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들의 고통, 거기 주님이 계신다

[349호 커버스토리]

2019-11-20     이박광문


아프리카돼지열병(African Swine Fever, ASF) 그리고 살처분. 구제역의 비극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여전히 변한 것은 없었다. 하나님은 어떤 마음이실까. 그런 와중에 동물들의 고통에서부터 문제를 풀어가 보자는 제안은 기쁜 소식이었다. 위기 인식은 가장 고통 받는 대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결국은 모두 그 위기를 향해 추락할 것이다.

우리가 멧돼지라고 부르는 이들과 분홍색 돼지가 같은 종이라는 사실은 의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 집돼지는 사람들이 사육을 위해 변형시킨 돼지를 부르는 이름이다. 돼지는 본래 멧돼지다. 본래의 유전적 다양성을 가진 멧돼지의 경우 이 병이 위험하지 않지만, 인위적으로 살이 잘 찌도록 변형되고 단일화한 집돼지들에게는 치명적이다. 

우리는 진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인도적 살처분’이란 말은 진실을 온전히 반영하는 표현이 아니다. 평화롭게 눈감는 게 아니라 기관지가 타들어가고 질식하여 죽는 것이다. 그러니 ‘녹색 성장’처럼 가증한 표현이다. 멧돼지가 전파경로가 됐을 확률은 거의 희박하다. 오히려 농장에서 몰래 버리는 분변과 사체들을 통해 멧돼지에게 역으로 전파됐다는 게 과학적으로 더 합리적인 해석이다. 멧돼지 사냥은 오히려 멧돼지가 더욱 퍼져나가게 만들고 있다. 축사의 돼지들에게는 현재의 ASF 비상시국이든 평상시든 어차피 지옥과 같은 삶이었다. 고통과 학대 속에 있다가 작년에 도축을 당한 수만 1,700여 만 마리다. 어쩌면 돼지열병으로 인한 축산업 위축으로 인해 오히려 지옥으로 밀어 넣어지는 돼지 수가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축사 밖 야생동물들에게 이 세상은 어떤 곳일까? 아마존 화재를 비롯한 서식처 파괴의 주된 원인이 공장식 축산이다.1 이 시대는 또 다른 대멸종 시대로 분류된다. 공룡 멸종과 같은 거대한 멸종이 지구상에 다섯 번 있었는데, 오늘날의 멸종 속도가 그 수준에 버금간다. 이와 관련하여 공장식 축산이 전 지구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 동물권 활동가들의 캠페인 장면. (캐나다 토론토)(사진: CC BY-SA-2.0/Aia Fernandez)

고통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망자 790명. 공장식 축산이 주 원인이 되어 발생한 어떤 결과로 인해 작년 한국에서만 사망한 사람의 통계 예상치다. 이들은 폭염에 의한 사망자다. 일반적인 사망자 통계치 대비 폭염 시 증가한 사망자 수치다. 폭염에 의한 사망자 증가는 기후위기의 한 단면이다. 그리고 그런 기후위기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현대인의 육식에 있다. 공장식 축산은 지구온난화에 18-51% 정도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 지구에 남은 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다. 

2050년 지구 온도가 2℃ 상승하면, 그때부터는 인간의 영향이 전혀 없어도 지구 스스로 뜨거워지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지구가 된다. 스프링을 너무 세게 당겼을 때 탄성이 회복되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된다. 이를 막기 위해선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절반으로 줄여 온도 상승이 1.5℃를 넘지 않게 해야 한다. 이제 지구에 남은 시간은 겨우 10년이다. 세계의 여러 국가와 지자체들이 기후위기에 맞서 국가적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기괴할 정도로 조용하다.

