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추구하는 사람, 그리스도인

[334호 커버스토리]

2019-07-01     손성실

첫 방문
2011년 화창한 봄날이었다. 홍익대학교 인근에 있는 ‘그릭조이’라는 식당을 빌려 예배를 드리는 ‘은혜와평화교회’를 방문했다. 책으로 읽고, 간간이 사람들을 통해 전해 듣던 메노나이트 교회를 생애 처음으로 대면한 날이었다.  

어린이와 함께하는 예배
첫 예배를 드린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린이와 함께 드리는 예배, 어린이를 위한 설교를 따로 준비하여 진행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예수는 어린아이가 나오는 것을 막은 적이 없지만, 한국교회는 대부분 어린아이와 예배를 함께 드리지 않는다. 초등학생은 오전 주일학교에 나오도록 안내된다. 어린아이를 동반한 교인들은 유아실로 들어간다. 대다수 한국교회는 엄숙한 예배를 위한 명목으로 어린아이를 효율적으로 잘 배제하고 있다.

다양한 공동체의 모습
근 37년을 성서침례교회에 몸담았던 나로서는, 어린이를 위한 설교 외에는 새로 출석한 교회의 전반적인 예배 순서가 낯설었다. 장로교회와 아주 유사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은혜와평화교회 지체 중 상당수가 장로교회에서 성장하고 떠나온 경험이 있는 분들이었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사회학적 분석 개념으로 사용한 ‘아비투스’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신앙의 여정은 삶의 흔적이 되어 남는다. 새로 참여한 교회의 예배 순서를 낯설어한 까닭도 그 때문이었다.

메노나이트 교회도 구성원의 성향에 따라 다양한 공동체의 모습을 보인다. 설교부터 봉사까지 모두가 동등하게 나눠서 맡는 온전한 회중 교회를 지향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리더가 중심이 되어 목회자를 세우는 경우도 있다. 서울에서 메노나이트 교회를 지향하는 은혜와평화교회는 후자에 속했다. 교회에 목사가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한국적 상황이기도 하고, 방문하는 이들에게 매번 교회 공동체의 수평적 관계를 설명하기 어려워 회중 교회를 지향하면서도 목회자를 두는 방식을 선택했다고 한다.

   
▲ 브라질 Araguacema에서 25주기를 기념하여 약 400명 정도의 브라질 메노나이트 신자들이 텐트 구조물에서 모인 장면.(1981년 7월)

제자도, 평화, 공동체
몇 주 예배에 참석하면서 은혜와평화교회 지체들의 신앙 이력과 이들이 왜 메노나이트 교회 공동체를 이루려는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제자도, 평화, 공동체. 아나뱁티스트들이 공유하는 이 세 가지 핵심가치 중 어느 하나가 마음에 꽂혀, 기존 교회에서 더는 신앙의 여정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전에 속한 교회는 ‘거듭남’을 강조했지만, 그 후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해주지 못했다. 명확한 정교분리(政敎分離)를 강조하기에 복음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무감각했다. 지체들 간의 친밀한 교제는 있었지만 교회 공동체로서 지향점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의 경우 제자도, 평화, 공동체 그 어느 것에서도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상태로 ‘떠돌다가’ 메노나이트 교회로 ‘흘러들어온’ 상태였다.

평화교회와 소속감
은혜와평화교회가 메노나이트 교회 공동체의 뚜렷한 특성을 담보한 모습은 아니었다. 2007년 1월 7일 첫 예배를 드리며 시작된 역사가 그리 길지 않았고, 다양한 신앙 배경을 가진 이들이 각자의 색깔을 내며 온전히 어우러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를 따라 사는 제자도를 지향하는 삶, 각자의 삶 속에서 평화를 이루려는 마음, 이전에 자신들이 속했던 곳과는 다른 공동체를 이루고 싶다는 열의는 충분했다. 이들과 말씀을 함께 나누고 성경을 공동으로 해석하는 시간은 매우 뜻깊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말씀을 묵상한 이후 IVF 출신 형제 한 명이 제주 강정마을을 다녀온 경험을 공유하는 시간이 있었다. 해군기지 이슈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 이전이라 나 역시 언론을 통해 대략적인 상황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형제가 며칠을 제주 강정마을에 머물며 해군기지 반대운동에 참여한 경험을 사진을 곁들여 교회 공동체에 설명하는 모습을 보면서 적잖이 놀랐다. 내가 각종 사회문제에 참여한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전에 속한 교회에서는 공동체 지체들에게 사회적 실천을 이렇게 세세하게 공유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늘 ‘교회 안의 나’와 ‘교회 밖의 나’가 따로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전까지는 ‘그리스도인’ 정체성보다는 ‘주체적인 개인 혹은 사회인’의 입장에서 사회적 현안에 참여해왔던 터였다. 그와 달리 이곳 메노나이트 교회에서는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제자도, 평화, 공동체라는 가치 안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아, 내가 평화를 추구하는 메노나이트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구나!’ 하는 충만감을 맛보았다.

