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주〕 구약으로 배우는 복음, 하나님 나라

[345호 커버스토리]

2019-07-30     김근주

신구약성경 전체의 첫 머리를 여는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장엄한 선언으로 시작한다. ‘원죄’로 상징되는 인간의 죄성에 대한 끝없는 강조가 오늘날 우리네 신앙 이해의 근저에 있지만,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상을 지으셨는데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선언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창조의 절정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있다.
 

1.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왕으로 지음 받은 인간
창세기 1:26-28에서 하나님은 그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향해 ‘다스리라’ 명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의 근본적 의미는 하나님과 같이 왕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왕이란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시편 8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 온 땅을 다스리도록 세워진 사람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다스림은 우리 마음대로 결정하고 추진하며 좌우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사자와 소, 바다의 물고기를 우리 마음대로 부리거나 지배할 수 없다.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발아래 두셨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이 이 같은 것을 떠받들거나 숭배하지 말라는 말씀이라 볼 수 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을 넘어서는 것들, 이를테면 영원히 변치 않는 해와 달, 별이든, 아니면 무시무시한 맹수, 바다의 엄청난 힘이든, 그것을 숭배하고 제물을 바쳤다. 해와 달, 맹수, 바다, 땅에 대한 숭배는 결국 힘에 대한 숭배, 강력한 것에 대한 숭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존재라 이르신다. 이것들을 숭배하거나 이것들에 좌우되지 말고, 나아가 강력하고 대단한 것, 힘에 좌우되거나 숭배하지 말 것을 이르신다고 볼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을 고백하는 신앙은 하나님 아닌 모든 것을 사람이 숭배해서는 안 되는, 사람의 발 아래 있는 것으로 제자리를 잡게 한다. 하나님을 고백하며 찬양하는 이들은 만물을 지으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되, 보이는 것에 좌우되거나 떠받들지 않는다.

그리고 다스리고 발 아래 둔다는 것은 상대를 지배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과 거리가 멀다. 사람이 피조 세계를 제 멋대로 주관하고 말 그대로 제 발 아래 두었더니 어떻게 우리 사는 세상이 파괴되고 황폐해졌는지 오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모든 현실은 다스림을 착각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참된 왕이요 주님이시되, 우리 사는 세상에 ‘섬기려고 오셨다’고 선포하셨다. 주님은 다스림이 섬김임을 명확히 알리셨다. 예수를 주님으로 수많은 이들이 고백하는 까닭은 그분의 지배와 다스림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섬김, 자기 목숨을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모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도, 부모의 간섭과 명령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분들의 사랑과 희생을 기억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착한 권력’ 같은 것이나, ‘괜찮은 권위’ 같은 걸 행하는 것이 아니다. 섬기는 것이야말로 다스림임을 고백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시편에 나오는 압도적인 분량의 시들은 대개 “나”라고 표현된 시편 기자의 고백이다. 오늘날 우리는 ‘나’보다는 ‘공동체’를 강조한다. 워낙 개인주의화가 진행되다보니 공동체를 강조하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하지만 사실 우리의 진정한 문제는 오히려 개인이 도드라지지 않는 것에 있다.

어릴 적부터 들어온 것이 ‘나라가 없으면 내가 없다’는 식의 말이다. 하지만 이 경우 ‘나라’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개인보다 집단을 강조하고, 그래서 자신이 어떤 집단에 속해야 안심한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가 속해 있는 어떤 집단으로 자신을 말하는 셈이다. 그렇기에 학벌이 중요하고, 동문을 따지며, 가족이 다니는 학교를 따지고, 심지어는 어떤 아파트나 동네에 사는가도 자랑거리 삼는다.

이렇게 자신이 속한 집단을 내세우는 이들은 그에 속하지 못한 이들을 경시한다. 이주민을 구분하고 외국인을 구분하며, 남성과 여성을 구분한다. 이것은 ‘개인주의’의 폐해가 아니라 ‘집단주의’의 폐해이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집단이 늘 최우선이다. 지금은 좀 덜해졌지만 언제나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실제로는 그 “전체의 이익”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그 가운데 다수의 사람, 그 가운데 힘 있는 사람의 이익이면서, 내세우기로는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자고 한다. 그래서 개인이 사라진 자리에 집단이 득세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집단에 대한 강조의 가장 근본은 ‘나’일 것이다. ‘나’라는 개인이 또렷하게 살아있지 않는 공동체는 집단이요 패거리일 뿐이다.

