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여기, 복음을 묻고 말하고 살기

[345호 커버스토리]

2019-07-30     박대영

오늘 여기에서 복음을 ‘묻다’

“여러분의 청중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메시지를 들었는데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메시지를 오해했든지 아니면 당신이 제대로 전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급진적인 메시지를 듣고도 삶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진 피터슨이 한 말이다. 루터가 성경을 읽으면서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라고 중얼거렸듯이, 결국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썼다. 독일어 문맹률이 95%에 이르던 시기, 라틴어 식자율 1%에 불과한 시기에,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라틴어로 썼다. 황제 카를 5세 앞에서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의 양심은 신의 말에 사로잡혀 있다. … 나는 내 주장을 철회할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는 것은, 확실하기는 해도 득책(得策)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시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복음 대신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복음을 위해 그가 배신하지 않고 용납할 수 없는 세상은 없었다.

     
 

복음은 말 그대로 “좋은 소식”(good news)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뉴스’다. 그것은 권면도, 조언도, 홍보전단지도 아닌 ‘뉴스’다. 이를 처음 전한 사람들은 그 소식에 생명과 삶을 걸었다. 단지 믿으면 죄를 용서 받고 죽으면 천국 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첫 청중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도 그것은 살아온 모든 삶을 재해석하고, 오늘 우리 앞에 놓은 모든 현상들을 재평가하고, 전혀 다른 현실을 수용하고,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미래를 기다리는 존재가 되게 하는 소식이다. 그것은 분명 ‘좋은’ 소식이지만, 모두에게 좋을 수는 없다. 복음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환영하는 이들에게만 좋은 소식이기 때문이요, 내가 믿고 의탁해온 큰 이야기(meta-narrative), 그래서 참여하고 있는 이야기 대신에, 그 오랜 이야기만을 참(truth)이자 현실(reality)로 인정하고, 그 하나님 나라 이야기로,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의 이야기로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는 사람에게만 ‘좋은’ 소식이 되기 때문이다.

그 복음은 새 시대의 이야기이고, 새 통치자(lordship)의 이야기이고, 새로운 가치(value) 즉 존재 방식(life-style)의 문제이다. 그것은 기존의 상식과 당대의 기성권력이 만든 상식과 룰과 가치를 뒤엎고(upside-down) 뒤집는(inside-out) 전복적인 주장이다. 그것은 점잖은 권유가 아니라 전격적인 습격이다. 복음은 미래가 현재 속으로 쇄도해 들어와 소망이 단지 미래의 바람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부터 누리는 현실이라고 말해주는 소식이다. 따라서 복음을 수용하는 순간 우리는 현재에 두 발 딛고 살아가는 동시에 미래를 살게 되며, 이 세상 속에서 살지만 이 세상에 포박되어 살 수 없는 자유인으로서 존재하는 이중 국적자가 된다.

복음의 왜곡 1: 세속화
이 세상도 나름 자기만의 복음을 전하여 추종자들을 거느린다. 생사여탈권을 주장하는 각양의 이야기들을 설파한다. 시대를 달리 할 뿐, 그 이야기들은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 따라서 세상은 복음의 경연장이고, 시대마다 복음의 각축전이 벌어진다. 하나님의 복음은 반(反)복음과 맞서고 유사복음과 차별화하면서 존재해왔다. 세상은 늘 단단하고 딱딱하고 빈틈이 없어 보인다. 거대하고 막강하고 도저히 흔들릴 것 같지 않다. 그렇지만 놀라운 것은 그렇게 막강한 세상이 단 한 번도 그 불온한 복음을 완전히 잠재우거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압살하거나, 그 소수 무리들의 모임이요 내세울 것도 없는 세상의 주변인들 모임인 교회를 완전히 침묵시키는 데 단 한 번도 성공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무수히 파괴되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교회를 박해한 제국은 번번이 사라졌으며, 교회가 세상에게 둘러싸였지만 세상이 그 말씀을 가두지 못했다. 그 말씀은 건재했고, 발화(發話)된 대로 역사를 만들었지만, 교회를 위협했던 세상의 추상같은 명령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오늘 우리 시대는 어떤 방식으로 복음이 위협을 받고 있는가? 네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겠는데, 첫째는 복음의 세속화(世俗化)를 들 수 있다. 이것은 복음이 이 세상 이야기, 이 세상 이데올로기에 포박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세상 이야기와의 선명한 차별화를 거부한 채 그들의 가치와 목표를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현상이다. 무엇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동적이고 목적 있는 역사 주관과 창조, 통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제 하나님마저 ‘황금송아지 하나님’처럼 물성화(物性化)되고, 통제 가능한 형태로 재현된다. 하나님에게서 신비와 초월의 영역이 줄어들고, 예측 가능한 형태로 인간 욕망에 기여하는 존재로 축소된다.

