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중단’에 대한 ‘프레임’에 관하여

[339호 믿는 '페미'들의 직설]

2019-01-30     달밤
   
▲ 다큐 영화 <섹스, 설교 그리고 정치>(2016)의 한 장면

2018년 1월, 믿는페미 팟캐스트 〈교회를 부탁해〉 정규 방송을 시작하며 첫 주제를 ‘혼전순결과 섹스’로 잡았다. 시간 제한 없이 이야기해도 될 만큼 교회 다니는 페미니스트에게는 할 말 많은 주제인지라, 기대만큼 사연도 많이 들어왔다. 그중에 이런 사연이 있었다.

“저희 교회에 혼전임신으로 결혼을 하게 된 갓 스물 되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성만 죄인으로 치부되더군요. 아이의 아빠는 ‘책임감이 있다’ ‘열심히 산다’ 등의 여론이 많았습니다만, 여성은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말부터 ‘애 엄마는 이래야 해’ 하는 갖가지 규정들이 시선으로 표현되어 아기를 낳지 않은 저조차 따가운 눈초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결혼 전에 섹스를 하면 안 되고, 하면 죄인이고. 그 과정 속에서 여성의 깨끗함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 저희 교회가 보수적이라서 유독 그런 걸까요?” (사연자 ‘으컁컁캬컁’ 님)

‘혼전순결’에 대한 교회 내 젠더 차별
갓 스물이 되는 청년, 이 사연을 받아 방송할 때가 1월이니 아마도 그 커플은 10대에 섹스를 하고 임신 사실을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사회가 금기시하는 ‘청소년의 성관계’에다가 ‘혼전 성관계’이고, 당사자들이 임신과 출산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피임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부족했을 수 있고, 콘돔을 사기 어렵다든가 하는 이유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피임 도구에 대한 접근성 자체가 낮았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 갖가지 안전 장치에도 불구하고 피임에 실패했을 수 있다. 100% 피임이란 없기 때문이다.

임신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월경을 규칙적으로 하는 사람의 경우 주기가 되어도 피가 비치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과로나 스트레스 등 컨디션이 극도로 나빠지지 않았다면 규칙적인 월경 주기가 불안정해지는 일은 일상적이지 않다.

가장 먼저 임신 테스트기를 샀겠지. 약국에서 5천 원에 살 수 있다. 누가 봐도 결혼했을 것 같지 않은, 어리거나 젊은 여성이 약국에서 임신진단기를 주문하려면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했을까. 부러 심부름을 하는 듯 연기할 수도 없고, 얼마 전 섹스했다는 사실을 생판 모르는 약사가 알게 만드는 이상한 대사, “임신테스트기 주세요.” (이 글을 쓰며 검색해보니 인터넷으로 구매할 수 있다. 택배로 배송 받는 과정에서 사생활이 보호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이 방법을 이용해도 좋겠다.)

이성간 성관계를 해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임신테스트기를 써 본 사람이라면 소변이 테스트기에 스며 줄을 그리면서 결과가 나오는 그 짧은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진 적이 있을 것이다. ‘안 되는데, 절대 안 되는데. 혹시 임신이면 어쩌지. 장난처럼 두 줄이 표시되면 어쩌지?’ 하며. 갑작스레 임신해서 내 인생에 불어 닥칠 평지풍파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파트너는 어떻게 나올까, 끝까지 나와 함께 책임질까? 부모님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무엇보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수많은 물음표와 의심과 불안이 뒤섞여 수천 장의 색색깔 셀로판지를 겹쳐 검은색이 될 것만 같은 그 시간.