앞서 언급한 시편 8편은 어린아이와 젖먹이 같은 시편 기자를 이야기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영화와 존귀를 부어 주셨음을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강력하고 대단한 존재로 만드셨다고 하지 않고, 어린아이요 젖먹이인데 하나님께서 그의 입을 통해 권능을 세우셨다고 고백하며 선포한다. 그의 영광과 담대함의 근거는 어린아이 같은 자신의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와 같은 고백은 그의 모습 그대로 서서 살게 한다. 8편의 배경에 있는 창세기 1장은 모든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고 선언한다. 괜찮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왕이나 대통령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 그가 남자든 여자든 혹은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든 신체가 어떠하든 피부색이 어떠하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께서 영화와 존귀로 관 씌우신 이들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 형상으로 지으셨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고백이야말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장 자신답게 한다. 내가 속한 어떤 집단 때문이 아니라, 내가 어느 정도의 자격과 실력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이기에, 어린아이 같은 나이기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씀은 나를 그저 나이고 나답게 한다. 하나님 앞에 설 때 나는 가장 자유롭다. ‘이 세상 사람 날 몰라줘도 뒤돌아서지 않겠네’와 같은 가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개인을 또렷이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왕’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왕이며 누구든 그 자신으로 충분하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공동체
하나님의 형상의 또 다른 의미는 남자와 여자, 즉 공동체로 지음 받은 사람이다. 공동체로 함께 살아간다는 점이 가장 분명히 드러난 사건은 출애굽이다. 출애굽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이스라엘을 건져내시는 까닭은 다음의 구절에서 잘 드러나 있다.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출 6:5-7)

하나님의 건지시는 사건의 출발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이다. 삶의 고통과 곤경 가운데 달리 도움을 구할 길 없는 이들의 부르짖는 소리야말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을 움직인다. 무거운 짐 밑에서 시달리는 이들을 건지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의 팔과 공의로운 판결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신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관계가 이루어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건져 낸 이스라엘을 “주의 거룩한 처소”(출 15:13) 혹은 “주의 기업의 산”(출 15:17)으로 인도하신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하시려고 예비하신 처소이기에 거룩한 “성소”인 이곳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어, 이제 여호와께서 “영원무궁하도록 다스리”실 것이다(출 15: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예비하신 땅으로 인도하시는 까닭,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땅으로 인도하시는 까닭은 그들을 그 땅에 거하게 하고 여호와께서 영원토록 다스리시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하나님의 통치, 그리고 그 통치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속량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내 백성-너희 하나님” 도식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나라의 설립임을 알 수 있다. 이 도식은 출애굽기부터 시작해서 구약의 거의 마지막 시기인 스가랴서에 이르기까지 구약성경 전체에서 줄기차게 반복되고 환기된다(레 26:12; 신 29:13; 시 33:12; 100:3; 렘 7:23; 11:4; 24:7; 30:22; 31:1,33; 겔 11:20; 14:11; 34:30; 36:28; 37:23,27; 호 1:9,10; 2:23; 슥 8:8 등). 출애굽에서부터 시작된 이 간결한 표현이 구약 전체에서 반복된다는 것은 출애굽 사건이 지닌 결정적인 중요성을 보여준다. 구약 전체에서 면면히 흐르는 것은 출애굽 때 맺은 언약 관계의 회복이며, 이러한 출애굽의 회복 혹은 새로운 출애굽에 대한 갈망은 관계의 회복, 하나님의 통치의 회복이다.

