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를 위한 공적 윤리로서 ‘정의로운 평화’

[344호 커버스토리]

2019-07-01     글렌 H. 스타센

글렌 H. 스타센 교수(1936-2014)는 기독교 윤리학자로 듀크 대학교(Duke University), 남침례 신학교(Southern Baptist Seminary)와 풀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 등지에서 가르쳤다. 그는 신학윤리학, 정치철학, 사회정의, 정의로운 평화사역 이론 등을 통해 전쟁과 평화에 관한 비교 윤리학을 발전시켰다. 선친이 미네소타 주지사이자 미국 대통령 후보로 나왔던 해럴드 스타센인 만큼 정치와 교회, 전쟁과 평화에 관한 관심이 그의 학문적 열심과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아나뱁티스트 침례교도라 부르며, 침례교가 아나뱁티스트와 개혁주의라는 두 가지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라인홀드 니버와 존 하워드 요더를 융합시키는 작업에 혼신을 기울였고, 정의로운 평화(Just Peace)를 그 접점으로 여겼으며, 디트리히 본회퍼를 예시로 제시했다. 아나뱁티스트이자 정의로운 평화주의자인 스타센 교수가 7년 전에 발표한, 하지만 여전히 시의적절한 글을 소개한다. - 옮긴이
 

   
▲ 글렌 H. 스타센 교수


정의로운 평화사역
제가 1981~2년까지 1년간 독일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제로부터 정확히 31년 전인 1981년 10월 10일 역사상 가장 거대한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평화 구현 및 소련과 나토 양편의 핵무기에 반대하는 시위였습니다. 곧이어 두 달간 유사한 규모의 평화 구현 시위들이 암스테르담, 런던, 그리고 유럽 각 나라의 수도에서 일어났습니다. 저의 남침례 신학교 동료 교수들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큰 시위가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고, 게다가 그 시위는 평화 구현을 위한 것인데, 당연히 글렌이 거기 있어야 하는 거 아냐?”

1989년 11월에 제가 동독의 10개 도시를 돌며 설교하러 간다는 것을 그 친구들이 알고는, “글렌이 또 거기 간다는데, 이번엔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며 다시 농담을 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농담을 한 것이었지만, 제가 서독에서 베를린 장벽을 통과해 동독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날 아침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모든 동베를린 사람들이 언제든 자신들이 원할 때 서독으로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공산 치하 동독의 종말이었고, 소련 몰락의 시작이었습니다.

   
▲ 무너지는 베를린 장벽

1995년 대한민국 대전으로 한 주간 강의하러 갈 때, 제 친구들이 “이번엔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글렌이 거기 가면 남북한을 막고 있는 담이 갑자기 무너지고 통일이 되는 거 아냐?” 하고 농담을 했습니다. 제가 대전에 있는 한 대형 침례교회에서 설교할 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교인들이 큰 한숨을 쉬더군요!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북한의 형제 자매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요? 이러한 태도는 남북의 평화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셨나요? 한국 교인들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나요? 아니면 예수께서 서울을 보시며 그들이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울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요(눅 19:41-42)?

정의로운 평화사역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꾸준히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초기의 정의로운 평화사역에 관한 글은 ‘참된 평화구현을 위한 일곱 가지 원칙’이라는 제목의 한국어로 번역되어 <기독교사상>에 실렸습니다. 《정의로운 평화사역(Just Peacemaking)》은 이미 3쇄에 들어갔는데, 이 책은 미국 개신교와 가톨릭 학자들에 의해 저술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네 명의 선도적인 장로교 학자들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무슬림과 유대인 학자들도 새로운 책 저술에 참여해서 정의로운 평화사역의 열 가지 실천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나온 책이 《종교 간 정의로운 평화사역》(Interfaith Just Peacemaking)입니다.

정의로운 평화사역의 열 가지 실천은 제가 예수의 산상설교와 바울의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발전시킨 내용입니다. 전적으로 성서에 기초하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여 하나의 공적 윤리로 발전된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과학 안에서도 예수께서 가르치신 평화사역의 실천과 유사한 방식이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국가들 사이에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연구 발전시킨 것입니다.

