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장자연이 소리친다

[341호 시사 잰걸음]

2019-03-29     박제민
   
▲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게시판

2009년 3월 7일은 고 장자연 배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알려진 날이다. 언론은 우울증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처럼 보도했고, 경찰도 타살 흔적이 없어 자살로 잠정 결론을 내고 수사를 종결지으려 했다. 유서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다음날인 3월 8일, 고 장자연 배우가 2월 28일에 측근에게 자신의 심경이 담긴 문건을 전달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측근은 ‘언론이 단순히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몰아가지 않았으면 한다’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고 장자연 배우가 우울증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언론도 문건의 존재 사실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중에 특히 눈에 띄는 기사가 있어 소개한다.

탤런트 장자연 씨가 사망하기 직전 장문의 글을 남겼다는 주장은 사실이었다. 9일 새벽에 만난 장 씨의 지인 A 씨는 고 장자연 씨가 남긴 장문의 문건 중 일부를 갖고 나왔다. (…) 〈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 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2009.2.28 800125-2******〉 긴 문장은 이렇게 끝나고 있었다. 볼펜으로 눌러 쓴 A4용지 여러 장에는 페이지마다 지장(指章)이 찍혀 있었다. (…) 수억 원의 개런티를 받는 연예인, 수십억 원의 재력가 스타가 존재하는 우리 연예계의 한쪽에서는 꿈을 담보로 잡힌 채 고통을 겪고 있는 무명 여배우란 존재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유린하는 건 그들보다 힘이 센 사람들이다.

〈조선일보〉 3월 10일 자 19면에 ‘“전 힘없는 신인… 고통 벗어나고 싶어요” 故 장자연, 장문의 글 남겨’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사다. 이 기사를 쓴 박은주 기자(당시 조선일보 엔터테인먼트 부장)는 적어도 고 장자연 배우가 작성한 문건의 일부를 직접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을 유린하는 건 그들보다 힘이 센 사람들이다.” 길지 않은 기사는 이렇게 끝나고 있었다. 박 기자는 곧 자신이 속한 언론사, 그리고 사장들이 이 사건의 진행에서 중심에 놓이게 될 줄 알았을까?

“조선일보 방 사장, 스포츠조선 방 사장”
KBS는 그해 3월 13일에 고인의 자필 문건을 단독 입수해 보도했다. 고인이 폭언과 폭행뿐 아니라 술 접대와 잠자리 강요까지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KBS는 더 나아가 3월 14일에는 언론계 유력 인사들의 이름이 적힌 문건도 추가로 입수해 보도했다. 이 문건에 따르면 고인 외에 다른 배우도 수차례 술자리에 불려 나갔다고 한다.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언론계 유력 인사 등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밝혀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4월 6일에 이종걸 국회의원(민주당)은 국회 본회의 정치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질의하면서 “장자연 문건에 따르면 ‘당시 〈조선일보〉 방 사장을 술자리에 만들어 모셨고 그 후로 며칠 뒤에 〈스포츠조선〉 방 사장이 방문했습니다’라는 글귀가 있다”라고 폭로했다. 마침내 그 가해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이종걸 의원에 따르면 대정부질문 직후 〈조선일보〉에서 “엄정한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공문이 날아왔다고 한다. 당시 공문을 보냈던 〈조선일보〉 경영기획실의 책임자가 지금 강효상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이다. 또 〈조선일보〉 기자가 의원실을 방문해 질의를 자제해달라고 요청 또는 압박하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조선일보 방 사장’과 ‘스포츠조선 방 사장’은 공중파 방송에서도 울려 퍼졌다. 4월 9일에 생방송으로 진행된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한 이정희 국회의원(민주노동당)은 이종걸 의원의 발언이 국회의원 직무상의 발언으로써 면책특권의 범위 아래 있다고 봐야 한다고 옹호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이 개인의 사생활 문제라는 상대 주장에 대해서 반론을 폈다.
 
“사생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언론사 사주다. 〈조선일보〉의 방 사장님, 〈스포츠조선〉의 방 사장님, 이 두 분은 굉장히 중요한 공인이다. 특히나 피해자분이 연예산업에 아주 약한 고리에 있는 신인 연기자이자 어린 여성이다. 일종의 권력관계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구조적 문제고 공적인 관심사다. 사생활이라고 덮어둘 수 없다.”

