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인가, 정착민인가?

[345호 신학서 읽는 네 가지 시선] 데이비드 반드루넨의 《자연법과 두 나라》

2019-07-31     최경환

1. 저자의 관심: 에스콘디도 신학
칼빈신학교에서 도덕신학을 가르치는 칼빈 P. 반 레켄은 “세상 속 그리스도인: 나그네인가, 정착민인가?”라는 글에서 미국에 정착한 화란 개혁교회 성도들의 정체성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추적한다. 처음에는 소수의 이민자가 ‘나그네’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정착민’으로 변하더니, 이제는 이 세상이 모두 자기 것인 양 지나치게 주인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반 레켄이 분석한 대상은 흥미롭게도 화란 개혁교회의 찬송가인데, 우리나라식으로 하자면 처음에 그들은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천국에 있네” 같은 찬양을 불렀다는 거다. 그런데 요즘은 정 반대로 “천국은 내 집이 아니네”(Heaven is not my home, 이는 폴 마샬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라는 찬양을 부른다는 거다.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드러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칼빈주의의 세계관이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와 세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지나치게 세상 친화적인 문화관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래 화란 개혁교회는 최근 대안 공동체로서의 교회 윤리를 주장하는 재세례파처럼 나그네이자 거류민으로 자신들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 《기독교 강요》(1834년판) 속표지. (사진: 위키미디어 코먼스)

최근에 젊은 칼빈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신칼빈주의 세계관에 대한 비판이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기독교세계관 운동의 근간이었던 신칼빈주의가 사실은 칼빈의 이상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정통 개혁파 사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성이나 루터의 두 왕국 이론을 이어받아 사회사상을 발전시켰다는 것이 이들의 주된 논지다. ‘창조의 선함’을 강조한 신칼빈주의는 영지주의적 세계관을 반대하려다 오히려 자연을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해석했고, 자연을 하나님의 은총과 구속,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통전적으로 변혁시키려는 과도한 비전을 품기도 했다. 이런 세계관은 종교개혁의 유산을 이어받은 것도 아니고, 오늘날 우리 시대를 위한 사회윤리로도 적절하지 않다. 반드루넨은 그리스도와 문화, 복음과 세상 사이의 긴장을 적절하게 유지하면서 두 세계의 통치 질서를 구분해서 이해하는 것이 개혁파 사회윤리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을 가진 일련의 사상을 ‘에스콘디도 신학’(The Escondido Theology)이라고 부른다.

반드루넨은 에스콘디도 신학을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신학자로서 최근에 그의 책들이 연이어 소개되고 있다. 그는 법학박사이자 철학박사이며, 현재 캘리포니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과 기독교윤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지금까지 모두 11권의 책을 집필·편집했고, 다양한 학술지에 글을 기고하는 왕성한 학자다. 50살이 채 안 된 젊은 신학자로서 관심 분야도 다양하고 신학 스펙트럼도 상당히 넓어서 앞으로 가장 주목받는 개혁파 신학자가 될 것 같다.

2. 편집자의 선택: 출판사의 뚝심과 열정
역사적 개혁파 신학을 중심으로 책을 출판하는 ‘부흥과개혁사’는 뚝심과 열정의 출판사다. 그동안 보수적인 성서주석과 개혁파 신학자들의 책을 꾸준하게 소개해왔는데, 대다수가 상당히 무게감 있는 책들이다. 부흥과개혁사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입장이나 저자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들의 책은 결코 가볍거나 어설프지 않다. 국내 보수적인 신학교에 다니는 신학생들에게 좋은 양서를 제공하고 학문적 토대를 마련해주는 출판사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책은 부흥과개혁사의 신학적 정체성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책이 아닐까 한다. 출판사 내부자가 아니기에 정확한 판단은 어렵지만, 반드루넨은 마이클 호튼이나 데이비드 웰즈와 함께 이 출판사의 신학적 토대를 보여주는 학자로 보인다. 이들은 대중적인 복음주의 신학이나 학문적 토대가 얕은 근본주의 개혁파 신학과는 달리 현대신학과 대결하면서 학문적으로 논쟁할 수 있는 학자들이다.

마이클 호튼이나 데이비드 웰즈가 조직신학적 기반을 제공한 학자였다면, 반드루넨은 이 출판사의 기독교사회윤리 혹은 정치윤리의 신학적 토대를 제공한 학자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반드루넨의 책은 모두 4권이 번역됐는데, 《자연법과 두 나라》는 개혁파 사회윤리 사상을 역사적으로 추적한 책이고, 《언약과 자연법》은 성서에 나오는 자연법을 성서신학적으로 철저하게 탐구한 책이다. 이 두 권의 책이 그의 사상을 가장 충실하게 보여준 책이고, 이를 좀 더 쉬운 문체와 가벼운 분량으로 저술한 책이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이다.

젊은 개혁파 신학자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책을 열심히 출간하는 부흥과개혁사는 그 존재만으로 이미 한국 기독교 출판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앞으로는 이 출판사의 실질적인 기획자인 백금산 목사의 신학적 역량을 뛰어넘어 좀 더 다양하고 폭넓은 개혁파 신학을 소개하는 출판사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3. 비평가의 시선: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사회 참여에 관심이 많은 그리스도인 중에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사회 속에 이식해야 한다는 열심에 사로잡힌 이들이 있다.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선교적 소명을 넘어 기독교적 가치를 사회 전반에 확산시켜야 한다는 열망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이런 열망은 특별히 개혁파 신자들과 기독교세계관을 강하게 붙들고 있는 이들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빛나게 하라’는 그들의 신념은 심지어 개혁주의 기초 위에 “염소 사육 협회를 세우고 개혁주의 세계관과 인생관에 따라서 대학 미식축구 프로그램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18쪽).

