간과 경험이 필요한데도, 교인들은 목회자를 완성된 존재로 기대하는 것만 같다. 내 안에 있는 삐뚤어진 마음과 상처들은 또 어떤가. 교회에서 진행하는 내적치유 프로그램이나 묵상기도, 신앙적 경험이 나를 자라게 돕지만, 실은 정신 건강을 위한 체계적인 상담이나 자기 분석을 거치지 않은 채 오래된 편견과 분노를 품고 목회 현장으로 나가는 일이 보통이다. 여러 경로로 스킬을 쌓고 신학적으로 무장했을지 모르지만, 현장이란 실전의 세계, 많은 순간이 위태롭고 두렵다. 바로 그럴 때, 그렇게 위태로울 때 하나님 다음으로 가장 절실해지는 요소가 무엇일까? 바로 동역자다.  

내가 W씨와 연애할 시기에, 그는 목사 안수를 앞두고 있었다. 수련목 생활을 마치고 경기도 어느 개척교회 담임 목회자로 가는 걸 보면서 옛날 고등부 때 전도사님이 저 멀리 지역으로 담임목회를 하러 떠나며 급하게 결혼을 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W씨가 간 교회에는 어른이 없고 청소년 아이들이 몇 명 있었다. 빌라 건물 지하에 있는 교회 공간 안에 방이 하나 있어서, 싱크대도 놓고 샤워기도 설치한 뒤 잠을 자며 산다고 했다. 보일러는 없고 전기판넬로 방을 데우는 방식이라기에 그러면 샤워할 때 온수가 나오느냐 물었더니 물을 끓여 찬물과 섞어서 씻는다고 했다. 나는 너무 기가 막혀서, 대학원 학비로 쓰려고 모으던 돈을 조금 헐어 온수기를 선물했다. 하나님이 목회자의 목욕물을 직접 데워주시지는 않으니까, 싶어서.

결혼하고는 W씨가 시무하는 교회로 옮겼다. 원래 전도사로 사역하러 갔다가 교회가 너무 좋아 평신도로 눌러앉았던 내 교회를, 결혼 때문에 떠나는 게 탐탁치는 않았다. 하지만 담임목사님 권면도 있고, 내 마음 한구석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혼자 목회하며 고군분투하는데 그 곁을 지켜주어야겠다는 결심이 컸다.

나는 반주도 할 줄 모르고, 교회를 예쁘게 꾸밀 줄도 모르고, 심지어 요리도 할 줄 몰라서 처음엔 그냥 교회 청소를 열심히 했다. 쪽문 하나뿐이라 환기도 제대로 안 되는 교회 공간에서 바닥을 닦겠다고 락스를 풀어 쓰는 바람에 다음날 속이 울렁거려 고생하기도 하고, 타일을 바르지 않아 시멘트 결이 거칠고 배수도 잘 안 되는 주방 겸 샤워실을 청소하겠다고 신나게 비질을 해대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W씨는, 정말이지 무척이나 좋아했다. 막막한 개척 목회를 혼자서 해 나가는 중이었는데, 내가 나타나 팔을 걷어붙이고 여기저기 쓸고 닦으니 어떻게 좋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대림절을 어떻게 보낼까 의논하며, 청소년들에게 대림절과 성탄절의 의미를 잘 전하기 위해서 어떤 교육적인 장치를 마련할까, 4주간 이어지는 프로그램으로 어떤 상승 작용을 만들 수 있을까, 새벽송을 돌려면 어느 집을 가야 할까 함께 머리를 맞댔다. 교회 근처 공원에 나가서 솔방울과 마른 가지를 주워 모으면서 ‘아, 재미있다!’ 생각하던 기억이 난다. 무척 재미있었다. 목회는 나와 연이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였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동역자가 되어 사역을 도우면서 꽤 많은 순간 행복했다.

아마도, 남성 목회자와 결혼한 많은 여성이 경험하게 되는 일이 아닐까 싶다. 교회 규모와 목회 성격에 따라, 각각의 은사와 관계적 맥락에 따라 양상이 다르겠지만 배우자의 목회에 초연할 수 없고 작더라도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 역할 수행은, 구조적인 원인뿐 아니라 내적인 요인, 자발성에도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하필, 사랑하는 사람이 목회자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 쉽지 않은 사역을 해 나가는 배우자를 응원하며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극히 인지상정이지 않은가. 목회자 입장에서도 급할 때 가장 먼저 찾게 되고 일상에서 쉽게 의지하는 상대가 배우자일 테고.