4월 11일, 결국 〈조선일보〉는 이종걸·이정희 의원에 대해 국회 대정부 질문과 방송토론회 등을 통해 자사 임원들이 고 장자연 씨로부터 접대를 받은 것처럼 말해 명예를 훼손했다며 각각 10억 원을 배상하라는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또 5월 15일에는 KBS와 MBC 기자 5명에 대해서도 총 35억 원을 배상하라는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2009년 11월 30일에 열린 1심, 2013년 2월 8일에 열린 2심에서 〈조선일보〉가 모두 졌다. 다만 2심 재판부가 “조선일보 방 사장이 장 씨로부터 술 접대와 성 상납을 받았다는 의혹이 허위 사실임을 입증할 책임은 원고 측에 있다”며 “심리 결과 이를 허위 사실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러자 〈조선일보〉는 2013년 2월 28일, 진실 규명이라는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었다며 소송을 모두 취하하겠다고 밝혔다. 그 모든 소송에서 〈조선일보〉가 죄다 패소했다는 사실은 언급도 안 했다. 지난했던 재판이 일단락되자 이종걸 의원은 다음과 같은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다. “진실을 향한 싸움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재수사, 새로운 증언들
2009년 8월 19일, 사건을 수사했던 수원지검 성남지청 형사3부는 언론계 유력 인사, 기획사 관계자, 방송사 관계자 등에 대해 모두 ‘혐의없음’으로 처리하고 수사를 종결했다. 다만 고인의 소속사 대표였던 김종승에 대해 폭행 및 협박, 전 매니저 유장호에 대해 김종승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기소했을 뿐이다. 성접대 의혹 때문에 처벌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9년의 세월이 흘렀다.

2018년 2월 26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고 장자연의 한 맺힌 죽음의 진실을 밝혀주세요”라는 국민청원이 올라왔다. 언론의 무관심 속에서도 약 한 달 만에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의했다. 20만 명 이상이 동의한 청원에는 청와대가 공식 답변을 하기로 되어 있다. 박형철 반부패비서관은 “공소시효를 떠나 과거 수사에 미진한 부분은 없었는지 법무부 과거사위원회와 검찰 진상조사단에서 의혹 규명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답변했다.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검찰이 과거 검찰권을 남용하고 인권을 침해했던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하기 위해 2017년 12월 12일에 생겼다. 2018년 4월 16일,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고 장자연 배우 사건을 사전조사 대상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다시 들여다 본 2009년 당시의 조사는 매우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고인이 사망한 후 일주일 뒤에 있었던 압수수색 시간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옷방, 핸드백 등은 아예 수색조차 하지 않았으며, 수첩 등 자필 기록도 빠져 있었던 것이다. 사건이 경찰에서 검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휴대전화 통화 기록 원본과 복구 기록이 사라진 것도 드러났다.

검찰 과거사위는 검찰에 재조사를 권고했다. 서울중앙지검은 수사 종결 9년 만에 재수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고인의 전 소속사 대표였던 김종승의 생일파티 현장에서 고인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추행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전 〈조선일보〉 기자 조희천을 기소했다. 아울러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7월 2일 이 사건에 대해 본조사를 결정했다. 그 결과 2009년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코리아나호텔 사장인 방용훈과 전 〈TV조선〉 대표 방정오가 조사를 받았다.

▲ 윤지오 씨 인스타그램

다시 장자연이 소리친다
지난 2019년 3월 7일은 고 장자연 배우의 10주기였다. 10년의 세월이 지나도 고 장자연 배우를 잊지 않은 사람이 많다. 그들에 의해 장자연의 외침은 다시 커지고 있다.

최근 고인의 동료이자 목격자인 윤지오 배우는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고 여러 인터뷰를 진행했다. 윤지오 배우는 어렸던 자신이 보기에도 당시 수사가 매우 부실하게 진행됐다고 말했다. 이어 “고 장자연 배우가 문건을 남긴 것은 살아서 싸우기 위해 남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직접 그 문건을 본 적이 있는데 이름이 특이한 국회의원이 적혀 있었다”고 했다.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3월 말 조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코리아나호텔 사장 방용훈과 전 〈TV조선〉 대표인 방정오가 이 사건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밝혀져야 한다. 전 〈조선일보〉 기자 조희천이 고인을 추행했는지에 대해 진실이 드러나야 한다.

숨겨 둔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막 4:22, 표준새번역)

“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 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다시 장자연이 소리친다. 그리고 살인자에게 보복하시는 분께서는 억울하게 죽어 간 사람들을 기억하시며, 고난 받는 사람의 부르짖음을 모르는 체하지 않으신다.(시 9:12)

 

박제민
20대 끝자락에 기독시민운동 판에 들어와 어느덧 30대 후반이 되었다. 낮에는 기독 시민단체 실무자, 밤에는 ‘동네교회청년’ 활동가로 살아가는 30대 청년이다. 보수적인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자라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