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클레시아와 바울의 이신칭의

[345호 제국과 하나님 나라] 빌립보서 다시 읽기 2

2019-07-31     한수현

할례와 음식법, 유대인의 표식
미국 유학 시절 위스콘신주 케노샤라는 도시의 한인 교회에서 중고등부 전도사로 일했다. 당시 교회에는 한국에서 온 1세대 이민자들과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2세대들이 섞여 있었다. 미국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한인들은 언어도 영어가 편하고 법적으로도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백인이나 흑인들과 지내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이들 한인 2세들은 대부분, 한국어를 써야 하는 언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민자들이 주를 이루는 한인 교회에 다니거나 그들 스스로 한인 2세들을 위한 교회를 설립해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현지의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다 하더라도 자신이 자란 종교적 분위기와 부모에게 물려받은 문화와 더 어울리는 한인 교회를 선호했다.

이는 비단 한국인 이민자에게만 해당되는 현상이 아니다. 이민자의 천국이라 불리는 미국의 교회는 외형적으로 인종과 문화에 따라 분명하게 구분된다. 흑인들은 흑인 교회를, 중국인들은 중국인 교회를, 백인들은 백인 교회를 선호한다. 아마도 저마다 자신의 정체성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외형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종교 생활하기를 선호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운동이 예루살렘뿐 아니라 현재의 터키 지역인 안디옥과 북아프리카 지역인 알렉산드리아로 퍼져갈 때, 그 주축을 담당한 이들은 바울처럼 헬레니즘이 지배하는 지역에 태어난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보다 상대적으로 타문화에 개방적이었다. 그러나 이방 땅에서 수세기를 살아온 유대인들도 엄격히 지키는 관습이 있었는데, 할례(circumcision)와 음식법(dietary laws)이었다.

   
 

유대인들은 태어난 지 8일째에 남성의 성기에 상처를 내는 할례라는 관습을 시행했고 히브리성서(구약성서)에 기록된 먹어도 되는 음식만을 먹었는데, 이는 당시 유대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살던 사람들이 모두 힘써 지켜오던 관습이었다. 이러한 관습은 종교적일 뿐 아니라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 남자아이들이 당연한 듯이 태권도를 배우면서 한국어를 익히듯이, 그들은 그렇게 자신이 유대인임을 자신의 몸을 보며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많았으므로 다른 민족들, 즉 이방인들과는 함께 식탁에 앉을 수 없었다. 부정한 음식은 스스로를 더럽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엄격한 할례 의식과 음식법은 민족적 정체성을 형성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이자 하나님 백성임을 나타내는 표지로, 정치적으로는 로마제국의 식민인임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에서 끝끝내 다스려지지 않은 민족이 되었다. 예수의 제자였던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예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가 예루살렘에 생겨난 예수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고, 그들에게 배운 헬라지역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복음의 도를 전하는 와중에는 할례와 음식법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방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자 발생했다. 공동체 안에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뚜렷한 구별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할례와 음식법, 그리고 이방인 그리스도인
원래 이방 땅에 세워졌던 유대인들의 모임터인 시나고그(회당)에도 이방인들이 있었다. 일부는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이었고, 일부는 아예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전자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God-fearers), 후자를 개종자들(proselytes)이라 불렀다. 아마 초기에는 자연스럽게 이전 유대교의 방식을 따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유대교의 중심인 예루살렘 공동체의 결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공동체에는 세 개의 분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유대인, 할례 받은 이방인,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할례 받은 자들이 그렇지 않은 자들보다 더 강한 결단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 여겨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예수가 할례를 명한 적이 있는가? 율법과 예수의 십자가는 무슨 연관이 있는가? 명민한 이방인이라면 이런 질문을 한번쯤 품었을 법한 상황이 되었을 때, 음식법 준수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주장하며 이방인을 편든 사람이 있었다. 바로 베드로였다. 미국 매사추세츠 대학교 종교학 교수인 리처드 호슬리(Richard Horsely)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베드로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인 음식법의 규례를 공동체가 벗어버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이는 베드로가 당시 그리스도 공동체의 지도자로 격상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주장한다.