그런데 어떻게 육식이 기후위기에 그토록 큰 영향을 끼치는 걸까? 생태 발자국을 따라가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소의 살 1kg을 얻기 위해 소비되는 물의 양은 4,650리터다. 소가 직접 먹는 물뿐 아니라 사료가 될 작물을 키우는 데 사용되는 물 등 요구되는 모든 물의 양을 추적한 결과다. 채식에 비해 육식에는 화석연료가 11배, 땅이 18배나 더 요구된다. 육식은 보이지 않는 자본주의 구조를 통해, 원래는 가난한 이들이 써야 할 땅과 물 등의 자원을 약탈하고 있다. 전 세계 농지 5분의 4가 육식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공장식 축산이 끼치는 영향은 우리가 직감할 수 있는 규모보다 훨씬 거대하다. 지구상의 척추동물 전체 몸무게를 100이라고 할 때, 인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30%, 가축화한 동물은 67%, 야생에서 살아가는 동물은 겨우 3%다. 한국에서만 육류 소비가 지난 50년간 10배 이상 증가했다. 중국은 더욱 빠르다. 육류 소비는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각종 광고와 소위 ‘먹방’에서는 고기 소비를 적극 권하며 웃고 있다. 

작년 사망자수 790명이 체감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약자이기 때문이다. 기상이변, 해수면 상승, 사막화, 질병 확대 등 인간의 육식 문화가 초래한 이 지구적 파괴의 특징은, 약탈로 이익을 얻는 이들이 피해를 당하는 게 아니라 이미 빼앗기고 있는 사람들이 추가적인 위험에 놓인다는 데 있다. 이 시대의 고아와 과부, 나그네에 해당하는 소외계층이 주로 피해를 입는 불평등 재앙인 것이다. 

작년에 환경 재난으로만 1,72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이미 기후위기는 난민 발생의 가장 큰 원인이다. 변화가 없다면 30년 후 예상 기후난민 수는 최대 10억, 곧 전 세계 인구의 10%에 이른다. 경제세계화 속에서 이제 내 이웃은 나의 만족을 위해 빼앗기며 노예화된 약소국의 힘없는 이들, 그리고 미래세대들이다. 바로 이 이웃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고작 몇 분간의 식도락을 위해 숨겨지고 정당화되고 있다. 

현대 사회는 고통을 느끼는 생명들을 산업 상품으로 둔갑시킨다. 동물의 고통에 대한 침묵은 사회적 약자들의 신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음 단계에는 반드시 내 차례가 올 것이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동물권에 대한 성경적 이해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여기서 말하는 생령(生靈)은 히브리어로 ‘네페쉬 하야()’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영혼이 육체와 따로 분리된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생령은 영적인 육체를 뜻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흙’과 ‘생기’가 결합되어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직접 영을 불어 넣어주신 하나님 영혼의 한 조각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동물을 어떤 존재라고 말하고 있을까?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령, ‘네페쉬 하야’다.

동물권(動物權, animal rights)이란 “사람이 아닌 동물 역시 인권에 비견되는 생명권을 지니며 고통을 피하고 학대당하지 않을 권리” 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성경적인 입장에서 동물권을 살펴보자. 하나님은 분명히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신다. 우리는 동물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에 대해서는 의외로 큰 관심이 없다. 하나님의 관점은 노아 이야기에도 잘 나타난다. 하나님은 다시는 물로 멸하지 않겠다는 무지개 언약을 세운다.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창 9:9-10), 이 언약의 대상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분명히 동물도 포함된다. 하나님은 무지개 언약을 말씀하시면서 몇 번이나 반복하며 동물들과도 언약을 세운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표현하는 단어가 ‘네페쉬’다. 하나님은 자신이 숨을 불어 넣은 영혼의 다른 조각들과도 언약을 체결하신 것이다.

지금까지 동물에 대해서는 인간 중심의 이해가 의심 없이 전제되어 왔다. 이제 하나님 중심으로 다시 생각해보자.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모습 그대로 언약의 존재들을 지켜나가는 일에 동참하는 영광을 허락하신 것이다. 그 방법은 다스림이다. 하나님이 명하신 다스림이 무엇인지는 예수님을 통해 명확히 드러났다. 그것은 곧 아래에서 섬기는 일이다. 그 낮아짐은 인간 세계의 위계가 아닌 가장 높은 하늘의 위계이다. 인간의 관점으로 동물권을 살펴보면 어떤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이와 달리,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과 계획 안에서 동물권을 재고해보면, 그것이 무엇보다 기독교적 관점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태아에서부터 출산 후 아이의 성장 과정을 지켜본다면, 만 세 살 된 아이가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 알 수 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최소한 그 정도의 지능을 가진 존재가 돼지다. 돼지 역시 자의식이 있다. 생각하고, 탐구하고, 도전하고, 다양한 감정들을 가지고 있다. 개들도 꿈을 꾸는 것을 아는가? 돼지도 그렇다. 당연히 모성애와 우울, 고통, 두려움, 공황, 죽음도 느낀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인간이 정확히 모를 뿐, 그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존재들 하나하나에 자신의 영을 불어넣으시고 마음이 되게 하셨다. 우리들이 마주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마음이다.

