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온 현주 씨, 응웬 티 프엉

[344호 다르거나 혹은 같거나] 로그인

2019-07-01     김영준


#01
인터넷 채팅방에 아무나 들어오기를 현주 씨는 종일 기다렸다. 가족의 이름에 초록불이 들어오는 순간이 그날 처음 사람과 대화하는 시간이었다. 한국에 와서 첫 1년 동안 한글을 처음 배우는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가르치는 학원에서 한글과 한국어를 배우며 한국 생활을 열심히 준비했지만, 아는 사람이 없어 외로웠다. 인터넷 채팅방에 들어가서 베트남 가족을 기다렸다. 가족 이름에 초록불이 들어오면 바로 접속하기 위해 현주 씨 아이디는 항상 로그인 상태였다.

#02
현주 씨의 베트남 이름은 ‘응웬 티 프엉’(NGUYỄN THỊ PHƯỢNG)이다. 이름 ‘프엉’을 한국어로 풀면 ‘꽃’이다. 고향 하이퐁(Hải Phòng)은 항구 도시다. 아버지는 조기, 꽃게 등을 잡는 어부였고, 통통배를 조립해 팔기도 하셨다. 통통배를 조립할 때면 밤새워 불침번을 서기도 했는데, 현주 씨는 열 살 때부터 한밤중에 혼자 배에 탄 채 조립중인 통통배를 지키기도 했다. 무서웠지만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호롱불을 켜고 공부했었다. 반딧불과 눈빛에 의지해 공부하여 공을 이뤘다는 ‘형설지공’의 차윤과 손강처럼 공부했던 현주 씨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9년 동안 한 해도 빠뜨리지 않고 ‘호치민상’을 받았다.

가난했다. 막냇동생이 태어난 직후 어머니는 뇌졸중으로 잘 걷지 못하셨다. 통통배를 타는 아버지의 수입으로 엄마의 병원비와 동생들의 학비를 대기 어려웠다. 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신발 공장에 취직했다. 열일곱 살 청소년은 취직을 할 수 없어서 옆집 언니 신분증으로 서류를 위조해서 중국인이 경영하는 신발공장에서 3년 동안 일했다. 일하는 내내 공부하고 싶었다. 막상 동생들은 공부를 그닥 좋아하지 않아 현주 씨가 대신 공부하고 싶었지만, 현주 씨는 끝내 학업을 잇지 못했다.

스무 살,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지금 남편을 소개 받은 후 이틀 뒤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을 진짜 한 건지 실감나지 않았고, 드라마 〈천국의 계단〉을 통해 만났던 한국에 대한 막연한 호감만으로는 이민 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 헤아릴 수 없었지만, 아픈 엄마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 다행히 인상이 나쁘지 않았던 남편은 일터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일하면서 꾸준히 공부하는 남편과 결혼한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처음 계획했던 대로 아픈 엄마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드리기 위해 빨래방에서 하루 4시간 신발을 빨았다. 자동차 부품, 볼펜 부품 따위를 조립하는 부업을 하기도 했다. 남편은 성실했고 열심히 일했지만, 베트남 가족을 돌보는 일까지 남편에게 의지할 수 없어서 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엄마의 병은 점점 깊어졌다. 뇌에 종양이 생겼다. 기독교인이었던 남편을 따라 교회에 가게 되었고, 저녁마다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며 함께 예배드렸다. 남편은 새벽예배도 드리고, 금식기도도 자주 하는 신실한 사람이다. 남편만큼은 아니지만,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성경말씀이 나침반이 되었다. 현주 씨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다.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며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 이사야 41:9-10

두려웠냐고 넘겨짚으며 물어보았다. 현주 씨는 당연하지 않겠냐는 듯, 목사가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약간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섭죠. 한국에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데 의지할 사람 남편밖에 없는데 두려웠죠. 과연 잘 선택했을까 걱정도 되고, 두렵고, 부모님 떠나서 한국에 온 거는 내가 잘 선택했을까, 부모님께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잘 도와줄 수 있을까, 남편 정말 좋은 분일까, 나한테 사랑할까, 애기 낳고 나서 혹시 (이혼당하면)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 그런 두려움들이 많았죠, 이혼당하게 되면 베트남에 어떤 얼굴로 돌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며 엄청 두려웠었죠.”