사도행전의 고넬료 이야기가 극적이고 소설적인 전개를 보여주긴 하지만 아마도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복음을 전해준 유대 그리스도교의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기억들이 베드로를 이후 공통시대(Common Era) 70년 이후에나 기록될, 이방인들이 주요 구성원이 되어 기록된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에 제일 먼저 이름을 올린 예수의 제자로 기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도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간의 구별을 강조했는데, 아마도 갈라디아서에 기록되어 있는 안디옥에서의 사건은 이를 의미할 것이다.

베드로와 바울의 충돌
갈라디아서에 기록된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베드로와 함께 온 사람들이 안디옥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밥을 먹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동생 야고보의 제자들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베드로가 음식을 먹다 말고 일어나서 나간 것이다.

야고보의 제자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부정한 음식 먹는 것을 금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지는 않다. 이 사건을 살펴보면 적어도 예루살렘과 베드로 사이의 약속에는 부정한 음식을 먹는 이방인들과 나머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명확한 구별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베드로는 상대적으로 이러한 구별에 자유로운 사람이었으나 그들 사이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리를 피한 것이다.

이런 일상적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당시 이방인들을 향한 복음 전파의 소명을 지닌 사도 바울이었다. 베드로는 바울이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탓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베드로를 위선자라 소리 질렀다. 바나바까지 베드로의 편을 드는 것을 보면서 깊게 탄식했다. 베드로와 바나바에겐 상황에 맞춘 선교 전략 정도였겠지만, 바울은 구별과 분리를 강조하는 지도자가 걱정스럽다 못해 절망적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베드로와 바나바에게서 돌아선 바울의 여정은 이전과는 달랐다. 이전에는 이방 선교의 중심지인 안디옥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돌며 복음서에서 예수가 명한 방법과 비슷하게 넓은 지역을 순회하며 각 촌락과 도시들에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디옥 사건 이후로 바울의 선교 스타일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가장 큰 변화는 바울이 스스로 찾아간 지역마다 에클레시아란 이름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이다.

1세기 초대 기독교 공동체와 바울의 에클레시아의 관계 및 발전에 대한 자료는 성서 이외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바울이 세운 공동체가 대부분 바울의 두 번째 선교여행, 즉 안디옥을 떠난 직후에 생겨났고, 바울이 그 이후로 한 도시 지역에 자주 몇 개월, 길게는 몇 년 이상을 머문 것으로 볼 때, 바울이 순회선교사라기보다는 스스로를 공동체 개척자로 여겼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디옥에서의 사건이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가 갈라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자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교에 대한 마인드를 획기적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에클레시아’의 본래 뜻
안디옥을 떠난 바울은 아마 공통시대 49-50년경에 빌립보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록으로 알 수 있는 최초의 도시 에클레시아 공동체가 빌립보에 세워지게 된다. (물론 그 이전에 갈라디아 공동체가 있었지만 과연 이 공동체가 도시 공동체인지, 아니면 갈라디아라는 넓은 지방 내 여러 토착민들 안에 세워진 공동체인지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보통 교회(敎會)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 정도로 생각한다. 엄밀히 말하면 보통 교회라고 써 붙인 곳은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예배당이라고 불러야 한다. 지금의 우리에게 ‘교회’란 기독교인에게만 사용되고 다른 의미는 없는 교유명사와 다름없지만 바울이 그의 서신에 써 붙여 놓은 ‘교회’로 번역된 헬라어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란 말은 새롭게 만들어낸 용어도 아니고 종교단체에서 사용되는 단어도 아니었다.

원래 에클레시아란 말은 고대 그리스시대의 도시국가 아테네의 남자 시민들이 삶에 대한 모든 주제에 대해 듣고 답하고 토론하고, 더 나아가 결정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이는 집회였다(박영호, 23). 즉,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모임이 에클레시아였다.
오늘날 시민들은 자신들의 대표자를 선출할 수 있는 선거라는 행위를 통해 정치에 참여한다. 그러나 선거를 통한 정치 참여는 가장 소극적인 정치 행위이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으로 선거를 통해 선출되고 나면 시민을 위한 정치를 할지 자신을 위한 정치를 할지는 전적으로 선출된 자의 선택이 된다. 이와 달리 에클레시아는 스스로 삶과 직결되는 정책들을 결정할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가 ‘정치’라고 부르는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열어 놓은 공간이 에클레시아였던 것이다. 시민에게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에클레시아의 기능이라면 에클레시아의 목적은 무엇일까? 왜 고대 아테네인들은 에클레시아를 만들었을까?

