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 너머의 ‘메시아적 시간’을 사는 바울 공동체

[342호 제국과 하나님 나라 : 바울 서신 읽기 05]

2019-04-29     한수현

로마제국을 떠받친 노예제도
로마 사회는 “노예 사회”였다. 노예 사회란 노예들이 그 사회의 대부분의 생산력을 담당하는 사회를 일컫는다. 당연히 노예 사회는 인구의 상당 부분이 노예로 이루어져 있다. 로마 이전에도 노예제도는 존재했는데, 이른바 민주 정치의 꽃을 피웠다는 그리스 고대 도시국가들도 다수의 노예가 있었고, 소수의 성인 시민 남자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 시대에서 일어난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대규모 반란이나, 육천 명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유혈극도 그리스 시대에는 벌어지지 않았었다. 로마가 급속한 팽창으로 노예제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는 높아질수록, 노예에 대한 처우는 더욱 잔인하게 변해 갔다.

예수가 태어날 당시,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하에서 도시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 지역은 30% 정도가 노예로 이루어져 있었다. 로마는 전쟁에 승리하면 패배한 국가의 시민을 노예로 만들어 노예의 수를 채웠다. 노예 사회로 발달할 수록 가족 중심의 소규모 농장들은 노예 중심의 대규모 농장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소규모의 자작농 중심의 경제체제보다 대규모의 노예를 이용한 농장이 훨씬 더 대량생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에 경쟁력을 잃고 자신의 땅과 일자리를 잃은 농부들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노예를 이용한 대규모 농장이 유지되기 위해서 값싼 노예들이 공급되어야 했고, 당시 여러 전쟁을 통해 공급된 노예들이 이를 떠받치고 있었다. 노예는 급료를 받지 않고, 먹고 잘 자리만 만들어주면 노동력을 무료로 공급하기 때문에, 노예시장에서 노예를 살 수 있는 돈이 있으면 부를 거머쥐기 위한 사업에 뛰어들 수 있었다. 결국 이렇게 발달한 노예 사회는 빈부 격차를 심화시켰고, 도시로 몰려든 자유 노동자들은 빚에 시달리다 노예가 되거나 변두리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극빈한 삶을 살아야 했다.

로마는 원래 도시국가에서 성장한 제국이지만, 도시국가는 대대로 민주정치나 귀족 정치로 경영되었기 때문에 황제 중심의 제국이 되기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당시 중동 지역의 제국은 황제를 신격화하는 문화가 확립되어 있어서 1인 중심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지만, 로마는 그것으로는 부족했는지 황제정을 확립하기 위해 ‘투 트랙’ 전략을 만들었다. 중동의 제국과 같이 황제 종교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통하지 않는 귀족이나 시민들은 자본을 통해 설득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로마제국의 모든 전투를 수행하는 군인들은 모두 봉급을 받는데 이는 오로지 황제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황제 휘하의 모든 장군들은 황제가 주는 돈으로 군인들을 지휘했다. 또한 로마제국의 심장인 수도 로마의 시민은 모두 황제가 공급하는 밀가루 배급으로 생활했다. 즉, 로마의 황제는 로마제국 최대의 대농장 지주일 뿐 아니라 로마의 모든 군사제도를 경영하는 자였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유지하는 노동력은 바로 노예에게서 나왔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황제 정치가 안정되기까지는 로마에 계속적인 팽창과 노예 공급이 필요했다. 노예제도는 로마의 황제 정치 자체를 떠받치는 기본 시스템이 되었다.

‘노예제도 이데올로기’
거의 모든 노예제도가 그렇듯, 로마의 노예는 당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권리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집에 있는 숟가락처럼, 하나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의 주요 농업, 광산, 운송, 제조업, 더 나아가 교육, 군사, 공공 서비스, 도로와 항만 건설, 성적 오락 등, 삶의 모든 분야에 종사했다. 고급 기술, 라틴어, 헬라어, 학문에 특화된 소수의 그리스 출신 노예를 제외하고는 특히 주로 육체노동을 하는 노예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 없었다. 현재에도 그렇듯이 노동자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줄일수록 당장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높아진다. 노동 강도가 너무 심했기에 도망치는 노예가 많았으므로 대농장주들은 자신이 부리는 노예들을 좁은 벽으로 둘러싸인 건물에 쇠사슬로 묶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화산재로 뒤덮인 폼페이에서 쇠사슬로 묶인 채 죽음을 맞이한 노예들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앞의 글에서 말했듯이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대규모 노예 반란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기에 로마의 법에서 노예에 대한 처후는 매우 철저했다. 노예에겐 아무런 법적 권리가 없을 뿐 아니라 복종 거부 시에는 생사를 오가는 형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노예 제도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유지하느냐가 로마 사회 유지의 관건이 되었다. 로마가 노예 노동력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사회적 안정을 위해서도 노예의 철저한 복종이 필요했던 것이다.