몇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왜 기독교 윤리에는 변혁적 주도(transforming initiatives)로서의 평화사역의 윤리가 없는 걸까요? 왜 우리는 계속해서 전쟁이 정당한가 아닌가 설전을 벌이며 평화주의와 정당 전쟁론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대치시키면서 실제 평화로 이끄는 실천, 곧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신 요점에는 관심이 없는 걸까요? 복음은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에 관한 것이 아니지요. 예수께서 전하신 메시지 핵심은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으로 뚫고 들어오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이 통치는 평화사역을 주도할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하는 것이지, 보다 많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허가를 받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지요. 성서 현실주의(biblical realism)는 현실적으로 죄를 진단하고 구원의 길을 찾는 것에 관한 것이지, 단지 어떤 고결한 이상을 단언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의로운 평화사역의 윤리가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살고 가르치셨던 시기는 로마제국의 지배에 대한 유대인들의 분노가 쌓여갈 때였습니다. 때로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그룹을 이끌던 사람들은 그룹 전체를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거대한 저항 전쟁의 전조가 보이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복음서에서 성전이 파괴될 것을 여섯 번 예언했습니다. 도마복음에서 한 번 언급한 것도 포함해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로 일어났습니다: 66년에 반란이 시작됐고, 70년에 로마는 성전과 예루살렘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은 그러한 파괴가 있던 직후에 쓰였습니다. 정신적인 폐해, 그리고 예수를 따르던 유대인 제자들과 다른 유대인들 사이의 화해의 필요를 보며 쓰인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평화사역은 단지 비현실적인 이상이 아니라 불의, 끓어오르는 분노를 건설적으로 다루고 어떤 적대감을 해결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이행하는 구체적인 지침입니다. 산상설교는 현실 세계의 적대감, 폭력, 그리고 하나님의 평화 의지를 마음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이 주어진 당시 사회 상황 속에서 그 의미를 연구해야 합니다.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 사이의 적대감이 끓어 넘쳐 반란이 일어나 로마군에 의해 성전이 파괴될 것(그리고 많은 유대인이 죽임당할 것)을 예수는 예언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얄팍하고 추상적인 원리로 축소시키지 말아햐 합니다. 총체적인 관점으로 1세기 상황을 의식하면서 예수의 가르침의 생생함과 구체성을 우리의 사회 상황 속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 어떠한 실천이 예수께서 사셨던 원래의 상황 속에서 말씀하신 10리를 가라는 것과 유사한지 연구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9.11 테러 후에 몇몇 교회들은 교인들을 보내 이슬람 사원들을 지키게 했는데, 이는 무슬림들을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사람들이 테러를 반대하는 무슬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집트 독재자 무바라크를 실각시킨 ‘아랍의 봄’(Arab Spring)에서도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들이 함께 연대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유추적 상황화”(analogical contextualization)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제가 원하는 것은 원래 상황 안에서의 의미 연구와 현재 사회적 상황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주의 깊게 함으로써 유추가 단지 창의적인 것만이 아닌, 사회적 의미 속에서 유사성을 찾아내는 작업이 되기 때문입니다.

적과의 협력적 갈등 해결
산상설교의 일부인 마태복음 5:21-26에서 예수께서는 먼저 십계명 중 살인에 관한 전통적인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리고는 지속적으로 분노하고 모욕하는 것이 심판으로 이끄는 악순환(vicious cycle)이라고 진단합니다(5:22).

그 가르침의 정점은 변혁적인 주도(transforming initiative)인데, 단순히 살인이나 분노를  부정적으로 금하는 것이 아닌,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예수는 직접적으로 명령합니다: “가서 속히 화해하라.”(5:25) 이것은 어떤 플라톤적인 이상이나, 가치, 선택, 혹은 금기나 어려운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관계를 풀거나 화해를 위해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의 실천(practice)입니다. 여기서 실천은 규칙에 기초한 규범적인 행위인데, 제자 공동체인 교회에 의해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자신들과 다른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으로 봅니다. 그들은 사회 안의 다른 사람들도 가서 화해하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하는 행위를 하도록 주창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과 인간이 적대관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행하신 은혜의 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오셔서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화해의 대화를 위해 찾아가는 길을 성육신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많은 사회적 약자들의 삶 가운데로만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권력자들 가운데로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단지 다정하고 부드러운 이야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때때로 충돌하며 회개를 외치기도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예언자 전통에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에 빠진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적들과 대화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대화는 의로운 자들에게 주어진 상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과 다른 것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갈등 해결은 종종 ‘충돌’과 ‘회개’의 메시지를 포함합니다.