   
 

평화의 실천과 제자도
이날부터 나는 ‘메노나이트 교회 공동체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란 정체성으로 강정마을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2010년 ‘생각비행’이라는 출판사를 창업하면서 시작한 블로그에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반대’라는 꼭지로 27번의 기사를 연재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전에는 단지 복음의 개인적인 실천 정도에 그쳤을지 모를 일이 메노나이트 평화신학과 맞닿으면서 삶이 풍성해지고 일상의 실천이 제자도와 긴밀히 연결되기 시작했다.

교회 평가와 공동체의 분리
개인적으로는 메노나이트 교회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은혜와평화교회 공동체는 나눠질 조짐이 보였다. 초기 리더들의 서로 다른 성향과 공동체 지체 사이에 있었던 갈등 문제, 그리고 다양한 구성원이 들어온 탓에 서로가 그리는 교회상(敎會像)이 달라 생기는 이질감 등이 이유였다. 당시에 나는 교회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눠질 것을 예측했다.

우선 목회를 원하는 리더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이 있었다. 몇몇 지체들은 목회자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전통적인 한국교회의 모습을 편하게 여겼다. 회중 교회를 지향하며 지난한 고민을 거듭하기보다는 교회에서 ‘은혜와 감동을 받는’ 경험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다른 한 그룹은 직업을 중심으로 이미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먼 거리를 이동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현실적인 문제가 작용했다. 마지막 그룹은 앞선 두 그룹에 속하지 않는, 서울을 중심으로 회중 교회를 지향하는 이들이었다.

결국 공동체는 목회자, 초기 리더십 평가, 교회의 지향과 개선 등을 묻는 설문을 바탕으로 교회의 큰 방향성을 논의하는, 그야말로 전반적인 ‘교회 평가’를 약 1년 과정으로 시작하기로 결의했다. 다음은 당시 교회 평가서 서문의 일부다.

“이번 평가는 성도 개인과 교회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교회 방향성을 정하는 데 필요한 회중의 의견을 취합하여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며 하나 됨으로 교회를 세워나가자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교회 구성원 전체가 각자의 신앙과 삶을 돌아볼 뿐 아니라 지난 6년간의 교회 사역 및 프로그램, 운영위원회 운영, 재정 운용 등에 이르는 교회 전반의 상황을 함께 평가하고 돌아보자는 목적을 겸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지난 6년간 지속한 교회 돌아보기에서 충분히 다루지 못한 부분들을 짚고 넘어가고자 하며, 교회를 세워나가는 과정에서 드러난 서로의 다름과 이로 말미암아 생긴 갈등을 충분히 소통하여 원만히 해결해 왔는지도 돌아보고자 합니다.”

화해의 여정
처음에는 ‘교회 돌아보기’를 지속하는 필요성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초기 리더십을 인터뷰하고, 구성원 간의 갈등을 들여다보고, 이를 바탕으로 교회 평가서를 구성하고, 평가 결과를 공유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교회의 방향성을 논의하는 사이에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화해의 제자도》라는 책의 저자들은 “화해란 깨지기 쉬운 기나긴 여정”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평화가 없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급박하고 절실할수록 한 걸음 물러서라고 강조한다. 속도를 늦춤으로써 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바로 이것이 핵심이다. 한 걸음 물러서기. 그것은 행동하지 않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적극적인 선택이 된다. 다른 방식으로 주위의 세계를 보고 참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1년의 긴 호흡으로 진행된 교회 평가는 내부 구성원 사이에 존재했던 갈등의 요인과 서로의 실수를 들여다보고, 신앙 안에서 서로 다른 교회상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는 성찰의 시간이 되었다. 다양한 공동체 지체들의 삶과 신앙 여정을 들으며 왜 각자가 서로 다른 교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긴 ‘교회 평가’를 거쳐 2014년 10월을 기점으로 교회는 자연스럽게 나뉘었다.

메노나이트 독서모임
교회 평가와 더불어 몇몇 지체들과 메노나이트 신앙을 공부하는 자발적인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이 모임은 교회가 나뉘고 난 이후에도 이어졌다. 언젠가 메노나이트 교회를 함께 이루자는 비전을 안고서 말이다. 당시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 파송 선교사 한 분이 2016년 여름 즈음 우리 독서모임에 합류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새로운 분들이 독서모임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적게는 서너 명에서 많게는 대여섯 명이 모여 매주 한 권, 때로는 한 권을 몇 주에 걸쳐 논의하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신앙의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2017년부터는 ‘메노나이트 독서모임’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책을 읽고 토론하며 메노나이트 신앙을 공부하면서 제자도, 평화, 공동체의 가치를 추구해 나갔다. 2017-2018년 사이에 많은 책을 함께 읽었다. 여기에는 각자의 관심사, 메노나이트 신앙에 대한 탐구, 교회 공동체를 이루려는 열의가 담겨 있다.