인간 사회는 생존과 번영을 위해 필요한 제도에는 윤리와 법을 적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노예제도에도 마찬가지였다. 만약에 노예를 보통 시민과 같은 인간으로 여기게 되면 윤리적 책임과 가책이 뒤따르게 된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부터 노예는 줄기차게 이데올로기적으로 색칠되었다. 플라톤은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고대로부터 있었던 그리스인과 이방인(Greeks and non-Greeks)의 구분을 이용하여 이방인, 야만인(babarians)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노예는 자연적인 일하는 도구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생각은 로마제국의 시대에 오면 더욱 강화되는데, 들여다보면 노예제도를 받치고 있는 한 축이란 민족적 우월감 또는 계층적 우월감이었다. 노예가 된다는 것이 자연스럽거나 언제나 존재해야 하는 것은 비록 아닐지라도 ‘노예’가 된 자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 한 번 노예가 되면 그에 걸맞은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은 로마 사회를 유지하는 데 강력한 이념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결국 로마의 지배자들은 인간을 인종 별로 분류하고 우열을 나누고 계급을 만들어 더욱 손쉽게 사회 구성원들을 지배했다. 황제가 황제인 것이 나름의 이유가 있듯이 네가 가난한 것이나 노예인 것은 그에 따른 마땅한 이유가 있다는 논리이다. 바울이 복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인종적 계층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를 바로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노예)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갈 3:27-28, 새번역)

바울은 세례(침례)를 통해 한 사람에게 당연한 듯 덫 씌워진 계급, 인종, 종교등의 구분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원래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도 아니다. 오직 인간이 만든 사회가 법과 제도로 구축해놓은 것이다. 바울은 그 복잡한 사회적 구축물들을 그리스도와 하나된다는 상상을 통해 허문다.

그러나 많은 역사가는 이러한 바울의 목소리를 당시의 정치 사회 제도에 대한 개혁이나 변화에 대한 목소리로 이해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역사가 어니스트 크로이(Geoffrey E. Maurice Ste. Croix)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육체와 행위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었지만 자신을 그리스도의 ‘노예’로 표현함으로써 노예제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바울의 언어는 정치적 신념이나 사회적 대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현실의 정치, 사회에 대한 비판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바울의 글을 읽은 사람들이 노예제도를 직접 반대하거나 거기 반감을 갖기는 힘들다는 것이 크로이의 판단이다. 그러나 바울이 노예제도를 당연시했다고 결론 내리기는 이르다. 실제로 바울이 노예에 대해 말하는 본문들을 살펴보면서 사람들이 이루고 있는 공동체인 교회에 대해 바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보자.