어떤 것이 우리의 상황에 맞는 유추가 될 수 있을까요? 이란, 팔레스타인, 이라크, 레바논 등의 국가들이 미국의 반(反)이슬람, 반(反)아랍 정책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지요.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아동, 여성, 노인을 비롯한 비전투원들을 공격한 테러리스트들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리고 교회가 이데올로기에 분노하고 적대감을 강화하는 상황 속에서 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적합한 유추적 실천은 협력적 갈등 해결입니다. 이것은 정의로운 평화사역에서 제시하는 10가지 실천 사항 중 하나입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지금까지 경멸해온 북한 사람들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든 기회가 왔을 때 북한 사람들과 화해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는 이유가 북한이 독재에 의해 통치되고 있고, 아마도 우리처럼 기독교 교육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또 경제적으로도 가난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우리는 우리의 형제자매뿐 아니라 적들에게도 가서 존중하는 마음으로 화해하고 갈등 해결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단지 모호한 이상이 아니라 복음에 근거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명령입니다. 갈등 해결 분야는 우리 시대에 광범위하게 발전되어 왔는데, 학문적 영역뿐 아니라 노사관계, 국제관계, 그리고 결혼관계 등의 일상적인 영역에서도 그렇습니다. 이것을 정의로운 평화사역의 윤리에서는 협력적(cooperative) 갈등 해결이라고 부릅니다. 적을 협력적인 동반자로 대할 것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관습, 문화, 신앙, 그리고 주도권을 존중하며 그들이 해결책을 찾는 데 기여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폭력 직접 행동과 ‘독립적 주도’
마태복음을 보면 ‘눈에는 눈’이라는 전통적 가르침이 나옵니다(5:38-43). 그러고는 “복수심에 불타거나 악한 수단으로 보복하지 말라”고 나오는데, 이것이 악의 순환(vicious cycle)입니다. 변혁적 주도는 우리가 단순히 압제자에 순응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을 놀라게 하는 창발적인 주도권을 행사하며 대결하되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유지하라고 합니다. 

비폭력 대결을 위해 변혁을 지향하며 우리 시대에 적합한 유추적인(analogous) 실천을 하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비폭력 직접 행동”이라고 하는데 정의로운 평화사역의 실천 중 하나입니다. 예수 시대에 유대인들은 비폭력 저항 전략을 로마 총독에 대항해 세 번 행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30년 전, 반민주적 정권에 대항해 일어난 시위(광주민주화운동-옮긴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비폭력 직접 행동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독재자들을 무너뜨리고 독재체제에서 민주체제로 변혁시키며, 혁명전쟁을 방지함과 동시에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랍의 봄’에서 비폭력 직접 행동은 투니시아와 이집트의 독재자를 끌어내렸습니다. 오는 6월에 저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서 정의로운 평화사역에 관해 수업을 진행하게 됩니다. 웨스트뱅크 경험을 통해 폭력은 잘 작동하지 않으며 비폭력 행동이 훨씬 더 소망을 가져온다는 것을 배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비폭력 행동, 교육, 그리고 사회를 일으키는데 헌신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소망을 주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아랍의 봄'을 맞고 있는 이집트 타히르 광장


하지만, 가자(Gaza Strip)에서 하마스는 여전히 간헐적으로 폭력을 지원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당한 것의 열 배 폭력으로 보복하고 있습니다. 폭력은 평화를 위해 작동하지 않습니다. 비폭력 직접 행동이 독재자 에리히 호네커를 끌어내리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바로 그때, 저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 혁명 속에 단 한 명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비교적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의로운 평화사역의 실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 “독립적  주도”(independent initiatives) 전략입니다. 이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 같은 것을 말합니다. 물론 그의 정책 행사가 바른길이었느냐 여부는 논쟁이 있긴 합니다. 다른 예로, 냉전이 끝나가면서 조지 H. W. 부시와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독립적 주도를 통한 협력으로 양국의 핵무기를 단시간 내에 반으로 축소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두 개의 팔레스타인 정부 사이에도 이러한 독립적 주도가 필요합니다.

비폭력 직접 행동과 독립적 주도, 이 두 가지 전략은 마태복음 5:38-42에 나오는 예수의 가르침과 연결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단지 수동적으로 기다리시지 않고 화해를 위해 주도적으로 일하신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통치의 신학과 기본적으로 같은 신념에 기초합니다:

이러한 … 실천들은 기독교 평화사역의 일곱 가지 본질적인 요소들을 구현한다: (1) 단순히 수동적으로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평화사역을 주도하도록 힘을 부여하는 선행하는(proactive) 은혜의 길을 따른다; (2)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인정하고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닌 평화사역을 위해 자신들이 져야 할 책임을 진다; (3) 나쁜 행동이나 잘못된 행동을 거부하면서 적의 존엄성과 이익을 긍정해준다; (4) 상대방과 대결하면서도 그들을 평화와 정의를 위해 일하도록 초대한다; (5) 이전에 원수되었던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버림받았던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고 포용하여 공동체로 초대한다; (6) 이러한 실천들은 역사적으로 구현되었거나 현재 일어나는 중이다; (7) 이러한 실천들은 경험적으로 입증되었다. 국제 관계나 국내 갈등 속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갈등과 불의에 대한 책임 인정, 회개하고 용서 구하기
회개와 용서는 예수가 전한 메시지와 복음, 그리고 기독교 신학의 핵심입니다. 산상설교의 한 부부인 마태복음 7:1-5절에 보면 회개하고 자신의 눈에 들보를 빼라는 외침이 나옵니다. 또한 이러한 실천은 주기도문 안에 있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해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청원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유추적 (정의로운) 평화 실천은 갈등과 불의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회개와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이제야 2차대전 당시 행해진 끔찍한 잔혹 행위들에 자신들이 연루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은 국가 차원에서 히틀러 당시에 자신들의 공모를 극적이고 파급적인 방식으로 인정했고, 그것이 다른 이웃 국가들과의 화해를 이루어가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만약 일본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놓고 회개의 깊이를 더할 수 있다면 일본과 중국, 일본과 한국 관계의 화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남북 관계에 있어서도 그동안 서로가 적대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면, 화해를 위해 큰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독일이 타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실천을 주도하도록 한 공로를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가 쓴 《윤리학》(Ethics)의 매우 탁월한 부분에서 본회퍼는 자신과 교회와 독일의 죄를 고백합니다. 1945년 이후 독일의 몇몇 교회들은 본회퍼의 고백을 이어받아 그와 유사한 자신들의 고백문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고백과 행동은 빌리 브란트 수상과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독일을 대표해서 극적인 공개 회개를 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 폴란드 바르샤바에 조성된 빌리 브란트 기념비의 조각판. 독일 총리였던 그는 1970년 바르샤바의 유태인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속가능한 경제 정의,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
마태복음 6:19-34은 경제 정의를 실천하도록 가르칩니다: 자신을 위해 돈을 비축하지 말고 우리의 우선순위에 하나님의 정의와 통치를 구하라고 합니다.

우리 시대에 맞는 유추적 (정의로운) 평화 실천 중의 하나는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경제 발전”입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그리고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들에겐 정의로운 정부와 법체계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우리 시대에 적합한 또 하나의 유추적 정의 실천을 지지합니다: “발전된 민주주의, 인권, 그리고 종교 자유”가 그것입니다. 신약학자 크리스토퍼 마셜은 “인권이란 범주는 이제 도덕적 논쟁에 있어서 거의 세계통화(universal currency)가 되었다. … 인권의 개념은 깊이 있고 독특하게 성서 이야기에 자리 잡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인권에 대해 특별히 말할 것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개혁주의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또한 신 중심적으로 기초된 인권에 관한 역사적, 신학적, 철학적으로 통찰력 있는 논쟁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독재와 불의한 경제체제에 대항해 민주주의, 인권, 그리고 서민들의 기초 필요를 해결해주는 경제체제를 만들려는 국제적 투쟁에 한국은 한몫을 해왔습니다. 거의 모든 남미의 국가들은 권위주의나 독재 정부로부터 민주주의로 움직였습니다. 여기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인권을 가진 민주주의 국가 중 어느 나라도 인권을 가진 다른 민주주의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적이 20세기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권을 위해 일하고 그래서 민주주의를 위해 압력을 가하는 정의로운 평화사역의 실천은 전쟁을 방지하고 정의를 향해 가도록 극적인 영향을 미쳐왔다는 것입니다.

테러리스트를 모집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지된 불의에 대한 원한 감정입니다.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박탈감과 독재자에 대한 지지가 그러한 감정입니다. 정의로운 평화사역은 부시 대통령의 민주주의를 확산하려는 노력을 지지하지만, 전쟁을 통해 그것을 이루려는 뜻에는 반대합니다. 정의로운 평화사역은 전쟁으로 민주주의 확산을 시도하는 것에 분명히 반대합니다. 전후 이라크에서 일어난 다수의 죽음, 증오, 종교〮민족 간의 갈등은 전쟁 후에 일어난 문제들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비폭력 직접 행동, 인권의 강조, 국가 간의 공조로부터 나온 압력으로 인해 최근에 민주주의로 전환된 국가들은 그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의로운 평화사역은 부시 전 대통령이 아프리카 지원을 늘리고 밀레니엄 챌린지를 통해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 50억 불까지 경제 원조를 늘리겠다는 약속을 지지하며, 오바마 대통령과 그의 후임자들, 그리고 의회도 이러한 약속을 이행해나갈 것을 촉구합니다.

