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세계를 구할 유일한 길
[349호 커버스토리]
어느 날 갑자기 지구에 나타난 그들은 스스로를 다른 사람이라고 불렀다. 인류는 초동 대응에 완전히 실패했다. 러시아의 침입인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입니다. 북한인가? 미국?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공격입니다. 누구에게 어떤 무기를 써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무엇과 전쟁 중인가? 아무리 질문을 해도 돌아오는 답변은 하나뿐이었다. 다른 사람입니다.
인간은 미지의 정복자를 향한 경외와 공포에 압도되어 수군거렸다. 다른 사람이 정부를 장악했대. 대통령부터 의원들, 하다못해 어디 기업의 회장들까지 모두 다른 사람으로 대체됐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여유롭게 저녁 시간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해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 인간과 공존하고 싶다’는 입장을 밝혔다. 많은 전문가들이 다른 사람의 식성을 우려하며 휴전에 반대했다. 인간을 모아 놓고 기르다가 잡아먹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인간과 공존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화의 상대적인 차이에서 오는 갈등은 곧 피곤한 일상 속에 묻혀 작아졌다. (부정적 의견을 펼친 전문가들은 맛있게 요리되었다.) 어쨌거나 아직 잡아먹히지 않은 인간이 많이 남아 있었고, 그들은 계속 출근과 퇴근을 반복해야 했다. 잊어버리는 편이 편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외양도 인간과 흡사해서 겉모습으로 구분하기 어려웠다. 상대가 다른 사람일까 일일이 두려워해서는 도저히 생활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학생들은 학교에 갔다. 11월 14일에는 수능이 치러졌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겼다가 되찾으러 뛰어오는 워킹맘, 카페에서 매번 똑같은 자리에 앉아 똑같은 음료를 마시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설가도 그대로 살았다. 그래서 소설 연재가 끊기는 일도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그 병이 문제가 되었다. 1921년 케냐에서 최초로 보고되었고, 서서히 다른 나라에 전파되어 풍토병이 되었다가 결국 아프리카 대륙을 벗어나 유럽과 아시아까지 옮아간, 무서운 열병. 그 병엔 아직 백신도 없다. 40도에서 42도를 넘나드는 고열이 주요 증상이다. 열에 들떠 구토하거나 혈액이 섞인 설사를 쏟게 된다. 입맛이 없어서 뭘 먹을 수가 없고, 몸을 가누기 힘들어서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다. 몸 속 이곳저곳이 부어 고름이 차고, 출혈이 일어나 귀와 팔다리에 시뻘겋게 피가 몰린 상태로 빠르게 죽는다. 살아남는다 해도 보균자가 된다. 그리고 2019년 9월 17일, 한국에서 첫 감염자가 나타났다.
한국 사회는 충격에 휩싸였다. 보통 병자의 침, 배설물, 혈액 등과 직접 접촉해야 전염되는 병인데, 어쩌다가 동아시아 끄트머리에 튀어나온 작은 반도에까지 전파가 된 것일까?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지 않는 야생의 감염자가 평화롭게 살고 있는 한국인 가정집 문을 부수며 들어와 밥그릇에 침이라도 뱉고 간 것인가? 인간 사육을 연구하는 몇몇 다른 사람들의 조심스러운 추측에 의하면 발병한 인간에게 사육자가 감염자의 사체를 먹였던 것 같다고 한다. 감염된 사람을 먹은 사람은 당연히 감염되고 만다….
인간들이 만든 가축전염병 예방법 20조 1항에는 “우역, 우폐역, 구제역, 돼지열병, 아프리카돼지열병 또는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에 걸렸거나 걸렸다고 믿을 만한 역학조사·정밀 검사 결과나 임상 증상이 있는 경우에는 그 가축이 있거나 있었던 장소를 중심으로 그 가축 전염병이 퍼지거나 퍼질 것으로 우려되는 지역에 있는 가축의 소유자에게 지체 없이 살처분을 명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법에 인간의 전염병을 조금 추가해 개정한 바 있다.