   
 

이것은 필연 그분의 말씀인 성경조차 물성화함으로써, 말씀이 더는 순종과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취급자나 해석자에 의해 그 의미나 쓰임새가 결정되는 ‘정보’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 복음이 만들어낸 ‘교회’ 역시 물성화되면 이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인격적인 공동체’가 되기보다는 효율성과 생산성에 의해 평가되고 계량화되는 ‘기관’이나 ‘단체’로 전락한다. 쇼핑몰에서 일정한 돈을 지불하고 늘 새롭고 진기한 것들을 경험하듯이, 교회는 소비자들에게 성스러움을 소비하도록 늘 낯선 경험들을 제공하는 장으로 전락한다.

이제 교회가 더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영적인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이것이 복음의 세속화이다. 복음을 설명할 때 동원되는 모든 용어들이 동일하게 쓰이고 거기서 기대되는 목표와 경험들이 유사복음에서도 약속되면서 진정한 복음이 주는 부담과 불편을 거세하기 때문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확신을 갖고 이 유사복음의 신봉자들이 된다. 

복음의 왜곡 2: 사사화
복음은 한 나라에 대한 소식이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탈출하여 전혀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된다는 소식이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그 나라를 수용하는 일이요, 참여하는 일이요, 그 나라(왕국)의 통치자를 영접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나 한 사람의 실존적인 결단을 동반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더불어 함께 사랑과 평화를 나누며 사는 나라를 환영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삼위 하나님으로 서로 사랑과 연합으로 존재하시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서로의 생명을 생명되게 하며, 그것은 사랑으로 발휘되는 자유와 자유롭게 하는 사랑을 통해 이루어진다. 복음은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결단을 촉구하는 소식이요, 한 개인 안에서 존재론적으로 변화를 가져오는 소식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개인주의적’인 소식은 아니다. 한 개인이 누리는 축복(생명)은 타인과의 관계성 안에서만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궁극에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자신을 혹은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시면서까지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축복이기에, 복음을 사적인 차원으로, 특정 집단이나 인종이나 민족으로만, 혹은 생태계 전체의 구원을 외면한 채 인간만의 구원으로 축소하는 사사화 경향은 한 번도 사라지지 않고 위세를 떨치는 강력한 유사복음의 형태이다. 상대주의나 다원주의만큼이나 배타주의나 고립주의의 위험을 간과한 결과이다.