국제 협력
예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레위기 19:17-18이 우리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럼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요?” 하는 질문이 던져집니다. 예수께서는 자연 현상의 이야기로 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해와 비를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을 생각할 때 친구뿐만 아니라 적들도 포함해야 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단지 태도나 개인 관계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지역사회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적대적인 다양한 사람들의 관계 위에도 다스리신다는 것에 기초합니다. 

지금 정의로운 평화사역 실천은 국제 협력을 증대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화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실증적 자료들은 국제 협력에 적극적인 국가들이 전쟁을 일으키거나 침략을 당하는 빈도가 적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학준 교수는 ‘미국만이 지금이 세계화 시대라는 것을 모르는 거의 유일한 국가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공격 무기와 무기 거래량을 축소하기
국가간의 전쟁은 부분적으로 빈도가 줄었는데, 그 이유는 전쟁 비용이 전쟁 이득보다 더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무기들이 매우 강력해져서 타국의 보복이 다시 복구하기에는 너무 파괴적입니다. 예외가 있는데, 한 국가가 자신의 공격 능력이 상대 국가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어서 그들이 다시 보복할 수 없을 것이라 믿을 때입니다. 세르비아가 바로 그런 유혹에 굴복해서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코소보와 전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미국도 이라크, 아프카니스탄, 그리고 알 카에다보다 압도적인 공격력을 가졌고, 부시 대통령은 그 유혹에 굴복해 그들과 세 번의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결과는 좋지 않았지요. 정당한 평화실천은 공격 무기 보유량을 축소하게 합니다. 거기에는 공격무기 거래도 포함됩니다. 그렇게 해서 전쟁을 시작하려는 유혹 또한 감소시킵니다. 1988년부터 1995년까지 7년간 개발도상국들에 의한 무기 구입량이 이전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을 만큼 축소되었습니다.
이것은 칼을 드는 것에 대한 예수의 책망과 연결됩니다.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마 26:51-52)
 

풀뿌리 평화사역 그룹을 격려하기
마태복음 5:1-2과 7:28-29에 보면 예수께서 산상설교를 제자단과 군중에게 가르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개인들만을, 혹은 예루살렘에 있는 고위층만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그들도 가르치시긴 하셨지만), 풀뿌리 제자단을 모으시고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의 메시지를 퍼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의 중요한 행적 중 하나는 식탁 교제였는데, 그 자리에서 더 친밀하게 가르침이 행해졌습니다.

예수는 여러 회당과 마을에서도 가르치셨는데, 그룹들을 만드시고, 그들 안에서 평화를 이루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마침내 이 사람들이 교회들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로서, 함께 예배, 가르침, 그리고 서로의 필요를 채울 수 있도록 나눕니다. 빌레몬서를 제외한 다른 모든 바울서신들은 특정한 도시에 있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쓰여진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인 그룹들 안에 있었던 신실함과 자정(self-correction)의 과정을 그린 드라마입니다.

정의로운 평화사역은 목사들과 교회 리더들이 통전적인 예수의 길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가운데 확산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교회 안의 소그룹들이 예배, 성경공부, 평화사역을 함께 행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개인 혼자서는 지역사회와 교회, 혹은 평화냐 전쟁이냐를 결정하는 정부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 데 있어 무력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그룹으로 함께 모여 평화사역을 하는 단체들과의 네트워크 연대를 하면 시의적절한 정보를 얻고 다른 그룹들과 발맞춰 행동을 취할 수 있어서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기독교 평화사역자들은 사역과 증거뿐 아니라 연구와 토론을 통해서도 평화사역에 참여하게 됩니다. 각각의 구체적 미션을 가진 소그룹들이 교회의 소명의식(sense of mission)을 계발하는 데 하나의 열쇠가 되는데, 이것은 우리 시대 교회 갱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글렌 H. 스타센
기독교 윤리학자로 듀크 대학교, 남침례 신학교, 풀러 신학교 등에서 가르쳤다. 신학윤리학, 정치철학, 사회정의, 정의로운 평화사역 이론 등을 통해 전쟁과 평화에 관한 비교 윤리학을 발전시켰다. 한국어로 번역된 책으로는 《평화의 일꾼》 《산상수훈으로 오늘을 살다》 《하나님의 통치와 예수 따름의 윤리》(공저) 등이 있다.

번역_허현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인 교회는 지금 여기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가정과 교회, 지역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을지 길을 찾는 중이다. 미국 메노나이트 교단 소속으로, 아내 Sue Park-Hur 목사와 함께 LA에서 한인 메노나이트교회와 다민족교회의 lead pastor로 섬겼고, 아시안화해센터 ReconciliAsian의 co-director, Anabaptist Mennonite Biblical Seminary 이사, 미국 메노나이트교단 Journey Forward reference team에서 다문화, 다민족의 사람들을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