문제는 이 사랑과 호의가, 우정과 지지의 동역이 악용된다는 데 있다.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안다고, 도와줘서 고맙고 함께해줘서 기뻤던 응원과 지지가 어느새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린다. 내가 피아노를 연주할 줄 아는데 예배 때 반주자가 없다면 흔쾌히 피아노석에 앉을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가 자원하고 선택하는 것이지, 배우자를 목회자로 두었을 때 따라오는 당연한 의무가 아니다. 내가 한 교회의 목회자로서 사역하고 있지 않는 한, 배우자와 같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내게 맞는 다른 일을 찾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부부로서 신앙생활을 함께하고 싶다는 선택이고 자발적 헌신일 뿐, 당연하게 여기면서 내조와 순종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호의는 내가 원하지 않을 때 자유롭게 중단할 수 있어야 하고, 수고로움에 대해 고마움으로 보답받지 못할지언정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며 비난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많은 여성이, 사랑하는 사람을 돕고 싶다는 마음과 가부장 사회 속 역할 수행의 요구 가운데 각자 분열적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사모감을 찾는 것은 잘못됐다
작년(2017년) 가을, 믿는페미는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있어?!”라는 주제로 백일장대회를 열었다. 접수받은 원고 중에 모 신학대학교 게시판에 올라왔다는 ‘사모감 공개구인 글’ 미러링이 있었다. 게시판에 올라왔던 원본 글을 인용하자면 내용이 대강 이러하다.

“사모감을 찾고 있습니다. 신앙 좋고 건강하고 내조를 잘 할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저에게 장애와 방해가 될 수 있기에 되도록 순종적인 성품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면 좋겠습니다. …재정적인 부분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모는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목사의 수행원입니다. 사모는 목사 남편을 돕는 사명을 띠고 출생한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어떤 직임을 맡지 않고 보이지 않게 뒤에서 돕는 것이 중요하고 목사의 영역을 침범하기보단 나서지 않고 목사의 영적 안정을 위해 격려와 응원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다만, 피아노 반주에 은사를 가지고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네요). 물론 아주 잘못한 것에 대해 조언을 해줄 수 있겠지만 목사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일하는 사람이기에 그럴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사모는 복 있는 여자, 복 받는 여자입니다. 사모로 부르심을 받았거나 사명감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기도하신 후 연락주시길 바랍니다.”

굉장히 노골적이고 저열한 글이지만, 표현의 정도나 뻔뻔함 정도가 다를 뿐 사모감의 조건을 따지며 ‘배우자 기도’를 하는 문화와 별로 다르지 않다. 사모는 목사 남편을 돕는 사명을 띠고 태어난 자로서 순종적인 성품으로 배우자를 내조해야 한다고 한다. 목사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일하는 사람이므로 잘못을 할 경우도 거의 없다고? 심각하게 왜곡된 인식이다. 누구나 각자에게 주어진 자아를 실현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간다. 본인이 목회자로 부름 받았다면, 배우자 또한 고유하게 부름 받은 길이 있다. (순종적으로 남편을 내조하는)사모는 직분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여성 신학생은 목사가 되는 미래를 그리기 힘들다. 여성을 독립된 사역자가 아니라 남성을 돕는 보조적인 존재, 결혼을 통해 인정받을 수 있는 부차적 존재로 취급하는 교회 문화 속에서 신학생들은 주체적으로 목회 활동을 이어가는 여성 목회자와 접점을 갖기가 어렵다. 사역자가 아니라 사모감으로 재단되고, 또 실제로 여성 목사 안수의 길이 치명적으로 좁은 요인들은 여성들을 스스로 위축되게 한다. 내 길과 비전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동역하는 게 아니라, 여성이기에 독자적인 목회보다는 남성을 돕고 내조하는 일이 마땅한 제한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여성은 ‘사모감’이라는 서사를 이렇게 경험한다. 나 자신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험. 이 와중에 내조를 받고 순종을 받는(!) 자신의 위치성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 목사의 ‘사모감을 찾는 게 무엇이 잘못되었나, 인지상정 아닌가?’ 하는 의문은 잘못됐다.

목회자의 배우자 역할이 현실에서 성별에 따라 다르게 기대되고 수행된다는 점도 중요하다. 앞선 질문을 받은 도라희년의 대답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목사 배우자가 여성일 때는 사모라고 부르지만 남성일 때는 사부라고 부르지 않고 권사님 혹은 장로님이라고 부르더라고요. 또 그 사부를 보면 교회에서 김장을 하는데도 와서 돕지를 않아요. 자모실(!)에서 아이를 보지도 않고요. 오직 사모만이 그런 일들을 합니다.”

목회자-배우자의 관계 설정이 목회할 때는 곧 배우자의 내조를 필요로 하는 원리라면 여성이 목회자일 때 남성이 당연히 내조해야 하건만, 많은 경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가부장적인 성별 분업을 당연하게 여기는 기제가 함께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사님이 오시면 혼자 오지만, 남자 목사님을 모시면 사모님이랑 둘이 오시잖아요.” 이런 ‘1+1 서비스’를 선호하는 말을 면전에서 들었다던 선배 목회자의 이야기는 교회 안에서 여성이 어떻게 취급되고 역할 수행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어떤 목회 모델을 꿈꿀 수 있을까. 목회자를 ‘1+1’으로 보지 않는 모델, 목회자 부부가 각자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모델, 목회자의 배우자가 동역자로 함께 사역을 돕는다면 충분히 고마워하거나 낯설어하는 모델을 꿈꿀 수 있을까. 나에게 익숙한 인지상정을 거부하면서.


달밤(필명)
크리스천페미니즘운동 ‘믿는페미’ 활동가.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기독교 단체에서 일했다. 활동가 동료들과 결성한 여성주의 연구살롱 ‘나비’를 통해 페미니즘을 가깝게 접하고 운동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현재 감리교 여성지도력개발원에서 상임연구원으로 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