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로 오시는 하나님

[341호 역사에 길을 묻다] 칼 바르트의 《로마서》 읽기

2019-03-29     김기현

‘기억의 지층’으로부터
사랑하는 아들아, 네 편지 잘 받았다.
말문이 틔었을 때부터 너는 나의 대화 파트너였지. 어린 아이들의 순전한 질문에 모든 부모가 놀라곤 하지만, 너는 곧잘 철학적인 질문과 생각을 많이 해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지. 너랑은 대학생들과 토론하듯 대화를 나누던 기억이 나는구나. 그런데 ‘제논의 역설’을 시간으로 해결할 수 있겠다는 너의 탁견을 기억하지 못하다니, 이런이런 이런…(그런 일이 너무 흔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네가 물었지. 타자(他者)란 누구인지,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그 질문을 받자마자 나는 예상치 못한 책과 저자가 생각났단다. 타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신학 분야의 고전에서 타자에 관한 책이 어떤 것이 있을까, 묻자마자 바르트의 《로마서》(복있는사람)가 생각나더구나. 하나님을 가리켜 ‘전적 타자’(Wholly Other)라고 한 것이 모종의 말할 거리를 제공해주지 않을까 싶더라. 그래서 다시 읽어보았더니 이게 웬일, 그야말로 보물 창고가 따로 없더구나. 속으로 얼마나 환호했던지. 기억이란 실로 신기하구나.

그 책은 1995년 1월과 2월께에 읽었다. 어떻게 그 시점을 정확하게 기억하냐고? 95년에 아빠가 박사 과정(Ph.D.)에 입학했거든. 공부하기 전에 신학의 뿌리랄까 기초를 다져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렇다면 바르트의 《로마서》를 꼭 읽어야겠다 생각했지. 2천 년 역사에서 로마서와 로마서 주석이 시대를 뒤흔들고 새로운 시대를 창조했던 교회사의 증거로 보나, 종교철학 및 현대신학이라는 내 전공을 고려할 때 결론은 《로마서》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후배들을 끌어 모아 낑낑 대며 영역본으로 읽었지.

그때 내게는 낯선 용어가 있었어. 전적 타자. 하나님을 지칭하는 바르트의 용어였어. 인격적인 신을 저리 객관적이고 무덤덤하게 지칭하는 게 생소했지. 당시 ‘타자’라는 용어가 우리나라 학계에 유통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내가 몰랐던 거겠지. 그래서 ‘타자가 뭐지’ 하고 넘어갔지. 이제와 생각하면 타자는 그냥 ‘남’ 또는 다른 것인데 말이야.

그런데 ‘타자 이해’를 바르트에게서 찾았을 때 예상치 못한 수확이 있었단다. 사르트르 전문가인 변광배에 의하면, 들뢰즈는 사르트르의 타자론이 서구 철학사에서 ‘타자에 관한 최초의 위대한 이론’이었다는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더구나.(《장 폴 사르트르》, 살림, 4쪽). 찾아보니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가 1943년,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는 1947년에 출간되었더라. 그런데 바르트의 《로마서》는 초판이 1919년, 전면 개정판은 1922년에 나왔거든. 그러니 들뢰즈의 말은 수정되어야 해. 서구 철학사에서 최초이자 최고의 타자론은 칼 바르트라고.

또 하나. 요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가히 전쟁이라고 할 만한 논쟁이 벌어지는 핵심 쟁점인 ‘믿음’을 바르트는 ‘신실함’으로 번역했더구나. 다시 읽으면서 어찌나 놀랐던지. 1919년에 초판이 출간되었고, 우리가 읽는 재판은 1922년판인데, 오늘날 ‘새 관점 학파’(전통적인 ‘칭의론’을 1세기 유대주의 관점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신학자들, E. P. 샌더스, 제임스 던, N. T. 라이트 등이 이에 속한다.-편집자)가 말하는 것을 반세기 전에 선취하다니, 그것도 신약학자가 아닌 조직신학자가 말이지. 놀랍다 못해 경이롭더구나.

‘전적 타자’의 기원
희림아, 이 용어는 오롯이 바르트의 것은 아니란다. 실은 루돌프 오토(Rudolf Otto)의 것이지. 그의 책 《성스러움의 의미》(분도출판사)에서 처음 사용했거든. 독일의 종교학자이자 개신교 신학자인 오토는 이 땅에 존재하는 각기 다양한 종교들을 한데 아우르는, 종교를 종교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지. 그는 인도학의 대가로도 알려져 있는데, 서구 종교라는 지역적 제한을 넘어서 동양종교까지 포괄하는 종교의 핵심을 ‘누미노제’(Numinose)라고 명명했어.