바빌로니아로 끌려와서 유배 혹은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던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국경을 넘어와 무섭고 두려웠던 현주 씨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예부터 하나님은 경계를 넘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셨으니까. 아브라함, 요셉, 야곱, 모세도 당시 국경을 넘었던 이주민이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요셉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선 현주 씨의 하나님이다. B.C.587년에 유다가 망했을 때 유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국경 너머 여기저기로 흩어져야 했다. 국경을 넘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셨는데, 역시 현주 씨에게도 말씀하셨다.

“딱 읽으니까 마음에 쏙 들어가는 그런 감정이 들었어요.”

야속하게도 뇌종양으로 투병하던 엄마는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엄마를 돕기 위해 한국에 왔는데, 한국에 온 지 5년 만에 돌아가셨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현주 씨는 교회에 가기 싫어졌다. 성경도 잘 읽지 않고, 기도도 뜸하다. 아직 하나님한테 화난 게 풀리지 않았다.

   
▲ 검정고시 준비모임 (사진: 김영준 제공)


#03
현주 씨와 처음 대화했던 건 2016년 가을이었다. 현주 씨는 베트남에서 이민 온 친구들과 함께 ‘민들레와 달팽이’를 찾아왔다. 검정고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이주노동자들이나 결혼이민자들은 주로 한국어를 공부하고 싶어 하고, 그중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이 한국어능력시험을 준비하곤 하는데, 검정고시를 공부하고 싶은 경우는 흔치 않은 터라 이유를 물어보았다.

한국에 와서 결혼을 하고 떠듬떠듬 한국말을 배우며 아이들을 낳아 키웠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이 이제 엄마보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잘하면서, 베트남 말로 수다 떠는 엄마를 무시하는 경우도 더러 있고, 학교에서 가정으로 보내는 통지문들을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워졌다며, 손등으로 눈시울을 훔친다. 아직 어린 초등학생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공부해야 알 수 있지 않겠냐며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싶다고 했다.

김 목사는 검정고시를 치러본 적도 없고, 무얼 준비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국경을 넘어와 씩씩하게 사는 나그네들의 젖은 목소리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부터 시작하는 거니까, 할 수 있겠지 생각하고 자원봉사자들을 모아 이주민을 위한 검정고시 교실을 꾸렸다. 처음 검정고시 기출문제를 나눠주고 풀었을 때, 평균 30점 정도 나왔다. 문제를 푸는 게 어렵다기보다, 시험지에 나오는 한국말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시험지에 나오는 한국말이 일상에서 쓰이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험지에 나오는 문어체 한국어가 낯선데다가 과학 시험지에 나오는 액화, 응결, 승화 따위의 단순 개념도 설명하기 난망했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물과 유적 등에 대해선 아마추어 자원봉사자 교사들도 충분히 알진 못했다. 초졸과정 시험을 앞두고 모의고사를 치르고 조촐한 파티를 하던 날, 김 목사도 대입시험 치르러 가는 수험생 둔 아비마냥 긴장되고 떨렸다. 불합격할 경우의 상심을 떠올리며 막막했었다. 그런데,

한 번에 덜컥 합격해버렸다. 아마추어 교사들과 이민자 학생들이 토요일마다 4시간씩 공부했는데, 2017년 4월에 초졸과정 시험을 너끈하게, 2018년 8월엔 중졸과정 시험은 겨우, 2019년 4월에는 고졸과정마저 넉넉하게 합격해버렸다. 고졸과정은 검정고시 전문학원에 다니긴 했지만 3년이 채 안 되는 기간, 초중고 검정고시 전 과정에 합격할 줄, 처음 30점짜리 시험지를 받아봤을 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 (사진: 김현주 제공)
   
▲ '프엉'이라는 이름대로 하얀 꽃 같은 아오자이를 입고, 현주 씨는 한국의 학생들과 접속한다. (사진: 김현주 제공)

#04
당시엔 예상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초등학교 과정 수업을 할 때에도 국내 어떤 대학원 수업보다 뜨거웠었다. 2016년 겨울은 참 추웠고, 김포 신도시 외곽에 있는 ‘민들레와 달팽이’에 오려면 시내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꽤 걸어와야 했지만, 날씨 때문에 휴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저녁을 먹고 오지 못한 학생들은 빵, 과일, 과자를 책상에 놓고 먹으면서 공부를 했지만, 한순간도 산만하지 않았다. 과자 바삭거리는 소리, 과일 와삭거리는 소리는 연필심 사각거리는 소리보다 크지 않았다. 카페 한편에 칠판을 놓고 테이블을 모아 강의하고, 테이블 위에는 문제집뿐 아니라 음식도 널려 있고, 아이들이 엄마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곤 했지만, 자유로운 듯 흐트러지지 않았다. 초졸검정고시 문제집을 주입식으로 공부하며 머리는 아팠지만 심장이 뛰었다.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 중 현주 씨는 가장 우수했다. 머리도 좋았겠지만, 심장이 좋았다. 절실한 맘으로 공부했다. 현주 씨가 합격한 건, 돌아보니 당연하다.