박영호 목사(포항제일교회)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지역에는 여러 도시국가들이 있었지만 시민정치가 처음 발달한 곳은 아테네가 거의 유일했다. 다른 도시국가들이 아테네의 정치형태를 받아들인 것은 고전시대 후기에 이르러서였다. 아테네에서 민주정치가 시작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에 대한 이해, 인간 삶의 가치에 대한 이해로부터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코이노니아’라는 단어에서 찾는다. 보통 당시의 ‘나눔’이나 ‘교제’로 이해되는 ‘코이노니아’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의 도시국가를 지칭하던 폴리스에 해당하는 말로 격상시킨다. 후에 ‘코이노니아’는 라틴어 코무니타스가 되었고, 현재의 ‘공동체’를 뜻하는 커뮤니티(Community)로 번역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의 핵심은 타인과 공유하는 삶, 함께하는 삶을 뜻했다. ‘정치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과 더불어 살 때 의미를 가지는 존재인 것이다.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은 타인에게 속박되거나 어떤 가치나 법에 의해 억압당하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에게 중요한 가치인 ‘자유’가 억압되지 않아야 인간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렇다면 더불어 살면서도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아테네 사람들이 만든 유일한 해법은 시민을 자신의 삶을 다스리는 통치의 주체로 세우는 것이었다. “시민들이 돌아가면서 통치를 하고, 통치를 받기도 하는 것이 자유를 실현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에클레시아란 공간은 인간이 가장 최선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곳이다. 아테네인들에게 시민을 뜻하는 말은 ‘데모스’인데, 이는 폴리스에 속한 모든 사람 또는 성인 남성을 가르키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에클레시아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즉, 민주정치라는 ‘데모크라티아’나 영어인 ‘데모크라시’를 지칭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교회라는 의미로 번역된 에클레시아가 원래는 민주정치라는 의미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바울과 고대 그리스 아테네 사이에는 400년이란 세월의 무게가 있다. 많은 학자들이 로마제국 시대에 이르러 에클레시아는 옛날에 가졌던 의미를 잃어버리고 정치에서는 ‘평의회의 제안을 형식적으로 승인하는 고무도장’ 정도로 여겨졌고 모임으로서는 보통의 사교 모임이나 조합과 같은 의미로 변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영호에 따르면, 에클레시아가 조합과 같은 시민들의 모임으로 불린 예는 존재하지 않으며, 당시 유대교 회당과 같은 종교적 모임인 ‘쉬나고게’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경우도 없다. 오히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에클레시아를 전 로마제국 안의 하나의 교회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사용했다.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서인 70인역에서도 에클레시아는 민족 전체를 대표하는 모임을 의미하지만, 쉬나고게는 모든 종류의 모임이나 그룹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인다. 즉, 고대 그리스 아테네 시대로부터 바울의 시대까지 에클레시아는 그 원래의 정치적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인간의 삶에 대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참여를 통해 결정하는 모임으로 이해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 에클레시아란 단어를 자신의 선교적 상황에서 새롭게 해석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공동체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삶의 주체가 되는 공간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이신칭의와 공동체적 삶
당시 로마의 도시화가 진행되던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에게 이전까지 깊이 고민해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것이다. 물론 안디옥을 떠나면서 가졌던 여러 가지 의문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았을 것이다. 호슬리는 이 당시의 바울이 아마도 로마제국의 도시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 그리고 그 이후 동맹시 전쟁으로 다시금 나타나게 되는 근본적인 적폐에 확실히 눈뜨게 되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이는 바로 로마의 우산 아래 사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이와 차별에 관한 것이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들과 라틴 시민권을 가진 자들, 즉 다양한 권리를 누리던 로마 시민들과는 달리 그들과 함께 피 흘리며 전쟁에 참전했지만 여러 의무에 비해 턱없이 적은 권리에 만족해야 했던 라틴 시민들 사이에 차별이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살던 도시를 벗어나면 아무런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던 여러 다른 소도시의 시민들, 그리고 무거운 세금과 노역에 생계를 위협받으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을 팔아 노예가 되는 농촌의 농부들과 노예들의 삶이 보였다. 더 나아가 바울은 이러한 차이와 차별이 결국 구별과 분리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와 동일한 현상이 이미 안디옥과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 서신 전체를 아우르는 바울 사상의 중심을 엿볼 수 있는데, 바울이 왜 그토록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이며(갈 3:28) 차별 없는 하나님의 사랑(고전 12-13장)과 복음을 강조했는지, 그리고 그 배경과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바울 서신 전체에 걸쳐, 바울은 차이와 차별이 강조될 때 가장 극렬하게 반응한다. 고린도교회의 분파들(고전 1:10-11)을 보면서, 바울은 단순히 사이좋게 지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바울이 해답으로 제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지혜이다. 자신이 가진 복음의 핵심을 공동체 내 분열에 대응하기 위해 내어놓는다. 이런 바울에게 신학적 논증과 공동체적 실천은 분리되지 않는다.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는 믿음은 율법과 관습을 뛰어넘는 가치를 가져다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소위 20세기 바울 신학의 뜨거운 이슈인 ‘새 관점’을 쉽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새 관점의 할아버지격인 그리스터 스탠달은 바울의 이신칭의(믿음으로 얻는 의)가 이방인들을 공동체로 조건 없이 받아들이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주장했고, 더 나아가 제임스 던은 바울이 이신칭의를 통해 유대 기독교가 스스로를 이방인 기독교로부터 분리하려 한 것을 반대하고 비판하려 했다고 지적했다. 결국 바울 서신에서 변치 않는 관심은 바울이 말하는 공동체적 삶에 관한 것이며, 바울이 세운 거의 최초의 도시 공동체 에클레시아를 살펴보는 것으로 바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바울의 에클레시아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빌 3:20)

