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좌절과 눈물

[347호 제국과 하나님 나라] 고린도후서 읽기

2019-09-24     한수현

바울 서신을 읽는 방법
같은 사건이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어느 대형교회 목사의 범죄는 한 개인의 일탈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한 교회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시작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시야를 더 크게 넓히면 이는 교회 전체의 위기 징후로 볼 수도 있다. 개인의 문제로 볼 것인가, 공동체의 문제로 여길 것인가, 아니면 사회 전체를 반영한 징후로 생각할 것인가? 결국 시야의 문제는 해석의 문제로 귀결된다.

바울 서신 읽기도 마찬가지다. 첫째, 바울의 이야기를 한 개인의 신앙과 열정의 드라마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한계에 이르러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난 개인의 회심과 소명 이야기로 읽는 것이다. 둘째, 바울 서신을 통해 그리스-로마 지역에 있었던 메시아 공동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도 있다. 바울과 각 공동체 구성원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재구성하고 그들의 신앙고백과 예배 생활을 발굴함으로 초기 메시아 공동체의 살아 숨쉬는 삶을 엿볼수 있다. 바울 서신이 초대 교회 역사를 재구성하는 유물로 사용되는 것이다.

신앙공동체에서 바울 서신을 읽는 첫 번째 방법은 대체로 개인적 시각의 방식이다. 바울의 회심이나 목회에 자신을 심리적으로 일치시켜 스스로 삶의 등불로 삼는다. 이 방법의 강점은 서신의 맥락과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해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물론 약점도 있는데, 때로 어떤 본문은 맥락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바울의 저술을 무조건적으로 맹신하게 될 수 있다.

두 번째 방법은 보통 성서신학에서 사용하는 역사비평학에 기대어 바울 서신의 맥락과 역사적 상황을 연구하여 바울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 방법의 강점은 당연히 본문의 맥락과 의미에 접근이 용이하므로 자의적인 해석을 막고 성서의 과도한 신비화를 방지하는 데 있다. 반면, 약점은 깊이 침투해간 과거의 역사에서 현재로 돌아오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바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의 깨달음으로 바꾸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시야를 더 확장하는 세 번째 방법이 있다. (바울 서신을 읽는 세 가지 방법은 서로 이질적인 것이라기보다 시야의 폭이 서로 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울 서신을 당시 전체 그리스-로마 사회 속에서 읽는 방식이다. 비록 바울은 당시 수많은 사람들 중 한 개인이었을 뿐이지만, 그가 고민하던 문제가 단순히 개인적인 사안이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바울의 하나님 나라와 부활의 메시지들은 한 개인을 넘어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들 모두가 가져야 할 소망이었다. 게다가 유대 공동체 중심의 선교활동을 이방인 중심으로 과격하게 변화시킨 인물이 바울임을 기억할 때, 그의 서신은 하나의 공동체나 민족의 경계를 넘어 당시 사회 전체를 향해 있음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필자는 이 확장된 바울 이해가 현재의 우리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와 호응한다고 믿는다. 만약 바울 서신의 주제들이 개인 구원의 종교적 문제일 뿐이거나 이미 해결된 인간 문명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현재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읽으며 고민하는 글이 될 수 없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바울의 글을 직접 읽어가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바울이라는 개인, 또는 한 메시아 공동체의 문제에 쉽게 몰입하게 되어 넓은 시각으로 들여다보는 일이 힘들어진다. 좋은 예를 들어보자.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고린도 공동체에 보낸 눈물과 애통의 편지이다. 이전 글에서 고린도 공동체의 분열과 그에 대한 응답이 바로 고린도전서임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수많은 참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바울의 지혜가 담겨 있다. 고린도교회가 실패했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평소에 소망했던 에클레시아의 모습을 편지에 아로새겼다. 그리고 그 에클레시아를 이루기 위해 다시금 고린도 공동체가 힘을 써주기를 소망했다.