#05
검정고시 합격 소식을 들은 후 전화로만 축하 소식을 나누고, 꽤 오랜만에 현주 씨가 일하는 김포이주민센터에서 만났다. 현주 씨는 인사하자마자 대뜸 독거노인이나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고 했다. 베트남 사람들로 구성된 봉사단체를 조직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봉사처를 연결해달라고 한다. 한국에서 일하는 베트남 사람들이 독거노인이나 장애인들을 만날 수 있는 고리가 무엇일지 생각하며, 대답할 만한 시간을 벌기 위해 자초지종을 물었다. 베트남 사람 스물다섯 명이 2019년 2월, ‘중못 짜이 띰’(CHUNG MỘT TRÁI TIM)이라는 봉사단체를 조직했고, 대두증(Macrocephaly)을 앓고 있는 베트남 어린이를 위한 치료비를 모금하고, 베트남 산간 지역 학교 학생들을 위한 학용품 지원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인들을 위해 도움이 필요한 어르신들이나 장애인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중못 짜이 띰’은 ‘한마음’이라는 뜻이다.

‘중못 짜이 띰’의 대표 현주 씨는 김포이주민센터(대표: 최영일 목사)의 사무국장이기도 한데, 체불임금, 산업재해, 직장 이동, 출입국 관리 등 문제들로 어려움을 겪었던 이주민들이 현주 씨를 통해 상담하고 통역 지원을 받은 후 함께 봉사단체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현장 근무로 바쁜 남편의 아내이고, 초등학생 아들 둘의 엄마이고, 혼자 남으신 친정아버지의 딸이고, 이주민을 지원하는 시민단체의 사무국장이면서, 고등학교 검정고시 시험을 준비하던 중에, 베트남 사람들을 조직해 봉사단체를 꾸렸다니, 이 사람 참.

#06
가끔 하얀 아오자이를 입는다. 초등학생과 유치원생들에게 다문화교육을 할 때다. 다문화교육을 할 때 강의만 하지 않는다. 학생들도 베트남 옷을 직접 입어보기도 하고, 현주 씨가 준비해온 베트남 음식을 먹기도 한다. 프엉(PHƯỢNG)이라는 이름대로 하얀 꽃 같은 아오자이를 입고, 현주 씨는 한국의 학생들과 접속한다. 하루 중 어느 한순간 로그오프 된 채 지나가는 시간이 없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베트남에 사는 가족들과 접속하기 위해 항상 로그인 상태로 채팅방을 열어두었던 현주 씨는, 한국 생활 13년이 넘은 요새는 채팅이 필요한 한국인과 베트남 사람을 위해 여전히 로그인 중이다. 고졸검정고시까지 통과한 이제는 사이버대학에 진학해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려고 한다. 아프고 가난했던 엄마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한국에 왔었던 마음 그대로, 쌀이 없어 고구마로 연명하는 산간지대 사람들, 병원비가 비싸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는 환자들, 부모 잃은 소년 가장들, 전쟁 후유증으로 짐작되는 대두증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을 전문적으로 돕고 싶다. 

#07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또 하나님의 약속이었을까. 현주 씨에게 두려움이 보이지 않는다. 아오자이 입고는 백학처럼 훠얼훨, 참 잘도 산다. 하나님께선, 채팅방을 열어두시고 항상 로그인 상태일 거다. 훠얼훨 나는 백학이, 잠시 날개를 쉬고 다시 접속하기를 기다리실 터다. 


김영준
소설을 좋아하고, 그림을 찾아본다. 《그림 속 성경이야기》라는 책을 썼고, ‘문학 속 성경이야기’라는 모임을 진행한다. 발달장애인 지원을 위한 사회적협동조합 ‘파파스윌’의 조합원이다. 이주민들과 함께 검정고시를 준비한 인연으로 이주민과 선주민이 함께 공부하는 교육협동조합을 준비 중이다. IVF 사회부 간사이고, 민들레교회 목사다. 김포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