한반도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고 외쳤던 선교단체의 열정이나 도시 전체를 하나님의 성읍으로 만들어버리자고 주장했던 과도한 정치적 열망 속에서도 이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열망은 자연스럽게 이 세상을 기독교적 사회·정치·문화로 바꿔야 한다는 승리(정복)주의적 태도로 귀결되고, 동시에 기독교세계관을 통해 비기독교적 사상을 철저하게 비판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지기 쉽다. 

반드루넨의 신학적 기획은 이런 태도를 교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의 핵심 주장은 책 제목에 그대로 담겨 있다. 종교개혁 이후부터 지금까지 개혁파 사상가들은 자연법과 두 나라 이론을 주장했고, 그것이 개혁파 사회윤리의 기초 개념이라는 것이다. 자연법이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도덕법”을 새겨 넣으셨기 때문에 누구나 양심에 따라 도덕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14쪽). 따라서 이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와 상관없는 세계가 아니라 모든 이들이 안전하게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근거이자 터전이다.

하지만 초기 교회 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제도와 활동을 다스리시되 근본적으로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다스리신다”고 생각했다(14쪽). 2세기 문헌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와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을 보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실존 방식은 “적대적인 세계와 대립 가운데 있는 공통성”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49쪽). 즉,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함께 공유하는 자연법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이 둘은 서로 다른 시민권을 지닌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은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속에서 살아가는 영적 나라의 시민이고, 비그리스도인은 창조자이자 보존자이신 예수의 통치 속에서 살아가는 일반 시민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속에서 자신들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과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라 할 수 있다.

반드루넨이 말하는 두 나라 이론은 현대 기독교 사회윤리자들의 논의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면서도 미묘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그의 입장은 폭력 위에 세워진 국가와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덕과 성품으로서의 대안 공동체를 주장하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와도 비슷하고, 세속적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독교 정통주의의 복원을 꿈꾸는 존 밀뱅크와도 유사하다. 기존의 기독교세계관 논의를 비판하면서도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모색하는 반드루넨의 입장에는 이런 논의들이 좋은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혁파 신학자로서 반드루넨은 하나님이 임명한 국가와 일반은총으로서의 문화 영역을 간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나라의 시민으로서 두 영역에서 모두 신실하게 살아가게 하셨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부여한 자연법과 국가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태도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반드루넨의 숙제였다. 이 숙제는 네덜란드의 수상이자 신칼빈주의의 선봉자로 알려진 아브라함 카이퍼에게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일반 은혜를 강조한 신학자로 잘 알려졌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반립(反立, Antithese)에 집중했다. 그래서 자우데마 같은 철학자는 카이퍼 신학 에 담긴 근원적인 모순을 지적하기도 했다. “분명히 카이퍼는 카이퍼와 다툴 수 있다. 반립의 카이퍼는 일반 은혜의 카이퍼와 맞서 싸우는 것이다.”(474쪽).

어쩌면 이런 모순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과 등지고 교회와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보수적 태도나 기독교세계관을 적극 실천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열정, 이 두 가지 입장이 한편으로는 일관되고 모순이 적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렇게 칼로 두부 자르듯 설명될 수 있을까? 반드루넨은 그 미묘한 경계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긴장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적 삶의 태도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인 이 세상을 인정하면서도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랄까? 

4. 독자의 취향: 전통의 재해석
진지하고 딱딱한 이론서를 추천하려니 살짝 미안하다. 추천사가 말해주듯, 이 책은 개혁파 사회사상의 역사를 정말 꼼꼼하고 세밀하게 소개한 책이다. 신칼빈주의를 둘러싼 역사적 논쟁사와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집중력이 가히 압도적이다. 오늘날 개혁파 신학을 공부하는 신학생들이나 목회자들이 읽으면 많은 정보와 신학적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신칼빈주의나 기독교세계관을 들먹이며 정치 참여에 열을 올리는 정치목사들이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개혁파 신학은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오기 힘든 매력을 지녔다. 역사적으로 개혁파 신학자들은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 탓에 거의 모든 신학적 궁금증에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 애를 썼다. 바늘에 찔려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깐깐하고 엄격한 이미지가 사실 아주 잘못된 이미지만은 아니다. 실제로 개혁파 신학자들의 책과 저서는 교파를 떠나 많은 신학자에게 깊은 영감과 영향을 끼쳤다.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은 개혁신학이 빠질 수 있는 오류 두 가지를 지적한 바 있다. 하나는 지나치게 역사적 사실에 얽매여 전통주의에 빠지는 오류이고, 다른 하나는 ‘개혁교회는 계속해서 개혁해야 한다’는 명제에 빠져 현대사상에 압도당하는 오류이다. 그런데 한국의 개혁파 신학은 첫 번째 오류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한다. 시대는 빠르게 변한다. 신학은 늘 동시대의 다양한 학문과 대화하고 적응하면서 자신의 전통을 재해석해야 한다. 영미권에서는 최근에 젊은 칼빈주의자들이 신학적으로 주목할 만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하는데, 국내에서도 젊은 개혁파 신학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해서 다양한 연구를 해주길 기대한다. 이 책이 그런 연구에 마중물 역할을 해주면 좋겠고, 젊은 신학생들이 열심히 읽어 개혁파 신학의 소중한 유산을 이어가길 기대한다. 

 

 

최경환
대학과 대학원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남아공 프리토리아 대학교에서 공공신학을 연구했다. 현재는 과신대(과학과 신학의 대화) 기획실장으로 일하면서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