고린도후서를 살펴보면 그러한 바울의 소망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고린도에서 아마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몇몇 공동체원들은 바울의 소망과 충고를 참견과 독설로 받아들였고, 급기야 바울과 일대 격전을 준비했다. 그들은 복음에 대한 바울의 순수성을 의심하고 사도로서 바울의 권위를 부정했다. 이제는 에클레시아를 어떻게 이루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바울은 사도로서 자신의 자격과 순수성을 증명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 오늘날의 고린도(코린트)시(2007년).(사진: 위키미디어 코먼스)

바울의 투쟁, 바울의 실패
고린도후서에서 바울과 논쟁을 벌인 사람들이 말한 내용을 보면, 대부분 고린도전서의 참된 공동체에 대한 비판이나 반대가 아닌 바울 개인에 대한 비판이나 비방이었다. ‘메신저’를 공격함으로써 바울의 ‘메시지’까지 지우려는 의도도 보인다. 만약 고린도후서를 위의 처음과 두 번째 방법처럼 바울 개인과 공동체의 관점으로만 이해한다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이루어진다.

첫째, 고린도후서를 바울 자신의 사도됨에 대한 이해와 고백으로 읽을 수 있다. 바울이 말하는 자신의 순수한 의도와 사랑, 공동체를 지켜가려는 소망이 그것이다. 둘째, 고린도 공동체의 상황 및 그들의 신앙과 삶으로 읽을 수 있다. 이 경우 고린도 공동체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초기 메시아 공동체의 믿음이 어떠했는지 증언하는 기록이 된다. 그런데 시야를 좀 더 넓히면 바울과 고린도 공동체 사이의 일들이 기록된 고린도후서를 당시 전체 그리스-로마 사회의 변화를 위한 소망의 글로 읽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오늘을 사는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희망으로 되살려낼 수 있다. 왜 이런 시각이 필요하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살펴보자.

신약성서에 따르면 바울이 처음 개척한 교회들은 갈라디아, 데살로니가, 그리고 빌립보에 있었다. 이렇다 할 증거들은 없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이 교회들의 구성원이 경제적으로는 빈곤층, 사회적으로는 노동자나 노예들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바울이 천막 노동자였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경우 바울과 함께 동고동락했음을 볼 때, 그들의 처지도 바울과 같은 노동자였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 교회는 언제나 바울이 필요한 여비를 마련해주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바울은 힘든 와중에서도 여비를 마련해준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다. 이런 몇 가지 정황으로 보아, 바울의 초기 에클레시아 공동체 사역은 주로 하층민·노동자 중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린도에 이르면 변화가 생긴다.

고린도는 당시 그리스의 중심 도시에 속했고, 여러 문화와 문물이 활발히 교류되는 곳이었다. 개방적인 분위기의 고린도에서 바울은 자신의 메시지에 흥미를 갖는 당시의 상류층 지식인들이나 부자들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메시아에 대해 전할 수 있었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런 고린도에 바울은 거의 2년 가까이 체류하면서 선교활동에 힘썼다.

고린도에 길게 체류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는 바울에게도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이 긴 시간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그가 떠난 후 고린도전서의 내용과 같이 고린도의 에클레시아에는 몇 개의 패거리 문화가 생겨났으며 논쟁과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여러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보낸 바울의 편지에 분노한 고린도의 몇몇 구성원들은 바울과 관계를 끝내고자 한 목소리로 그를 헐뜯기 시작했다.

고린도 성도들의 반란은 바울에게 크나큰 상처이자 실패였다. 바울이 상상한 에클레시아는 메사아의 부활 이후 신의 나라가 시작되는 공간이다. 남녀나 신분 차별도, 빈부 격차도, 민족과 문화라는 장벽도 없어야 하는 곳이다. 나아가 당시 인간의 정신문화를 지배하던 종교의식이라는 형식도 벗어버려야 할 곳이었다. 다양한 문화적·민족적·경제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에클레시아를 세웠으나, 결국 그러한 가치들은 와해되고 이제 그 꿈을 제시한 지도자에게마저 등을 돌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바울은 실패했다. 스스로 확신했던 하나의 확신이 무너지고 있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드러난 신의 정의와 구원은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심에 무너지고 있었다.

어느 특정한 계층이나 민족 이데올로기로 하나가 된 공동체는 얼마든지 있다. 유대주의를, 가족주의를, 로마의 신분제를 넘어, 경제적 차이를 극복하여 세워질 메시아 공동체만이 신의 정의와 구원을 드러낼 수 있다. 안디옥에서 보았던 베드로의 이중성, 전통에서 벗어나길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뒤로 하면서 여지껏 이루고자 했던 꿈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를 바울이 사도로서 자신의 정당성과 순수성을 주장하는 글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이익집단들의 분열 속에 무너져가는 메시아 공동체를 붙잡으려는 시도로 읽어야 한다. 이제 바울은 자신이 왜 이러한 소망을 품게 되었는지, 그 소망을 왜 끝내 놓을 수 없는지, 그래서 자신을 등진 고린도 성도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간청해야 하는지를 쓰기 시작했다.