바울이 고대 그리스의 에클레시아에 대한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면, 우리는 왜 굳이 당시 민족이나 교회 전체를 대표해서 사용했던 에클레시아란 단어를 자신이 도시에 세운 공동체의 이름으로 사용했는지를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사람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을 때라는 에클레시아의 원래 목적을 이용하여 바울은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빌 2:4)라고 말한다.

스스로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하며 그 독립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봉사(코이노니아)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구원의 기초가 세워지게 된다. 그 기초를 위협하는 자들이 바로 ‘개’와 같은 자들이다(빌 3:2). 그들은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빌 3:2)이며 육신에 신뢰(빌 3:3)를 두는 자들이다.

그리스도 외의 것은 모두 오물로 여긴다(빌 3:8)는 맹렬한 표현은 안디옥에서 베드로에게 소리쳤던 바울의 목소리를 기억하게 한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의지했던 자신의 민족, 종교, 가문, 율법으로 쌓은 명예를 비판하는 바울의 고백은, 그가 말하는 평등한 시민들로 이루어진 하나 된 공동체인 에클레시아를 전제하지 않고는 오해되기 매우 쉽다.

다음호에서는 이 바울의 에클레시아가 지닌 특이점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자 한다. 

참고자료
1. Horsley, Richard A, and Neil Asher Siberman, The Message and the Kingdom: How Jesus and Paul ignited a Revolution and Transformed the Ancient World. Menneapolis: Fortress, 2002.
2. 박영호, 《에클레시아》,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8.

 


한수현
감리교신학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Th.M.), 시카고 게렛신학교에서 목회학을 공부(M.Div)한 뒤, 시카고신학교에서 바울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된 연구 분야는 바울 서신, 복음서, 유대 묵시문학이며, 박사 논문은 고린도전서 15장의 ‘죽은 자의 부활’과 세월호 참사를 연결 짓는 연구 작업의 결과물이다.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 강사로 바울 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한국교회와 사회를 바울 서신과 바울 신학에 비추어 살펴보는 여러 연구들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