바울은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지 않았으나
빌레몬서에 등장하는 오네시모라는 인물은 바울 서신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중에 상당히 매력적이면서도 수수께끼에 싸여 있는 인물이다. 오네시모에 대해 가장 정확한 정보 중의 하나는 그가 노예라는 것이고, 논쟁 중에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빌레몬의 노예인 오네시모가 바울이 갇힌 감옥에 찾아온 이유이다. 바울이 빌레몬서를 쓴 장소와 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이 감옥에 갇힌 장소는 에베소, 가이사랴, 로마인데, 만약 로마에서 썼다면 바울이 처형되기 직전이었을 것이고, 에베소에서 썼다고 한다면 54년경으로 보인다. 로마를 기록 장소라고 보는 학자들은 바울이 자신이 ‘나이가 많다’고 말한 것에서 이유를 찾지만, 정확한 사실은 누구도 모른다. 도대체 왜 오네시모는 바울을 찾아갔을까?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허락 없이 바울을 찾아간 것은 서신의 내용을 살펴보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노예인 오네시모가 주인의 허락 없이 집을 떠난 행위만을 놓고 보면 죽음으로 다스려야 하는 중한 죄다. 주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에게 십자가형도 내렸을 수 있다. 당시 노예들에게 주는 벌이 무거웠던 이유는 그것이 주인의 명예를 더럽혔을 뿐 아니라, 앞서 말했듯이 로마 사회를 유지하는 심장이 바로 노예제도였기 때문이다. 로마 황제가 ‘주인’(Master)이라고 불린 것은 로마 시민들이 황제에 대해 ‘노예’(Slave)가 된다는 의미였다. 로마사가인 케이스 브래들리(Keith Bradley)는 로마제국이 발달하면서 덩달아 노예제도가 더욱 촘촘하게 발전되었고, 그 노예제도를 떠받치기 위해 로마의 법들이 제정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관련된 법들은 노예 자신보다 그 주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게다가 주인과 노예란 단어는 노예제도 안에서만 아니라 로마의 황제와 시민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말로 쓰여지기 시작했다. 즉, 노예제도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써 로마 사회를 대변하는 인간 관계를 형성하는 언어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노예제도를 반대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당대를 사는 사람의 상상력으로는 매우 힘든 일이다. 바울 또한 자신과 그리스도의 관계가 노예와 주인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다는 의미가 로마의 그것과는 매우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자들은 바울이 노예제도를 반대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곤 한다. 위에서 언급한 갈라디아서 3:28 본문에 따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인과 노예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져 이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왜 그들은 여전히 주인과 노예가 나누어진 삶을 살았을까? 아니 더 나아가 주인과 노예로 구조화된 세계가 틀렸다고 외치지 않았을까? 시대를 이끌어가는 어떤 상상이든 그 상상이 실재가 되려면 그 시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바울이 만약 노예제도 폐지를 상상했다면 당연히 노예 없이 실제로 유지 가능한 사회에 대한 경제적 대안이 밑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로마제국 아래에서 살던 바울에게 노예 없이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여러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상력에 밑받침이 될 수 있는 사상적 실험의 결과나 학문적 결과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었던 바울이 노예제도를 현실 정치 논리 안에서 반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예로 들어보자. 요즘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문학작품이나 영화가 많다. 이는 미래에 대한 대안을 말해야 하는 예술 활동이 현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실행 가능한 대안을 더 이상 찾지 못하자, 미래 사회나 핵 전쟁으로 모든 사회 기반이 무너진 상황으로 그 배경을 옮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바울이 당시 제국 자체를 경영하는데 필수적이었던 노예제도를 현실적으로 반대할 수 있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2천 년 전에 살았던 바울에겐 지금처럼 발달된 과학 기술도, 여러 철학 사상도, 삼권분립과 같은 정치적 실험 결과도 없었다. 그에게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한 제국의 세계에서 현실적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어려웠으리라 인정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왜 바울 서신을 읽어야 하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그럼 바울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어떤 대안이 있는 걸까?

바울이 제시하는 삶의 새로운 의미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내가 갇혀 있는 동안에 얻은 아들 오네시모를 두고 그대에게 간청합니다.”(빌 1:10) 바울은 그의 서신을 통해 자주 자신을 여성 어머니로 표현하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여러분을 낳았습니다”(고전 4:15), 또는 “나는 여러분에게 젖을 먹였을 뿐…”(고전 3:1)과 같은 표현들은 이때까지 그리 중요한 표현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세계관에서 자신을 여성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상당한 상상력을 필요로 하였을 것이다. 낳아서 젖을 먹이고, 이제 아들이 된 오네시모를 바울은 자신의 “마음”(빌 1:12)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마음이란 빌레몬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언어이다. 보통 신약성서에서 마음이란 단어는 카르디아(καρδα)를 번역한 것으로, 마음 영혼을 뜻하는, 그야말로 마음이란 단어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마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스플랑크나(σπλγχνα), 뱃속이나 내장 기관을 뜻하는 말이다. 한국말로는 오장육부에 해당하는 의미라 할 수 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의 오장육부와 다름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그 기관으로 낳은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오네시모를 받아줌으로 빌레몬에게 자신의 마음(σπλγχνα) 또는 뱃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달라고 말한다(빌 1:20). 빌레몬서 속 바울의 언어를 살펴보면 고린도전서에서 자신을 여성, 어머니로 말하는 바울의 표현이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메시아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관계를 표현하는 방법임을 알 수 있다. 즉, 바울이 생각하는 메시아 공동체 사람들은 다시 태어남의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력은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더 이상 노예가 아닌 형제로 받을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권위를 발휘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강력한 상상력의 근원은 초대 교회에 팽배했던 묵시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당시 메시아 공동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으리라 생각했으며 지금의 삶은 그 순간을 위한 과도기라 여겼다. 그래서 내부적으로 매우 혁명적인 정치 사회적 상상력을 할 수 있었으면서도, 그것을 곧 외부의 현실 자체를 변화시킬 동력으로 사용하지 못했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 눈에 비춰진 전지구적 제국인 로마는 언젠가는 과거의 다른 제국과 함께 사라질 것이고, 이후에는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제국이 시작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당연시 생각되었던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제국을 스스로 세우려 하지 않은 시도가, 그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현실과 동떨어진 내세 추구 신앙으로 이해되거나 그런 신앙을 정당화하는 증거로 이용된 것이다. 그러나 시각을 조금 달리해서 보면 당시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바울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재림 이외에 이렇다 할 현실적인 혁명적 사회를 기대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우리는 현재 자본주의와 대의 민주주의 이외의 새로운 정치적 실험은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대의 민주정치체계에서 우리가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방법이란 이미 결정된 대통령 후보 중 그나마 차악의 인물을 뽑는다든가,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에 한 표 정도 행사하는 일이다. 이외엔 실질적으로 변화와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런 현실을 감안하고 바울을 다시 보면 바울서신이 제시하는 삶의 방법이 가지는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이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 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도록 하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집니다. (고전 7:29-31)