고린도후서의 재구성
고린도후서는 여러 통의 편지 묶음이다. 고린도후서를 읽을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것이 문단과 문단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 곳이 많다는 점이다. 1-2장을 보면 고린도 공동체와의 관계가 해결되었다는 인상을 주는데, 2장 후반이나 10장을 보면 매우 격렬하게 자신을 변호하는 바울을 만나게 된다. 학자들은 고린도후서가 하나의 편지가 아니라 여러 짧은 편지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게다가 편지들이 순서대로 모여 있지 않고 뒤섞여 있다고 생각한다. 편지의 숫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다음 순서로 정리할 수 있다.

1. 2:14-6:13; 7:2-4 (추천서에 대하여) 처음 편지에서 바울은 고린도 공동체가 문제 삼은 추천서 문제를 다루고 있다.
2. 10:1-13:13 (바울의 눈물의 편지) 고린도 전서의 경우와 같이 바울이 보낸 추천서에 대한 편지는 고린도 공동체원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오히려 바울을 더욱 호되게 비판하고 폄하하였다. 두 번째 편지는 바울이 결국 사도로서 자신의 자격을 논하는 편지이다.
3. 1:1-2:13; 6:14-7:1; 7:5-16 바울의 눈물의 편지가 전해지고 난 후, 고린도 공동체는 기적적으로 마음을 돌이켜 바울에게로 돌아온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공동체를 두 번이나 방문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한다. 또한 문제를 일으킨 공동체원을 용서했다는 말을 듣고 기뻐한다.
4.  8:1-9:15 (헌금을 요구함) 관계 회복과 함께 바울은 고린도 공동체에 헌금을 권고한다. 곧 메시아 공동체가 제국의 경제 안에서 저항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 가난한 자를 돕는, 구약성서로부터 내려오는 나눔의 실천을 강조한다.

로마의 잣대, 그리스식 스펙에 맞선 바울
바울이 가장 큰 위기에 몰렸을 때 보낸 ‘눈물의 편지’의 내용을 먼저 살펴보자. 그는 고린도의 모임이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고 말한다.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지만, 직접 대할 때에는, 그는 약하고, 말주변도 변변치 못하다.”(고후 10:10, 새번역)

교회를 개척하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목회자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개척할 당시의 메시아 공동체에 대한 열정과 목표보다는 여러 인간관계와 정치적 역학으로 인해 공동체가 파괴되어가는 경향이 많음을 알게 된다. 그런 경우 어떤 이들은 목회는 경영과 비슷하다고 충고한다. 인간을 파악하고 그들의 욕망을 분석하여 적절한 상벌을 가하고 목회자의 뜻과 신념에 동의하는 자기 사람들을 만들어 공동체를 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필자 또한 이런 처방을 반대하지 않지만, 바울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간다. 고린도전서에서 십자가는 인간의 권위와 시스템을 해체하는 것이라 말했던 바울은 이제 자신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로마의 잣대에 부활한 메시아로 맞선다.

바울이 살던 시대는 그리스-로마라는 거대한 문화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는 알렉산더 대왕이란 불세출의 인물이 이뤄낸 것이었다. 알렉산더 이전의 제국은 정복전쟁 이후 패배한 나라와 민족들에게 얼마간의 조공이나 세금을 걷는 것으로 지배를 이어갔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그리스식 ‘도시’ 문화를 중심으로 그리스 문화를 통해 자신이 정복한 지역의 사람들을 ‘그리스식’으로 변화시키려 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알렉산더 이후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은 소위 ‘출세’를 위해서는 지배 문화가 요구하는 특정 문화를 체득해야만 했다는 점이다. 즉, 그리스식의 ‘스펙’을 쌓은 사람만이 중앙으로, 더 높은 자리로 진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의 교육을 파이데이아라 불렀는데 청소년이 되면 짐나지움이란 곳에서 여러 학문을 습득하고 사춘기가 되면 수사학을 공부했다. 말을 통한 ‘설득’을 배우는 수사학은, 법과 정치를 다루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학문이었다. 법을 기초로 한 질서가 발달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욱 정의롭고 합리적인 사회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법은 다양한 인간의 삶 전체를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런 점에서 결국 그 법을 다루는 사람들의 판단력과 정의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 판단력을 겨루는 곳이 법정이다. 판관과 검사, 그리고 변호사가 법에 대한 지식을 토론할 때 필수적인 능력이 바로 수사학이다. 결국 법치의 문제는 설득의 문제로 환원된다.