‘내 백성-너희 하나님’ 도식이 의미하는 두 번째는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저 한 개인으로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함께 그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이다. 사실, 구약의 사고 안에서 ‘고립된 개인’은 매우 낯설다. 시편에 수많은 ‘나’가 등장하지만 이 나는 그 안에 이스라엘 전체를 담고 있는 나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을 건지신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의 언약을 통해 하나님 백성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리신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 19:5-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은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세운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는 공동체로 존재하도록 부름 받았다. 광야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는 것은 혈통이나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었다고 할 수 있다. 레위기의 한 구절은 이스라엘을 향해 떠나 온 애굽과 앞으로 들어갈 가나안의 풍속과 규례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따라야 함을 선포한다(레 18:3-4).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애굽과 가나안과는 구별되는 공동체, 대안적인 삶을 보여주는 공동체로 부름 받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집단을 강조하는 집단주의와 올바른 공동체주의는 어떻게 다를까? 집단주의는 여지없이 나보다 약한 이를 무시하고 짓밟는다. 집단에 속하면 약자를 유린하고 지배한다. 그에 비해 공동체주의는 8편에서도 드러나듯이 원수와 보복자 가득한 세상에서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는 것으로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약한 자가 안전할 수 있고 가장 약한 자의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다. 그래서 참 좋은 공동체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남과 구별되는 또렷한 나다. 모두 비슷한 모습이 되고 모두 비슷한 취향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홀로 서 있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소리를 존중하고 그 소리 그대로 울려나고 드러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2. 부르심의 목적

정의와 공의
창세기 12:1-3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새로운 삶으로 부르셨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초대하신 새로운 삶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땅과 자손의 약속을 주시는 까닭은 무엇인가?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창 18:19)

이 구절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까닭은 그로 하여금 여호와의 도, 즉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이 구절에 나온 “의”와 “공도”는 구약의 다른 본문에서 주로 “공의”와 “정의”로 번역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시는 까닭은 의와 공도, 공의와 정의를 행할 주인공, 사람이 필요한 까닭이며, 땅에 거하게 하시는 까닭은 공의와 정의를 행하고 이루어갈 공간이 필요한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삶을 살 때에 열방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아셨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특권은 천하 열방을 위하여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으로 부름 받았다는 점이다. 특권이라 하면 흔히 우리는 배타적으로 누릴 수 있는 어떤 혜택 같은 것을 생각하지만(그런 점에서 우리의 ‘특권’ 이해는 지극히 사사롭다), 실상 이스라엘의 특권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행하는 삶으로 부름 받았다는 특권이다. 구약의 여러 구절에서 공의와 정의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원칙으로 소개된다(시 33:5; 89:14; 97:2; 99:4; 사 33:5 등).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왕이신 하나님을 따라 왕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첫머리에 다루었다. 왕이신 하나님이 정의와 공의로 세상을 통치하시니, 그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왕인 사람이 정의와 공의로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논리적으로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다. 그래서 다윗과 솔로몬은 정의와 공의로 다스린 왕으로 평가되며(삼하 8:15; 왕상 10:9), 다윗의 뒤를 이은 왕이 행할 가장 중요한 통치 덕목은 정의와 공의다(사 9:7; 렘 23:5; 겔 45:9). 그러므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은 하나님을 닮는 삶(Imitation of God)이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삶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말의 실질적 의미이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마태복음 22장은 예수님을 찾아온 한 율법학자를 소개한다. 율법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그가 예수께 여쭈었을 때, 예수께서는 “온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 전체가 마음과 목숨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고 답하셨다(마 22:34-40). 예수님은 구약 전체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제사 혹은 예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제사를 명령하는 구약성경에서부터 이미 곳곳에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가난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임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시 51:17; 사 66:2-3).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찾으시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사 1:16-17; 암 5:15)이고,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미 6:6-8)이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구체화된다고 할 수 있다.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을 서로 사랑하라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표현한 요한복음의 진술(요 15:1-12)도 이와 통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요일 4:21). 구약 전체에 대한 예수님의 또 다른 요약인 다음의 구절 역시 이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주님은 구약을 두 계명으로 요약할 때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다시 한 마디로 할 때에는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다. 구약 전체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압축하셨다는 점에서, 오늘 어떻게든 하나님을 높이기 원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요약은 파격적이다. 주님은 ‘휴머니스트’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바울에게서도 볼 수 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 13:10)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갈 5:14)

이에 따르면 율법으로 대표되는 구약의 요체요 핵심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가 “공의”이며, 고아와 과부의 억울함을 바로잡는 것이 재판을 통한 “정의”인 것을 생각하면, “정의와 공의”로 대표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칙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압축될 수 있다.
 