한 줄로 끝나면 좋으련만, 기어이 두 줄이 나왔을 때 거짓말 같은 그 기분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그 여성은 병원에 가서 확진을 했을까, 파트너에게 말했을까. 부모님께는 언제쯤 이 일을 알렸을까.
만약 나였다면? 막막하다. 누구에게 제일 먼저 이 사실을 털어놓고 의논할 수 있을까? 파트너? 아니면 파트너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어 가까운 친구에게 털어놨을까? 혹은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혼자 끙끙 앓았을까? 알 수 없다. 이런 상상도 이미 나의 경험과 시각에서 상황을 재현했을 뿐 정말 그들의 서사가 어땠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명백한 건 임신했다는 것이고, 당사자들 의지나 상황, 각각의 가정에서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모르나 이들이 출산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어 아이를 양육하기로 했다.

자,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교회가 취해야 하는 태도는 무엇일까? 가뜩이나 결혼을 강조하고 가족을 중요시 여기는 판에, 스무 살 청년들이 결혼과 출산을 앞두고 있다면 응당 축복하고 축하해줘야 할 일 아닌가. 그런데 교인들 반응은 당사자들의 성별에 따라 달랐다. 남자에게는 책임감이 있다며 칭찬하고, 여자에겐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며 비난의 시선을 보낸 것이다. “임신해서 결혼하는 거래”라면서 은근한 경멸을 드러내는 뒷담화, 한번쯤 들어봤음 직하지 않은가? 여기서 왜, 여성이 비난과 경멸의 암묵적 대상이 되는 걸까. 그 까닭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혼인 관계를 성립하지 않은 채 성관계한 여자, 출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성적인 즐거움을 누린 여자는 문란하기 때문이다. 문란한 여자는, 교회와 성경의 언어에서 소위 ‘창녀’ 노릇을 한 여자는 징계받아 마땅하다.

통제되는 여성의 섹슈얼리티, ‘배틀 그라운드’, 그리고 죄책감
이십대 초중반, 한참 연애를 시작하고 파트너와 스킨십에 민감하던 시기에 내 친구는 남성 파트너의 끈질긴 성관계 제안에도 절대 응하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 교회에 다니지 않았으니 신앙적 동기는 아니었다. “무조건 여자가 손해를 보니까”라는 말만으로 나는 그 함의를 알 수 있었다. 성관계 경험 이력, 혹시나 닥칠지 모르는 임신 위협이 여성을 얼마나 쉽게 ‘문란한 여성’의 자리, 경멸과 비난의 자리로 밀어 넣는지 우리 모두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난, 사회적 지위와 명예에 손상을 입고 극단적으로는 인권과 시민권마저 박탈될 수 있는 ‘문란한 여성’의 자리로 몰리고 싶지 않다는 것,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바로 이렇게 통제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이런 상상을 해볼 수 있다. 만약 그 커플이 출산하지 않고, 임신 상태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지금 한국에서 인공 임신중절 수술은 거의 모든 경우에 불법이다. 불법적으로 수술을 받아 임신을 중지했을 경우 당사자는 형법 제269조에 따라 1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 받고, 수술한 의사는 형법 제270조에 따라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된다. 그러니 아마도 쉬쉬하며 불법 시술을 할 병원을 찾을 테고, 낙태죄가 거의 사문화되었던 때(한국 사회에서도 비교적 최근까지 그랬다)와 비교하여 여섯 배가 넘는 비용을 지불하며 기록에도 안 남는 수술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몸은 범죄화된 몸이 되어, 이 수술 사실을 아는 그 누구라도 신고를 통해 여성을 처벌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겠지. 임신 중지를 결정하고 실행한 순간, 여성은 언제든 처벌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남성, 그러니까 성관계를 통해 여성의 임신을 초래한 남성의 위치는 기묘하게도 ‘여성을 신고할 수 있는 자리’에 놓인다. 낙태죄 적용이 남성에게는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여성만, 징벌적으로 처벌받는다.