따라서 ‘예방’을 위해서, 이미 병에 걸린 인간과 그 주변 인간들이 살처분되었다. 경기 북부와 인천 등, 병이 휩쓸고 간 지역의 감염자들은 거의 ‘전멸’했다. 10월 6일 오후 10시 기준, 죽임당한 감염자 수는 모두 43만 4천 895명이다. 비록 혼자 돌아다니는 여행객이 감염자와 접촉해 병을 옮길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장악한 정부는 바이러스 전파 가능성을 완전 차단하기 위해 발병 지역에서 이동하는 인간을 모두 없애기로 결정했다. 국방부는 저격수 투입을 지시했다. 몇몇 지역에서는 민간인 수렵단을 모집한다. 시간이 걸릴 뿐, ‘차단 지역’ 내에 있는 개체들은 곧 전면 제거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사태를 ‘국가적 재난’이라고 표현했다. 저렴하고 맛 좋은 인간 고기를 더 이상 부담 없이 즐길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뉴스에서는 연일 다른 사람들이 입은 경제적 손실과 인간 가격 폭등, 혹은 폭락 문제를 다뤘다. 대통령은 인간 소비 위축을 우려해 청와대 만찬 메뉴에 인간 구이를 포함하여 주요 인사들에게 안전한 인간을 대접했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이것은 살처분되기 직전, 포크레인에 들려 두 다리를 버둥거리는 돼지를 보고 내가 쓴 소설이다. 만약 그 돼지들이 사람이었다면 인간들은 이토록 익숙하고 평온하게 화면을 보고 있을까. 최소한 너무 시끄러워서 볼륨을 줄이기라도 했을 것이다. 43만 4천 895라는 수의 인간은 죽기 직전까지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려고 할 테니까. 그렇게 43만 4천 895명 중 누군가는 이 부당한 경험에 합당한 언어를 부여했을 것이고, 경험은 그저 흙더미에 파묻히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말로, 글자로 전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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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발을 쓴 돼지. (그림: picryl.com/ taken from "Illustrated Poems and Songs for Young People. Edited by Mrs. Sale Barker") |
그러나 죽은 것은 인간이 아니라 돼지였다. 영상 속의 돼지는 다급하게 입을 뻐끔거리다가 어둠 속으로 던져졌다. 그 모습만 봐서는 돼지가 죽은 시기를 추정할 수조차 없다. ‘2019년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인해 실시된 살처분 영상’이라는 부가적인 설명 없이는 이 죽음과 저 죽음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비슷한 영상을 거의 연례행사처럼 보며 지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2000년에도, 2001년, 2002년에도 돼지가 있었고, 살처분이 있었다. 그러니까, 2010년 11월 28일에 발생한 구제역으로만 331만 8,292명의 돼지, 150,864명의 소, 7,559명의 염소, 3241명의 사슴이 죽었다.1 같은 해 1월과 4월에 비슷한 일이 있고 난 후였는데, 그렇게 죽고도 더 많이 죽을 동물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한 수치다. 2010년 이후에도 동물들은 계속 죽었다. 농림축산식품부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8년까지, 5년 동안 AI와 구제역으로 72,068,569명의 동물이 살처분되었다고 한다.
읽는 사람들이 이 낯익은 죽음 앞에서 약간의 헷갈림이라도 느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구를 정복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다른 사람은 돼지를 가리키며, 돼지와 인간을 서로 대치하여 은유적으로 쓴 것이다. 2019년 9월 17일, 한국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했다. 43만 4천 895명의 돼지가 죽었다. 대학살이다. 세계를 이대로 두어도, 괜찮은 것인가.