이처럼, 예수님과 바울의 구약 요약은 종교적인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예수를 믿건 믿지 않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러나 이 말씀처럼 살기는 누구라도 만만치 않다. 더구나 경쟁을 가장 중시하며 승리하지 않으면 도태된다고 하는 세상에서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고,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며 살기는 정말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됨은 남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기독교적 용어들로 가득 찬 표현들에서 나타난다기보다는, 누구나 이해하고 납득하고 동의되지만 정작 지키기는 버거운 진리를 정말 지키고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에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숨겨진 비밀을 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알지만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여기는 진리를 실제로 살아내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의 말로 대표될 수 있는 신약의 구약 해석의 결론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가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웃”에는 아무런 조건이 붙어 있지 않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 말씀이 가지는 함의에 놀라게 된다. 이웃을 사랑할 때, 이웃의 어떤 조건이나 상태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이웃의 사회 경제적 여건은 물론이고 이웃의 종교나 그 어떤 것도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파격적이며 근원적이다. 참으로 구약의 본질을 꿰뚫는 해석이다. 이 원칙을 철저하게 적용한다면, 모든 사사로운 신앙 이해는 그 모든 근거를 잃게 된다.

3. 죄인과 가난한 자를 위한 새로운 출발

흔히 구약 제사가 신약에 이르러 폐지되었다고 말하지만 매우 부정확한 표현이다. 제사의 형태와 외형이 바뀌었을 뿐, 제사의 본질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 왜냐하면 레위기가 증언하는 제사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레위기와 구약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는 것은, 고대의 제사 체계를 통해 구약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이다.

레위기는 크게 1-16장, 17-26장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의 결론은 16장에서 다루는 속죄일이다. 후반부 규례는 25장에서 다루는 희년으로 마무리되고, 26장은 규례 순종과 연관된 축복과 저주를 다룬다. 그러므로 후반부는 희년 규정으로 결론을 맺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희년은 속죄일에 시작한다는 점에서 레위기 전체는 속죄일에 시작하는 희년으로 요약할 수 있다. 속죄일은 모든 이스라엘의 죄악과 성소의 부정을 정결케 하는 날이다. ‘속죄’는 레위기의 핵심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누구든 잘못을 깨달았다면 그를 인정하고 성소로 나아와 속죄제를 드린다. 그런 점에서 속죄제는 죄의 결과에 매이지 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는 일종의 리셋(reset), 새 출발이다. 속죄제의 리셋 기능은 산모의 속죄제(레 12장), 나병에서 나은 사람의 속죄제(레 13-14장), 그리고 유출병에서 나은 사람의 속죄제(레 15장)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출산과 나병, 유출병은 죄와 무관하다. 이러한 상태에서 완전히 회복되었을 때 이들은 속죄제를 드리며 이 속죄제는 이 사람들이 이제 일상으로 완전히 복귀함을 공적으로 알린다. 이스라엘이 1 년에 한 번 지키는 속죄일은 이러한 리셋을 좀 더 명확히 보여준다. 이미 일상에서 속죄제를 비롯한 제사를 드리지만 속죄일 예식을 통해 이스라엘의 정결을 상징적으로 선포한다. 속죄일 예식을 통해 이스라엘 가운데 있는 성소가 정결해지고 모든 죄와 잘못을 저질렀던 이스라엘이 정결케 된다. 그러므로 속죄일은 과거의 부정과 죄에 매이지 않고 새로 출발하는 삶을 상징한다.

희년은 매 50년마다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던 토지와 몸의 자유가 원 주인에게 돌아오는 절기이다. 그러므로 희년 역시 원점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있게 하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희년은 죄 사함과 정결을 선포하는 속죄일에 시작한다. 결국 속죄일과 희년 절기는 모든 이스라엘의 진정한 새 출발을 말한다. 죄에 매인 삶으로부터의 새 출발은 반드시 토지와 몸의 새 출발을 수반해야 한다. 일상의 삶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죄 사함은 정신 승리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레위기 체계는 새 출발을 지향하고 선언한다. 이러한 새 출발은 죄인을 향한 새로운 은혜의 선포이며 땅과 노동력까지 모두 넘어간 가난한 자를 향한 은혜의 선포이다. 그래서 우리는 레위기로 대표되는 구약이 죄인과 가난한 자의 새로운 삶을 제도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개인과 나라의 분리
이상에서 살펴본 본문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살아가는 신앙을 우리와 우리 주위의 개인사로만 국한할 수 없음을 일러준다. 그럼에도 아주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종교의 영역을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으로 국한하곤 했다. 그들은 종교를 개인의 성품을 연마하고 인간의 내면적인 고뇌와 번민을 대처하는 수단으로 여겨 왔다. 우리네 개신교 역시 이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 많다.