동서양의 모든 종교를 봤을 때, 종교의 핵심은 서구 기독교의 주지주의적 특성 혹은 칸트와 헤겔이 이해한 바 합리와 윤리를 넘어서는 것이면서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어떤 것을 가리키기 위해서 사용된 용어가 ‘전적 타자’였단다. 종교를 종교 아닌 것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비판하고, 종교만의 고유함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가 이 개념어인데, 그래서 번역자인 길희성은 ‘전혀 다른 것’(das Ganz-andere)라고 번역했더구나.

바르트는 오토가 ‘심리학적인 경향’을 띤다고 지적했고(《로마서》, 141쪽), 오토의 편에 선 이들은 바르트가 이 개념을 지나치게 단절적으로 이해했다고 불만이더구나(《성스러움의 의미》, 22쪽). 둘 사이 미세한 결의 차이는 내 관심사는 아니다만, 바르트 편향적인 아빠가 보기에는 그가 신과 인간의 절대적 분리를 주장했다고 생각하지 않다. 애당초 그런 것은 기독교 신학에 존재하지 않거든. 만약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마니교일거야.

‘전적 타자’로서 하나님
아들아, 바르트의 타자론에는 신론과 인간론이라는 두 측면이 있어. 먼저 신론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롬 1:1)이라고 명명했지. 복음을 규정하는 단어가 하나님이야. 그러니 하나님의 복음을 이해하자면, 하나님 아닌 것을 저 자리에 대입하면 의미가 금세 드러난단다. 바로 인간이지. 하나님의 복음은 사람의 복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과는 이질적인 존재, 인간적인 것으로 축소할 수 없는 분이시겠지. 그렇기에 바르트는 ‘전적 타자’를, 하나님의 복음을 설명하면서 이 책에서 처음 사용해(141쪽). 인간적인 어떤 것을 신성한 것으로 승격시킨 것은 결코 하나님의 복음이 아니야. 하나님 그분에게서 직접적으로 내려오는 것, 우리 인간이 만들 수도, 지어낼 수도 없는 낯설고 기이한 어떤 것이 바로 복음이고, 복음은 정녕 하나님 자신의 것이지.

그러면 왜 바르트는 하나님을 이리도 비인격적인 용어로 표현한 걸까? 내게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 어머니 하나님이거든. 그리하여 내게 하나님은 아빠,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시지. 그러니 하나님을 저런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용어로 명명하는 것이 내게는 내심 거리끼는 것이었어. 전적 타자라고 하니까 뭔가 고상해 보이지만, 우리 말로 쉽게 번역하자면 ‘완전히 남’이라는 뜻이잖니. 하나님과 우리가 완전히, 절대적으로 남남이라니. 그게 무슨 뜻일까? 내가 아닌 너, 내가 될 수 없는 남이라…?

그게 바로 바르트가 의도했던 거였어. 내가 아닌 너라고 했을 때의 너는 나와 동일하지 않고, 환원될 수 없지. 완전히 다르다는 거지. 다른 인격체이자 존재이고. 게다가 그냥 남이 아니라 전적이고 절대적으로 다른 너, 라는 것이지. 아빠가 앞에서 하나님의 대칭어가 인간이라고 했었지. 그에 따른다면, 하나님을 인간화하지 말라는 거야.

바르트가 저런 주장을 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로 변질시킨 시대적 상황이 있었어. 19세기의 기독교 신학은 신을 인간화했었어. 하나님은 하나님인데, 하나님을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물신화(fetishism)가 아니고 뭐겠니. 우상이라고도 하지. 우상이 뭐겠니.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만든 것이지. 그래서 나온 유명한 문구가 바로 이것이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Let God be God!) 내 말로 바꾸면, 타인을 타인의 모습 그대로 인정하기!

이런 논의가 신학자들의 동네에서 저들끼리의 고담준론이 아니라 당시 유럽의 정신사와 신학사, 정치사적 맥락에서 읽으면 바르트의 급진성이 도드라지지. 근대는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대상에서 주관으로 옮겨가는 급격한 전환의 시기였다. 근대의 도전 앞에 신학도 신을 인간화하기 시작했지.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인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절대 의존의 감정’이라고 했지. 그에 따르면, 앞에 어떤 수식이 붙든 간에 종교는 인간의 감정인 게지.