우리 사회가 개 식용에 반대하게 된 것은 식용 동물이란 존재가 따로 있고 반려 동물이란 존재가 따로 있어서가 아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의 진실로 넘어가듯 동물의 정신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도 알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반려견 하나하나의 영혼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계시와 마주함으로써 하나님이 동물들에게 넣어주신 영혼과 그 마음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기준은 다시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굳이 왜 동물에게 영혼과 마음을 주셨는가? 동물권에서 말하는 대로 그들의 고통에 감응하는 것은 단지 낭만적 감정 호소가 아니다. 인간에게 주신 이성을 근거하여 과학적·신학적 증거들을 살펴본 합리적 판단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마음을 주셨다는 것은 적어도 그 마음을 인간의 소견대로 취급해도 된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인권도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권리이듯, 동물권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권리다.

동물 혐오와 육식주의
오늘날 인류 사회는 동물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2년 전 중국의 어느 시장에서 살아 있는 동물을 열쇠고리로 만들어 판매해왔다는 기사가 보도되어 충격을 안겨주었다. 새끼 거북이나 작은 물고기 등을 플라스틱 백에 밀봉하여 열쇠고리로 만들어 판매하는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 출시되어 동물학대라는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판매가 중단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판매 상인들은 “(플라스틱) 주머니 안에 산소와 영양분이 충분히 녹아 있어 동물이 최대 3개월까지 살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살아 있는 동물을 물건처럼 여긴 끔찍한 일이다. 동물을 동물로 보는 관점과, 인간과 다른 물건처럼 보는 관점은 전혀 다른 것이다. 동물을 동물로 보지 못하는 것이 동물 혐오다. 여기서 ‘혐오’는 개인 감정이나 정서가 아닌 차별의 원인이 되는 구조적 인지를 뜻한다. 이는 동물을 좋아하는 동시에 혐오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 2017년 3월에 보도된 '살아 있는 동물 열쇠고리' 영상. 플라스틱 백 안에 거북이, 물고기, 도마뱀이 산 채로 들어 있다. (유튜브 화면 갈무리)

우리나라에 유기 동물이 계속 증가 추세라는 사실은 사람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예전에는 애완 동물로 부르던 것을 이제는 반려 동물로 부르며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해 더 많은 돈을 소비한다. 그 이면에는 유기 동물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어쩌면 축산 동물, 식용 동물을 따로 구별하여 차별하고 학대하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이런 사회 현실을 보면 구조적으로는 강한 동물 혐오의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혐오의 대표적인 특징은 인지 부조화다. 공격성, 합리화, 체념 등의 모습이 나타난다. 완전 채식을 하는 운동선수나 보디빌더가 있을 정도로, 골고루 먹는 균형 잡힌 채식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다. 일반적인 잡식에서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심혈관 질환은 문제시하지 않으면서, 일부 불균형 채식에서 나타나는 사례를 들어 모든 채식주의자들을 건강 위험군으로 만들어 젠틀하게 공격한다. ‘살아 있는 동물 열쇠고리’는 비판하면서, 끔찍한 공장식 축산 문제에는 둔감해진다. 지구의 남은 운명을 10년으로 단축하는 일에 힘을 보태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어도 “난 고기에 대해선 어쩔 수 없어”라고 말하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만약 의학적으로 정말 고기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의학적으로 먹으면 되는 문제다. 지금의 파괴적 쾌락이 필수가 아니라는 얘기다. 