어떤 질병이 발생하고, 유행하는 것은 병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균, 바이러스 등에 대응한다고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법에 명시된 모든 전염병을 잘 연구해서 예방법과 치료약을 마련한다 해도, 근본적인 해결책 없이는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사회·문화적 요인을 고려하지 않은 방역 대책은 오랜 시간에 걸쳐, 거대한 규모로 실패한다. 반드시 새로운 병이 나타나고, 새로운 유행병이 퍼질 것이다. 더 많은 돼지나 닭, 소, 오리 등이 묻힐 것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실현하는 것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위계질서와 지배를 향한 비판과 해체가 현 생태계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2이라는 오래된 말은, 말이 행위가 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으로 인해 낡은 채로 남았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유일한 길’을 제안하고자 한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고, 인간에게는 세상을 포기하거나 버릴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의 요인 중 하나, 공장식 축산
아프리카돼지열병을 ‘예방’하기 위해 43만이 넘는 돼지를 죽여야 했던 사회문화적 요인 중 하나는 공장식 축산이라 불리는 돼지 생산관리 시스템이다. ‘고밀도 사육시설에서 집약 및 집중 방식으로 가축을 생산하는 것’이라 풀어서 설명하기도 하는데, 쉽게 말해 돼지를 좁은 공간에서 학대하며 기른다는 뜻이다. 돼지들은 서로의 분변 위에서 생활하며 바이러스가 유행하거나 변형될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열악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사실 돼지는 IQ가 80이나 되는, 강아지보다 지능이 높은 동물이다. 따지고 보면 일부 인간보다도 똑똑한 존재인 것이다. 축산농가에서 구출되어 동물권 운동가들의 생츄어리(sanctuary, 보호소) 같은 곳에서 사는 돼지들을 찍은 영상을 보면, 카메라에 잡힌 표정이 정말 ‘인간적’이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아는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 정도다. 그들은 햇빛과 바람의 존재에 기뻐하고, 친구를 사귀고, 서로 사랑하고, 흙장난을 치며 행복하게 뛰어다닌다.
공장식 축산은 그런 돼지를 하나의 물건처럼, 컨베이어벨트 위의 부품처럼 다룬다. 여자 돼지는 출산용 스툴에 갇혀 ‘쓸모가 없어질 때까지’ 강간, 임신, 출산 경험을 반복한다. 태어난 아기들은 꼬리를 잘린다. 좁은 곳에 빽빽하게 돼지를 몰아넣다보니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의 꼬리를 물어뜯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남자아이의 경우 고기에서 잡내가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마취도 없이 거세된다. 그렇게 죽을 때까지 햇빛과 바람을 알지 못하는 삶이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고기용 돼지는 몸무게가 110kg 정도가 되면 도축되는데, 그때가 태어난 지 대략 160-170일 째라고 한다. 그러니까 입 속에 들어가는 고기는 정신병 걸린 아기 돼지의 살이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난 후 고기를 끊었다. 개인의 영역에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닭, 오리 등 다른 ‘가축’의 사정도 이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중간중간 실패하는 때도 있었지만, 올해로 벌써 4년차 베지테리언이다.
동물권과 페미니즘의 교차성
물론 개인의 채식 실천은 유일한 길을 걷는 과정에 불과하다. 해체하고 비판해야 할 위계질서와 지배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아프리카돼지열병 문제의 근원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면, 납득할 수 있을까?
나는 채식을 실천하기 전부터 이미 주변에서 ‘유별난 페미니스트’로 널리 통했기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를 길게 말하기 귀찮을 때는 그냥 “에코 페미니스트라서 그렇다”고 말하곤 했다. 누군가는 나 때문에 에코 페미니즘을 검색해 보았을 것이다.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했으니까, 좋은 일이다.
에코 페미니즘은 여성이 경험하는 부정의를 해석하고, 해결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 중 하나다. 에코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에 대한 억압이 자연에 대한 억압과 연결된다고 본다. 물론 에코 페미니즘이라는 범주 안에는 굉장히 다양한 설명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솔직히 이런 식으로 에코 페미니즘을 언급하는 건 아주 게으른 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그냥 내가 좋아하는 설명을 하나 소개해 보자면, ‘억압의 형태란 결국 닮게 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억압과 자연에 대한 억압을 연결해 보면 두 억압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문장이 나온다. 실제로 여성과 여성성을 가진 존재(동물 포함)가 겪는 억압의 닮은 점을 찾아내는 일에는 꽤 명쾌한 재미가 있다. 인간이 첫 번째 발을 디딘 땅은 왜 처녀지인가? 남자는 여자를 왜 ‘따먹는가?’ 여자랑 과일이 무슨 상관이 있기에?