그런데 아빠가 주목하는 것은 신학의 인간화가 초래한 정치적 문제야. 바르트가 선배들의 신학을 깡그리 비판하고 근원으로 돌아가서 뒤집어엎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배경이 있어. 그 하나가 목회와 설교의 문제였어. 그들의 신학은 설교할 수 없는 신학이었던 거야. 스위스 자펜빌 마을이 산업화하면서 인간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탐욕과 죄악이 분출하는데도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독일 신학은 교육과 계몽의 힘으로 인간을 선하게 바꿀 수 있다고 지나친 낙관론에 빠져 있었거든. 인간의 죄인됨을 말하지 않는 신학은 멋있어 보일는지 몰라도 실제로는 무기력하지.

다른 배경으로는 정치적 요인도 있었는데 바로 전쟁이었어. 1차 세계대전 말이야. 모든 전쟁을 종식하는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벌어진 이 전쟁으로 지옥문이 열렸지. 첨단 과학으로 무장한 군대에 의한 대량 살상이 가능해졌거든. 그 전쟁은 단적으로 제국주의 전쟁이었어. 식민지 쟁탈전 말이야. 그런데도 1차 세계대전을 지지하는 독일 지식인 93인 선언에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이 죄다 참여한 거야. 바르트는 깊이 절망했지.

로마서 1장에 썩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짐승의 것으로 변질시켰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주석하면서 바르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어. “전적 타자는 … 천차만별의 교묘한 동일시와 혼합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인간적인 혹은 동물적인 사건이 하나님 체험으로 격상되고,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는 인간적인 혹은 동물적인 체험으로 경험된다.”(184쪽) 자유주의 신학이 고상하게 말해도, 그 속내를 들춰보면 자신과 자기 민족과 국가의 이익을 지키는 데 복무하는 시녀였던 거야. 이를 두고 바르트는 ‘아니오’라고 크게 외쳤지.

바르트는 전쟁을 지지하는 신학은 신학의 실패라고 규정했어(부쉬, 《칼 바르트》, 159쪽). 그런 신학은 ‘구제 불능’이야. 그런데 왜 기독교가 국가 차원의 전쟁을 지지할까? 거기에는 국가와 기독교를 동일시하는 신학이 깔려 있는 거야. 존 요더가 말한 ‘콘스탄틴주의’, 내 식으로 말하자면 ‘혼합주의’인 거지. 바르트가 보기에 독일을 변혁하는 기독교가 아니라 독일화된 기독교, 그래서 기독교와 독일 사이에 어떠한 구별도 없는 물에 물탄 종교에 대한 강한 비판이자 대안은, 오래되었지만 새로운 하나님이었어. 바로 인간과는 무한한 질적 차이를 가지신 전적 타자로서 하나님. 그래서 바르트는 교회 내적으로는 설교할 수 있는 신학, 외적으로는 전쟁을 비판하는 신학이라는 신학의 근본적 재구성 작업에 들어갔고, 그 산물이 바로 이 책 《로마서》야.

아들아, 이쯤 되면 왜 바르트가 하나님을 ‘전적 타자’로 묘사했는지를 충분히 알거야. 인간이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신, 인간의 욕망으로 조종하고, 인간의 관점으로 조작할 수 없는 신이 참된 신이라는 것이지. 인간의 이기심을 종교적으로 승인해주는 그런 얄팍한 신은 성서가 말하는 신이 결코 아니야. “그분은 인간으로서는 전혀 알 수도 가질 수도 없는 하나님이시며, 바로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기대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141쪽) 그는 이전의 신학과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토대 구축에 성공했어.

‘타자’로서 인간
그런데 희림아, 내가 누구인지에서 내가 아닌 것을 토론해보자는 네 제안은 참으로 적절하더구나. 넌 타자는 누구이고, 타자와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물었지. 네 편지에 의미심장한 한 문장이 있더라. “나와는 다른,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심지어 나를 파괴할 수 있는 그런 존재인 타자와의 접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요?” 아빠가 말하고 싶었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낸 거야.

앞의 것은 나 아닌 너, 나와 다른 너라는 일반적 범주의 타자라면, 뒤의 것은 나를 파괴할 가능성을 갖고 있는 너라는 좀더 특수한 범주의 타자이지. 곧 말하겠지만, 전자를 기독교는 ‘이웃’이라고 하고, 후자를 ‘원수’라는 단어로 표현하지.

로마서를 크게 구분하면 1-11장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복음을, 12장부터는 교회와 신자의 윤리를 다루고 있어. 그렇다면 타자인 하나님은 전반부에, 타자인 인간은 후반부에 나타나겠지.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철저하게 타자로서 마주 서셨다’(592쪽)면, 우리는 서로에게 철저한 타자로 존재하겠지. “바로 그 타자의 문제에서 윤리의 문제가 떠오른다.”(890쪽) 타자의 존재론 혹은 타자의 신학에서 타자의 윤리론이 나오는 거지.