낙태죄가 작동하고 집행되는 방식은 낙태죄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낙태에 대한 처벌을 실현하는 힘의 원동력은 2010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합헌 의견으로 제시한 ‘생명 존중’이나 ‘태아의 복리’에 해당하지 않는다. 낙태죄에 대한 고발은 파혼·이혼 시 남성이 좀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는 경우, 낙태한 여성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경우, 낙태한 여성이 빚을 갚으라는 소송을 제기한 경우 등에서 주로 전 남자 친구, 전 남편, 전 시부모에 의해 악용된다. 낙태한 여성은 언제든지 처벌 가능한 범죄화된 몸으로 존재하며, (낙태 사실을 알고 있는) 파트너나 가족의 의사에 반하거나 충돌하는 행위를 통제하고, 단속하고, 엄벌하고, 응징하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 처벌받는다.
- 《배틀 그라운드》 36쪽, “낙태를 정치화하기”(이유림) 중에서

현실이 이렇다보니 인공 임신중절 수술을 하는 병원에서는 남성 파트너에 의한 형사 고발을 방지하기 위해 수술을 받는 모든 여성에게 남성 파트너의 동의서를 요구한다고 한다. 동의를 받아야 하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내 몸에 대한 통제 권한을 남성 파트너에게 구걸하거나, 다른 남성에게 그 역할의 대행을 요청해야 한다. ‘성인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 권한이 일차적으로는 배우자에게, 부차적으로는 타 남성에게 있다는 것은 바로 가부장제의 사전적 정의’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낙태죄를 통해 작동되고 있는 욕망이 무엇인지, 너무도 자명하게 알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법적 차원 말고도, 여성으로 하여금 임신 상태의 지속이냐 중단이냐를 선택하기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은 바로 죄책감이다. 언젠가, 계획하지 않고 원하지 않은 임신에 대한 두려움을 파트너와 함께 나눈 적이 있다. 아이 출산에 대한 계획이 없이 성생활을 이어가는 우리가, 불시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나는 체념하듯 “주시면 낳아야지 뭐”라고 말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것이니 내가 계획치 않았더라도 임신한 아이를 낳겠다는, 거의 관용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파트너는 뜻밖에 “임신중단도 고려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말을 들었을 때는 무척 서운했다. 임신을 지속하고 출산하는 일이 보통 일은 아니지만 인공 임신중단 수술을 하는 것 또한 만만치 않게 내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인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나는… 그러긴 어려울 것 같아. 너무 무서워” 하고 대답했다. 파트너는 더 말하지 않았지만, 내 마음은 착잡했다. 임신을 중단하는 것보다 지속하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인데 나는 왜 선택하지 않고 벌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려 한 걸까 고민되었다. 그 기저엔 죄책감, 생명을 살해한다는 죄책감이 자리했다. 생명을 ‘선택’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죄책감을 들게 하고, 내가 다른 대안을 생각해보지 않게 막았던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는 많은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이 아닐까 싶다. 불시에 찾아온 임신, 결혼했건 하지 않았건 이 상태를 중단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날아드는 죄책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임신 중지를 여성의 재생산 권리로 보지 않고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로 생각하게 만드는 프레임은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인지 우리는 공부하고 고민할 필요가 있다. 마침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를 다룬 책 《배틀 그라운드》를 가지고 믿는페미와 무지개예수 공동 주최로 북토크를 기획하고 있다. 1차로 다큐영화 〈섹스, 설교 그리고 정치〉 공동체 상영회를 하고 2차로 북토크를 열 계획인데, 이 주제를 같이 공부하고 고민할 크리스천 페미니스트를 많이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나의 고민은 현재 진행 중이고, 함께 고민할 동지가 필요하다.

■ 교회×낙태죄 : 배틀 그라운드
•영화상영회 : 2019.2.1.금. 오후 7:30~9:00,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
•북토크 : 2019.2.9.토. 오후 2:00~5:00, 섬돌향린교회
•공동주최 : 믿는페미, 무지개예수

 

달밤(필명)
크리스천페미니즘운동 ‘믿는페미’ 활동가.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기독교 단체에서 일했다. 활동가 동료들과 결성한 여성주의 연구살롱 ‘나비’를 통해 페미니즘을 가깝게 접하고 운동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현재 감리교 여성지도력개발원에서 상임연구원으로 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