진실에서 눈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 공장식 축산에 관한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원하지 않는 상대의 성기를 자극해 사정시키고 강제로 임신시키는 것은 일종의 강간이다. 고기를 먹기 위해 인간이 하고 있는 일이다. 원래는 일 년에 한 번씩 임신하는 동물들을 끊임없이 임신시키고 출산하게 만든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파괴되어 급격하게 망가져 간다. 돼지의 경우 세 살, 사람으로 치면 20대 초반 정도에 기능이 떨어지게 되어 도축된다. 가공육이 되는 것이다. 새끼가 태어나면 마취도 없이 이빨, 꼬리, 고환을 칼로 자른다.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6개월이 되면 도축된다. 사람으로 치자면 2차 성징이 오기도 전 초등학교 3-4학년 정도의 아이들이다. ‘화장실’이라 할 수 있는 분뇨 처리 시설도 없는 철창 안에 새끼 돼지들을 밀집시켜 각종 약물에 절여 놓는다. 앞서 언급한 살아 있는 동물 열쇠고리와 별반 차이가 없는 잔악이다. 그런 지옥과 같은 삶을 살던 그들의 죽음 위에 행복하게 웃고 있는 돼지 캐릭터를 달아놓는다.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라 용인되어왔을 뿐, 내용으로 보자면 사이코패스나 다름없는 행위다.

애초에 가축 동물, 반려 동물, 야생 동물의 종이 다르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함께하기에 좀 더 적당한 특성이 있다고 해서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고기를 먹는 것이 인간에겐 자연스러운 본능이라는 주장도 좀 더 섬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기가 입에 맛있을 수는 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먹어도 되느냐’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지금의 육식에 대한 반성은 육식에 대한 찬반 이분법과도 다른 문제다.

혐오에 기반을 둔 제한된 인식이 ‘육식주의’다. 육식을 완벽하게 부정하거나, 그럴 수 없다면 육식은 불가피하다는 이분법에 빠진다. 또한 어디서 오는지 얼마나 먹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싸게 먹는 것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현대의 육식 문제에선 결코 ‘모든 음식이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니 감사하며 먹기만 하면 괜찮은’ 일이 되지 않는다. 그런 사고방식은 ‘돈도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사채업을 하더라도 감사하면서 벌면 괜찮은’ 일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아픔이 있는 곳을 세상의 중심으로 두는 것이 예수님의 방식이다. 인식을 제한하고 돈의 문제로 단순화하는 것이 맘몬의 방식이다. 현대의 육식 문화는 진실을 가리고 세뇌한다. 쾌락을 위해 공장식 축산의 실태와 과정은 감춰진다. 그러나 파는 쪽과 사는 쪽 모두 돈을 겸하여 섬기는, 변명 불가능한 우상숭배다. 현대의 공장식 축산은 약자와 미래 세대에 대한 도둑질이다. 또한 그 동물에게 직접 영을 불어넣으신 하나님의 권리에 대한 도둑질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동물 혐오는 본질적으로 하나님 혐오다.

하나님과 함께 동물들을 마주하기
우리는 동물 혐오에 둘러싸여 있다. 혐오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마치 날 때부터 내 몸의 일부였던 것처럼 여겨지게 만든다. 그러나 합리화나 체념은 어쩔 수 없는 나의 본능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학습된 구조적 혐오가 가진 본능이다. 감기에 걸리는 일이 나의 악함이나 의지력 문제가 아니라 감기 바이러스가 유행하기 때문인 것처럼, 동물 혐오가 사회 안에서 유행처럼 퍼져 있는 것뿐이다. 감기에서 낫기 위한 적절한 믿음의 반응은 기도만 하는 게 아니라 적절한 치료를 받는 데 있다. 마찬가지로 동물 혐오는 믿고 기도만 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방법은 언제나 혐오의 대상인 약자들을 직접 만나는 일이었다.