로마 법 제도 안에서 살아가는 ‘메시아적 시간’
전도사 3장은 “모든 일에 다 때가 있다”고 하면서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심을 때와 뽑을 때, 울 때와 웃을 때를 분리시킨다. 그러나 바울은 이 분리된 시간을 하나로 합친다. 조르지오 아감벤은 이것이 바로 ‘메시아적 시간’이라 말한다. 바울은 “웃는 것처럼 울라”라고 하지 않는다. “마치 울지 않는 것처럼 울라”라고 말한다. 바로 이 “as if not”(마치 ~하지 않는 것처럼)이 아감벤이 말하는 바울의 메시아적 시간에 일어나는 핵심적 사건이다. 바울은 현실을 완전히 뒤바꾸는 새로운 법을 만들기 위해 현실의 법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의 어떤 법도, 어떤 효과도 그 효력을 중지하는 시간(Inoperative time)을 만들 상상력을 메시아 공동체에게 부여하려 하였다.

현실에서 중요한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 바로 예수 메시아가 죽음에서 부활한 사건을 통해 나타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공동체는 현실의 삶을 지배하는 정치 세력의 영향에 반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감벤은 헤멘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를 내세워서 지금 종말로 치닫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담론을 말해보려 하였다. 그의 대안은 필경사 바틀비라는 인물로부터 시작하는데, 이 사람은 오로지 “나는 그것을 하고 싶지 않다”라는 말만을 되풀이하며 그 어떠한 행위도 하려하지 않는다. 실력 있는 법률 검사관으로서의 삶도 마다하고 더 이상 차라리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는 말을 되풀이할 뿐, 아무런 업무도 하지 않는다. 끝없이 무력한 얼굴을 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혀 살기 시작한다. 결국 이혼하고 혼자서 굶어 죽는 삶을 선택한다. 아감벤은 바틀비의 선택이 어쩌면 출구 없는 삶을 구축하고 끝없이 그 심연으로 사람들을 몰아대는 현대의 자본주의가 가장 두려워하는 방법일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다시 노예라는 단어로 돌아가보자. 바울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이제, 바울이 노예제도를 인정했던 증거가 아니라 그를 통해 노예와 자유인을 분리하는 로마의 법을 중지시키는 효과를 낳게 된다. 로마의 법에 의해 죽은 메시아가 부활함으로 바울이 그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법 제도 안에 살면서도 그 밖의 효과 속에서 삶을 사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바울이 자신을 소개할 때 ‘메시아의 노예’라고 하는 표현은 바로 메시아적 소명 안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효과를 말하는 것이며, 모든 법적 조건들이 변화를 맞이하는 순간을 뜻한다. 그러므로 아감벤의 시각에서 보면 바울의 공동체는 새로운 정치적 조직이나 법을 가진 공동체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전의 모든 정체성이 그 효력을 잃어버리는 시간, 메시아적 시간에 나타나는 메시아적 공동체를 말하고 있다.

참고자료
1. www.ancient.eu/article/629/slavery-in-the-roman-world/
2. DeSainte Croix, Geoffrey Ernest Maurice. 2001. The class struggle in the ancient Greek world: from the archaic age to the Arab conquest. London: Duckworth. (410-430)
3. Bradley, Keith, and Paul Cartledge. 2011. The Cambridge World History of Slavery. Volume 1, Volume 1. (Ch. 12)


한수현
감리교신학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Th.M.), 시카고 게렛신학교에서 목회학을 공부(M.Div)한 뒤, 시카고신학교에서 바울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된 연구 분야는 바울 서신, 복음서, 유대 묵시문학이며, 박사 논문은 고린도전서 15장의 ‘죽은 자의 부활’과 세월호 참사를 연결 짓는 연구 작업의 결과물이다.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 강사로 바울 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한국교회와 사회를 바울 서신과 바울 신학에 비추어 살펴보는 여러 연구들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