복음의 사사화(私事化)가 문제인 것은 구원을 말할 때 심각한 전도 현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복음이나 구원을 말할 때, 가장 먼저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은 “나는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은 왜 세상을 혹은 나를 창조하셨는가?”이다. 후자의 질문 안에는 “왜 예수님을 보내셨는가?” “왜 구속의 역사를 이어오셨는가?”와 같은 질문도 포함된다. 즉 하나님의 창조계획이 나를 구원하시는 계획보다 앞서야 한다. 나의 구원은 바로 그 하나님의 창조계획이 이루어질 때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바로 그 하나님의 창조계획인 “하나님의 나라”를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고, 내가 구원을 누린다는 것은 그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복음에 합당하게 다른 생명과 관계를 맺으며 존재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신앙고백과 실천적인 삶이 분리되는 모순적인 존재를 태연하게 양산하는 현실은 구원의 사사화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복음의 왜곡 3: 신령화
복음의 신령화(神靈化)는 복음의 영지주의적인 태도이다. 그들은 복음을 이 땅의 멸망과 소멸, 이 땅에서 사는 우리 몸의 소멸과 이 땅을 벗어난 다른 별개의 장소에서 맞이하는 새로운 삶, 특히 영적인 삶을 목표로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강하고, 시간적으로는 죽은 후에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설령 그들이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경우에도 그 나라와 앞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서 임할 하나님 나라 사이의 불연속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복음은 한 나라의 소식이고 한 통치의 소식이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존재 방식의 문제이다. 그것은 철저히 인격적인 창조이며, 역사와 과정을 중시하는 창조이다. 성령의 역사와 간섭과 조명이라는 초월적인 차원의 도움이 없으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몸을 가진 인간의 지극히 일상적인 삶과 그들의 소소한 결단과 마음 씀씀이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창조이다. “영적”이라는 것이 몸이나 마음이나 정신의 문제와 별개로 동떨어진 영역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영역을 의미한다면, 그 영적 삶의 실현은 우리가 몸과 마음과 정신을 갖고 살아가는 ‘물질’ 세계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은 우리 인간 전인을 향한 소식이요, 그 몸을 갖고 형성하는 역사와 문화 혹은 문명과 관련한 소식이다. 그 세상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또 많은 고민을 해야 하지만, 복음은 궁극적으로 이 땅과 이 하늘이 새 땅과 새 하늘이 되는 문제인 것은 분명하다.

복음을 신령화하는 유사복음은 늘 두 가지 극단을 낳았다. 한편에서는 이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을 소홀히 한 채 다가올 천국만 소망하는 피안적인 세계관을 갖고 사는 이들을 만들었으며, 다른 하나는 이 세상 윤리와 도덕과 법 준수를 가볍게 여기는 부류를 만들어냈다. 특히 후자는 자신들은 좀더 고차원적인 ‘영적인 법’ ‘하늘의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불법과 탈법을 심리적으로 정당화하면서 수치심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간다. 이는 마지막으로 살필 복음의 왜곡 형태인 ‘복음의 구획화’ 현상으로 더 구체화된다.  

복음의 왜곡 4: 구획화
복음의 구획화(區劃化)는 복음의 공공성과 전인성, 그리고 통전성을 외면했을 때 나오는 다른 왜곡 현상이다. 이는 앞에서 밝힌 복음의 세속화·사사화·신령화의 다른 양상일 뿐이다. 복음의 구획화는 철저하게 성속이원론을 기초로 한다. 이 세상에는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이 처음부터 정해졌다고 주장한다. 이는 앞서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분리하는 발상과 같다. 그들은 (시간적으로) ‘죽음 이후’ (공간적으로) 특정한 장소로 우리의 영이 이동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믿으며, 그 소식을 복음이라고 믿는다. 또한 이 세상에도 그 시간에 상응하는 거룩한 시간이 있고, 거룩한 공간이 있고, 거룩한 사람이 있고, 거룩한 일이 따로 있다고 믿는다. 그런 시간과 장소에서 행하는 일들만이 영원한 ‘구원’과 관련이 있으며, 나머지는 무관하다고 여긴다.

가령 그들에게 거룩한 시간은 성일로서의 ‘주일’이며, 거룩한 장소는 성전으로서의 예배당이며, 거룩한 일은 성직 혹은 성무로서의 선교나 성경공부나 예배이며, 거룩한 사람은 성직자로서의 목사나 선교사 혹은 그보다 낮은 등급의 성도들이다. 이들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목표로 살아가는 삶을 외면하지는 않지만 강조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교회를 통해서만 이뤄지고, 주로 주일에만 이뤄지고, 주로 종교전문가들에 의해 이뤄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오직 이 부정한 세상에서 예수님을 입술로 고백하는 이들을 얻어서 그들을 일단 다른 거룩한 피난처인 교회 안으로 데려오고, 궁극적으로 거룩한 장소인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 이래로 복음이, 단 한 번도 이 세상의 시간(역사)과 사람과 나라와 상관없는 채로 존재한 적이 없다. 복음이 급진적이고 혁명적이고 전복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래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곧 고난을 받는다는 말과 동의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그 복음이 시대와 역사를 뒤흔들고, 통치자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고, 추앙 받던 모든 것들과 숭배의 대상이 되던 모든 것들을 향한 배반과 변절을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복음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소식이다. 그분의 통치가 우리 개인의 마음에만 국한될 리 없고, 주일에만 해당될 리 없고, 특정한 사람에게만 국한될 리 없고, 특정한 활동에만 국한될 리 없고, 특정한 민족과 인종만을 향할 리 없다. 그분은 모든 시간, 모든 사람, 모든 영역에서 왕으로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그분을 인정하는지 여부는 둘째다. 그분이 당신의 소유라고 주장할 수 없는 영역은 없으며, 그분의 뜻과 상관없이 자율적으로 돌아가는 영역도 없다.