살처분 규정은 왜 가축 전염병 예방법에 의거하는가? 병이 난 후에 죽이는 게 예방인가? 불법촬영 신고가 ‘예방’인 것처럼? 가축전염병이 발생하면 왜 사람들이 입는 경제적 손실, 고기를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 여부 따위가 보도되는가? 여아 낙태가 심해서 많이 죽게 된 쪽은 여자들인데 결혼할 여자가 없는 남성의 위기가 보도되는 것처럼. 죽은 가축도 뭔가 다른 입장이 있지 않을까? 고기가 되어 먹혀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거 말고.
애초에 살처분은 동물에게 백신을 접종하거나 치료를 제공하는 것보다 죽이는 편이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에 채택된 방식이다. 살처분 당하는 동물의 권리, 고통, 향후 예상되는 살처분 규모의 증가, 집행하는 인간의 고통 등은 포함되지 않은 계산이지만, 어쨌든 죽이는 게 값이 ‘싸다’. 같은 사고방식으로 가임기 여성 지도가 만들어졌다. 임신과 출산을 결정할 여성의 권리, 당사자 육아 가능 여부, 향후 육아 비용의 부담 등은 포함되지 않은 계산이지만, 어쨌든 여기 임신 가능한 여자가 있다.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 그러니 지도를 만들자. 지도를 만드는 건 값이 싸다.
여성을 향한 억압과 다른 억압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복합적인 문제임을 안다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인간중심주의와 결합하여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어떤 산업 구조를 만드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여자를 재화로 삼은 성 산업이 웹하드 카르텔을 구성한 것처럼, 돼지를 재화로 삼은 축산업에도 카르텔이 존재한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이다.
임진강을 물들인 붉은 핏물
인간이 하루 평균 약 1만 5천 톤의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중 재활용되는 쓰레기는 1만 4천-6천 톤 정도의 양이 동물 먹이나 사료의 재료로 쓰인다. 우리가 집에서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의 상태와 해당 쓰레기의 보관 여건을 고려했을 때, 동물 앞에 놓인 쓰레기가 어떤 모습일지는 쉽게 추측 가능하다. 그런 역겨운 폐기물을 먹이는 것 자체가 학대다. 인간이 버린 음식물에는 돼지고기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음식물 쓰레기를 먹는 돼지는 돼지고기를 먹게 된다. 그러다가 어떤 돼지가 아프리카돼지열병 등의 전염병에 걸린 돼지를 먹기라도 하면? 당연히 감염이 발생한다. 따라서 방역을 생각한다면 돼지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에게 음식물 쓰레기를 먹이지 않는 게 맞다.
그러나 음식물 쓰레기를 먹이는 것을 전면 금지하기 전에 매일 6천 톤 넘게 남는 음식물 쓰레기를 어떻게 할지 대책부터 세워야 한다. 그 전에는 바다에 던져버리곤 했지만, 이젠 그것도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여전히 어떤 돼지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음식물 쓰레기로 배를 채워야만 한다. 농림축산식품부의 ‘잔반 급여 돼지고기 유통경로 세부조사’에 따르면 그렇게 생산된 돼지고기의 7.6%가 구내식당으로, 3.2%가 식당으로 갔다고 한다.