특별히 현대의 육식 문화는 질병과 유사한 특성을 지닌다. 실제로 오늘날 육식 문화가 뇌 구조를 바꾼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고기 맛을 느끼는 감각을 붙잡고 들어와 모든 자본과 미디어가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담론을 형성하고 사회문화적으로 편향된 쾌락을 학습하게 만든다. 이렇게 형성된 자극을 따라 뇌를 이루는 신경 세포들의 생물학적·생리적 기능이 재구성된다. 육식과 관련된 뇌의 쾌감 회로 반응이 강화되고, 그에 따라 인지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 당뇨병이 스스로의 의지로 조절되는 것이 아니듯 육식주의는 스스로의 자제력으로 극복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 사회는 너무나 강력한 동물 혐오의 구조 속에 있기에 육식주의에 대한 치료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심리치료 방법 중 집단 상담 치료가 있듯, 동물권을 지키는 시민단체의 회원으로 함께 모일 수 있다. 지금 당장 함께 활동할 방법을 찾는 일이 다소 어색하고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돈과 관련된 적금이나 보험 하나도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컨설팅을 받는다. 거기에 쓰는 10분의 1의 노력이라도 들인다면, 동물들과 함께하는 이들을 발견하고 그들과 함께 행동하는 방법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함께할 단체와 모임을 찾을 때 치유가 시작된다.

   
▲ '로즈법'은 다섯 가지 동물의 기본권을 담은 동물권 보호법의 명칭이다. (사진: 디엑스이서울 제공)

‘로즈법’(Rose’s law)은 공장식 축산으로부터 구출한 닭에게 로즈라는 이름을 붙인 후 제안된 동물권 보호법이다. ‘동물권리장전’(the animal bill of rights)이라고도 한다. 하나님이 하나하나 영을 불어 넣은 존재들 앞에서 예수님의 다스림을 통해 하나님 나라로 정복하라는 명령이 이 동물권리장전에서 울려 퍼진다. 다섯 가지 기본 권리는 다음과 같다. 
 

1. 고통과 착취의 상황에서 구조될 권리 
2. 보호받는 집, 서식지, 또는 생태계를 가질 권리 
3. 법정에서 그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법에 따라 보호받을 권리 
4. 인간들에게 이용당하거나 학대당하거나 살해당하지 않을 권리 
5. 소유되지 않고 자유로워질 권리 또는 그들의 권익을 위해 행동하는 보호자가 있을 권리
 

하나님의 법은 창조주의 질서다. 동물들의 비명소리에 반응하는 사회에서는 동시에 더 이상 약자들의 소리를 무시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약자가 기준이 될 때 모두가 함께 구원을 얻는다.

우리가 속한 세상은 고기 먹는 사람들 앞에서 “육식은 폭력”이라고 외치는 일이 과격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유색인종은 더럽고 자신과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 앞에서 “차별은 폭력”이라고 외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것을 과격한 일로 인식하도록 왜곡하는 것이 동물 혐오이며 인종 혐오일 뿐이다. 아픔이 있는 곳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곳에 함께 서지 않으면 변화는 없다. 아픔이 있는 거기, 주님이 계신다.

돈이 주인 되는 사회구조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활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가 현대의 육식 문화다. 육식은 그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그러나 한 줄기 작은 빛에도 어둠이 밀려나가듯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 우리의 무기는 진실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이 있던 개와 마음을 나누게 하셨다. 이제 다른 동물들 곧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 마음들이 있는 곳에도 다가갈 차례다. 마음은 절대 축산품이 될 수 없다. 한 마음이 거기 있다. 

우리는 매일 공장식 축산으로 죽어간 동물들의 살에 둘러싸여 그것을 먹는 육식의 쾌락을 권장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 일들은 매우 세련되고 영민하게 포장된다. 세상이 총력을 동원하여 세뇌를 반복한다. 그러니 우리도 매일 진실을 반복해야 한다. 공장식 축산의 진실과 학대의 고통 가운데 있는 마음들을 반복해서 마주하고 작은 자들의 억울함을 외쳐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동물들의 고통 가운데 주님이 계신다. 지금도 매일 반복되는 멸망의 가증한 현장 가운데, 주님은 항상 거기 계신다. 

 

1 “소고기와 콩 재배 등 ‘개발’이 아마존 화재 원인”, 〈뉴스1〉, 2019.08.25., 〈http://news1.kr/articles/?3703275〉 (접속일: 2019. 11. 14) ― 편집자

 

이박광문
서울대학교에서 생물교육(석사)을 전공했다. 사단법인 물푸레생태교육센터에서 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목회학 연구과정을 밟고 있다. ‘인간과 동물권의 관계’ ‘지구의 위기와 하나님의 계획’ 등을 주제로 강연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