“거룩”은 기본적으로 “타자성”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그분이 타자로서 존재하신다는 뜻이다. 그분은 그 어떤 세력도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부리거나 이용하거나 조종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거룩하시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그곳이 어디든 바로 성전이 되고, 어느 요일이든 성일이 되고, 어떤 일이든 성무가 되고, 어느 누구든 성인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종교적인 수사들이 화려하게 동원되는 예배 장소여도, 하나님의 거룩하심, 즉 그분의 자유와 주권이 인정되지 않는 곳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곳이 되며, 하나님은 ‘심판’으로 당신의 존재를 확인시키실 것이다. 하지만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햇빛과 비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지금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 임하고 있으며, 오늘 우리도 그 하나님의 기다리시는 은총으로, 받아주시고 용서해주신 은총으로 지금껏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하늘 위의 어떤 영역만도 아니고(복음의 신령화), 동시에 이 땅 위에서 어떤 특정 공간과 시간과 활동만도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서 항상 주권자로 다스리시며, 그분을 인정하는 모든 시간과 장소와 활동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통치가 우리의 모든 일상 속에서 이뤄지도록 존재해야 하는 자들이다. 그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이 의미하는 바다. 바울은 로마서 12:1-2에서 그것을 “예배”라고 표현한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어디로 부르시든, 어떤 일로 부르시든, 어떤 직분을 주어서 부르시든, 어떤 나라에서, 어떤 계급에서, 어떤 삶의 조건을 갖고 부르시든, 강력한 이 세대의 이야기(meta-narrative)와 그 이야기를 점유하는 자들에게 순응하지 말고(conformed), 거룩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따라 가치관(“마음”)을 새롭게 하여 이 세상을 바꾸고(reform) 변화시키는(transform) 것, 그것이 예배이며, 그것이 우리 몸(삶, 인생)을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로 드리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우리가 관여하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개인적으로 혹은 공동체적으로 구현하는 삶이 곧 복음에 어울리는 삶인 것이다.
 

오늘 여기에서 복음을 ‘말하다’

그러면 오늘 여기에서 우리가 복음을 따라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은 복음을 따라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 사람들을 참 다양한 메타포를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 교회, 제자, 하나님의 자녀, 백성, 제사장, 종, 권속, 나그네, 그리스도의 신부, 양, 의롭게 된 자 등등. 그것들은 모두 결국 우리의 소속이 어디이며, 우리가 경배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삶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아들 예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창조되고 있는 존재들이며, 이 땅에서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가고, 하신 일을 하고, 사신 방식을 따라서 살아가는 그분의 제자이며, 작은 예수로 살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현재적 형태로서의 교회
교회를 예수의 몸이라고 부른다. 이 시대에 세상이 예수님을 보기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는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 사는 자들이며,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성령을 통해 새 시대를 사는 유기체이다. 이 세상의 지배적인 가치관을 거스르고도 얼마든지 인간다운 삶,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시연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현재적·역사적 형태로서의 교회로 존재한다면, 그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일 것이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고 물으면서, 그분의 마음을 따라 그분이 사랑하셨던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분이 사셨던 하류지향의 삶, 주변을 향하는 삶, 낮추고 비우고 내어줌으로써 풍성해지는 삶을 공동체와 더불어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에서 복음이 드러날 것이다.

사랑과 자유의 존재로서의 성도
복음은 사랑의 소식이고 자유의 소식이다. 자유를 주기 위해 자신의 자유(생명)를 포기한 창조주의 사랑의 소식이다. 사랑을 명령하지 않고 사랑으로 사랑을 창조하시는 소식이다.

