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부끄럽기를 선택할 때

[347호 평화를 살다]

2019-09-20     문아영

나는 빌었다. 새봄이 돌아온 날 늦은 저녁, 퇴직금으로 산 술을 앞에 놓고 나는 내가 가르친 일에 대해서 진심으로 빌었다. 그 옛날 학교 운동장에서 ‘빨갱이’를 증오하라고 웅변하던 아이들 앞에서였다. 뿐만 아니라, 솔직히 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내가 가르친 모든 아이들을 불러내서 깊이 속죄하고 싶었다.
- 이치석, <전쟁과 학교> 서문 중

어느 초등 고학년의 전쟁 대피훈련
살아가면서 저마다 잊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듯, 나에게도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1994년 즈음 초등학교 고학년이던 나는 뉴스에서 ‘서울 불바다’ 이야기를 들었고 어른들이 지나가듯 ‘이번엔 정말 전쟁이 날지도 모르겠다’고 서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학교에서는 민방위 훈련 때 책상 밑으로 들어가는 연습을 했고, 나는 전쟁이 난다면, 그래서 어차피 죽는다면 학교에서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왕 죽으려면 목숨같이 사랑하는 우리 가족이랑 같이 죽어야지 내가 왜 이 학교에서 죽어야 하나.

그 날 이후, 나는 나와 세 살, 네 살 터울의 동생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너희들 만에 하나 전쟁이 나면 선생님이 책상 밑에 들어가 꼼짝 말라고 할 거야. 하지만 너희들은 그 말을 들으면 안 돼. 전쟁이 났다고 책상 밑에 들어가라고 선생님이 말하면 너희들은 모든 짐을 그대로 두고 몸만 뛰어나와! 여기 조회대 바로 옆에서 언니를 만나는 거야! 알았지?”

하늘에서 포탄이 쏟아지는 것을 상상하며 어린 두 동생과 함께 안전하게 귀가할 동선을 짰다. 학교 운동장을 피해 가장자리 나무 아래를 지그재그로 뛰어 교문 옆 경비실 지붕아래 잠시 쉬었다가 교문 앞 문방구 옆 차고로 들어가서 동태를 살핀 다음, 반대방향으로 뛰면서 머리를 싸매고 여기저기 뛰어 들어가며 집까지 가려는 계획이었다. 동선이 다 결정된 후에는 동생들과 함께 실전훈련을 했다. 얼마 전 동생들에게 혹시 그 때 그 일들이 기억나느냐 물었더니 그 어렸던 동생들도 기억이 난다고 했다. 정확하게 뭔지는 몰랐는데 언니가 무조건 조회대 앞으로 오라고 했고 죽어도 집에 가서 죽자고 했다는 것이다.

두어 번 정도 실전연습을 했는데 어두운 이웃집 차고에 웅크리고 앉은 나의 심정은 매우 비장하고 결연했다. 동생들의 생명에 대한 책임감과 어떻게든 엄마아빠와 꼭 재회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의 나는 왜 그렇게까지 전쟁을 두려워했던 것인지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내 마음을 다 알 수는 없겠으나 다만 죽어도 가족들과 함께 죽겠다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죽어도 가족 곁에서 죽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가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이 글을 쓰며 찬찬히 떠올려보았다. 그 떠올리는 과정 속에서 강력한 이미지 하나를 기억해냈다. 입가에 피를 흘린 채 죽어있던 어린 남자아이의 사진과 이승복 어린이 생가 사진, “나는 공산당이 싫다”고 외쳤다는 이유로 입을 양쪽으로 찢어 죽임을 당했다는 이승복 어린이의 사진이다.  그 사진 바로 옆에는 집의 앞마당 거적 위에 누워 있던 일가족의 사진이 생생히 기억난다. 엄마와 함께 죽어 누운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 사진은 학교에서 현장학습으로 다녀왔던 안보회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피아 이분법’ 내면화한 학교 교육
거적 위에 누워 있던 일가족의 모습.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몸에서 느낄 수 있는 정적. 사진에는 본래 소리가 없지만 나는 그 사진으로부터 죽음만이 낼 수 있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그 사진을 마주했던 그 순간 이후로 나는 죽으려면 모두 함께 죽자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살아남아 그 모습을 보게 될까 두려웠고, 내가 그리 된 모습을 우리 가족 중 누군가 살아남아 보게 되는 것이 너무 싫었다.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 아닌가. 북한이 무서웠던 유년기, 내게 북한 사람들은 공산당이 싫다고 말하면 어린 아이의 입을 찢어 죽이는 무서운 사람들이자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괴수처럼 느껴졌는데 과연 그들이 무서웠던 것이 나뿐이었을까?

《전쟁과 학교》(삼인)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이치석은 1953년 7월에 끝난 한국 전쟁을 ‘학교’가 다시 불러냈다고 말한다. ‘적’과 ‘우리’를 가르는 이분법, 학교는 그 이분법을 주입하는 공간이었고 그 이분법을 통해 분단체제는 사람들에게 깊숙이 내면화되었다. 국가의 안위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고 선언하는 국민의 탄생, 그 과정에서 인민이라는 이름은 부를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학교에서 벌어진 전쟁은 국민과 인민이 대립하여 결국 국민이 승리했던 일련의 과정 아니었을까?

   
 


전쟁을 가르치고 반공을 가르치고 애국을 가르쳤던 학교는 불과 몇 해 전까지도 여전히 같은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정권이 바뀐 지금도 곳곳에서 비슷한 교육들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무엇을 가르치는 것인지도 정확히 모른 채 옳다고 믿어지는 것들을 그냥 전달하는, “역사의 자장가”와 같은 멸공과 반공의 메시지는 한국 사회에 치밀하게 스며들어있다.

내가 죽어도 같이 죽자고 말했을 때 동생들에게 어떤 공포가 전달되었을지, 이 글을 쓰며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전달했던 그 공포는 공산당을 물리쳐야 한다고 가르쳤던 어떤 교사의 목소리와는 어떻게 달랐을까?

2004년 9월 한 무리의 원로교사들이 광화문에서 반공교육 참회선언을 했다. 그 때는 반공교육이 애국인 줄 알고 가르쳤다는 교사들은 다시는 이런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오늘의 참회선언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 다른 미래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각자 자기 몫의 과오를 직면하고 기꺼이 부끄럽기를 선택할 때, 그리고 좀 더 용기를 내어 마침내 용서를 구할 때에야 비로소 생각해볼 수 있는 것 아닐까? 국민과 인민, 두 말이 지향하는 것은 결국 살아있는 존재, 곧 “사람”임에도, 한반도의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한일 지소미아 종료결정을 앞둔 시점, 어떤 목사들은 “한국도 일본과 함께 (2차 대전의) 전범”이라고 하거나 “한국은 그냥 두어도 망할 나라”라며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공산주의를 타개”해야 하는데 현 정권이 일본과 미국을 서운하게 하면서 “한국 사회를 공산화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고도 했다.

‘역사의 자장가’는 일부 목사들의 입을 통해 주말마다 한국 곳곳의 교회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언젠가 이 목사들도 참회하는 날이 올까? 한반도의 전쟁이 여전히 끝나지 못하는 것은 주일마다 전쟁이 끝나지 않기를 기도하는 이들 덕분(?)인 건가.

 

문아영
피스모모(www.peacemomo.org)라는 평화교육 단체를 2012년에 설립하여 함께 운영해오고 있다. 실천적으로 사유하는 삶에 관심이 많다. 네 마리의 고양이, 새촘이, 우아, 레오, 라라와 함께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