흔히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라고 하지만, 바르트는 ‘주 안에서 서로 다른 나로서 하나’라고 한단다. 그의 타자의 정의는 이렇다. “여기서 말하는 타자란 누구인가? 그들은 우리가 도저히 들여다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타자성 속에서 믿고 있는 사람들”(890-891쪽)이야. 우리는 하나다, 는 말이 자칫 서로의 다름을 간단히 지워버리고, 획일적 생각과 행동을 강요하는 건 아닐까? 바르트는 공동체라는 것은 “개인이 다름(타자성)으로 지양하거나 제약하거나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다름을 요구하고 각기 다름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됨”(892쪽)이라고 해. 그럴 때 우리는 서로에게 자유를 경험하지. 타인을 내 의지에 복속시키려 하지도 않고 말이야.

그러기에 우리는 전적 타자인 하나님을, 나와 다른 타자인 이웃 안에서 만나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나를 결코 동일시하는 우상을 짓지 말아야 하듯, 나의 의지와 타인의 것이 완전히 같다고 생각하거나, 같아야 한다는 폭력을 행사하지 말아야 해. 다름의 존중을 통해서 너가 너 될 수 있다면, 나는 나 될 수 있는 거지.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나 자신이 되라는 요구”(511쪽)를 하고 계신 거야. 이것이 복음이고, 자유란다.

그런데 희림아, 우리 기독교의 독특성은 원수에 대한 사랑에 있다. 네가 말한 ‘나를 파괴할 수 있는 타인’이 곧 원수일 테지. 원수는 정말 ‘웬수’이고, 타자 중의 타자 아니겠니. 내가 너일 수 없는 타자가 이웃이라면, 너가 되고 싶지 않은 타자, 폭력적으로 제거하고 싶은 타자가 원수겠지.

‘선물’로서 타자
원수가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도 알다시피 아빠는 이미 《내 안의 야곱 DNA》(죠이북스)에서 원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자고 얘기했고,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복있는사람)에서는 원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 원수를 통해서 우리를 부수시는, 그리하여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말한 바 있지. 그러니까 역설적이게도 원수는 하나님의 일꾼이란다. 참으로 불편한 진실이지.

바르트도 비슷한 말을 하고 있어. ‘박해하는 타자가 하나님의 심부름꾼’(919쪽)이며, 그 “‘원수’는 가장 알 수 없는 타자”(939쪽)라고. 궁극적으로 우리는 원수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는 명령을 받았어.(944쪽) 아빠는 그 원수가 없었다면, 고난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다고 고백한단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다른 이웃으로서의 타자만이 아니라 나와 대척점에 서 있는 적대자로서의 타자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라고 생각해.

아들아, 문득 어릴 적 내가 너를 타자로 대하지 못한 적이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네가 장래 희망을 말할라치면, 그것이 아빠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이런저런 그럴싸한 말로 못하게 막았던 게 그중 하나지. 그냥 자연스런 성장 과정일 뿐인데 말이야. 네 나이에 할 수 있는 생각과 과정을 거치면서 자라는 것인데, 너를 아빠의 잣대에 우겨 넣으려고 했어. 아빠가 만든 틀 속에 구겨 넣으려고 너를 힘들게 한 거지.

이제 편지를 마칠까 해. 아빠가 이 글에서 줄곧 말한 걸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타자로서 하나님은 나를 내 모습 그대로, 나 아닌 남도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윤리의 토대라는 거야. 아빠는 이제 철학에서 말하는,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타자는 무엇인지 궁금하구나. 네가 던진 질문에 대한 신학자 아빠의 대답과는 다른, 스스로 질문하는 자이면서도 스스로 대답을 찾는 철학도인 너의 생각을 듣고 싶다.

마지막으로 아들아, 타자는 선물임에 틀림없어. 내게 타자인 너의 존재가 아빠에게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선물이듯이. 또 하나의 선물이 될 너의 편지를 기다린다.


김기현
로고스교회 담임목사이자 로고스서원 대표로, 코스타 강사, <매일성경> 집필자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철학과 현대 영미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기독교 세계관, 평화주의, 변증, 성경 이야기를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다. 가족으로는 아내 이선숙과 아들 희림, 딸 서은이 있다. 지은 책으로 《성경 독서법》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 《가룟 유다 딜레마》 《예배, 인생 최고의 가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