고대에는 헬라(그리스) 문명과 유대 문명에서 글보다는 말에 더욱 권위를 부여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정치 영역에서는 글보다 말을 중시했으며, 연설을 지도자의 필수적인 덕목으로 여기곤 했다. 결국 고린도의 모임은, 당시 잣대로 바울이 함량미달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의 치밀하고 유려한 글을 말의 능력 없음으로 폄하한 것이다. 당시 분위기로 볼 때, 이는 매우 모욕적인 말이면서 자신들의 모임을 일군 개척자와의 관계를 끊으려는 시도였다.

바울이 전한 메시아에 대한 복음과 십자가의 의미를 알면서도, 바울의 메시아 공동체 구성원들은 왜 그토록 로마의 잣대로 판단하려 했을까? 필자는 많은 메시아 공동체들이 성서를 통한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만들고자 한 에클레시아, 곧 진정한 메시아 공동체를 만드는 데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믿는다. 바로 자신들이 배우고, 훈련받고, 믿어왔던 신념체계 또는 이데올로기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그 믿음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로마의 방식을 따른 메시아 공동체의 실패
지젝이 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자신을 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오랜 치료(?) 뒤에 드디어 자신이 닭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믿게 되었다. 의사를 만나 퇴원을 위한 마지막 상담을 받던 중 그가 꽤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다른 사람들이 저를 여전히 닭이라고 생각하면 어쩌지요?” 소위 스펙 사회의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펙에 목숨을 거는 현실에 있지 않다. 스펙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문제는 결국 다른 사람들이 스펙이라는 잣대로 판단/평가한다는 생각이 스펙에 목숨을 걸게 하는 것이다.

바울의 첫 번째 편지(고전 2:13-6:13)에서 주된 이슈가 되는 추천서 문제를 이런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당시 로마의 공직 사회는 추천서 중심의 사회였다. 오늘날에도 서구의 대학이나 구직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명망 있는 인물의 추천서가 필수적인데, 당시 사회에서도 누구에게 추천서를 받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좌우되었다.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 메시아 공동체 안에서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자신이 예수의 생전에 그의 제자였다거나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라고 자랑했을 것이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 또한 예수의 혈육이라는 점이 그의 권위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공동체가 확장되면서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 전역에 메시아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미 바울이 로마에 편지를 보낼 당시 그곳에 10여 곳이 넘는 공동체가 있었음을 볼 때, 여러 선교사들이 로마 전역을 누비고 다녔을 것이라 상상할 수 있다. 당시 사도들이나 유명 지도자들은 추천서를 그 선교사들에게 들려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아마 그들이 바울이 고린도 공동체에서 그런 추천서를 가진 자가 아님을 말했을 것이고, 이것이 바울을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안디옥에서 베드로에게 등을 돌렸을 때, 바울은 예루살렘 공동체의 권위에 힘입은 선교사가 되기를 거부했다. 바울이 실망한 것은 자신을 무시하는 추천서를 가진 선교사들이 아니라, 로마의 방식과 다를 바 없이 모임을 조직해나가는 메시아 공동체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로마 사회의 방식으로 사람을 평가했던 것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메시아 공동체의 실패를 본다. 분열한 고린도 교회가 이제 스스로 분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 사회의 방식을 사용하여 보이지 않는 계급과 차별의 공동체를 만들고 있다. 바울은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갔을까?


한수현
감리교신학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Th.M.), 시카고 게렛신학교에서 목회학을 공부(M.Div)한 뒤, 시카고신학교에서 바울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된 연구 분야는 바울 서신, 복음서, 유대 묵시문학이며, 박사 논문은 고린도전서 15장의 ‘죽은 자의 부활’과 세월호 참사를 연결 짓는 연구 작업의 결과물이다.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 강사로 바울 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한국교회와 사회를 바울 서신과 바울 신학에 비추어 살펴보는 여러 연구들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