메노나이트 서울모임
2017년 ‘메노나이트 독서모임’이 한창 궤도에 오르던 때, 교회 공동체에 대한 열의를 가진 이들을 중심으로 실질적인 교회를 이루는 과정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언제 교회를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성경공부를 시작하자는 방향성에 합의하여 2017년 5월 21일부터 〈복음과상황〉 사무실을 빌려 요한복음을 읽고 나누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메노나이트 서울모임’에 새로운 방문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평균 참석자가 5-6명 정도 될 때쯤 매달 마지막 주에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서로 돌아가며 예배 인도자가 되어 다양한 형식으로 예배를 드렸다. 우리에게 적합한 예배 형식이 무엇일지에 대한 탐색은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렉셔너리(Lectionary)에 따라 지정된 성경 본문을 한 주일간 묵상하고 A4 용지 1장 정도로 각자 정리하여 나눈 이후 모두가 함께 공동체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나눔 방식은 지금도 이어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성경 말씀을 구현하는 삶
― 누가복음 4장 14-21절 묵상
손성실

2000년 전 공생애를 시작한 예수는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습니다.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종말론자여서 그런 게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 분쟁과 갈등, 욕망과 탐욕, 음란과 방탕의 역사를 반복했던 인간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이전과 다른 역사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전한 해방의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종교적 지식을 독점하고 공고한 신분질서, 지배체제를 종속시키길 원하는 당시 율법학자, 제사장들, 정치 권력자들에게 이런 예수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비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들에게 예수는 실존적인 위협을 가하는 위험한 존재였겠지요.

왜 그랬을까요? 예수의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실존하는 세계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 포로 된 사람, 눈먼 사람, 억눌린 사람이 주체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으로 등장하는 세계를 상상해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아닐까요?

예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고 살아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럴 때 복음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기쁜 소식이 됩니다. 그럴 때 복음은 포로 된 사람에게 해방의 축가가 됩니다. 그럴 때 복음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치료약이 됩니다. 그럴 때 복음은 억눌린 사람의 상한 내면을 고치고 자존감을 회복시켜 풀어주는 메시지가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는 인간이 쌓아온 형식적 구조와 가식적인 체제를 송두리째 무너뜨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형식적인 제사보다 가장 작은 자에게 베푸는 자비야말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 받으시는 제사라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인습에서 벗어나 고통에 신음하는 병자를 고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신학으로 민중을 유린하는 거짓 선지자와 선생들과 대결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예수가 가는 곳에는 가치의 전복이 일어났습니다.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말씀을 듣는 이들의 삶이 뒤바뀌는 기적이 매일 일어났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성경 말씀을 이루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본령입니다. 예수는 그런 가르침을 삶으로 증명했고, 스스로 혁명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자연의 순리를 잘 압니다. 그렇기에 예수가 심은 복음의 씨앗이 이 땅에서 어떤 열매로 나타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예수가 삶으로 가르친 복음은 철저히 현실 지향적이었으나 어느 순간 기독교는 내세 지향적인 종교로 변모해버렸습니다. 그런 곳에 예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차별에 저항할 때, 평화를 지향할 때, 반자본주의적인 삶을 살아낼 때, 창조 세계를 이 땅의 원리로 만들려 할 때 예수는 이 땅에 현현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통해, 공동체적인 삶을 통해, 성경 말씀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 러시아 제국에서 대체복무를 하고 있는 메노나이트 신자들(1907)

평화를 이루는 힘
메노나이트 교회는 말씀을 공동체적으로 해석하며 ‘평화’에 관심을 둔다. 제자도, 그리스도 중심성이 평화를 실천하는 삶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아나뱁티스트 전통 속에서 메노나이트가 ‘평화신학’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도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도와 공동체 지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예수는 폭력과 무력으로 세상을 다스리려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십자가’와 ‘좁은 길’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상징하는 푯대다.

예수의 가르침과 평화는 구분되지 않는다. 복음이 곧 평화를 구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이 말씀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는 까닭은 그것을 이루는 힘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전한 복음은 처음부터 관계 지향적이었다. 회당에서 이사야서 61장을 읽으며 자신을 메시아로 선포한 내용에 등장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가난한 사람, 포로 된 사람, 눈먼 사람, 눌린 사람들이었다. 공동체가 이들을 회복시켜 품어주고, 이들이 마음의 평화를 누릴 때 하나님 나라가 임재한다. 그러므로 예수가 가르쳐준 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도구인 셈이다. 우리는 ‘샬롬의 언어’로 관계를 회복하고, 공동체를 이뤄내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존재들이다. 그렇게 평화를 지향하며 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될 것이다.

 

손성실
‘메노나이트 서울모임’에서 평화를 추구하며 공동체를 향한 여정을 즐기고 있다. 생각비행(ideas0419.com) 출판사를 설립하여 공동으로 운영하면서 은평녹색당 운영위원,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