모든 사랑은 자유의 양도 행위다. 그것이 시간이든 물질이든 심지어 생명이든, 우리를 자유케 하는 바로 그것을 누군가에게 양도함으로써 내가 작아지고 줄어들고 낮아지기를 선택하는 것이 사랑이다. 누군가와 연대하기 위해 불편해지고 덜 수월해지기를 선택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이 없어서 매여 있고 묶여 있는 자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그 사랑의 방식, 자유의 방식을 펼쳐보인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다. 아들 예수님을 내어주신 사건이다. 그것을 기록한 성경이 진리이다. 그 진리, 그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알고 살 때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임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또 이웃을 사랑하는 것, 나와 하나님을, 그리고 나와 이웃을 별개로 여기지 않고 환대하는 것, 그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삶의 결단을 예배로 받으신다. 이웃을 향한 사랑을 당신을 향한 예배로 받으신다. 우리가 그 이웃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이 인간다움을 누리고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사회와 제도를 만드는 데 참여하는 것이다. 공의와 정의를 위해 애쓰는 것이 사랑이다. 소유가 주는 권력을 상대화하고, 시간의 횡포에 맞서 영원을 선택하는 삶, 그래서 자족하고 관대한 삶을 추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복음에 어울리는 삶이 될 것이다.

평화와 안식의 사역으로서의 선교
복음은 평화의 소식이다. 단절과 소외를 딛고 모든 생명 있는 것들과 하나가 되는 사건이다.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 이웃과 평화를 이루고, 더 나아가 모든 피조물과 화평의 관계를 누리는 것이 구원이고, 그 구원의 소식이 복음이다.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것, 새 언약의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것,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 평화의 시대가 왔다는 뜻이다. 이 평화를 거스르는 모든 차별과 분리와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성경은 그 샬롬(평화)이 임한 사건을 ‘안식’이라고 표현한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기대하신 그 목표인 안식에 참여할 때, 하나님도 비로소 안식하실 것이다. 하나님과, 이웃과, 피조물과 샬롬의 관계로 존재할 때, 그들은 모두 안식을 누리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안식을 선물하는 일이다. 안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하나님 나라는 샬롬의 나라이고 안식의 나라이다. 그 나라를 여기에서, 일상에서 구현할 때 그것은 예배가 되고, 하나님은 안식하게 될 것이다.
 

   
 

오늘 여기에서 복음을 ‘살다’

복음은 소식이다. 그것은 이미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이며, 그 사건이 오늘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소식이며, 그 사건이 결국 나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소식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정보가 아니라 창조를 촉구하는 강력한 명령이다. “내가 미쳤든지 그 복음이 미친 소식이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소식이다. 그런데 그 경천동지할 복음이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주는 소식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바로 잡는 소식이며, 허위를 폭로하는 소식이며, 모든 욕망이 제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소식이기 때문이다.

존 스토트는 “선교의 마지막 세기라고 일컬어지는 21세기에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단호하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가시성”(visibility)이라고 답했다. 복음은 우리의 수용 여부와 상관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 복음을 가시화하지 않을 때 우리는 복음과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 그것은 생명의 소식이다. 생명이 되게 하는 존재 방식을 알려주는 소식이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우리가 살아야 한다. 복음이 요청하는 관계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그것을 욕망해야 한다. 오늘 우리 시대가 숭상하는 복음에 이의를 제기하고, 단호하게 복음을 말하고, 그 복음을 삶으로 입증하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살고 세상도 살리는 생명의 길이다.  

 


박대영
〈성서조선〉을 통해 ‘성경교사’의 소명을 가진 후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성경원문 연구에 매진하여 에스라성경연구원, 영국 Capernwray Bible School, London Bible College에서 공부했다. 광주소명교회를 개척해 책임목사로 섬기고 있고, ‘아카데미 숨과 쉼’을 통해 지역 성도들과 목회자들에게 말씀을 배우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묵상집 〈매일성경〉의 편집장을 거쳐 현재 〈묵상과 설교〉의 편집장을 맡고 있으며, 《묵상의 여정》 《디도여, 교회를 부탁하오》를 썼고 여러 권의 번역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