여기에는 칼빈을 비롯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같은 데에서, 구약 율법을 셋으로 구분(이른바, ‘시민법’ ‘도덕법’ ‘제의법’)하여 폐지와 존속을 말하는 것도 근본적인 문제를 초래했다. 시민법과 제의법은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공동체로 부름 받은 대안적인 공동체였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제의법과 시민법에 대해 매우 손쉽게 “폐지”되었음을 선언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나라를 이룬 출애굽 이후 시기에 나라와 제도, 틀에 관한 규정을 주셨으되, 후대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미성년 교회로서의 이스라엘”에 주신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것으로 여겨 폐지를 운운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규정들을 폐지된 것으로 여김으로써 구약 전체를 개인적 윤리와 연관된 도덕적 영역으로 축소했고 신앙 자체를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에 국한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와 같은 신앙고백서에서 ‘정의와 공의’는 전혀 설 자리가 없을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조상으로 마태복음 첫 머리(마 1:1)가 소개하는 아브라함의 부르심의 이유, 다윗의 통치 특징을 가리키는 정의와 공의가 설 자리가 없다는 점에서, 구약의 정치적 차원, 사회·구조적 차원에 주목하지 않는 이해는 단순히 부족한 이해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 전체를 파괴하고 뒤흔들어 버리는 일이다. 정치적 차원의 상실이 성경을 격언 모음집이나 영적 비밀 모음집으로 읽게 만든다는 점에서, 우리가 흔히 행해오는 성경 해석은 이미 이단 사이비 종파의 출현을 배태한다.

앞서 본대로, ‘내 백성-너희 하나님’ 표현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 안에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속량 혹은 구속하신 까닭은 그들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게 하기 위함이다. 이를 생각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두 단계의 목적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 백성을 죄와 곤경의 상황에서부터 건져서 새로운 약속의 땅으로 이끄시는 것이 계시의 첫 번째 목적이라면, 그렇게 새로이 부름 받은 이들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는 것은 계시의 두 번째 단계이자 궁극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며, 그 실질적 내용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살아가는 일상,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여기며 언제든 새로 출발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세상이다.
 

   
 

결론

신명기 5장 십계명 규례는 종이었던 이스라엘을 건져 내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안식일마다 종과 나그네, 가축까지라도 쉬게 하라 명령한다(신 5:14-15). 레위기 19장은 ‘공동체의 거룩’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 품꾼을 위한 행동으로 표현하였다. 희년 제도는 근본적으로 이런저런 이유로 삶의 가장 근본이 될 땅과 몸뚱이마저 다른 이에게 넘겨야 하는 지경에 처한 이를 위한 제도이다. 예언서 곳곳에서 예언자들은 고아, 과부, 나그네를 저버린 채 제사와 제의만 무성한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 마태복음 18장이 어린아이를 예로 들어, 25장은 헐벗고 굶주리며 옥에 갇힌 자를 예로 들어, 영생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하는 사랑으로 표현한 점은 정확히 구약과 맞닿는다. 결국 영생, 복된 삶은 가장 연약한 자들에 대한 고려와 배려에서 비롯된다. 이웃 사랑, 남을 대접하는 사랑은 우리 곁의 연약한 이웃을 돌아보는 삶으로 구체화된다.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의 삶이 그대로 끝나지 않고 죄에 대해서나 경제적 측면에 대해서나 새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공동체가 구약과 신약이 일관되게 증언하는 복음의 구현이다. 그것이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이며, 장차 누리고 경험하게 될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김근주
학부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신학교에 가게 되었고 결코 상상해본 적 없는 목사가 되었다. 예언자들이 외치는 심판뿐 아니라 회복의 메시지야말로 예수께서 이 땅에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알짬임을 깨닫고, 이를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며 살기를 소망한다. 소망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는 연구나 준행, 가르침 모두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서울대, 장신대 신대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다니엘처럼》 《복음의 공공성》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시리즈) 《특강 예레미야》 《이사야가 본 환상》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