다시 2019년 9월 17일로 돌아오자. 야생 멧돼지로 인한 감염인지, 감염된 외국햄 먹이 등으로 인한 감염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했다. 43만 4천 895명의 돼지가 죽었다. 처음 구제역이 돌았을 때만 해도 살처분은 공무원과 군인의 일이었다. 이제 돼지를 죽이는 일은 외부 용역 업체가 한다. 살처분 인력 중 공무원 비율은 2014년과 2015년 사이 50.3%에서 2017-2018년 16.4%로 감소했고, 용역 비율은 27%에서 74.8%로 증가했다. 살처분은 지자체에서 몇십 억씩 예산을 들이는 사업이라서, 돈이 필요한 방역 업체와 외국인 노동자들은 빨리 다음 전염병이 터져서 살처분 일을 할 수 있기를 기다린다. 일부 노동자들이 죽거나 트라우마에 시달리지만 그건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비용이다.
인간은 매일 1만 5천 톤의 음식물 쓰레기를 남겨야만 해, 인간은 어쩔 수 없어, 인간은, 남자는 성욕을 해결해야만 해, 누군가는 음식물쓰레기를 먹고 누군가는 찍혀서 팔려야 해, 그러다가 돼지가 병에 걸리면 방역 업체에 용역을 맡겨서 처분을 하자, 피해촬영물이 유포되면 디지털 장의 업체에 가면 돼….
마음껏 학대해도 되는 동물이 있는, 성폭력 피해자가 생기면 돈을 벌 수 있는 구조 속에서 살아있는 것들이 뱅글뱅글 돈다. 삭제 업무는 공무원이나 군인 신분만 되어도 하지 않을 일이기 때문에 경력단절 여성이나, 제3세계 노동자의 노동력을 활용해 처리된다. 산처럼 쌓인 돼지의 시체에서 배어나온 핏물이 임진강을 빨간 색으로 만들었다.
언제까지 ‘돼지’에게 죄를 떠넘길 건가
나는 유일한 길을 제안했다. 그러므로 부차적인, 나중에 생각해야 할 문제는 없다. 이 길 위에서 지구의 위기는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제국과 식민지 관계 등 수많은 억압 구조를 부숴야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만약 당신이 지구를 살리고 싶다면, 당신은 페미니스트여야 하고, 생태주의자여야 하고, 동물권을 지지해야 한다. 용역 노동자의 인권을 고민하며 채식을 고려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비용을 새롭게 계산하는 법을 배우고, 이윤 추구라는 가치 밑에 깔린 것들을 돌보고, 누구도 깔리지 않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뭍에 오르셨을 때에 그 동네에서 나온 마귀 들린 사람 하나와 마주치시게 되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옷을 걸치지 않고 집 없이 무덤들 사이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예수를 보자 그 앞에 엎드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고 크게 소리질렀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미 그 더러운 악령더러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여러 번 악령에게 붙잡혀 발작을 일으키곤 하였기 때문에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단단히 묶인 채 감시를 받았으나 번번이 그것을 부수어버리고 마귀에게 몰려 광야로 뛰쳐나가곤 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시자 그는 “군대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에게 많은 마귀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귀들은 자기들을 지옥에 처넣지는 말아달라고 예수께 애원하였다. 마침 그 곳 산기슭에는 놓아 기르는 돼지 떼가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마귀들은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나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마귀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는 비탈을 내리달려 모두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눅 8:27-33, 공동번역)
언제까지 우리는 우리의 죄를 다른 존재에게 떠넘겨 죽게 할 것인가. 예수를 떠나게 하고 돼지가 죽은 값만을 아까워하는 사람으로 계속 살 것인가.
1 필자는 글에서 가축을 세는 수의 단위인 '마리'가 아닌 사람을 세는 수인 '명'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 편집자
2 머레이 북친, 문순홍 편저, 《생태학의 담론》 (아르케, 2006) 128-129쪽
리아
비건 지향 페미니스트. 2015년부터 반성폭력활동가로 활동했다. 전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사무국장을 역임했고, 영화잡지 〈프리즘오브〉, 〈워커스〉, 〈아이즈〉, 〈황해문화〉 등 다양한 매체에 필자가 읽은 세상의 여러 가지 모습을 기고해 왔다.
